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과 한글 발전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필자가 몇 년 전에 출판한 ≪조선 시대 여성과 한글 발전≫(역락)이란 책에서 부제목을 “여성이 아니었으면 훈민정음이 살아남았을까?”라고 했더니, 간혹 정말 그랬느냐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꽤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까? “지배층과 주류 지식층인 남성 사대부들이 한글을 조선 말까지 문자다운 문자로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이류 문자 취급을 했다.”고 말이다. 이 사실을 들려주면 그제야 다들 질문 의도를 알아차리곤 한다. 1894년 고종 임금이 이른바 ‘국문 칙령’으로 한글을 한자보다 더 중요한 주류 문자로 선언은 하지만 실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물론 남성 사대부들이 한글을 이류 문자 취급했다고 해서 한글 자체를 배격한 것이 아니다. 한글 보급을 반대했던 양반 사대부들 7인이 올린 반대 상소(1444.2.20.)에서도 훈민정음이 매우 신묘한 문자임을 인정했고, 1446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행된 후 단 한 건의 반대 상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글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 수단인 한자를 배울 때 매우 요긴할 뿐 아니라 한자를 쓸 수 없었던 부인, 딸 등 여성들과의 소통에서는 대체 불가의 절대적인 문자였다. 반면에 서당조차 다닐 수 없어 한자를 배울 수 없던 여성들에게 한글은 한자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유일한 실용 문자 역할을 했다. 그런 역설적인 현실이 한글 발전의 지렛대가 되었다.
실제로 한글이 살아남는 데 여성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근거를 다섯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 초기 보급에서의 역할이다. 세종은 1443년 12월(음력)에 한글 창제를 알린 뒤 하급 관리 교육과 과거 시험에도 도입하는 등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한글 불경 책을 서둘러 출판한다. 이는 백성들의 문화요 생활이었던 불교를 통해 한글을 보급하려는 의도였다. 성리학의 나라여서 한글로 된 불경 책 발간 자체가 거의 힘든 상황이었지만 훈민정음 해례본 발간 6개월 전 운명한 소헌왕후의 죽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명복을 빈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왕실 여성들이 제도 차원에서 공식 사용을 한 영향력이다. 왕실 여성들은 여성이었지만 남성 사대부들을 뛰어넘는 권력이 있었다. 이들은 공문서에 한글만 썼다. 이를테면 중전이 영의정한테 보내는 공문서가 한글이었고 영의정도 답신으로 한글로 써야만 했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순조 때 여왕 수준으로 섭정을 했던 정순왕후는 4년 내내 주요 행정 문서를 언문으로 발행했다. 더욱이 왕실 여성들이 한문을 안다고 하더라도 한글로만 모든 공문서를 발행했다.
셋째, 여성 중심의 언문 편지가 남성들의 한글 사용을 유도했다는 점이다. 양반 사대부들이 실용 분야에서 한글을 쓴 것은 오로지 부인, 딸 등 여성들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였다. 권위적인 남성 사대부들의 한글 사용을 여성들이 이끈 것이다. 여성 중심의 언문 편지는 실생활에서 한글이 널리 퍼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넷째, 여성이 주요 독자였던 한글 소설 등 한글문학이 한글을 폭넓게 유통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글 소설 창작자의 대부분은 소외당한 남성들이었으나 이런 소설의 주요 독자는 여성들이었다. 춘향전, 홍길동전 같은 재미와 흥미를 갖춘 한글 소설은 한글 확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섯째, 한글 조리서, 한글 백과사전, 한글 가사 등 실용서와 실용문학이 실질적인 한글 발전을 이끌었다. 18, 19세기에 남성 사대부들이 펴낸 백과사전과 같은 실용서는 100% 한문이었고 실제로 읽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라나 ‘음식디미방(장계향)’, ‘규합총서(빙허각 이씨)’ 등 여성들이 펴낸 실용서는 모두 한글로서 실용적인 지식 보급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4음보 형태로 쓴 영남 지방의 한글 가사는 비록 운문이었지만 우리말다운 문체 보급에 크게 이바지를 했다.
세종은 단지 한글을 창제 반포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말하듯이 쉽게 글을 써서 자기 생각과 느낌, 지식과 정보를 맘껏 나누게 하는 것이었다. 말하듯이 글을 쉽게 쓰는 이른바 언문일치의 꿈은 누구나 사람답게 사는 꿈이었고 한글은 태생부터 그것이 가능한 문자였다. 한자를 섞어 쓰거나 한자어 중심의 생경한 문제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언문일치의 꿈을 이루게 한 것이 바로 여성들 중심의 언문 편지였고 한글 소설이었으며 한글 가사였다.
자, 그렇다면 여성들 덕에 한글과 우리말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