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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니,
중생일 때에도 이 마음은 줄지 않고,
모든 부처가 되었을 때에도
이 마음은 늘지 않는다.
나아가 육도만행六度萬行에 이르기까지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공덕은 본래 스스로 다 갖추고 있는 것이므로,
닦아서 더할 필요가 없다.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쉬면 고요하니,
만일 이 일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을 갖지 않고
모습에 집착한 수행으로 공용功用을 구하고자 하면,
모두가 망상이라서 도道와는 아주 어긋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다시 다른 부처가 없고 또한 다른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밝고 맑은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한 점의 모양도 없다.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면 즉시 법체法體에 어긋나서 모습에 집착하게 되나니,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본래 형상에 집착할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 것은
차례[次第]이지만, 비롯함이 없는 이래로 차례로 된 부처[次第佛]는 없다.
오직 한마음을 깨달으면 다시 사소한 법도 얻을 것이 없나니,
이것이 곧 참 부처이다.부처와 중생은 한마음이라서 차이가 없으니,
마치 허공이 섞이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 것과 같다.
또 둥근 해가 사천하를 비추는데, 해가 비출 때에는 광명이 천하에
두루하지만 허공은 본래 밝아진 적이 없고, 해가 저문 뒤에는 어둠이
천하에 두루하지만 허공은 본래 어두워진 적이 없는 것과 같다.
밝고 어두운 광경은 저절로 서로 엇바뀌지만 허공의 성품은 텅하니
트여서 변하지 않으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또한 마찬가지다.
만일 부처는 청정하고 빛나는 해탈의 모습이라 하고,
중생은 더럽고 어두운 생사의 모습이라 여기면,
이 사람의 그러한 견해는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을 지나더라도
끝내 보리菩提를 얻지 못하리니, 바로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 한마음일 뿐 다시 티끌만큼의 사소한 법도 얻을수가 없는
것이 바로 부처이건만, 요사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체體를 깨닫지 못하고, 문득 마음 위에 마음을 내어
밖을 향해 부처를 구하여서 모습에 집착한수행을 하니,
이는모두 잘못된 법이지 보리의 도가아니다.
○ 시방에 계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얻을 수 없는
하나의 무심無心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니, 사람들이 이루기 어렵다.
무심이라는 것은 일체의 마음이 없는 것이니,
여여如如한 체體는 안팎이 목석과 같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전변하지도 않으며,
안팎이 허공과 같아서 막히지도 않고 걸리지도 않으며,
능能도 없고 소所도 없으며,
방향이나 처소도 없고, 모습도 없고 득실得失도 없다.
나아가는 이가 감히 이 법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공에 떨어져서 머물 곳이 없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니,
그래서 낭떠러지를 바라보고는 물러난다.
문수는 이理에 해당하고 보현은 행行에 해당하는데,
이理란 참으로 공하여 걸림이 없는 이理이고,
행行이란 모습을 여의어 다함이 없는 행이다.
관음觀音은 대자大慈에 해당하고,
세지勢至는 대지大智에 해당한다.
유마維摩는 정명淨名이라 번역하니,
정淨이란 성품이고 명名이란 모습인데,
성품과 모습이 다르지 않으므로 정명이라 호칭한 것이다.
모든 대보살들이 표현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일심을 여의지 않으니,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다.
이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의 깨달음을 향하지 않고
마음 밖에서 구하느라고 형상에 집착하며 경계를 취하니 모두 도에
위배된다. 항하의 모래라 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래인데,
이 모래는 부처님과 보살과 하늘ㆍ범왕들이 밟고 지나가도 기뻐하지
않고, 소ㆍ양ㆍ벌레ㆍ개미가 밟고 지나가도 화내지 않고,
진기한 보배ㆍ향기로운 향기가 있어도 모래는 탐내지도 않고,
똥ㆍ쓰레기 따위의 더러움이 와도 모래는 싫어하지 않는다.
○ 이 마음은 곧 무심無心의 마음으로서 온갖 모습을 여의었다.
부처님과 중생이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 오로지 능히 무심하면,
바로 그대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당장에 無心이 되지 못하면,
여러 겁을 수행하여도 끝내 도를 이루지 못하고 3승의
공행功行에 얽매여서 해탈치 못한다.
그러나 이 마음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름이 있으니,
어떤 이는 법을 들으면 한 생각[一念]에 문득 무심을 얻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迴向에 이르러야 비로소
무심을 얻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10지地에 이르러야 비로소 무심을
얻는 이도 있다. 길건 짧건 무심을 얻어서 그대로 머무르면,
다시는 닦을 것도 없고 다시는 증득할 것도 없어서 실로
얻을 바가 없어 진실하여 허망치 않다.
한 생각[一念]에 얻은 이와 10지에서 얻은 이의 공용功用은
가지런하여 조금도 깊고 얕음이 없건만,
다만 여러 겁을 지나면서 잘못 받아들여 애를 쓸 뿐이다.
악을 짓고 선을 짓는 것이 모두 모습에 집착하는 것이니,
모습에 집착하여 악을 지으면 허망하게 윤회를 받아들이고,
모습에 집착하여 선을 지으면 헛되이 고통을 받을 뿐이어서,
이 모두 언하言下에 스스로 근본법을 깨닫는 것만 못하다.
이 법은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는 법이 없다.
이 마음은 곧 법이니, 법 안에는 마음이 없다. 마음은 스스로가 무심
이라서 또한 무심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무심이려고 하면
마음은 곧 있음[有]을 이루나니, 묵묵히 계합할 뿐 온갖 사량思量이
끊겼기 때문에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행하는 곳이 멸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마음은 본원청정불本源淸淨佛로서, 사람마다 모두 갖고 있으니,
꼬물거리는 축생들도 부처님이나 보살들과 동일한 체體이어서 다르지 않다.
다만 망상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業果를 짓지만
본래의 부처 자리에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으니,
비고,
통하고,
적멸하고,
고요하고,
밝고,
묘하고,
편안하고,
즐거울 뿐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아 알면
당장에 문득 이러해서 원만하고
구족하여 다시는 모자라는 바가 없다.
설사 3아승기겁 동안 정진 수행하여 온갖 지위를 거쳤더라도 급기야
일념一念을 증득할 때에는 다만 원래의 자기 부처를 증득할 뿐이니,
위로 향하는 길에 다시 한 물건도 덧붙일 수 없다.
여러 겁에 걸친 공용功用을 관찰하건대 모두가 꿈속의 허망한 짓이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실제로 얻은 바가 없다.
만일 망령되게 얻은 바가 있었다면 연등然燈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授記를 주시지 않았으리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리菩提라 한다”고 하셨다.
즉 이 본원의 청정한 마음은 중생ㆍ부처ㆍ세계ㆍ산ㆍ강ㆍ형상 있음ㆍ
형상 없음과 더불어 시방세계에 두루하면서 일체 평등하여
피아彼我의 모습이 없다.이 본원의 청정한 마음은 항상 스스로
원만히 밝고 두루 비추지만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見聞覺知] 것을 인정하여 마음으로 삼기에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에 덮이게 되어서 정묘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장에 무심하면 본체가 저절로 나타나니, 마치 둥근 해가
허공에 솟아서 시방을 두루 비추어도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을
인정해서 동작으로 삼다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을
비워 버리면, 즉시 마음의 길[心路]이 끊어져서 들어갈 곳이 없다.
다만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곳에서 본래의 마음을 인정할 뿐이지만,
그러나 본래의 마음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데 속하지 않고,
또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을 여의지도 않는다.
다만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에 대해 알음알이[見解]를 일으키지 말고,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에 대해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또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앎을 여의고서 마음을 찾지도 말고,
또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앎을 버리고서 법을 취하지도 말라.
나아가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종횡으로 자재해서 도량 아님이 없다.
○ 세상 사람들이 도道를 듣기를, 부처님들이 모두 마음의 법을 전하셨다고 하지만,
마음 위에 따로 증득할 수 있고 취할 수 있는 하나의 법이 있다고 여겨서
마침내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는다면,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임을 알지 못하게 된다.
마음을 가지고는 다시 마음을 찾을 수 없으니,
천만 겁을 지나더라도 끝내 얻을 날이 없을 것이다.
당장에 무심해서 문득 본래의 법인 것만 못하나니,
마치 장사[力士]의 이마 구슬이 이마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밖을 향해 구하면 시방을 두루 다녀도 끝내 얻을 수 없지만,
지혜로운 이가 가르쳐 주면 당장 본래의 구슬이 예전과 같음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 본래의 마음을 잃고 의심하여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밖을 향해 찾으면서 공용功用의 행을 일으키고,
차제次第에 의거해 과위果位를 증득하고,
여러 겁을 거치면서 부지런히 구하면,
결코 도를 이루지 못하니,
이는 당장에 무심인 것만 못하다.
일체의 법이 본래 있는 바가 없고,
얻을 바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의지함도 없고,
능能도 없고 소所도 없음을 반드시 알아서 망념을
움직이지 않으면 문득 보리를 증득하리라.
그리하여 도를 증득할 때는 다만 본래 마음의 부처[本心佛]를
증득할 뿐이라서, 여러 겁의 공용은 모두 헛된 수행이다.
마치 장수가 구슬을 얻었을 때에도 본래의 이마 구슬을 얻었을 뿐이라서
밖을 향해 찾는 노력과는 관계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실제로 얻은 바가 없다”고
하시고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다섯 가지
눈으로 보는 바 다섯 가지 말을 이끌어 진실하여 허망치 않은 것이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 하셨다.
○ 도를 배우는 사람은,
4대大로 몸이 이루어지되,
4대에는 내[我]가 없고
나[我]에도 또한 주재主宰가 없음을 의심하지 말아서
이 몸엔 나도 없고 주재자도 없음을 알아야 하며,
또한 5음陰에도 내가 없고 주재자도 없음을 의심하지 말아서
이 마음에도 내가 없고 주재자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6근根ㆍ6진塵ㆍ6식識에 화합하고 생멸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로서,
18계界가 이미 공하면 일체가 다 공하니,
오직 본래의 마음만이 훤하게 청정하다.
의식으로 먹는 이가 있고
지혜로 먹는 이가 있는데,
4대로 된 몸은 굶주림과 시장함이 걱정이므로 형편에 따라 기르되,
탐욕이나 집착을 내지 않는 것을 이른바 지혜로 먹는다 하고,
멋대로 맛을 취하여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키면서 오직 입에 맞는 것만을 구할뿐
싫어하여 멀리하려하지 않는것을 이른바 의식으로 먹는다고 한다.
성문聲聞이란 소리에 의지해 깨닫는 것을 성문이라 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요달하지 못하고 음성의 가르침 위에서
알음알이를 일으키거나,
신통에 의해서나 상서로운 모습이나 언어나
운동運動에 의해서 보리 열반이 있다고 듣고서,
3아승기겁을 닦아야불도를 이루는것은 모두성문의 도에속하나니,
이를 일러서성문이라 한다.
부처님만이 당장에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부처라서
한 법도 얻을 수 없고 한 행도 닦을 것이 없음을 단박에 요달하니,
이것이 위없는 도[無上道]이고 이것이 진여불眞如佛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오직 한 생각[一念]이라도 있으면
도와 간격이 생긴다는 것을 걱정해야 하니,
생각 생각[念念]이 모습이 없고
생각 생각이 함이 없으면[無爲]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를 이루고 싶으면,
온갖 불법은 아무 것도 배우지 말고
오직 구할 것 없기와 집착 없기만을 배워라.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나지 않고,
집착이 없으면 마음이 물들지 않나니,
나지 않고 물들지 않으면 그대로가 부처이다.
8만 4천 법문은 8만 4천 번뇌를 대치하는데,
이는 교화로 이끄는 방편문일 뿐이니,
본래는 한 법도 없다.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읠 줄 아는 이가 부처이니,
다만 일체의 번뇌를 여의기만 해야 할 뿐,
얻을 만한 법은 없다.
○ 도를 배우는 사람이 요긴한 비결을 알고 싶다면,
다만 마음 위에다 한 물건도 붙이지 말라.
부처의 법신法身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하는 말은,
바로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고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은 법신이 허공의 처소에 두루하거나
허공 속에 법신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길 뿐,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고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일 허공이 있다고
단정하여 말하면 허공은 법신이 아니요, 법신이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이란 견해를 짓지 말지니 허공이 곧 법신이기 때문이요,
법신이란 견해를 짓지 말지니 법신이 곧 허공이기 때문이다.
법신과 허공은 다른 모습이 없고,
부처와 중생은 다른 모습이 없으며,
생사와 열반은 다른 모습이 없고,
번뇌와 보리는 다른 모습이 없다.
일체의 모습을 여읜 것이 부처인데,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한다.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야 바로 참된 법이지만,
경계를 잊기는 쉬워도 마음을 잊기는 지극히 어렵다.
사람들이 감히 마음을 잊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더듬을 곳이 없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니,
공은 본래 공도 없는 것이라서 오직 하나의 참 법계일 뿐임을 모르는 것이다.
○ 이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은
비롯함이 없는 이래로 허공과 수명을 같이 하니,
태어난 적도 없고 멸한 적도 없으며,
있었던 적도 없고 없었던 적도 없으며,
더러운 적도 없고 깨끗한 적도 없으며,
시끄러운 적도 없고 고요한 적도 없으며,
젊었던 적도 없고 늙었던 적도 없으며,
방향이나 처소도없고 안이나 밖도없으며,
수량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색상色像도 없고 음성도 없으며,
찾을 수도 없고 구할 수도 없으며,
지식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언어로써 표현할 수도 없으며,
경물景物로 만날 수도 없고 공용功用으로 도달할 수도 없다.
모든 불보살佛菩薩들과 일체의 꿈틀거리는 중생이 똑같이 대열반의 성품이니,
성품은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법이다.
한 생각[一念]이 참[眞]을 여의면 모두 망상妄想이 되니,
마음으로써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고,
부처로써 다시 부처를 구하지 말고,
법으로써 다시 법을 구하지 말라.
그러므로 도를 닦는 사람은
당장 무심無心으로 묵묵히 계합해야지 마음을 망설이면 곧 어긋난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것이 바른 소견[正見]이니,
행여 밖을 향해 경계를 쫓는 것을 마음이라 여기지 말라.
이것은 도적을 잘못 알아서 아들로 여기는 것과 같다.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곧 계율ㆍ선정ㆍ지혜를 세우는것이니,
본래번뇌가 없다면 어찌 보리가있겠는가?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온갖 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일체의 마음이 없으니 어찌 일체의 법을 쓰겠는가?”라고 하셨다.
본원의 청정한 부처[本源淸淨佛] 위에는 다시 한 물건도 붙일 수 없나니,
비유컨대 허공을 한량없는 값진 보배로 장엄해도 끝내 머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불성佛性도 허공과 똑같아서 아무리 한량없는 지혜와
공덕으로 장엄하여도 끝내 머물 수 없으니,
다만 본래의 성품을 미혹해서 유전하여 보지 못할 뿐이다.
○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것은
만법이 모두 이 마음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서 경계를 만나면 있고 경계가 없으면 없는 것이니,
깨끗한 성품 위에다 오로지 경계의 견해만은 짓지 말아야 한다.
이른바 정혜定慧라 함은 거울의 작용이 역력歷歷하고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것이니,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이 모두 경계 위에서
견해를 짓는 것이다. 임시로 중근기와 하근기를 위해 설할 것이라면
옳다고 하겠지만, 만약 친히 증득하고자 하면 모두 이런 견해를 짓지
말아야 하니, 모두 경계에 속박되기 때문이다.
법에는 빠지는 곳이 있으니 있음[有]의 경지에 빠지는 것이다.
다만 일체 법에 대하여 있다는 소견[有見]을 짓지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오신 뒤로 오직 한 성품만을 설했을 뿐이고
오직 한 법만을 전하셨으니, 부처로써 부처를 전하였을 뿐
다른 부처를 말하지 않았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였을 뿐
다른 법을 말하지 않았다. 법은 바로 설할 수 없는 법이요,
부처는 취할 수 없는 부처이니, 이것이 바로 본원의 청정한 마음이다.
오직 이 한 나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둘은 참되지 않다.
반야般若는 지혜가 되는데, 이 지혜가 바로 무상無相의 근본이다.
○ 범부凡夫는 도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여섯 감정[六情]을 멋대로 부려서 여섯 세계[六道]로 빠진다.
즉 도를 배운 후에도 한 생각[一念]으로 생사를 계교하게 되면
곧 온갖 마魔의 길에 떨어지고,
한 생각으로 온갖 소견을 일으키면 곧 외도에 떨어지며,
생生이 있다고 보아서 그것을 멸滅하는 데로 나아가면
곧 성문의 도에 떨어지고,생生이 있다고 보지 않고 오직
멸滅만 있다고 보면 곧 연각緣覺의 도에 빠진다.
법은 본래 나지도 않으므로 멸함도 없나니,
생멸이라는 두 소견을 일으키지 말며,
싫어하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말라.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한마음이 그런 것이니,
그런 뒤에야 곧 불승佛乘이 된다.
○ 범속한 사람은 모두 경계를 쫓아 마음을 내는데,
그 마음은 싫어함과 기뻐함을 따른다.
만일 경계가 없고자 하면 반드시
그 마음을 잊어야 하니,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공하고,
경계가 공하면 마음이 멸한다. 마음을 잊지 않고서
경계를 없애려고 하면, 경계는 없앨 수 없고
다만 어지러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오직 마음뿐이고,
마음은 또한 얻을 수 없거늘,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 반야의 법을 배우는 사람은
한 법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아서
3승乘에는 뜻을 두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뿐인 진실은 증득할 수 없거늘,
이른바 “내가 능히 증명하고 능히 얻었다”고 하면
모두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增上慢人]일 뿐이니,
법화法華 회상會上에서 옷자락을 떨치고 물러간 무리들은
모두 이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리의 법에 대해 실제로 얻은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니, 그저 잠자코 계합할 뿐이다.
○ 범속한 사람이 닦아서 증득하고 싶다면,
다만 5온蘊은 모두 공하고
4대大에는 내[我]가 없으며,
참마음은 모습이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태어날 때도 성품은 오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도 성품은 가는 것이 아니며,
담연히 원적圓寂해서 마음과 경계가 일여一如함을 관찰하라.
다만 이처럼 당장 단박에 깨달을 수 있다면,
3세에 얽매이지 않아서 문득 세간을 벗어난 사람이니,
결코 털끝만치도 나아가거나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훌륭한 모습의 부처님들이 마중을 나오시는 등
갖가지 일이 현전함을 보더라도 따라가는 마음을 내지 말고,
흉악한 모습으로 갖가지 일이 나타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
다만 스스로 마음을 잊어서 법계와 똑같으면 문득 자재하게 된다.
○ 무릇 화성化城이라는 것은
2승乘과 10지地,
나아가 등각等覺이나 묘각妙覺에 이르기까지
모두 임시방편으로 세워서 이끌어간 가르침을 모두 화성이라 한다.
보배 있는 곳이[寶所]란 바로 참 마음이자 본래 부처이자자기 성품인 보배이니,
이 보배는 사량분별[情量]을 초월한 것이라서
건립할 수도 없다.
즉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체[能]도 없고
대상[所]도 없으니, 어느 곳에 성이 있으랴.
만일 이것이 이미 화성이라면 어디가 보배 있는 곳이냐고 묻는다면,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다. 가리킬 수 있는 보배 장소라면
진실한 장소가 아니니, 이 때문에 “가까이 있다[在近]”고 말했을 뿐이다.
가깝다는 것은 생각과 분별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다만 당체當體에 그대로 계합한 것일 뿐이다.
천제闡提라는 것은 믿음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온갖 6도의 중생과 나아가 2승들까지도 불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나니,
이들은 모두가 선근이 끊어진 천제라 할 수 있다.
반면 보살들은 불법을 깊이 믿어 대승과 소승이 있음을 보지 않아서
부처와 중생이 동일한 법성法性이니, 이들을 선근이 있는 천제라고 한다.
대체로 음성의 가르침을 인해서 깨닫는 이를 성문聲聞이라 이름하고,
인연을 관찰해서 깨닫는 이를 연각緣覺이라 이름한다.
만일 자기 마음속을 향하여 깨닫지 못하면
비록 부처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聲聞佛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법에서만 깨닫고 마음에서는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여러 겁을 수행하더라도 끝내 근본 부처[本佛]는 아니다.
만일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법에서만 깨달으면,
마음은 경시하고 법은 중시하는 것이라서 마침내 흙덩이만을 쫓는 격이 되니,
근본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다만 근본 마음에 계합하면 법을 구할 필요가 없나니,
마음이 곧 법인 것이다.
○ 범속한 사람들은 대체로 경계가 마음을 장애한다고 여기고
사事가 이理를 장애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항상 경계에서 도피함으로써 마음을 편안케 하려 하고,
사事를 막아서 이理를 간직하려 하는데,
이는 마음이 경계를 장애하고 이理가 사事를 장애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마음을 공하게 하면 경계는 저절로 공하고,
다만 이理를 고요하게 하면 사事는 저절로 고요해지니, 마음을 뒤바꾸어서 쓰지 말라.
○ 범속한 사람들이 대체로 텅 빈 마음[空心]을 긍정하지 못하는 것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서 자기 마음이 본래 공한 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事는 없애도 마음은 없애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사事는 없애지 않는다.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렸으므로
지은 바 복덕을 전혀 탐내지 않으니,
버림에는 세 가지가 있다.
안팎의 몸과 마음을 몽땅 다 버려서 마치
취하고 집착할 바가 없는 허공과 같고,
그런 뒤에 방향에 따라 사물에 감응하되 능能과 소所를 모두 잊으면,
이것을 이른바 큰 버림[大捨]이라 한다.
만일 한쪽으로는 도를 행하여 덕을 펴고,
한쪽으로는 두루 버려서 희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것을 이른바 중간 버림[中捨]이라 한다.
만약 뭇 선행을 널리 닦으면서 희망하는 바가 있다가
법을 듣고는 공을 알아서 끝내 집착하지 않게되면,
이것을 이른바 작은 버림[小捨]이라한다.
큰 버림이란 촛불이 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다시는 미혹이나 깨달음도 없는 것이고,
중간 버림이란 촛불이 옆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한 것이며,
작은 버림은 촛불이 뒤에 있는 것과 같아서 앞길의 구덩이와 함정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몽땅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은 과거의 버림이요,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은 현재의 버림이요,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은 미래의 버림이니,
이른바 3세世를 모두 버린다는 것이다.
여래如來께서 가섭迦葉에게 법을 전하신 이래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가하시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도장은 문양을 이루지 못하고,
물건에다 도장을 찍으면 도장은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가하매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이니,
도장 찍는 이[能印]와 찍는 바[所印]가 함께 계합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얻는 자가 적으니,
마음은 곧 무심이요,
얻음은 곧 얻음 없음이다.
○ 부처님은 세 가지 몸[三身]이 있으니,
법신法身은 자기 성품의 영통靈通한 법을 설명한 것이요,
보신報身은 일체의 청정한 법을 말한 것이요,
화신化身은 육도만행六度萬行의 법을 말한 것이다.
법신의 설법은 언어와 음성과 형상과 문자로 하는 것이 아니니,
설할 것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어서 자기 성품이 영통靈通할 뿐이다.
이 때문에 “설할 만한 법이없는 이것을이름하여 설법이라 한다”고하셨다.
보신과 화신은 모두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 설법하는 바이며,
또한 사事에 따르고 근기에 응하여 섭화攝化하는 바이니,
모두 참된 법[眞法]이 아니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보신과 화신은 참 부처도 아니고 또한 법을 설하는 자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 말한 바가 똑같이 하나의 정명精明이 나뉘어서
여섯 가지 화합和合이 되었다고 하는데,
하나의 정명이란 한마음[一心]이요, 여섯 가지 화합이란
여섯 감관이 제각기 경계[塵:번뇌]와 화합하는 것이니,
눈은 빛과 화합하고,
귀는 소리와 화합하고,
코는 냄새와 화합하고,
혀는 맛과 화합하고,
몸은 감촉과 화합하고,
뜻은 법과 화합하는데,
중간에 여섯 가지 의식이 생겨서 18계界가 된다.
만약 18계가 空하여 있는 바[所有]가 없음을 요달해 알면,
여섯 가지 화합을 묶어서 하나의 淨明으로 삼는데,
하나의 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그러나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두 이를 알지만,
다만 하나의 정명이 여섯 가지 화합을 짓는다는 견해를 면치 못하여서,
드디어 법에 얽매여 근본 마음에 계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1승乘의 진실한 법을 설하고자 했지만,
중생이 믿지 않고 비방을 하다가 고통의 바다에 빠졌다.
만약에 전혀 설하지 않으면 부처가 간탐慳貪에 떨어지는 것이며,
중생을 위하지 않으면 미묘한 도[妙道]를 몽땅 버리는 것이니,
그리하여 마침내 방편으로 3승乘을 말씀하신 것이다.
승乘에는 대승과 소승이 있고 증득에는
깊음과 얕음이 있는데, 모두 본래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이 1승의 도일 뿐 나머지 둘은 참되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일심의 법을 능히 드러내지 못했으므로 가섭을 불러
법좌의 자리를 함께하면서 따로 일심을 부촉하니,
이는 말을 여읜 설법이다.
이 한 가지의 법이 오늘날 따로 행해지고
있으니, 능히 계합해서 깨닫는 자는 문득 부처 경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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