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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600
501.남지 유채꽃
출렁출렁,
노란 물결,
남지 유채꽃밭!
사진 찍는 사람들,
꽃 속에 푹 빠져
찰칵찰칵,
핸드폰마다
봄이 꾹꾹 담긴다
“남지, 남지요―”
집에 돌아왔는데도
눈만 감으면
마음속에
노란 꽃물 출렁출렁,
다시 피어난다
502.뱃살 빼기
봄이 졸졸 흐르는
금호강 댓잎 소리길
사각사각,
대나무들이
뱃살 줄넘기 중이다
“판다야!” 불러 봐도
오동통 판다는
대나무만 오물오물,
대답이 없다
“배에 힘 꽉!”
대나무 뱃살 측정기
쏙― 통과!
걷고 또 걷다 보니
내 뱃살도
슬금슬금 도망갔다
503.봄꽃
작년 겨울,
팔공산 철쭉꽃
철도 모르고
성급하게 피어나
마음을 졸이더니
윙― 윙― 윙―
벌들이 찾아오자
그제야 봄인 줄 알았나 보다
잎보다 먼저 나온 꽃들이
두 팔 번쩍 들며 외친다
“여기요!
봄 왔어요!”
504.초식동물이 되다
아침 밥상 앞에서
나는 염소가 되었다
냠냠냠―
토끼도 되었다
달래, 돈나물, 오가피,
상추에 쪽파까지
풀 친구들이
오늘의 반찬이다
시래기밥 한 숟갈,
콩나물국 한 모금
우적우적 먹다 보니
우리 집 식탁에
봄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다
505.제비꽃
아파트 담벼락 아래
조그만 제비꽃 하나
가는 길 붙잡으며
보라 손 흔든다
시골 산과 들에서는
떼 지어 피어 있더니
강남 갔던 제비처럼
도시까지 날아와
여기에도
봄 한 송이
살짝 심어 놓았다
506.먹보
뭐만 보이면
덥석!
뭐만 잡히면
입으로 쏙!
뒤돌아보면 금세
“지지지!”
엄마 아빠 합창 시작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입은 삐죽,
가슴은 콩알만 해져
훌쩍훌쩍 우는데
닭똥 같은 눈물이
툭! 툭!
바닥에 튄다
507.웃다가 울면
따뜻한 바람에
방실방실 웃던 벚꽃
부슬부슬 비 내리자
금세 울상이다
뚝뚝뚝―
분홍 눈물 떨어지고
꽃잎 엉덩이마다
까만 점 하나씩 콕!
웃다가 울면
정말 점 생기나 보다
508.울음폭탄
살금살금 발걸음,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
새근새근 잠든 아기,
울음폭탄 터질까 봐!
핸드폰 벨소리도
입 꾹 다물고
화면 불빛만
반짝반짝 눈치 본다
그런데도 아기는
용케 알고
“으앙―!”
조용하던 집이
갑자기 폭탄 맞았다
509.눈 내리는 날
소복소복
눈 내리는 날
눈사람 만들고 싶고,
눈썰매 타고 싶어
가슴이 콩닥콩닥!
그런데 문득
출근하실 아빠 생각
“길 미끄러우실 텐데…”
나는 눈삽 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눈보다 먼저
아빠 길부터
치워 드리려고
510.회초리
늦도록 놀다 와서
양말도 휙 벗어 던졌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으셨다
꾸중보다 더 무서운
조용한 저녁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
눈을 떴는데
어느새 이불 하나
살며시 덮여 있다
나는 자는 척한 채
숨소리만 죽였다
회초리보다 더 아픈 건
어머니 손길이었다
511.합치면 힘이 돼요
“물가가 너무 비싸네…”
엄마 한숨이
식탁 위에 툭 떨어진다
오르는 건
기온이랑 물가뿐
월급은
맨날 제자리걸음
어깨 축 처진 아빠에게
우리가족 모두 달려가
“아빠!
우리 힘 합치면
라면도 더 맛있어요!”
그러자 아빠 입가에도
조금씩
웃음꽃이 피었다
512.점
점이라고
얕보지 마!
콕 찍힌 작은 점 하나도
씩씩한 시작이거든
점이 모이면 선!
선이 모이면 면!
면이 모이면 집!
집이 모이면 마을!
마을이 모이면 도시!
도시가 모이면 나라!
세상은 모두
아주 작은 점 하나가
꿈꾼 자리에서 시작된다
513.예쁜 손
예쁜 손 되고 싶어
피부과에 갔어요
손등의 점들이
“우린 안 나가!”
꼭 붙어 있었거든요
따끔! 뜨끔!
번쩍번쩍!
눈물 찔끔 났지만
며칠 지나자
손등 위에
하얀 봄볕이
사르르 내려앉았어요
514.미루나무 아기다
마을 어귀
덩그러니 서 있던
미루나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 펴 주던
큰나무
작년 장맛비에
밑동만 남긴 채
잘려나갔다
어제 아침
무지개비 지나가고
연둣빛 새싹이
쏙 돋아났다
와!
미루나무 아기다
동네 사람들
쑥떡쑥떡
아기나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515.추위쯤이야
겨울 바람이
옷깃을 콕콕 찌른다
덜덜덜
내 볼이 얼어서
금방 떨어질 것 같다
저기
엄마가 서 있다
나는
달려간다
품에 안기자
세상이 따뜻해진다
아까 그 바람은
문 앞에서 멈춰 서서
조용히 잠든다
516.맞장구
짐작만으로도
무엇이든지
척척 아는 척하는 친구
그래그래
맞아맞아
“우주 최고 박사님!”
한 숟갈 알면서
열 숟갈 아는 척
콧구멍까지 씰룩씰룩
“공룡은
라면 먹고 컸대!”
“달님은 밤마다
이를 닦는대!”
재미난 거짓말에
용기까지 불끈!
어깨는 산처럼 으쓱
잘난 척 친구 만나도
둘의 말은
삐뚤삐뚤 엇갈리고
“그래그래
네 말이 맞아!”
두 고개는
병아리처럼
자꾸만 끄덕끄덕
끝까지
서로 맞장구치는
친구
517.겨울이 찾아왔어요
하늘에서
하얀 솜이불 털더니
추위가 찾아왔어요
털외투에
털모자
털장갑, 털장화
뒤뚱뒤뚱
펭귄 흉내 내며
학교 가는 길
강아지도
춥다며
종종종 뛰어가요
눈밭 위에
발도장
꾹꾹 찍으며
겨울하고 친구하자고
학교까지
함께 걸어갔어요
518.지금쯤
보름달이
산마루 끝에
걸려 있다
오래전에
그려 놓은
친구 얼굴
방아 찧는
토끼 옆에서
방긋 웃는다
친구 얼굴이
심심하고
외로워 보여
내 얼굴도
한쪽에
그려 놓았다
지금쯤 친구도
내 얼굴 곁에서
살며시 웃고 있을까
519.할아버지 밤나무
할아버지 산소 곁엔
키다리 밤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성묘 가는 날
아버지 손잡고
산길 따라 올라가면
고슴도치 같은 밤송이
뾰족뾰족 매달려 있다가
“어서 왔느냐”
반겨 주듯
단단한 가슴
쩍쩍 열고
툭, 툭, 툭
토실토실 알밤을
내 손바닥 위에
한 아름 내려준다
까만 밤알 만져 보면
할아버지 따뜻한 손길이
살며시 잡히는 것 같다
520.겨울 꽃밭
며칠째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더니
마당 화분에
빨간 장미가
불쑥 피었습니다
“어?
달력 못 봤니?”
찬바람이 씽씽 불자
장미는
어깨를 움츠린 채
베란다 햇살 옆으로
쪼르르 이사 왔습니다
우리 집에는
겨울을 몰래 건너온
작은 봄 한 송이
먼저
봄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521.병아리 꽃
봄이면 담 밑에
오종종 모여 있는
병아리반 친구들
해님이 빼꼼 나오면
쪼르르르
줄 서서 따라 나온다
“햇살밥 주세요!”
노오란 입 벌리고
냠냠냠 받아먹는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간질간질 지나가면
“까르르르!”
“히히히!”
어깨춤 덩실덩실
몸도 흔들 엉덩이도 흔들
노란 웃음 터뜨리며
담장 아래 봄소풍 열린다
522.고맙다고
심술쟁이
비바람이
지나간 하굣길
골목길 곳곳에
꺾어진
아기 풀꽃가지
몇 가지
주섬주섬
주워 집에 왔다
얼른 베란다
플라스틱 빈병에
물을 채워
콕 꽂아 두었다
먹구름 걷히고
햇살이 나오자
풀잎 어깨 들썩이며
뽐내듯
고맙다고
방긋방긋
웃는 하얀 꽃
523.못 본 척
전학 온 짝꿍
뽀하얀 얼굴
우유를 발랐나 보다
눈만 마주쳐도
내 얼굴은
토마토가 된다
수업시간엔
공부는 안 하고
짝꿍만 힐끔힐끔
그러다 결국
선생님께 딱 걸려
칠판보다 더 크게
이름이 불렸다
짝꿍은
입을 꾹 막고
킥킥 웃는다
나는 괜히
공책만 넘기며
못 본 척한다
그런데 자꾸
짝꿍 얼굴이
공책에 따라온다
524.담쟁이
높고
가파른 울타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조용조용
이쁜
그림 그리면서
파란 도둑이
아무도 모르게
울타리를 올라간다
525.바람 삼 형제
뜨거운 햇살이
땅을 꾹 눌러 앉힌 날
어디선가
바람 삼 형제가 왔다
큰형은 힘찬 숨으로
하늘을 흔들고
둘째는 장난스런 손끝으로
골목을 간질이고
막내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준다
잠깐 사이
세상의 더위가
종이처럼 구겨져
멀리 날아간다
526.단풍 편지
작아지는 풀벌레 소리
귀를 기울이면
산길 저쪽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풀벌레 우체부가
작은 가방 들고
가을 편지를
조심조심 전해 준다
노란 단풍 한 장
빨간 단풍 한 장
“가을이 왔어요!”
속삭이며 건네준다
527. 텅 빈 지하주차장
조용해지면
지하주차장은
숨을 길게 내쉰다
불빛들은 하나씩
눈을 감고
주차된 차들도
하품을 삼키며 잠이 든다
철컥, 멀리서 문 닫히는 소리까지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그 틈 사이로
살금 들어가
조용히 내 하루를 눕힌다
528. 가을 꽃잎
단풍인 줄 알고
다가갔다
발끝에서
살짝 웃는 꽃
그건 철쭉이었다
가을인데도
햇살을 꼭 잡고
“아직 나 여기 있어”
속삭이고 있었다
529. 사과한다고
가야산 식물원에
봄이 조금 늦게 왔다
꽃들은 이미 떠났지만
사과나무는
하얀 손을 흔든다
“미안해요
조금 늦었어요”
하지만 그 말이
더 환하게 피어 있다
530. 솜사탕
입속에 넣는 순간
하늘이 사라진다
손끝에는
조금 남은 구름
바람 한 입처럼
사르르 녹고
웃음만 남기고
조용히 사라진다
531. 어부바
등을 기대면
세상이 조금 낮아진다
무거운 마음도
등 위에서 잠이 들고
나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 아이가
편히 숨 쉴 때까지
532. 창가에 핀 달
창문을 닫아도
달은 들어온다
방 한가운데 앉아
나를 가만히 본다
말도 없는데
마음이 따뜻해지고
밤은 조용히
종이처럼 접힌다
533. 가로등
늦게까지 깨어 있는 건
나만이 아니다
가로등도
긴 길 끝까지
눈을 뜨고 있다
누군가 돌아오는 길을
기다리며
작은 노란 얼굴로
서 있다
534. 봄이 오는 소리
눈이 녹는 소리가
똑, 똑, 발자국이 된다
아직 보이지 않아도
봄은
조용히
발끝부터 온다
조심조심
땅을 깨우면서
535. 양심의 골목
좁은 골목 끝에
작은 불 하나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밝아진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조용히 길을 비춘다
536. 반성
나는 자꾸
내 마음을 지나친다
멈추려다
또 그냥 지나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거기
조용히 서 있는 나
“왜 나를 놓고 갔니?”
하고 묻는다
537.「첫눈」
토요일 아침
이상하게도
나는 먼저 깨어 있었다
창가에 다가서자
세상은 이미
소리 없이 빛나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이웃집 지붕 위에
하얀 눈꽃이
숨을 멈춘 듯 피어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은
소복소복 쌓이며
잠든 시간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창문만 두드렸다
마치
세상이 나에게
잠깐 말을 건네기 위해
밤을 하얗게 바꿔 놓은 것처럼
538.애완견 아지
학원 쉬는 날
게임하자는 친구 말도 뒤로하고
아지와 놀려고
일찍 집에 왔다.
혼자 집을 지키던 강아지 아지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꼬리를 흔들었다.
숙제하는 것도 잊고
엄마표 고구마 큐브도 잊고
엄마 오시는 줄도 모른 채
거실에서
아지와 함께 놀았다.
애완견 아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539.새침데기 마우스
모르는 건
쏙 빼놓고 다 아는 척한다
아는 건
또 쏙 빼놓고 되레 물어본다
콕! 콕!
독수리 타법으로 눌러 보는 검색창
“내일 숙제 좀 도와줄래?”
척척박사처럼
금방 대답할 줄 알았는데
엉뚱한 답만
툭! 툭! 튀어나온다
마우스는 오늘도
새침데기처럼 입을 삐죽인다
540.물제비 뜨기
납작한 돌멩이 하나
시냇물 위로 슝~ 날아갔다
핑! 핑! 핑!
날개도 없이 물 위를 달린다
물보라 꼬리 달고
빙글빙글 춤추다가
퐁당!
물속으로 사라진 돌멩이
“고향 찾아 돌아갔네.”
물결이 손바닥으로
짝짝 박수친다
541.가을 편지
전학 간 친구 생각에
가을이 자꾸 깊어진다
장대 끝에는
빨갛게 익은 해님 하나 걸리고
처마 밑 곶감들도
주렁주렁 편지처럼 매달린다
달랑달랑 까치밥 흔드는 감나무 가지
깍! 깍! 깍!
배고픈 까치 한 마리 날아와
감잎 편지 한 장
툭 떨어뜨린다
멀리 간 친구 소식도
곧 도착할 것만 같다
542.시골 가는 길
엄마 손 꼭 잡고
할머니 집 가는 날
설레는 마음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 간다
강아지풀도
요! 요! 요! 손 흔들고
선물 보따리는
내 마음보다 먼저 달려간다
골목길 가까워질수록
자꾸 빨라지는 발걸음
“할머니!”
내 웃음소리가
먼저 마당에 도착한다
543.까치밥
감나무에
주렁주렁 가을이 열렸다
빨간 감 사이
까치밥 하나 달랑달랑
깍! 깍! 깍!
까치 손님 찾아오자
가을바람도 살랑살랑 따라온다
“먼 데 있는 삼촌 소식도
곧 오려나?”
감나무 끝에서
가을이 귀를 쫑긋 세운다
544.외가 가는 길
엄마 손잡고
외가 가는 길
설레는 마음이
과수원 과일처럼 빨갛게 익는다
새 운동화 신고
선물 보따리 메고
언덕길 총총총
강아지풀은
“놀다 가!”
요요요 손짓하고
먼산 뻐꾸기는
뻐꾹뻐꾹 노래 부른다
앞산 까치도
깍깍깍 반갑게 인사한다
할머니 집 가까워질수록
내 발걸음은
구름 한 조각처럼 가벼워진다
545.납작돌
핑! 핑! 핑!
물 위를 달리며
재주 부리던 납작돌
물보라 신발 신고
한참을 깡충거리다가
퐁당!
시냇물 품속으로
쏙 숨어 버렸다
새처럼 날고 싶었던
작은 돌멩이 하나
오늘은
물고기 꿈을 꾸려나 보다
546.옆집 언니
장미꽃보다
더 환한 옆집 언니
방긋 웃으면
햇살도 따라 웃는다
친절과 배려를
두 손 가득 안고 다니는 언니
살금살금
지나가는 발걸음에도
조용한 미소 하나
골목 끝까지 번져 가고
봄바람 같은 그 웃음은
사람들 마음을
간질이며 지나간다
547.가을비
체험 학습날
비가 와서
일찍 집에 왔다
텅 빈 집
벽시계 혼자
똑딱~ 똑딱~
처마 끝엔
빗방울들이
똑~ 똑~ 똑~
나는 창가에 앉아
콧노래로
음~ 음~ 음~♪
그랬더니
빗소리도 신이 나서
짝~ 짝~ 짝~!
비 오는 날
구경꾼 하나 없는
우리 집 음악회
벽시계는 지휘자
빗방울은 박수쟁이
나는 오늘의 가수!
548.폭염
해님이
화가 났는지
뜨거운 숨을 훅훅 뿜었다
접시꽃은
“앗 뜨거워!”
노란 부채를 흔들흔들
강아지는 혀를 내밀고
그늘 속으로 쏙 숨었는데
소나기 한 줄기
운동화 끌고 달려와
“늦어서 미안!” 하고
마당에 물총 한 번
칙— 뿌리고 도망갔다
549.할머니
팔베개하고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니
높고 맑은
하늘가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얼굴
뒷산 자락 베고
누워 계시는
보고픈 할머니
어젯밤 총총
별이 반짝이더니
별 따러 가셨나 보다
하늘 끝에
할머니 웃음만
은은히 남아 있다
550.낡은 타이어
골목길
모든 차가 달려와
“쿵!” 부딪쳐도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서 있는
주차 방지턱
“덜컹!” 밟고 지나가는
미끄럼 방지 매트로
이따금 불려가도
수북수북 모여드는
오래된 타이어들
몸속은 텅 비우고
“후우—”
가볍게 살아간다
551.할머니 바다
이래도 “오냐—”
저래도
“그래, 그래.”
닳고 닳아
반들반들해진
할머니 마음속엔
넓고 깊은
푸른 바다 하나
출렁이나 보다
아무리 밉고
거친 말도
할머니께 건너가면
찰랑찰랑
웃음 물결 되어 돌아온다
552.호국평화기념관
평화의 성지에
무궁화꽃 활짝 피었다
언제 날아왔을까
기도하는 나비 한 마리
덩달아 두툼한 입술 모으고
“후우—”
조용조용
호국영령께
감사를 올린다
553.밑줄
나란나란 줄 서 있는
반듯반듯 글자들
그 아래
진하게 그어진 밑줄 하나
“나도 좀 봐 줘!”
괜히 어깨 으쓱
힘주어 눕는다
편하게
쉽게 찾아 주는
화살표가 되고 싶어
누구에게나 읽히는
사랑받는 귀염둥이가
되고 싶단다
554.가을이 온다고
“맴! 매에맴!”
맴이 아픈가
잦아드는 매미 소리
쫑긋!
당나귀 귀 세우는
여름 끝자락
스멀스멀
가을이 코앞에 왔다고
살랑거리는 풀잎들
깜짝 놀란 귀뚜라미는
“귀뜨륵! 귀뜨륵!”
귀 뚫어지게
밤낮으로
나발을 불어 댄다
555.반장
된장, 간장, 고추장은
우리가족 위해
단지 속에서
익어 가고 맛들어 간다
회장, 반장, 분단장도
우쭐우쭐
자랑만 익어 갈 게 아니라
“우리 함께!”
서로를 위해
맛들고 익어 가면
참 좋겠다
556.과자
바닥에 툭!
떨어진 과자 한 조각
어디선가 개미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얘들아, 잔치다!”
“영차! 영차!”
빨고 물고 낑낑대며
조그만 집으로 끌고 간다
한입 먹고
또 한입 먹고
“냠냠! 꿀맛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고, 무거워!”
“다리 아파!”
“조금만 쉬자!”
맛있는 과자도
너무 크면 힘든 법
개미들은 오늘도
땀 뻘뻘 과자 배달 중!
557.고장 난 불빛
대롱대롱
바람 따라
그네 타는 백열등
반짝반짝
웃고 있더니
갑자기 깜빡!
어? 왜 그러지?
눈 한 번 감고는
조용히 꺼져 버렸다
비 오는 날도
추운 겨울밤도
늘 그 자리 지키며
환한 얼굴로
골목길 밝혀 주던
우리 동네 불빛
“고맙습니다”
“수고했어요”
한마디 못 했는데
까만 전깃줄 끝에서
달님처럼 매달려
말없이 흔들린다
558.커피
눈 뜨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간다
“엄마~
커피 어디 있어?”
찬장 뒤지고
냉장고 열어 보고
없으면 세상을 다 잃은 표정
한 모금 마시면
내가 살아난다
세상이 살아난다
근데 이상하다
쓴데 자꾸 찾고
뜨거운데 호호 불고
잘도 마신다
안 마시면
눈이 반쯤 감긴다
엄마가 웃으신다
“너 아직 어린이야!”
나는 몰래 생각한다
커피는 혹시
어른들만 걸리는
맛있는 감기 아닐까?
559.눈빛 한줌
“커피 한잔 어때?”
쭈뼛쭈뼛 건넨 말에
고개를 갸웃한 너였지
달콤한 커피 속에
부드러운 웃음
살짝 넣어 저으면
은은하게 피어나는 향기
조곤조곤 자라는
말의 씨앗들이 돋아나고
조금씩 식어가는
커피잔 위로
따뜻해지는 눈빛 한 줌에
살며시 내 마음이 내려앉는다
560.고장 난 불빛
대롱대롱
바람 따라
그네 타는 전구 하나
밤마다
환한 얼굴로
골목을 지키더니
어느 저녁
깜빡깜빡
눈을 자꾸 감는다
“아이고, 아프구나!”
한참 망설이다
쓰레기통에 넣는데
텅 빈 가로등이
괜히 더
쓸쓸해 보였다
561.철부지
언제나
껌딱지처럼
내 곁에 붙어 있던 엄마
밥 먹을 때도
텔레비전 볼 때도
“우리 강아지~” 부르더니
오늘은 친구들과
씽씽 여행 가셨다
아침에 눈뜨니
집 안이
텅 빈 운동장 같다
“엄마!”
한 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다
그제야 알았다
엄마는
공기처럼 소중하단 걸
562.뜨거운 커피잔
김이 모락모락
춤추는 커피잔 속에
빼꼼
내 얼굴 하나
둥실 떠 있다
깔깔 웃던 엄마는
잠깐 어디 가셨나
조용한 식탁엔
후우—
겨울 입김만 남았다
한 모금 마시니
따뜻한 커피가
꽁꽁 언 마음까지
살금살금
녹여 준다
563.불빛
언제나
천장에 딱 붙어
방을 지키는 형광등
늘 그 자리에 있어
고마운 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깜빡깜빡
윙크를 한다
“어? 왜 그러지?”
희미한 불빛 아래
혼자 서 있으니
밝은 불 하나가
얼마나 든든한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564.비
비가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도 걱정
비가 너무 많이 와
논둑이 터져도 걱정
그래도 농부 아저씨는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조금만 알맞게 와라!”
구름에게
살짝 부탁해 본다
565.선물
줘도 좋고
받아도 좋은
조용히 숨을 틔우는 마음
받을 때는
마음이 살짝 간지러워
자꾸 손끝을 들여다보게 되고
줄 때는
가슴이 환하게 열려
말이 먼저 창문 밖으로 나갑니다
받으면
빗물 머금은 우산처럼
어깨가 조금 젖어 있고
주고 나면
빈집에 켜 둔 불처럼
창가까지 오래 밝아집니다
선물은
손에서 손으로
마음이 천천히 옮겨 가는 일입니다
566.태풍 오시는 날
하늘은 잉크 엎지른
캄캄하고
비는 샤워기 고장 난 욕실처럼
콸콸 쏟아진다
바람은 화난 사자처럼
아파트 창문을 덜컹덜컹 흔들고
가로수는 시험 망친 학생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텔레비전 뉴스는
“초강력 태풍 접근 중!”
빨간 글씨를 번개처럼 번쩍이며
사람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나는 메추리처럼 겁을먹고
휴대폰만 꼭 붙들고 있는데
시골 할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괜찮다마다!”
“바람이 엄청 세다던데요?”
“우리 집 염소가
바람 맞고 귀가 뒤집혀서
록 가수처럼 돌아다닌다!”
“논은 괜찮아요?”
“벼들이 전부
춤 학원 등록한 것처럼
허리를 흔들고 있지!”
“닭들은요?”
“닭장 문 열리니까
닭들이 운동회 선수처럼
냅다 뛰어다닌다!”
나는 결국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리고
할아버지 목소리는
따끈한 호빵처럼 마음에 김이 오른다
태풍은 아직도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지만
우리 집 걱정은
풍선처럼 둥실둥실 가벼워진다
567.선풍기
시원한 바람
쉴 새 없이 찍어 내는
우리 집 바람 공장
후덥지근 여름이
땀 뻘뻘 흘리며
성큼성큼 찾아오면
“걱정 마!”
고개 빙글빙글 돌리며
온 집안을 순찰한다
방에도 휙!
거실에도 휙!
빙글빙글 바람 택배
부지런히 배달한다
어질어질 힘이 들면
전원 버튼
꾹 눌리는 순간
윙윙윙 소리도
뱅글뱅글 춤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털썩,
코 잠에 빠진다.
568.미안해
산길 웅덩이
꼬물꼬물 도롱뇽
너무 귀여워 덥석 잡았다
손바닥 위에서
꼬리 흔들흔들
“놔 줘! 놔 줘!”
온몸으로 아우성이다
나는 갑자기
괜히 미안해져서
얼른 길가 웅덩이에
살짝 내려놓았다
“잘 가! 미안!
납치는 처음이라서!”
작게 중얼거렸다
깜짝 놀란 도롱뇽은
후다닥 꼬리만 씽 흔들고
퐁! 물속으로 숨어 버렸다
569.푸른색
푸른 나무
푸른 풀잎
푸른 들판
푸르다는 것은
가을 하늘이
한 장 두 장
마음속에 환하게 내려앉는 것
두 팔 한껏 벌려도
끝까지 안아지지 않는 바다처럼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것
570.차선변경
황금 모래밭에
삐죽삐죽 돋은 풀잎들
“앗! 밟히겠다!”
잔뜩 몸을 웅크리는데
사박사박 걸어오던
분홍 운동화 한 켤레
깜빡이도 없이
슥―
옆으로 차선변경했다
571.점수
성적표를 받는 날
교실마다 사람마다
다른 일기예보가 뜬다
누구 책상 위에는
햇빛이 반짝반짝
“올백이다!” 하는 바람이
어깨를 으쓱 띄워 준다
누구 얼굴에는
먹구름 한 장
살짝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높은 연도
실 한 가닥 툭 끊기면
빙글빙글 내려오는 법
내 점수는
계단 맨 위까지
아직 못 올라간 운동화
한 칸 더 오를 자리도 있고
헉헉 쉬어 갈 층도 많다
틀린 문제 하나는
“다음엔 여기!”
화살표를 그려 주고
빵점 가까운 문제도
내일로 올라가는
비밀 사다리가 된다
그래서인지
늘 꼭대기에서 떨고 있는 짝꿍보다
조금 부족한 나는
마음이 새털처럼 가볍다
아직도 오를 하늘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572.잘났어
나무는
키 큰 것만 믿고
구름까지 목을 빼지만
바람 한 줄기 불면
젖은 참새처럼
고개를 숙인다
민들레는
작아도 노란 웃음 피우고
별은
말없이 반짝인다
정말 멋진 사람은
“같이 놀자!”
“내가 도와줄게!”
따뜻한 말 한마디
조용히 놓고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은
별빛처럼 오래 반짝인다
573.참새 합창단
아기 울음소리
뚝 그친 시골마을
조용한 전깃줄에
아기 참새들
옹기종기 모였어요
“짹짹! 짹짹!”
목도 가다듬고
엄마도 불러 봐요
할머니
에헴,
기침 한 번 하시자
“짹짹짹짹!”
박자 맞춰
고개까지 까딱까딱
한산한 시골마을에
아기 참새
음악회가 열렸어요
574.바닥
바닥은
땅에 붙은 그림자
지친 발도
살며시 내려앉는 곳
만보기는
개미처럼 바쁘게
바닥을 뛰어다닌다
비바람 불면
엄마 품 같은 땅이
두 팔 벌려 안아 준다
새싹도
바닥을 밀고 올라와
푸른 하늘을 만난다
하늘로 가는 꿈도
모두
바닥부터 시작된다
575.하늬바람
파란 하늘에
하늘하늘
하늬바람 불어와요
크레파스도 없이
쓱싹쓱싹
그림을 그려요
강아지 구름
고래 구름
솜사탕 구름까지
모양은
가지가지
색깔은 하얀색 하나!
576.물거울
호수 위
나무 그늘 아래
물거울에 비친 내 얼굴
오빠는
오른쪽 눈썹에 앉아
그네를 타고
언니는
왼쪽 볼에 기대어
노래를 부른다
호수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물거울 속 가족도
흔들흔들 춤춘다
엄마는 코끝에
아빠는 눈가에
내 얼굴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우리 가족
577.콩떡
까만 콩이 노란 벼에게
"친구 할래?"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봄볕 먹고
여름비 마시며
쑥쑥 크고
통통 여문 벼와 콩
가을이 되자
콩은 까만 정장,
벼는 하얀 쌀옷을 입고
총총총,
시루 예식장으로 향했어요.
뜨거운 김이 후~
축하를 불어주자
콩 신랑과 쌀 신부는
쫀득쫀득
콩떡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그런데
"우와, 맛있겠다!"
아이들의 냠냠냠.
콩떡 부부는 방긋 웃으며
아이들 뱃속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답니다.
578.불러줄 때
골목길
주차 방지턱으로
다시 태어난 폐타이어
수많은 차가
닿아오고
밟고 부딪쳐도
말없이
품어 주는
낡은 타이어
가끔
다른 곳에서
불러 주어도
서슴없이
달려간다
아직
쓸모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579.과자 조각
과자 조각
고사리손에서
툭 떨어진
보잘것없는 과자 조각 하나
눈 깜짝할 사이
개미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빨고 물고 뜯고
밀고 끌고 번쩍 들고
"영차! 영차!"
개미들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낑낑낑
과자 조각을 집으로 옮긴다
그 모습을 보던
과자 조각
"아휴, 힘들어!
인기가 많아도 고생이네."
580.잡초밭
잡초들이 삐쭉삐쭉
누가 더 큰지
키재기하는 잡초밭
호미로 잡초를 뽑고
상추, 가지, 오이 모종을
한 줄 두 줄 심었어요
단비가 촉촉 내리자
잡초들이 소리쳤어요
"우리 자리야!"
상추 곁에도 쏙!
오이 곁에도 쏙!
가지 곁에도 쏙!
우르르 몰려와
텃밭을 빼곡히 채웠어요
뽑으면 또 나오고
나오면 또 뽑고
내가 가면 숨었다가
돌아서면 쏙 나와
메롱메롱 약 올리듯
고개를 내밀었어요
찬서리 내릴 때까지
잡초들과 나는
누가 이기나 겨루며
숨바꼭질했어요
581.굴러온 돌
길을 걷다가
삐죽삐죽
혼자 있던 돌멩이
발에 걸릴까 봐
톡,
살짝 밀어 주었더니
데굴데굴 또르륵
돌무더기 곁에 가서
친구 만난 듯 멈춰 섰다
비 오는 날
높은 곳에서 온 돌 친구들
우르르 내려와
빈자리를 채워 주었다
며칠 뒤
맑은 하늘 아래
햇살 한 줌 내려앉자
돌 틈마다
파릇파릇 풀잎이 돋고
알록달록 꽃들이 피어났다
굴러온 돌멩이도
풀꽃들 사이에 앉아
꽃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582.점수
기말고사
궁금한
우수 성적 발표날
나는 85점
짝꿍은
올 100점
짝꿍은
재미없겠다
올라갈 점수가 없으니
아차 하면
내려갈
점수만 남아 있으니
100점 위에
나는 조심조심
발끝을 세운다
583.다이어트
재롱이
밥 주는 날
밥그릇 뚝딱 비우고
더 달라고
짧은 꼬리 흔드는 재롱이
"안 돼, 안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르는 눈빛에
간식 몇 알 슬쩍 더 넣어 주었다
"조금만 먹고 산책 가자."
내 손에 군것질 쥐여 주시던
엄마 생각이 났다
재롱이 목줄을 잡고
공원을 한 바퀴 돈다
앞장서는 재롱이 뒤따르는 나
먹을 것만 생각하는 재롱이
군것질이 생각나는 나
오늘은 둘 다
다이어트 산책 중이다
584.선풍기
매미가 맴맴
여름을 데우면
선풍기 바람도
나뭇잎 흔들며
씽씽 달린다
저녁바람 불어오면
선풍기도 슬쩍
속도를 줄인다
오르락내리락
내 컨디션 닮아서
선풍기도 가끔은
씽씽 돌다가 스르르 졸린가 보다
585.참외
노란 참외 하나
여름 한가운데 앉아 있다
칼이 스치자
“간지러!”
하고 갈라진다
하얀 속이 환하게 웃고
씨앗들은
“여기야!” 하고 모인다
한 입 베어 물자
여름이
입안에서 톡, 터진다
586.여름
에어컨은
“출근!” 하고 켜지고
선풍기는
빙글빙글 신났다
먼지는
쏙 도망가고
햇볕은
“여기다!” 하고
여름을 밀어 넣는다
587.잔소리
잔소리꾼
엄마의 말은
간절한 소원의 길이 되고
개구쟁이
내 꿈은
그 길 위에서 자라난다
잔소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힘이 되어
꿈이
조금씩, 조금씩
키가 커진다
588.하늘동네 아이들
초승달이
구름 이불 속에
꼭 숨어 있다.
바람이 휙 불어오자
"나 여기 있지롱!"
얼굴을 쏙 내민다.
그러자 또 다른 바람이
후우― 불어오자
휙!
"못 찾지롱!"
다시 숨어 버린다.
높이 앉은 별들은
킥킥 웃으며
반짝반짝 눈짓한다.
바람은 오늘도
하늘 골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589.앵무새 사진관
사진관 아저씨
"자! 여기 보세요
김치~"
찰칵!
하얀 이빨
삐쭉 내밀고 모두 웃었다.
"자! 자!
한 번 더 김치~"
잠투정하던
동생도
보조개가 움푹 패도록
김치~ 김치~
사진관 아저씨는
우리보다
김치를 더 좋아하는
앵무새였다.
590.날 잡아봐라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매미 한 마리
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뻗는 순간
찍!
오줌 한 방울
떨어뜨리고
휙—
옆 나무로 날아갔다.
"야! 거기 서!"
소리쳐도
맴맴맴~
"날 잡아봐라!"
놀리듯 웃는
오줌싸개 매미
591.담배꽁초
입술구름
몽글몽글 하늘로 띄우고
길가에 툭! 버려진 담배꽁초
"어이쿠!
여긴 우리 집이 아닌데!"
목청껏 외쳐 봐도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멀어지는 발걸음
"에휴,
나도 발만 있었으면
냉큼 쫓아가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갈 텐데!"
바람이
쪼르르 달려와
데굴데굴 담배꽁초를 굴려 준다
592.도토리
도토리를 주워 담는데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와 말했어요.
"잠깐!
그건 우리 겨울 도시락이에요!"
메아리도 따라 했어요.
"도시락이에요!" "도시락이에요!"
그때
도토리 하나가 툭!
모자 위에 떨어졌어요.
다람쥐가 웃으며 말했어요.
"하나는 네 것,
나머지는 우리 것!"
지나가던 바람이
살랑살랑
나눗셈을 해주었습니다
593.여름
갑자기
여름이 와서
내 몸은 땀으로 반짝인다.
쪼르륵, 쪼르륵
이마를 타고
뺨을 지나 목까지 흘러내린다.
간질간질,
끈적끈적,
나를 자꾸 건드린다.
손수건으로
쓱쓱 닦아도
또르르 금세 다시 내려온다.
말을 듣지 않는
망아지처럼
여름은 내 몸 위를 뛰어다닌다.
594.어둠 지키
골목이
어두워지면
밤으로 출근하는 가로등
달과 별이
눈을 감는 날에도
홀로 깨어 선다
별빛이
살짝 웃는 밤엔
작은 날벌레들과 어울리고
달빛이
흐르는 밤엔
그림자와
나란히 길을 걷는다
비가 내려도
눈이 쌓여도
몸을 조금 기울인 채
제 자리를 지킨다
젖은 길 끝까지
가장 늦게까지
밤을 닦듯 빛을 남긴다
595.이팝꽃
보슬보슬
보슬비 내리자
이팝꽃이
하얀 눈물
또르르 흘린다
젖은 길 위에
하얀 카펫을 깔라고
파란 여름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596.봄비
이슬비
오락가락
하굣길을 적시고
연초록 눈물
똑똑
우산 끝에서 떨어진다
깜짝 놀란
눈빛이
봄잎사귀처럼 흔들리고
내 눈에도
지난 겨울 생각이 번져
또르르 봄비가 맺힌다
597.오빠라면
“오빠, 오빠!”
“왜?”
“라면 못 먹겠어.”
“왜? 맛이 없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오빠라면 이걸 먹겠어?”
“너무 뜨겁잖아!”
“맛있는 라면을
뜨겁다고 못 먹는다고?”
“오빠라면 후후 불어서,
너라면까지
후루룩― 면치기로 먹고,
‘한 그릇 더!’
없어서 못 먹지.”
“정말?”
“응!
오빠라면 말이야!”
598.쑥떡
재래시장 떡집에
쑥쑥 만든 쑥떡이
쟁반 위에 누워 있다
하나 집어 냠!
둘 집어 냠!
입속으로 쏙쏙 들어간다
볼은 빵빵
입은 냠냠
쫀득쫀득 씹으면
쑥덕쑥덕 소리 난다
몰랑몰랑 쑥떡
봄이 입속에 들어온다
599.불가사리
철썩철썩
쏴아아
바다가 나를 깨운다
눈을 뜨니
물결 사이
별 하나 떠 있다
다가가 보니
하늘의 별이 아니라
바다 바닥에 붙은 불가사리
한 걸음 물러서자
파도가 다가와
내 발자국을 지운다
다시 물결을 보니
별은 아직
나를 보고 있다
600.비둘기 식당
간판도 없고
메뉴판도 없다.
그런데도 줄이 길게 선다.
여기는 유명한
비둘기 식당이다.
“경비요원!”
비둘기,
목만 길어졌다.
“주방장!” 비둘기,
바닥을 콕콕콕.
레시피도 없이 요리 중이다.
“손님!” 비둘기,
자기 것도 먹고
남의 것도 먹고.규칙은 없다.
낙엽 하나 떨어졌는데
푸드득!
갑자기 대혼란이다.
이리로, 저리로.
어디로…
전부 도망가다 다시 돌아왔다.
콕콕콕.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도 식당은 영업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