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가져보자’던 박정희 집념, 내부 첩자들이 CIA에 고자질 (5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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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한국에 은혜를 끼친 나라다. 요즘 세대 중에 미국을 고맙게 생각하는 한국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미국의 은혜는 남아 있다. 은인은 잊어도 은혜는 남는다는 옛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미국에 다른 면도 있다. 근원을 따져 보면 미국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도 있다. 한국의 장래를 내다보지 않고 우리의 절실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이다.
“아 글쎄, 이후락 그 자가…” 박정희 분노케한 ‘DJ 납치’ (5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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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시절인 1973년 8월 초 나는 농수산부 장관과 전국의 목장을 둘러보며 낙농 실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8일 늦은 오후, 부산에 머무르고 있는데 황인성 총리실 비서실장(1926~2010·육사 4기·훗날 국무총리)이 전화했다.
“김대중씨가 일본 도쿄에서 누군가에게 납치됐다”는 보고였다. 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김대중씨가 미국과 일본을 돌아다니며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하고 한민통(韓民統:한국민주통일연합)이라는 반정부 조직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오후 김정렴(1924~2020)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최초 보고를 받았다.
나는 걱정이 됐다. 만일 한국의 공권력이 백주 대낮에 도쿄에서 사람을 납치했다면 주권국가인 일본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국교 단절과 같은 심각한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사안이었다.
김대중씨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8월 13일 밤 또 연락이 왔다. 충남 서산 일대 목장을 둘러보고 느지막이 온양관광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였다. 밤 11시, 자고 있는데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건 추이를 따라가면서 수시로 내게 보고하던 황인성 실장이었다. “8일 행방불명됐던 김대중씨가 서울 동교동 자택에 나타나 지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