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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택 목사
금년 첫 주일에 전도서 7장8절의 말씀을 중심으로‘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14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지혜자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전합니다. 돈이 사람을 보호하고 지혜도 사람을 보호하는데 지혜가 더 아름다움은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성경에서 가르치는 지혜, 그리고 그 지혜를 실천하였던 모델을 한 사람 성경에서 소개하고, 우리와 같은 시기를 살고 있으며 믿음으로 살고자 힘쓰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먼저, 기독교계 신문을 통해 최근 들려온 마음 따뜻한 소식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미국의 한 은행에서 CEO로 일하던 한국인이 4년 동안 일하던 은행장 직을 내놓고 최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은행으로 자원하여 자리를 옮겼습니다. 교회 장로이기도 한 이분이 미주의 은행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인정을 받던 은행장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직장에서 명퇴를 걱정하거나 슬슬 노후 준비를 해야 할 50대 초반의 나이에 누군가 선뜻 나서지 않는 가난한 나라 르완다의 한 은행 책임자로 자원하여 이번 2월에 부임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르완다는1994년도에 일어난 내전으로 약 100일 동안 100여 만 명이 학살을 당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종족간 학살이 벌어진 곳입니다. 남편들이 학살당하여 죽고 살아남은 대부분의 아내들은 경제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르완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중에 르완다에 있는 4개의 크리스천 NGO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우르웨고 오퍼튜니티 (Urwego Opportunity)' 라는 은행이 이런 선한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행은 잘 나가는 미국의 은행들 같지 않고 신용도 없고 보증도 서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을 하는 은행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누군가 선뜻 이 은행장 직을 맡으려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행 쪽에서도 역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운영하는 은행의 업무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고 신앙이 좋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을 찾고 있던 중에 마침 미국에 있는 이 장로님을 마음에 두고 와달라고 청하였다고 합니다.
이분의 간증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대학생 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도 했었지만 군대에 가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난 뒤 예수를 닮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30년이 되었을 때 자신이 어느 자리,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3년은 주님의 일을 하리라고 다짐했었는데 바로 지난 2008년이 30년이 된 해였다고 합니다. 자신과 한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12월에 미국 은행을 사직하고 르완다로 옮겨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선교사의 심정으로 르완다 은행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르완다로 오게 된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던 것처럼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또 어떤 발걸음을 인도하실지 기대하며 일하는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분이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63억의 세계 인구 중에 절반이 하루 1달러 정도로 살고 있으며, 2/3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난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를 놓고 보았을 때 전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영국에서 생활하는 우리들도 그들에 비하면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르완다를 직접 방문하여 그 나라 사람들을 보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작은 자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작은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는 그분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고 감사할 줄 아는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 그분처럼 아프리카로 달려가거나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도 한때 신학교에 가려는 생각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나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누구나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이용하는 선교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 지금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와 기회를 선한 일을 위해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풍성할 때에는 어려운 자들을 잊지 않고, 어려움을 만날 때에는 하나님이 주신 회복의 기회로 알고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께 엎드리는 지혜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여유로운 자리에 있을 때 나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에게 눈을 돌릴 수 있는 마음이 풍부와 비천 그 어느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오늘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여 남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준비를 합시다. 특히 장래를 준비하며 외국에 나와 공부하는 우리 젊은이들은 기회를 선용하여 주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도록 최선을 다하기 바랍니다.
지갑이 넉넉할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찾는 사람은 드뭅니다. 오히려 지갑이 텅 비고 어깨에 힘이 쭉 빠질 즈음에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그리고 솔직하게 매달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갑이 홀쭉하게 되는 것이 언제나 슬프고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궁핍에 처하였을 때 비로소 겸손해지고 하나님 앞에 낮아집니다. 내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이 만사 형통하고 술술 풀려가면 하나님께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감사할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반대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의 칭찬과 아부에 익숙해지고 내가 잘해서 잘 된 줄로 착각하여 목에 힘을 주고 자만하기 십상입니다. 차라리 깨지고 실패하고 얻어터진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구조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시인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하고 고백한 것처럼 고난이 오히려 내게 유익이 됩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자청하고 고행을 일삼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고난이 왔을 때 그것을 슬픔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고난 중에 하나님의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니 오히려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비한 계시를 체험했던 바울이 몸을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이 고통스런 질병으로 오래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단의 하수인처럼 두고두고 바울의 몸을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없어지기를 위하여 세 차례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대답은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 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답을 얻은 후로 바울은 더 이상 그 가시를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은혜의 징표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자랑할 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몸에 머물고 있는 가시가 그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스스로 높아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신 육체의 가시인 줄로 알고 오히려 자신의 약점들을 사람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연약한 나에게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것은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런 고난들은 바울이 일부러 청한 가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고 그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었으니 내가 기뻐한다는 고백입니다.
나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의 강함을 자만하지도 맙시다. 늘 아프다고 찡그리며 사는 것도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약한 자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강건한 분들은 혹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은혜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감사하되 너무 자만하지 말 것은 위급함을 느끼지도 않고 아쉬울 것 없는 건강을 과신하는 동안 약한 자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사람들 앞에서 무심코 우리 가족들의 건강을 자랑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지난 40여 년 동안 부모님도 형제들도 응급차에 실려가던가 장기간 병원에 입원을 한다던가 수술실에 들어가 가족들의 마음을 초조하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는 가끔 독감으로 주사 몇 대 맞으러 병원 출입한 것 외에 심각하게 앓아본 적이 없었으니 평생 건강할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랑을 한 지 얼마 안 가서 부친이 경미한 수술로 몇 일 입원하였고, 모친이 장기 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 대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주의하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건강 자랑하다가 벌 받았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족들이 병으로 고생한 적이 없고 제 자신이 심각하게 아파 본 적이 없었을 때는 병들어 아픈 사람들의 심정을 그렇게 잘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제 마음이 찌르르 아파옵니다. 전에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연약함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의 약함과 가족들의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간절히 그리고 솔직하게 기도하며 약한 내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겸손한 마음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 중에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은 약한 내 안에서 능력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병원 갈 일 없이 건강한 분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연약한 자들의 약함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풍성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억하지요? 하나님은 아무 부족함이 없어서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 부유한 사람들의 웃음소리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매달리는 애통하고 가난한 심령을 복 주시고 위로와 은혜를 주십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하였습니다. 약한 자들을 누르고 속여서 얻은 풍성한 것들을 손에 쥐고 즐거워하는 웃음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 자신의 죄와 더러움과 부족함을 깨닫고 슬퍼하며 우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고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위로 또한 넘치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그 동안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 실패의 쓴 맛이 무엇인지 모르고 늘 성공가도만을 달려온 사람이 있습니까? 이웃들에게는 물론 하나님께 조차 아쉬운 손 벌릴 필요가 없었고 가슴 졸이며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여길 만큼 자신만만한 분 있습니까? 그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슬픔과 눈물로 바꾸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이고 정말 마지막에 기뻐하고 즐거운 웃음을 웃을 사람의 복입니다. 지금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하는 일마다 형통합니까? 형통할 때 기뻐하십시다. 그 기쁨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감사와 찬송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십시다. 왜 이 어려움이 나에게 찾아왔는가? 이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려고 계획하실까 곰곰이 생각(consider, think) 하고 기대하며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런 점에서 감사(thank)와 생각(think)은 영어 알파벳 모음 하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통한 날의 기쁨 즉 감사와, 곤고한 날의 생각은 서로 통하는 일입니다.
언제나 햇빛만 비치는 날만 계속되면 세상은 얼마 안 가서 메마른 사막이 되고 맙니다. 때로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뇌성벽력과 함께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하지만 그 춥고 어두운 시절이 지나면 메말랐던 대지에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납니다. 형통과 곤고, 햇빛과 비바람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병행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형통과 곤고함이 번갈아 찾아옴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헤아려 알지 못하고 오직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하시는 선하신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학자들의 예언, 심지어 점성술가나 무속인들의 예언에 귀가 솔깃해져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겠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곧 예측 불허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한 동안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필명을 가진 얼굴 없는 논객의 경제 전망과 예측에 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열띤 찬반토론을 벌인 것도 불안한 장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 아니었겠습니까? 경제전문가로 보이는‘미네르바’의 지혜를 빌어 하루라도 빨리 지긋지긋한 경제 불황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대중들의 마음이 그렇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런 예언자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지혜가 우리의 장래를 무지갯빛으로 바꾸어 줄 수만 있다면 이런 곤고한 날, 경제 난국에 뭐가 두렵고 걱정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 어디에도 참 해결사는 없어 보입니다.
지금이 곤고한 날이라고 여긴다면 못살겠다고 울상을 짓고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먼저 왜 이런 곤고한 시기가 우리에게 필요한가 생각하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요? 그 동안 자기 분수를 모르고 너무 풍족하게 아쉬움 없이 살다가 곤고한 날을 당하고 있다면 나보다 부족한 중에도 감사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보면서 근검절약의 생활로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꾀부리지 않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곤고한 날을 지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처리 방식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 그 동안 형통한 날을 주셨던 때를 감사하고 오늘 곤고함 속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입니다.
전 세계의 인구 중 절반이 하루 1달러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보다 턱없이 부족하고 궁핍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간혹 견디기 힘들어 죽음을 생각하고 또 죽음으로 곤고함을 끝장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어려움 중에도 꿋꿋한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굴이라 하는 사람의 잠언에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30:7-9)
어려울 때일수록 일순간에 대박 터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허황된 마음 즉, 허탄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도적질을 정당화하던가 부유하다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도 지혜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아닙니다. 많이 가졌다고 하여 언제나 행복하고 가진 것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목마르고 더 가지고파 하는 것이 사람들의 욕심입니다. 지금 곤고한 날을 만난 성도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기도가 더욱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매일 아침 하루 분량의 양식, 만나를 거두어 살았던 것처럼 일용할 양식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의 나그네 삶에서 오늘 하루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창고가 빈약하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하루 분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사처럼‘내일 염려 내일 하라 오늘 고생 족하다’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입니다.
퍼렇게 녹이 슬고 곰팡이가 필만큼 넘치도록 곳간에 쌓아두고 그 재물 불리고 관리하는 재미에 푹 빠져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하루 하루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삶이 지혜로운 사람의 자세입니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123:2) 했던 시인의 고백처럼 오직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를 기대하며 그 은혜를 공급하시는 분의 손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사는 행복을 놓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더 강하게 체험했던 바울은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내일에 대한 계획도 목적도 없고 어제보다 나아지는 발전도 없이 오늘 하루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형통할 때에나 곤고할 때에나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서 요동치는 일 없이 나에게 주어진 날들을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살았다는 감사고백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지혜이고 비결입니다. 어려움에 처할수록 더욱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곤고함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파도타기 하는 사람들처럼 그 고난의 파도를 타고 넘는 지혜입니다. 이제 곤고한 날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서핑 보드 하나 준비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를 향해 마음껏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더 큰 은혜를 경험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