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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 앞에 설 자의 행복 김명혁 목사
성경본문 : 잠언 22: 29
29.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이번에 사할린에서 열린 제 11차 CIS(구소련) 한인 선교사대회는 규모는 가장 작았지만 지금가지 열렸던 어느 선교사대회보다도 감동과 은혜가 충만한 가장 알찬 선교사 대회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그리고 후원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선교사대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시간마다 신선한 감동과 오묘하고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고 거듭해서 말을 했습니다. 최고의 강사님들을 모시고 간 저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현지인 한인들 중 극빈자 40여명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함께 하면서 사랑의 선물을 전달했을 때 모두들 너무 좋아했습니다.
우리 다섯 명의 강사들은 함께 여행하고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숲 속을 산책하고 함께 쓰레기를 줍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말씀을 전하면서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처럼 5일 동안 한 호텔에서 함께 지나면서 거의 날마다 라면과 아이스 크림을 많이 먹어본 일은 평생에 처음이라는 말들을 모두 했습니다. 처음 몇 번은 한 그릇에 10불이나 하는 비싼 라면을 세 그릇 시켜서 다섯 그릇으로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원기가 왕성한 최성규 목사님은 매일 라면만 먹게 된 것이 김 목사 때문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제가 청교도 윤리의 3대 원리가 정직, 근면, 절제라고 지적하면서 음식을 절제하는 것도 청교도들의 신앙을 본 받는 것이라고 말하자 이중표 목사님은 '아하!' 하며 탄식 섞인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나 키가 제일 큰 이중표 목사님은 먹는 것이 인생의 낙인데 제대로 먹지 못하니 낙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볼 일을 보아야 하는 데 볼 일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니 걱정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위 수술 후 음식을 적게 드시는 방종순 목사님은 별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라면을 드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전화 받을 일도 없이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산책하고 대화하며 지나는 것이 이적 같은 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했습니다.
이제 강사님들이 전한 메시지들 중 중요한 부분을 한 마디씩 요약해서 말씀 드립니다. 박종순 목사님은 아벨과 노아와 야곱이 보여준 제자 중심적 삶과 위로 및 축복 전달적 삶의 모습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간증적으로 풀어서 제시했는데 모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정익 목사님은 소명에 근실하고 충실한 삶의 행복을 구체적인 실화를 들어가며 생생하게 제시했는데 모두 신선한 충격과 도전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최성규 목사님은 효를 통한 하나님 경외의 신앙이 가정과 사회와 나라와 세계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든다고 역설했고 또한 하나님의 종들에게 성령 받음이 절대로 필요함을 단순하고 진솔하고 열정적으로 역설했는데 모두 소리 내어 부르짖어 기도하며 성령 받음을 사모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 신앙의 관점에서 선교사역을 조명했고 또한 부부 관계와 자녀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했는데 모두 신선한 충격과 도전과 위로를 받으며 자신들의 삶의 현주소를 조망하며 새로운 결단을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 복음의 세 가지 특성인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제시했고 그리고 인생은 편지라는 말을 하면서 내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읽어 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감사를 표했습니다.
선교사대회에 대한 보고는 이만큼 하고 이제부터 오늘 아침 설교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정익 목사님이 전하신 메시지 내용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설교 제목은 "왕 앞에 설 자의 행복"입니다. 제가 조금 바꾸어서 정한 제목입니다. 왕 되시는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누가 왕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가 있습니까? 자기 일에 근실한 자가 왕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여기 “자기 사업에 근실하다”는 말은 자기 일에 정성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일에 공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토기를 만드는 토기장이의 일이든지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의 일이든지 병자를 치료하는 의사나 간호원의 일이든지 자기 일에 정성을 다하고 공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세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 이야기입니다.
이정익 목사님이 군인 장교의 훈련을 받고 중위로 그리고 군목으로 임관한 후 부대로 배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2명의 장교들 중에서 이정익 목사님만이 최전방 부대로 배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인제와 원통과 거진을 거쳐 최 전방 철책 선이 있는 곳을 향해 가면서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내가 어머니의 기도때문에 할 수 없이 목사가 되었고 그리고 주님이 시켜서 할 수 없이 목사로 헌신을 했는데 왜 하필 나를 최전방으로 보내십니까?"
이렇게 투덜거리며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방 부대의 부대장인 00 중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 부대장이 이정익 목사님을 만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목사님, 이곳에 잘 오셨습니다. 항상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는 우리 병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이곳 최전방에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저는 지난 25년 동안 군인 생활을 하면서 군인 생활을 한번도 후회한 일이 없습니다. 한번도 불평이나 원망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 말에 이정익 목사님은 뒤 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고 너무나 부끄럽게 보였습니다. 그 부대장의 말과 삶의 자세가 이정익 목사님의 삶의 자세를 완전히 뒤 바꾸어놓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그것이 질그릇을 굽는 토기장이의 일이든지, 그것이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이의 일이든지, 그것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일이든지,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일이든지, 자기 일에 근실하고 성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고 성스러운 사람이고 향기로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째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이정익 목사님에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예쁘장하게 생긴 간호원이 찾아왔습니다. 아프리카 우간다로 선교하러 가기로 작정을 했는데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에이즈 환자가 득실거리는 곳에 처녀의 몸으로 의료선교사로 간다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이즈 환자의 몸에 꽂혔던 주사 바늘 하나를 잘못 다루면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잘 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얼마 후 그 간호원은 우간다로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어느날 우간다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또박또박 쓴 편지의 편지지에는 이곳 저곳에 눈물 자국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간호원 선교사가 어느날 죽어가는 환자를 수술하고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발전기에서 나오는 전기로 방을 밝히고 수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발전기가 멎고 방이 캄캄해졌습니다. 그 간호원 선교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촛불, 촛불 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을 살려주세요.하나님, 이 사람을 살려주세요." 촛불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거의 불가능한 어려운 수술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죽어가던 환자가 의식을 되찾고 살아났습니다.
그 간호원 선교사가 쓴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목사님, 오늘 밤은 저의 생애의 최고의 밤이었습니다. 저의 사역에 대한 최고의 자부심과 감격을 느낀, 가장 행복한 최고의 밤이었습니다." 우간다로 간 그 간호원 선교사는 자기 일에 근실하고 성실했습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기 일에 근실했고 최고의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왕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왕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호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이야기입니다.
신촌 성결교회에 지성인 집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려대를 나온 몸이 건장한 엘리트 집사였습니다. 예배 시간이 거의 다 되든지 예배 시간이 조금 지나서 예배당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배당 뒤 좌석에 앉아서 소위 지성인의 모습으로 예배를 ‘보곤’ 했습니다. 예배 시간 전에 일찍 나와서 앞 자리에 앉는 것은 지성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성인 집사가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 지성인 집사가 죽어가면서 담임 목사를 불렀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뉘우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면 예배 시간 훨씬 전에 일찍이 교회당에 가서 맨 앞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지성인 집사는 그 다음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담임 목사인 이정익 목사는 한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인 예배 드리는 일에 근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고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후회하며 죽어간 소위 지성인 집사의 죽음을 바라보며 담임 목사는 한 없는 슬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정익 목사님은 교역자는 물론 장로님들이 교회에서 최우선적을 해야 할 일이 바로 예배라고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교역자들이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느라고 여기 저기서 서성거리는 것을 자기는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무 장로님들은 예배 시간 전에 일찍 나와서 안내를 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선교사대회에서 박종순 목사님도 시간마다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예배와 제사였습니다.
목사와 장로는 물론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와 제사라고 했습니다. 아벨의 삶이 그러했고 노아의 삶이 그러했고 야곱의 삶이 그러했다고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예배와 제사를 바로 드릴 때 그 삶의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복을 끼치는 향기로운 삶이 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세상에서 살면서 할 일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하고 달란트라고도 사업이라고도 하고 합니다. 그 일은 자기가 처한 처지에 따라서 주님의 뜻에 따라서 다양합니다. 자기 일에 근실한 사람이 귀한 사람이고 아름다운 사람이고 성스러운 사람이고 향기로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에 근실하고 성실하고 공을 드리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가정에서는 남편의 일과 아내의 일에 근실하고 교회에서는 교사의 일과 성가대의 일과 집사의 일과 권사의 일과 장로의 일과 교역자의 일에 근실하고 무엇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의 일과 봉사의 일과 전도의 일과 선교의 일에 근실한 사람들이 되십시다. 사회에서는 우리가 처한 일터에서 맡겨진 일에 근실한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에서 향기가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스러움이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왕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종말론에서 여기의 삶으로
이정익 목사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한때 사람이 통통하게 살찐 것을 선호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닌 여성에게는 복스럽다, 맏며느리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경우는 사장 같다, 장군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량아 대화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시대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오늘은 무조건 날씬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살과 전쟁을 벌이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무조건 날씬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내면을 가꾸는 일에 등한합니다.
그런데 살이 많이 찐 상태도 좋지 않지만 너무 날씬한 것도 좋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적당하게 몸의 균형이 이룬 상태입니다. 적당함, 얼마나 좋은 모습입니까. 이 같은 이치는 모든 면에 적용됩니다. 이 같은 이치는 신앙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도 너무 뜨거운 것도 좋지 않고 너무 차가운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신앙도 극단으로 치우치는 신앙형태는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앙에도 두 극단의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으로 치우친 상태” 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이 극성일 때 여러분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신앙이 종말론으로 치우치게 되니까 사람들이 현실의 삶을 무시하고 모두 재림을 준비한다고 직장도, 일도, 가정도, 학교도 버리고 한곳에 모여 집단 생활하던 그 모습이 생각날 것입니다. 신앙이 한편으로 너무 치우친 결과입니다. 신앙도 이렇게 한편으로 치우치면 불건전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지난 130여 년 동안의 신앙을 되돌아보면 영적으로, 종말론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종말, 심판, 천국, 계시, 은사에 대해서 많이 설교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꾼 꿈에도 의미를 붙이려 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에도 무리하게 영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그 신앙에는 중심이나 신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이 대체적으로 실제적이지 못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뜨겁게 하고 철야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현실생활에서 그 신앙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삶에 어떤 어려움이 주어지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임종 때가 되면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천국 천국 하던 그 기도와 찬송은 허구였다는 말이 됩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신앙이 구체적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구체적이지 못한 채 종말, 심판, 천국을 말하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참 좋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언제나 입에서 “감사합니다“하는 말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젠가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자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동네 한가운데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보니까 불난 집은 자기 집이었습니다. 지금 자기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합니까. 당연히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새집을 주시려고 헌집을 태우시는군요, 주님 감사합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불타고 있는 집이 자기 집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그 할머니는 땅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나무아미타불” 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형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아이 내용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열렬한 신앙에 비해서 그 신앙의 중심이나 뜻이나 내용이 현실의 삶에 그대로 미치질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처녀가 시집을 갑니다. 직장을 다녀서 돈을 많이 모은 이 처녀는 혼수를 많이 준비해서 두 트럭에 실어 시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그 혼수가 그대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시어머니의 여우목도리가 혼수에서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새로 구입해서 보냈는데 그제야 비로소 시댁에서 혼수가 접수되었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흔치않은 사건을 일으킨 시어머니가 누구냐 하면 서울의 유명한 장로교회 권사입니다. 그 시어머니도 분명 종말, 심판, 천국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하고 믿고 신앙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서 권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이익이나 물질 앞에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뛰어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란에 불어 닥친 지진으로 밤시가 10만 명의 인구 가운데 4만 3천명이 죽었습니다. 흙벽돌로 지은 집은 예외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데 철근이 조금만 들어간 집은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뼈대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교회의 최대의 약점은 감정도 풍부하고 열심도 있고 부지런함도 차고 넘치는데 문제는 중심이나 의지적인 부분이 아주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일년 내내 계시록만을 가지고 심판과 종말과 천국과 계시만 설교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은 만사를 제처 두고 매일 교회에서 일한다고 왔다 갔다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계시 받았다고 직장을 버리고 신학교 간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일 밤 기도한다고 짐 싸들고 교회로 산으로 돌아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두 건전하지 못한 신앙모습입니다. 그 신앙이 종말론적으로, 신비적으로, 영적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치우치게 되면 그 현실 삶을 부정하게 됩니다. 신앙이 건전하지 못하고 이렇게 치우치게 되면 그 신앙에 건강성을 잃게 되고 신앙이 현실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편으로 치우친 신앙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식적으로 치우친 신앙” 형태도 있습니다.
이것도 치우친 신앙입니다. 오늘은 신앙이 너무 지나치게 이성주의로, 지식신앙 쪽으로 기울어 가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한편으로 신앙이 기울게 되면 영적인 부분이 또 약화되게 됩니다. 신앙이 너무 현실에 치우치게 되면 미래가 보이질 않습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영적인 해석이 나오질 않습니다. 모두 현실적이고 인간적이고 타산적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이 현실적인 신앙은 오히려 종말론적인 신앙보다도 못합니다.
그 신앙은 마치 물 없는 샘과 같습니다. 샘은 홍수 때나 가뭄 때나 한결같이 물을 유지해야 그것이 샘이고 생수입니다. 그런데 홍수가 왔을 때 물이 넘치는 샘은 샘이 아닙니다. 그 물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또 조금 가물었다고 해서 물이 말라버리는 샘도 샘이 아닙니다. 샘은 언제나 한결같은 물을 유지해 주어야 그것이 생수를 공급하는 샘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신앙인들이 대부분 여기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신앙년조는 있는데 그 신앙내용이 뼈대만 있을 뿐 내용이 없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힘이 없고 눈물이 없고 소망이 약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아주 빈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는 기도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하면 더 피곤하고 힘들고 신앙이 무력화되고 겁부터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상도 좌우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극좌도 극우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이 극단의 사상 때문에 50년 동안 분단을 이루며 살아온 민족입니다. 또 음식도 뭐가 좋다하면 야단법석을 떠는 것도 좋아보이질 않습니다. 이것은 안 좋다 하면 그 순간으로 뚝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좋다하면 물론 또 극성을 떱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경박하니까.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친구는 좋은 친구고 저 친구는 나뿐 친구다 하고 갈라놓으면 파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파벌이 조성되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너무 영적으로 치우치는 신앙, 매사를 영적으로만 해석하고 생각하고 기준 삼는 신앙생활, 얼마나 불건전한 주관에 빠진 신앙입니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재적인 삶을 무시하게 됩니다. 현재적인 삶을 무시하고 영적으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게 강조하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현실적인 것을 버리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현실적인 삶을 부정하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면 다 된다고 믿고 행동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신앙은 감나무 아래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신앙입니다. 익은 감은 누워있으면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감을 익게 하셨지만 따 먹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 직장을 달라고 기도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적당한 사람들과 만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응답입니다. 내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냥 있으면 안 된다 그말입니다. 기도한 후에는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신앙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치우치면 좋지 않습니다. 매사를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기준삼고 인간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러면 무엇 하러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까. 신앙은 이렇게 치우치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건강한 신앙은 “조화를 이룬 신앙”입니다.
적당하게 균형을 이룬 몸은 보기도 좋을 뿐 아니라 건강미가 있고 조화가 이루어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균형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지극히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이 이렇게 균형을 이루려면 다음 세 가지에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는 “지난날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입니다.
소위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신앙입니다. 어떤 역사냐 하면 지난날의 그 아프고 고난스럽고 어려웠던 날들을 잊지 않는 신앙입니다. 지난날 어려웠을 때를 기억해야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난날을 잊지 말라고 아주 강조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감동을 주신 흔적을 알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미래를 소중히 여기는 신앙”입니다.
미래가 없는 신앙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신앙은 지극히 미래적인 것입니다. 신앙은 소망과 기대와 뜻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그날을 위해서 오늘 수고하고 힘쓰는 생활입니다. 신앙인에게 이 미래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오늘 수고하고 저축하고 인내할 이유가 없듯이 미래가 없는 사람은 오늘 공부하고 수고하고 저축을 하지 않습니다. 위를 보는 사람만이 하늘이 보이듯이 미래가 없는 사람에게는 오늘 수고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그리스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andropos) 라고 합니다. 그 뜻은 “위를 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만이 위를 보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과거도 소중하고 미래도 소중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개역판에는 “자기 일에 근실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근실”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마히르” “최선을 다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현재의 삶에 충실한 모습입니다. 그 삶에 향기가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런 규모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는 장차 미래에 주어질 천국만 생각하며 오늘 현재적인 천국은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천국은 현재 여기에서 주어진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천국을 무시하고 내일에 주어질 천국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그 삶은 잘못된 신앙인의 삶입니다. 대학에 가려면 학교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대학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학교생활을 그만두고 오직 대학에만 가려고 한다면 현재의 삶을 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믿음의 삶은 요한 웨슬레가 잘 정의해 주었습니다. 웨슬레는 오늘은 천년 살 것 같은 계획과 기대를 가지고 살고 종말론적으로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심정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면 그 삶이 얼마나 엄숙할 것입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 삶에 감동이 있고 향기가 있고 절제와 규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사회에 비취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오늘 세상에 공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철야하고 주일생활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충성스럽게 신앙생활을 다 했는데 실제로 가정과 사회와 동네와 직장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그렇게 공감을 주고 건전하고 어떤 메시지를 주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그 신앙이 구체적이질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사회인들이 보는 기독교인상은 항상 뒤에서 말 많은 모습, 말은 많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모습, 불평이 많은 모습, 짐 싸들고 기도원에 자주 가는 모습, 믿음생활 한다고 하면서 더 불안해하고 겁이 많고 쩨쩨하고 약속 안 지키고 자기 몫 챙기는 데는 약삭빠른데 남을 배려하는 데는 아주 서툰 모습,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모두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빛 되고 앞서 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실제적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은 많이 읽었는데 그 성경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적용이 안 되고 있습니다. 기도는 많이 했는데 그 기도가 복과 형통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말은 참 잘하는데 그 말에 철학이 없고 의식이 없고 책임감이 없습니다. 이제는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을 구하고 형통을 구하는 기도는 자랑할 기도가 아닙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나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을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천한 자 앞에 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왕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삶에 향기가 있고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