오후 세시 외 4편
김정웅
어쩌면 우리는 애초에 시작이 없었는지도 몰라요
바람이 자기의 행적을 더듬지 못하듯이
없는 뼈를 찾으려 헤매던 길조차
내비게이션에 갇혀 목적지를 잃어요
당신은 시작을 찾는다며
저녁을 짓는 날은 밖을 생각하지도 않았지요
안은 밖이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둘을 포개려고 한 시도는 매번 설익은밥처럼
아무도 탐닉하지 못하는,
거울 속에만 차려져 있는 식탁이었습니다
초침이 멈추는 오후 세시의 기억
너무 고요해서 지독하게 소란스러웠던 시간
여기 뼈가 만져지지 않느냐고 말하던
당신의 물컹한 질문이
어쩌면 우리의 시작 같지 않던
시작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만
안에서 자전해요
언제나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던 나는 바깥으로만 포개어져요
지금도뼈가 만져질 것 같은 오후 세시에서
시간은 매번 멈춰요
당신에게 그때는 뼈는 있었냐고 묻는,
지금은 뼈가 만져지지 않는 또 다른 오후 세시가
바깥이 없는 안으로 실족합니다.
공화동 터키 행진곡
벚꽃이 지기 시작하면
다 찬 달도 무거웠는지 기우뚱하다가
꽃비 내린 길 위에 가로등 불빛이 서걱거리면
구름 뒤로 숨기도 한다
문득 살던 곳의 주소가 낯설어 지는 날
이른 저녁에가보는 공화동골목은
리어카 한 대라도 마주치면
쉬어 가야 하는 비좁은 골목 동네
골목길을 사이에 둔 집들이
양팔 거리 안쪽에 아파트보다 밀집한 주소를 둔다
노인들의 무릎이 걱정되는 경사를 따라
울퉁불퉁한시멘트 길 위에
겨우 자국을 낸 물결무늬 계단은
장마철 빗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양
능청스럽기만 하고
주택가 새벽보다도 인적은 드물지만
컹컹 짖어대는 개들의 환대에
잠시 수선스럽기도하다
이른 저녁인데도 셔터가 내려진
행복세탁소와 럭키슈퍼의 작명운이
허술하다는생각을 하다가
공중전화 박스를 발견하고
습관처럼 주머니 속 동전을 더듬는다
지금은 사라졌을 옛 전화번호로
한 통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이
작은 옥상 장독대를 지나는 빨랫줄에
헛웃음처럼 걸리고
낯선 이의 신발 소리를 경계하는
주소 불명의 담장 위 고양이는
졸고 있는 보안등 그림자 뒤에 숨어
꼬리를 세운다
모차르트 터키 행진곡이 울린다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던 음악은
폐교한 학교 스피커에서 시작해서
한때 성대 결절을 앓던
구령대의 녹슨 마이크를 타고
이른 잠을즐기는 골목의 늙은학생들을 깨우고
출석을 불러도 대답 없는 교실에서
나만 홀로 먹다 만 도시락을 닫는다
시끄럽게 울리는 교무실 다이얼 전화기는
군대 간 막내가 보낸수취인 불명반송 편지처럼
그 주소가 서럽기만 하다
기념사진
어느 복지 시설에 갔다
사춘기를 지난 듯한 여학생
단체 기념사진마다 카메라를 보지 않는
새하얀 서어한 마음이
아랫줄에서 순진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
노오란 미소에 꽃씨를 뿌린다
허술한 집 대문 앞막 피어난 어린 꽃들은
행인들을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금이 간 담장 밑 키 큰 해바라기는
하루 종일 뜨거운 하늘만 응시한다
눈 마주칠 일 없는
막연한 어딘가를 자주 본다는 것,
불안한 눈길 놔둘곳 하나 없이
무너지는 구석만을 바라봐야 하는 경험을
해본사람은 안다
해도먼 산만 쳐다보는 날
소녀 자리에 하얀 목련이 피어 있다
(기념사진은 안 찍을 일이다)
나사
조여진 나사 하나가 풀리지 않는다
잠시 고정되었다가 풀려야 하는 나사가 버틴다
등줄기에서는 식은 땀이 흐르고
서늘해진 머리는 의과학적 원인을 찾는다
싱킹?
메탈 슬러지?
삽입철거로 오류?
그 어느 것도 누워있는 환자에게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긴박한 오 분이 다섯 시간처럼
길게 조여 든다
세상 모든 조여지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동냥젖을 먹는 강아지의
빈젖을 향하여 달려드는 입,
빈약한 벽에서 무거운 액자를
버티는 나사,
마음 떠난 이를 억지로 붙잡아 보는
떨리는 손가락,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알았지
힘을 뺄 때를, 놓아 줄 때를배운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창문 밖 나무에서는
바람에 나사들이 떨어진다
외설적인 계절에도
눈치 없는 나사 하나는
이미 다 쓴 수고에 제대로 박혀
긴장을 풀어야 하는 때인 줄도 모른다
오늘도 잠은 다 잔 모양이다
수치스러운 기억들은
매번 뇌리에 단단히박혀
좀처럼풀릴 줄을 모른다
요양병원 보내는 날
대장 검사 할란다
아침에 피가 비치더라
대학병원 갈란다
동네 병원은 미덥지 않아서 안 갈란다
딸내미에게 며느리에게
이른 아침부터전화기가 바쁘다
팔순을 훨씬지난그녀는
남편이 젊어서부터 속을 썩여서
여기저기 아프다며
일도 없는 사람이
쉬지도 않고움직이며
투정만 는다
마늘 가져가라
고추 갈아 놓았다
직접 기른 것도 아니고
아들이 보내 주는 생활비로
농산물 공판장을 돌아다니며
주부 구단의 눈썰미로
씨알 굵고 실한 놈으로 산 거라며
기세등등하다
살만큼 살았다
늙어서아프기만하고
이제는 얼른 가고 싶다는
또래의 노년들이 늘어놓는 푸념들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은 그녀
지나간삶이 억울한 지
생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큰 그녀
동네 미용실 염색의도움으로
유난히 검은 머리칼을 가진그녀
노인들만 거주하는 노년의 아파트
30년이 넘어가는 풍 걸린 승강기 앞에서
60년을 함께 살아 온,
10년도 더전에 중풍이 왔던
지독하게 미워하는 그에게
마지막 악수를 한다
자식들 고생 그만 시키고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여기에서 오래 살았다며
엷은 미소를여기저기에 흩뿌리고나오는
그를 태운 승강기는
유난히 덜컹거리며 내려간다
이제는 혼자가 된 집에서도
한 번씩 터져 나오는그녀의 원망 섞인
혼잣말 욕지거리는
듣는 이 없이 계속되고 있고
검정염색마저 바래서하얗게 새버린 밤도
그녀에게 마지막악수를 건네려는지깜빡이고 있다
----2019년 애지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