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오도송(悟道頌)
三十年來尋劍客삼십년래심검객 平仄平平平仄仄
幾回落葉幾抽枝기회낙엽기추지 平仄仄仄平平平
自從一見桃花後자종일견도화후 仄仄仄仄平平仄
直至如今更不疑직금여금갱불의 仄仄平平仄仄平
영운지근<靈雲志勤>
삼십년 진리의 보검 찾던 나그네여!
몇 차례나 잎이 지고
몇 번이나 가지가 돋았던가.
복숭아 꽃 한번 본 이후로
지금까지 다시금 의심이 없었노라.
이 게송은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韻)은 객(客)은 입성(入聲) 맥통(陌統) 운족(韻族)이고, 지(枝), 의(疑)는 상평성(上平聲)지통(支統) 운족(韻族)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 운(韻)도 근체시(近體詩)에는 맞지않다. 기구(起句) 운(韻)도 평운(平韻)이 아닌 측성(仄聲)인 객(客)이라 맞지는, 않다. 영운지근(靈雲志勤)은 본주(本州) 장계인(長溪人)이다. 처음 위산(潙山)에서 복숭아 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初在潙山 因桃華悟道>. 영운지근선사가 위산 영우선사 회하(會下)에 오랫동안 수행 정진하다가 봄 어느 날 복숭아꽃을 보고 도를 깨달았다, 고 게송을 남겼는데, 30년 동안 칼을 찾아 헤맨 나그네가 몇 번이나 낙엽이 지고 가지가 돋는 것 보았는가? 복사꽃 한번 본 후로는 곧바로 지금까지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네. 이 오도송(悟道頌) 내용을 위산선사(潙山禪師)가 듣고 말했다. 인연으로부터 깨달았으니,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잘 보호하고 가지도록 하라 하였다. < 靈雲志勤禪師 在潙山會下 因見桃花悟道 有偈曰 三十年來尋劍客 幾廻落葉又推枝 自從一見桃花後 直至如今更不疑 擧似潙山 山云 從緣悟達 永無退失 善自護持> 깨달은 것이 확실하니, 그 깨달음을 잘 간직 보림(保任) 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현사선사(玄沙禪師)는 영운지근 선사가 확실하게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諦當甚諦當 敢保老兄未徹在> 위산(潙山)은 인정을 했으나 현사(玄沙)는 인정하지 않았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보는 것은, 따지고 묻지 말고 눈 밝은 수좌의 안목(眼目)에 있다.
그러고 보면 영운지근 선사는 30년 동안 위산선사(潙山禪師) 회상에서 수행하였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선사들이 위의 게송을 법회 때 많이 설법으로 인용하는 오도송이다.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는 생몰(生沒) 연대(年代)는 자세하지 않고 당말(唐末) 선승(禪僧) 고승(高僧)으로 나온다. 장경혜릉이 납자 시절에 영운선사를 찾아가서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영운선사가 대답하였다. 나귀의 일도 마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당도하는구나!<長慶禪師 初參 靈雲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驢事未去 馬事到來>이다. 공안화두(公案話頭) 가운데 나귀 일을 마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하니, 갈고리 쇠사슬이 연결고리가 되어서 머리를 끊지 못하도다. 단지 오늘 아침과 또 명일에 상관하다가 등한히 일생의 아름다움을 지나치리라<驢事未去 馬事到來 鉤鎖連環沒斷頭 祗管今朝又明日 等閒蹉過一生休, 雜毒海二 示徒 天如則>이다. 려사(驢事) 마사(馬事)는 세상 살아가는 이일 저 일을 비유한 말이다. 나귀 일이 다 가기도 전에 말의 일이 돌아온다는 말(驢事未去 馬事到來)은 한 가지 일이 해결되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터져 닥쳐온다는 말이다. 세상만사가 온통 다 문제투성이다. 그런 문제투성이인 식심분별(識心分別)로 묻는 장경 에게, 한길로 부지런히 따지지 말고 정진하라(一路精進)고 향상일구(向上一句)로 경책(警責)한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의 답(答)이다. 영운(靈雲) 선사가 질문, 당시에 묻는 스님(僧)에게 여사(驢事)니, 마사(馬)니, 알아듣지 못한 말로 말하지 말고, 답(答)은 널려 있으니, 해탈(解脫), 자비(慈悲)니라. 답(答)했으면 쉬웠을 터인데, 괜한 말로 부스럼만 만든 격이다. 오늘은 영운선사 오도송을 근체시 평측을 맞추어 반추했다. 여여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