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8-16
벼랑 끝에 선 자의 축복 / 노경모 목사
인생을 살다보면 나름대로 ‘나는 지금 벼랑 끝에 있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선다는 것은 내 상황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상황, 즉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정의 문제든, 경제적인 문제든, 건강의 문제든, 생업의 문제든, 영적인 문제든, 어떤 문제든지 간에 벼랑 끝에 선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벼랑 끝에 섰던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벼랑 끝에서 서게 되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사들이 쫓아오지 좌우는 절벽이지요 앞은 홍해이지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그들은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뒤쫓아오는 애굽의 군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홍해에 뛰어 들어 익사하든지. 그들은 긴박한 벼랑 끝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도 벼랑 끝에 섰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다니엘에게 갑작스러운 위기가 다가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면 사자굴에 던져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벼랑 끝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지요.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부물에 집어 넣겠다고 하니..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상에게 절할 수도 없고..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가 잘아는 요셉은 여러 번 벼랑 끝에 섰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죽을 뻔 했고, 아버지 어머니도 모르는 사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애굽에서 종으로 있을 때 그 주인의 부인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누명을 씁니다. 감옥에 갑니다.
욥도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잘 믿었던 의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위기가 닥쳤습니다. 자녀들이 다 죽습니다. 집과 모든 재산이 다 날라갑니다. 자기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맙니다. 부인은 욥을 저주하고 떠나 버립니다. 이 이상의 벼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정말로 어찌 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딸 이민아 목사님, 그 분의 벼랑 끝이 얼마나 힘든 벼랑 끝이었던가를 알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한 남자와 헤어집니다. 암 선고를 받습니다. 다섯 살 아이는 특수 자폐 판정을 받습니다. 실명 위기가 닥칩니다.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은 스물 다섯 살 나이에 돌연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큰 고통의 벼랑 끝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견디기 힘든 벼랑 끝에 설 때가 한 두번은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도 나는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벼랑 끝에서 섰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도 벼랑 씉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만날 수 가 있습니다. 그 여인은 아들이 하나 있는 과부입니다. 가난합니다. 극심한 흉년 때문에 그 녀와 그 아들은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이제 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정말로 안타까운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먹을 것이 없어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하고 있는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이 과부의 집으로 보냅니다. 8-9절을 읽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엘리야로 하여금 굶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엘리사를 보낸 것 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벼랑 끝에 있는 이 과부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 과부에게 보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과부와 아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죽기는 커녕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배물리 먹고 살 수 있도록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벼랑 끝에서 겨우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네가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낄 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불청객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홍수같이 몰려 옵니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이제 나는 끝이구나.’ 나에게 찾아오는 이 두려움이라는 불청객을 쫓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 과부에게로 간 엘리야는 나뭇가지를 줍는 과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극심한 가뭄인데 물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도 이 가난한 과부에게 물을 달라합니다. 물을 가지러 가는 과부에게 이제는 떡 한 조각을 달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 때 엘리야 한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3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셩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홍해를 앞두고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도, 요단강을 앞에 있는 여호수아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장 18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는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본문 13절에서 과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셔서 나를 보냈기 때문에 이 벼랑 끝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선 것이 죽음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닙니다. 벼랑 끝에 선 것이 나를 망하게 만들고 내 인생을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벼랑 끝은 나에게 회복을 가져다 주고,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고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책을 썼는데 책 제목이 무엇인지 아세요? ‘벼랑 끝에서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분은 ‘벼랑 끝에 서면 길이 보인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분은 ‘벼랑 끝에 나를 세우라’라는 제목을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둘째,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는 신앙적 반응을 해야 합니다.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본능적 반응을 하면 안됩니다. 두려움, 공포, 자포자기, 절망, 불평, 원망, 저주 이런 것이 바로 본능적 반응의 모습들입니다. 벼랑 끝에서의 본능은 아주 나약하게 됩니다.
벼랑 끝에서 서 있을 때 정신적(심적) 반응을 의존해서도 안됩니다. 벼랑 끝에서의 정신적 반응 역시 아주 약해 지기 때문입니다. ‘견딜 수 있어’, ‘이길 수 있어’, ‘버틸 수 있어’ 라고 정신적으로 생각하지만 벼랑 끝 상황 속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쉽게 꺽여지고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벼랑 끝에서는 신앙적을 반응을 해야 합니다. 신앙적 반응을 하나님을 의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다윗이 수많은 벼랑 끝에서의 위기를 무엇으로 극복했는지 아세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시편은 고통과 환란과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르밧 과부는 벼랑 끝에서 신앙적 반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한다는 과부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나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라는 말을 합니다. 13절을 읽어 봅시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때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합니다.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먼저 먹으라고 갖다 준 것입니다. 지금 과부가 굶어 죽게 되었는데 과부와 아들이 떡을 만들어 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엘리야에게 먹으라고 갖다 주었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과부의 상황에 맞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과부나 본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반응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부는 신앙적으로 반응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벼랑 끝에서의 신앙적 반응은 우리의 생각과 이성과 지식과 형편을 초월하는 반응입니다.
셋째,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벼랑 끝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특히 말씀으로 다가 오실 때가 많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악독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할 때 엘리야는 도망을 하다가 로뎀 나무 밑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로 힘을 얻어 호렙산으로 갑니다. 호렙산 앞에 선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로 다가오지를 않으시고 세미한 소리로 다가오셔서 격려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미한 음성, 말씀으로 다가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벼랑 끝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엘리야는 과부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14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약속의 말씀은 벼랑 끝에 선 사르밧 과부가 신앙적인 반응 보이도록 만드는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밀씀을 듣고 과부는 가서는 엘라야의 말씀대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는 기도하기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까지 무엇이라고 약속하셨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벼랑 끝에 서섰던 사르밧 과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극심한 가뭄 속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아들도 죽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끝날 때 까지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배부르게 잘 먹었겠습니까?
벼랑 끝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기회입니다. 벼랑 끝은 전화위복의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 선 하나님의 자녀들을 드디어 웃게 하십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