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鳳煥, “少年軍의 起源”, 『朝鮮週報』 제1권 제4호, 1945년 11월 5-12일호 합호. (불수록)
二十世紀 初頭의 英國 各 都市 特히 倫敦, ‘만체쓰터’ 等 市에 있는 少年들은 纖弱하고 無氣力하기 짝이 없었고 學校에서 工場에서 파해 나오면 그들에게 無關心한 周圍 社會 속에서 第二國民 될 少年으로는 너무나 墮落的인 生活을 하고들 있었다. 밤마다 活動寫眞 劇場으로 그렇지 않으면 못된 作亂을 하거나 또는 火爐를 끼고 座談에 밤을 새운다거나 飮酒 喫煙하는 不良 少年少女輩는 都市 魔窟 속에서 徘徊하고들 있었던 것이다.
南阿戰爭에서 赫々한 武勳을 세운 英國 陸軍 中將 ‘로버트・바덴 파웰’ 將軍은 英國 少年들의 이 實情을 보고 英國의 將來를 慨然히 嘆息하야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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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八九九年 南阿戰爭 때의 일이다. 當時 大佐이었던 將軍은 ‘마후에킹’이라는 市를 守備하고 있었다. 極少數의 英國兵으로 數倍 되는 土人軍의 包圍를 받게 되자 戰線은 苦戰에 빠젔다. 將軍은 應急策으로 同市에 居住하는 英國人 中에서 義勇兵을 徵募했다. 그러나 當時 ‘마후에킹市’에는 英國人 男子 一千餘名과 婦女子가 六百餘名밖에는 없었다. 겨우 一千名의 義勇兵을 얻었으나 이 少數의 兵力을 갖이고 첩첩이 둘러싼 敵을 막아 내며 援軍이 오기를 기다리는 外에는 아무런 方策도 서지 않었다. 各 戰線의 戰死者와 負傷者는 나날이 높아 간다. 따라서 不足한 兵備는 더욱 더 減少될 뿐이다. 심지어 傳令으로 쓸 者조차 마음대로 求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傳令을 缺한다면 軍隊의 連絡이 끊어저저 戰線은 混亂해질 것이다. 어떻기든지 이 傳令만은 維持해 나가야겠다. 그러나 兵力은? 이때에 將軍은 百計를 다 하야 一案을 생각해 냈다. 參謀와 의론하야 在留 英國少年을 集合시켜 傳令과 斥候의 任務를 그들에게 命하였다. 처음엔 모다들 그 成果를 危惧했었으나 그러나 少年들의 純情은 드디어 成果을 이루었다. 適當한 指導가 있으면 少年들도 이렇게 훌융한, 큰 사람들도 감히 못할 事業을 이룩할 수 있다고 將軍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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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將軍의 少年 指導眼은 忽然히 열였다. 그는 곧 그 近處에서부터 英國 少年과 ‘포아’ 少年을 比較 硏究하기 시작했다. 모든 文明의 惠澤을 享受한 英(이상 12쪽)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