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넘어선 삶, 그리고 장애인 체육에 대한 헌신 – 김흥수 사무국장님의 이야기
강원도 영월의 깊은 산골, 무릉도원면 운학리에서 1965.3.6.
2남 7녀 중 누나4명 동생4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흥수 사무국장님의 삶은 시작부터 남다른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미역국 한 그릇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9남매를 키우시던 부모님, 특히 1979년 10월 24일, 아버지가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시면서 어머니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습니다.
배움과 자립을 향한 끈질긴 여정
만 6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더 다녀 7년 만에 졸업한 그는, 13세에 도시인 강원도 영월의 주천중학교로 진학하며 타지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그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쌀밥 한 끼'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옥수수밥이나 보리밥이 주식이었고, 간식으로는 감자와 고구마가 전부였던 가난한 세월 속에서 그는 자랐습니다. 중학교 시절, 그는 자취 생활을 하며 신문 배달을 해서 생활비에 보태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5세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읜 후, 고등학교진학을 포기하고 겨울방학에 어머님께는 고등학교 보낼 돈으로 여동생들 중학교라도 보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보따리를 싸 들고 큰누님이 일하시는 직장근처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자동차 정비 공장과 주유소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에 경북 울진의 양복점으로, 다시 강원도로 돌아와 농사일을 돕는 등 어린 나이부터 험난한 자립의 길을 걸었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뚝섬 섬유공장. 가방 공장, 어묵 공장, 웨이터 보조.신문배달ㆍ잡지책세일즈맨 등 여러 일을 전전하면서도 고등학교 졸업의 꿈을 키웠습니다. 한때는 타고난 힘으로 복싱 세계 챔피언을 꿈꾸며 운동에 매진하기도 했지만, 시합에서의 운이 따르지 않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0세가 되던 해 종로의 훼미리햄버거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중 우연히 고등학교 신입생 모집 광고를 보고 서울 양평동의 광영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어머니와 누님들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고, 방학 중에는 분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광영실업고등학교가 인문계인 광영고등학교로 전환되어 서울 양천구 신월동으로 이전한 후, 그는 1986년 서울특별시 교육청에서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학생회 주최로 학생회장 선출을 시행하는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광영고등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등록금을 면제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학교와 학생들간의 교량적 역활을 하였으며,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격려 속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마쳤습니다.
졸업 후 전문대학 진학을 고려했지만,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의 격려로 용인대학교의 전신인 유도대학에 진학하며 4년제 대학의 꿈을 키웠습니다. 학업을 이어가기 위한 그의 노력은 남달랐습니다. 학교 스쿨버스를 무료로 이용하기 위해 책받침 장사를 시작했으며, 아람출판사의 안태동 디자인 실장님의 도움으로 책받침 제작 방법을 배우고 판매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안태동 실장님과의 인연은 단순한 도움을 넘어 형제처럼 깊은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군 법무사관에서 법률 전문가로, 그리고 공직자의 길
늦은 나이(20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그는 군 입대 영장을 받게 됩니다. 군 입대 전인 1987년에는 제대 후 직장 준비를 위해 소방방화관리자 2급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미래를 위한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87년 11월 25일, 11사단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하던 중, 1988년 6월 육군 법무사관 1기 모집에 지원하여 합격하는 놀라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용인 성남의 육군 종합 행정학교에서 3개월간 법률 교육을 수료한 후, 원주 36사단에서 법무사관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특히 1989년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사회체육지도자 2급(복싱) 시험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그의 스포츠에 대한 열정은 군 생활 중에도 이어졌습니다. 조동향 참모님, 신재항 참모님, 강서보 부장님, 신인철 부장님, 강전욱 부장님, 그리고 고 박수일 선임 하사님 등 많은 분들의 가르침과 격려 덕분에 육군본부 고등군사법원에서 1년간 파견 근무하며 넓은 세상을 보고 전국 법무관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1991년 중사로 복귀한 후 원주 1군 사령부로 전출되어 김남근 부장님, 이재영 부장님, 박의견 참모님, 권혁균 부장님, 김용학 과장님, 전창호 과장님, 김정찬 과장님, 곽주신 선배님 등 많은 분들의 사랑 속에 1992년 4월 19일, 현재의 아내인 손숙기 여사와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 후 작은 집에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생활하다가, 1992년 9월 30일 명예 제대 후 서초동의 이상석 법률 사무소에서 변호사 사무장으로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책 판매원으로 일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1992년 10월 10일, 큰아들 김영광이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이를 키우며 생활했고, 비싼 서울 임대료 때문에 성남으로 이사하여 서초동으로 출퇴근하는 고단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여러 변호사 사무실을 옮겨 다니며 경력을 쌓던 중, 1995년 유준용 변호사님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의정부로 이사하게 됩니다.
의정부에서의 새로운 인연과 문화 활동, 그리고 법률 서비스의 혁신
낯선 의정부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낮에는 법률 업무, 저녁에는 사건 유치에 매진하며 열심히 뛰었습니다. 이때 청우봉사회의 송재남 회장님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송재남 회장님과의 만남은 김흥수 사무국장님에게 큰 행복이었으며, 함께 의정부 양정산악회를 창립하며 많은 지인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송재남 회장님과의 인연은 가수 현진옥님을 후원하는 활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두 분은 아리랑 후원회를 결성했고, 송재남 회장님이 회장을 맡아 신한대학교 대강당에서 현진옥 가수의 신곡 발표회를 성대하게 개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흥수 사무국장님이 직접 작사한 '내 사랑 백아절현'이라는 신곡이 탄생하며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신곡 발표를 앞두고 송재남 회장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면서 김흥수 사무국장님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송재남 회장님을 향한 깊은 그리움을 담아 가수 장욱조 선생님의 곡인 '그대 사랑'의 가사를 직접 써서 바치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또한, 김흥수 사무국장님은 신흥대학교 행정과에 등록하여 학업을 병행했고, 그곳에서 민선 5, 6, 7기 안병용 시장님을 당시 교수로 만나게 되는 소중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38세에 대학을 졸업하며 배움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이후에도 서초동 법률 사무소에서 근무하며 기아 모텔 코리아 파산 관재 업무를 4년간 담당하며 지방을 오갔습니다. 초당대학교 기업 경영과에 편입하여 44세에 졸업하는 등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2012년 당시 서초동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법률 상담의 문턱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이고자 '가가호호법률상담'이라는 홈페이지를 직접 개설하고 운영했습니다. 이 혁신적인 시스템은 대한민국 최초로 무료 출장상담 서비스를 도입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법률 서비스를 더 가깝게 다가가게 했습니다.
삶의 전환점, 그리고 장애인 체육의 선구자로
안병용 교수님이 시장이 되신 후, 민선 6기 때 민원 정무비서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2015년 10월 15일 의정부시청 정무직 공무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7년간 정무비서로 근무하며 의정부시 발전에 기여하던 중, 2016년에는 대한민국발명특허대전에서 조각가 박철찬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바베큐 그릴로 은상을 수상하는 뛰어난 발명가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중국에서 열린 국제발명대전에서도 동상을 받으며 그의 창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2017년 의정부시청 정무비서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그는 조영욱 회장님, 안태동 수석부회장님과 함께 의정부시산악연맹 창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2018년 12월에는 500여 명의 산악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