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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C 조선은 시인의 시대였다.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를 적을려고 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최경창의 나이는 34세,
홍랑의 나이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피천득 선생의 말마따나 “그리워 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하는 것"이 인연의 끄나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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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홍원에서 태어난 홍랑(洪娘)이란 기생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미모와 시재가 뛰어나 남다른 이목을 끌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병환에 눕자
약을 구하러 꼬박 사흘을 걸어 80리 떨어진 곳의 명의를 찾아 나선 효녀였다.
행색이 초라한 12세 소녀의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자신의 나귀에 홍랑을 태우고
함께 그의 집에 도착했으나 홍랑의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홍랑은 슬픔과 절망 속에 상(喪)을 치르고 석 달간을 어머니 무덤에서 시묘를 한다.
그런 홍랑의 지극한 효심이 소문이 퍼져 의원의 귀에 들어가자
이에 감격한 의원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수양딸로 삼고
시문(詩文)과 가무(歌舞)는 물론이고 예의범절을 가르쳐 곱게 키운다.
(후에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시인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홍랑은 절세가인이 되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늘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한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몇 날을 고심 끝에 홍랑은 중대 결심을 한다.
어느 날 홍랑은 자기를 금이야 옥이야 키워주신 의원님께 작별의 문안 인사를 드린다.
의원은 애석했다.
근자에 주변에서 좋은 혼사 이야기가 오가던 터라 평탄한 앞날이 보장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 효심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살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시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의원은 약간의 생활비를 챙겨주며 아쉬운 이별을 한다.
자기를 키워주신 의원님께 배신을 하는 심정이라 홍랑은 마음이 몹시 아팠다.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홍랑은 잡초에 묻힌 어머니의 무덤을 보며 대성통곡을 한다.
이렇게 해서 홍랑은 어머니의 묘 옆에 운 막을 짓고 시묘살이에 들어간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머니께 시묘를 하던 홍랑은 몸이 지쳐간다.
의원과 작별할 때 받아온 금전도 다 떨어졌고 그렇다고 도움을 받을만한 가족도 없었다.
홍랑은 고심 끝에 생계의 방편으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경성 관아 관기(官妓)가 된다.
이즈음 한양에서는 과거시험이 열렸는데 전라도 영암에서 올라온 젊은 청년
(후에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림) 고죽 최경창(孤竹崔慶昌 1539~1583)이 문과에 급제한다.
경복궁에 입성한 젊은 청년 "고죽 최경창"은 그의 나이 35살 (1573년. 선조 6) 가을에 , 정6품 문관으로 함경도 북도 평사(北道評事.북병사의 보좌관 격)로 부임을 하게 된다.
함경도로 발령을 받아 임지로 떠날 때는 가족이 동행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국법이었다.
요즘 말로 최전방지대였기 때문에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했던 것이다.
가족이 동행할 수 없다보니 자연 관기들이 수발을 맡아 했다.
『세종실록』에 ‘군사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추위와 더위를 두 번씩이나 지나므로 일상의 사소한 일도 어려울 것이니 기녀를 두는 것이 합당하다.’ 했음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천리가 훨씬 넘는 변방으로 새로 부임한 최경창을 위해경성고을 원이 연회를 마련했다.
관리가 부임하면 관청 소속 기생들을 소집해 점검하는 ‘점고(點考)’가 진행된다.
최경창도 북평사로 부임한 후 경성 관아의 기생들이 인사를 올리는 ‘점고’를 받게 되었다.
기생 점고에 이어 최경창의 부임 축하 연회가 열렸다.
최경창은 이날 저녁 연회에서 홍랑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홍랑은 거기서 시를 한 수 읊는데, 그것이 고죽의 시다.
고죽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읊은 시가 바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지은 것일 때, 그리고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그 이름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것일 때, 둘은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학자요, 시인이며 음율을 알고 피리를 불던 조선 팔대 문장가 고죽 최경창과 시를 알고 교양과 미모가 빼어난 기생 홍랑은 그날 그 자리에서 첫 눈에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는 6개월간의 짧고 진한 사랑을 한다.
사대부가의 관리와 기생의 사랑은 원래 바람 같은 것이다.
다음해 봄에 고죽은 임기가 끝나고 관직이 바뀌어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사랑하느니 곧 이별이다.
홍랑은 고죽과 헤어지지가 싫어 쌍성까지 따라왔고 함관령 고개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되었다.
국법인 "양계 금(兩界禁)을 어길 수는 없었다.
‘양계의 금’이란
조선시대에 평안도 함경도 백성들은 그 경계를 넘어 남쪽으로 올 수 없었다.
이유는 두 지방이 척박한데다가 외적의 침입이 잦아 빠져나가는 인구를 그대로 방치하였다가는 텅 빈 마을이 될 것을 염려한 고육지책이었다.
또 관비는 관내를 벗어날수 없었다.
돌아오던 함관령(咸關嶺) 고개 주변에는 산버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날은 저물고 비가 내렸다.
홍랑은 시를 지어 산 버들과 함께 고죽에게 보낸다.
이순간...
국문학 시조사에 길이길이 남을 최고의 걸작 시조가 지어진다.
홍랑이 ‘묏버들’ 시조를 지어 보낸것이다.
묏버들은 산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나무이다.
홍랑은 고죽에게 이 묏버들을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밤비에 새잎이 나거들랑 나 인줄 여기라고 노래한다.
예로부터 푸른 버드나무 가지는 사랑하는 남녀의 애절한 정과 이별을 나누는 징표로서 많이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절양류(折楊柳)라 하여 님이 떠날 때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애타는 정을 노래하는 한시의 형태까지 나오게 되었다.
홍랑도 익히 알고 있었을테니 봄날의 파릇한 싹이 돋아나는 산버들 가지를 꺽어 최경창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그 버들가지를 가져가서 창밖에 심어 새순이 돋아나면, 자기처럼 여겨 잊지말고 반겨달라는 애절한 심정을 전달한 것이다.
묏버들
홍랑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꽃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사진 1
<홍랑이 쓴 원본>
새 닙곳나거든= 새 잎꽃나거든
: 많은 인터넷 번역물들이 "새 닙곳"을 "새 잎"혹은 "새 잎 곧"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같은 시조 문학인 "나비야 청산가자"의 "곳"은 "꽃"이었으니 여기서도 새닙곳의 "곳"은 "꽃"이라 확신한다.
에이 10할 다움 | 나비야 청산가자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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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돌아온 고죽은 이듬해 초부터 시름시름 병석에 앓아눕고 만다.
홍랑과 이별이 너무 가슴 아팠던 것일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운 그는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하자,
이 소식이 머나먼 함경도 홍원에 있는 홍랑에게 전해지게 된다.
앉으나 서나 임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홍랑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고죽의 글을 보자.
그 후에 소식이 끊겼더니, 을해년에 내가 병이 나 오래 낫지 않아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 를 떠나지 못하였다. 홍랑이 그것을 듣고 즉일로 출발하여 무릇 칠주야(七晝夜)만에 이미 서울에 당도했다. 이때에 양계의 금령이 있었고 또 국상을 만나 소상이 이미 지났으나 평 시와는 같지 않았다.(최치만 발행 『고죽집』에서)
급기야 홍랑은 짐을 꾸려 한양을 향해 천리길을 나선다.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밤낮으로 걸어 7일 만에 한양에 도착한 홍랑은 고죽과 감격적인 재회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지극정성 병 수발에 고죽은 건강을 되찾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온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까지 비화되었고,
서인(西人)인 최경창을 향한 동인(東人)들의 여론이 들끓었다.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었다.
홍랑이 한양에 온건 국법 두 가지를 어긴 것인데
관기로서 근무지를 이탈한 것과,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제도인 ‘양계의 금(兩界之禁)’을 어겼다는 것이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홍랑이 한양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당시 정치상황도 안 좋은 시기였다.
홍랑이 최경창을 찾아온 때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안된 국상기간이었던 것이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1576년 봄, 사헌부는 최경창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죽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北方)의
관비(官婢)를 한양까지 데리고 와서 버젓이 살고 있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파직을 명 하소서".라는 대신들의 상소문이 왕에게 올라온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9년(1576년) 5월 사헌부 기록)
사헌부의 상소로 결국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고, 홍랑도 함경도 경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경창은 관직을 박탈당한 것보다도 홍랑을 다시 돌려보낸다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
최경창은 자신의 절절한 당시 마음을 한편의 시 ‘송별(送別)’에 담아 경성으로 돌아가는 홍랑에게 주었다.
송별(送別) / 최경창
玉頰雙啼出鳳城(옥협쌍제출봉성) 옥같은 뺨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나서니
曉鶯千囀爲離情(효앵천전위이정) 새벽에 휘파람새도 이별을 울어 주네.
羅衫寶馬河關路(나삼보마하관로) 비단적삼 좋은 말 타고 떠나는 변방 길
草色迢迢送獨行(초색초초송독행) 풀빛만 아련히 외로운 길 전송하네.
아래 유란(幽蘭)이란 시로 시도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난)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멀리 떠나면 어느날 다시 오려나.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에 올라서서 옛 노래를 부르지마시게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은 어둡겠지.
그리고 이 이별은 생에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최경창은 아깝게도 45세의 나이에 죽고 만다.
(최경창은 파직 당한 후 종3품의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다시 홍랑을 만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되었으나 동인들의 끝없는 모함과 북평사의 참소로 선조(宣祖)에게 미움을 받아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되어 한양으로 상경하던 도중 함경도 경성의 객관에서 세상을 떠난다.
1583년(선조9년) 3월, 그의 나이 45세였다.)
<고죽집 후서>에는 최경창의 최후에 대한 짧막한 기록이 나온다.
『직강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오는 도중, 종성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 <고죽집 후서>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부음은 그녀를 몸 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라. 이제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다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마땅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앉아서 울고만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 끝에 홍랑은 몸을 씻거나 단장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은 홍랑은 또한 커다란 숯 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스스로 벙어리가 되기까지 했다.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친 뒤에도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은 자기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묵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임진왜란, 정유재란) 그녀의 종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년)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파란 많고 한많은 한 여인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홍랑의 묘는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모셔져 지금도 그대로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었던 기생 홍랑의 고죽을 향한 애틋한 사랑은 사대부 양반 문중까지 감동시켰고, 문중은 비록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홍랑을 고죽 아래 묻어줬다.
유품들을 건네받은 문중 사람들은 문중에 남아있던 유품과 합하여 문집을 만든다.
그것이 남아 오늘날의 <고죽집>이 된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과 비석이 버젓이 있으며, 그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시제와 제사를 홍랑에게 지내고 있다.
조선시대...
기생으로서 후실도 아니지만 유일하게 사대부의 족보에까지 올라간 홍랑...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시대적 질곡을 뛰어넘어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파주에 위치한 최경창과 정실 부인 임씨의 묘(위) 홍랑의 묘(아래))
이 같은 사실은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南學鳴 1654~?)의 문집 ‘회은집’에 기록되어 후세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현재 파주시 다율동의 해주 최씨 선산에 있는 이 홍랑의 묘에도 후손들은 시제 때가 되면 음식을 차려 놓고 제를 올려준다. 그러나 축문을 읽지 않고 술도 한잔 만 올리며, 종손이 아닌 후손 중 한 사람이 올린다.
1969년에는 해주최씨 문중이 그녀의 묘 앞에 묘비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를 세웠다.
이들의 묘는 원래 파주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다가 군용지가 되어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이곳도 앞에 큰 도로가 생길 예정이라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해야 할 처지이다. (-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
(고죽집서) = <고죽집(孤竹集)> 서문
-고죽(孤竹)은 최경창의 호이며 전라도 영암 출생, 최충(崔冲)의 18대손이며 최자(崔滋)의 13대손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남학명의 <회은집(晦隱集)>에는 최경창과 홍랑의 만남에서 최경창이 죽고난 다음까지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소상히 적고 있는 <회은집>에 따르면
유일자(有一子), 즉 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두사람에게는 최즙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행적은 따로 나와 있는 내용이 없는 것 같다.
(5~6 개월전,
아니지...작년 2021 이었나??
TV 뉴스로 최즙의 후손들을 찾았다는 내용을 보았었다.)
아주 짧은 기간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홍랑의 광적이다시피한 사랑...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자랄때의 삶의 버거움... 외로움등이 원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생에서는 두 사람 정식 부부의 인연이 있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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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신분을 뛰어 넘는 사랑이야기는 2000년 11월에 홍랑의 시조 육필 원본과 최경창의 漢詩 두수가 공개됨으로서 더욱 화제가 되었고, 2003년에 ‘홍랑, 그 애달픈 사랑‘ 이란 제목의 가무악(歌舞樂) 뮤지컬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되기도 하였다.
2. 고죽집 (孤竹集)
1683년(숙종 9) 간행한 조선 선조 때 시인 최경창(崔慶昌)의 시집.
1책(87장).
목판본. 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음.
연도 : 1683
1683년(숙종 9) 손자 진해가 수집하고 증손 석영이 간행했다.
5언절구 33수, 7언절구 105수, 5언율시 42수, 7언율시 30수, 5언고시 28수, 7언고시 5수 등 총 245수의 시가 실려 있다.
손자 진해의 시집인 〈역촌유고 櫟村遺稿〉도 덧붙어 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다움백과)
고죽 최경창의 손자인 최진해가 “내 선대조의 문집이 정리가 안 되면 후손들에게 전할 길이 없겠다.”고 걱정하며 노구의 몸을 이끌고 때로는 발품을 팔며 자료를 수집해 <고죽집>을 엮어냈다고 한다.
고죽집의 서문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썼으며 후서는 박세채(朴世采)가 썼다.
필사본이 만들어진 뒤 <고죽집>은 목판본으로도 만들어지게 된다.
이렇게 고죽집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는 후손들의 노력과 함께 홍랑이 큰 역할을 했다.
<고죽집 후서>에는 최경창의 최후에 대한 짧막한 기록이 나온다.
『직강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오는 도중, 종성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 <고죽집 후서>
3. 회은집 (晦隱集)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南鶴鳴.1654~?)의 시문집.
제작시기: 미상
권수 : 5권 2책
소장처: 규장각 도서, 장서각 도서, 고려대학교 도서관
4. 서울의 어원과 의미 - 다움백과
:서울이라는 말은 원래 수도(首都)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지만, 현재는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즉 서울특별시를 약칭할 때 서울이라고 함이 그것이다.
이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은 고유 명사로서의 서울이 아니라 수도로서의 의미에 관해서이다.
서울이라는 말의 유래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서나벌(徐那伐)·서야벌 등으로 불려진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백제 말기의 수도인 부여(扶餘)를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던 점에서 삼국시대 수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명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것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의 풍습이다.
버드나무는 생명력이 강한 식물로 가지를 꺾어 아무데나 심어도 다시 새 잎을 틔운다.
홍랑은 자신의 사랑이 영원히 재생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또 버들柳’는 머물'留’와 음이 같으니 자신의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6. 산-버들(다움사전)
버드나뭇과의 하나. 여우버들과 비슷하지만 어린가지와 잎에 털이 없다. 잎은 타원형이며 끝이 뾰족하다. 봄에 잎보다 꽃이 먼저 피고 열매는 삭과(蒴果)를 맺는다. 산과 들에 자라는데 우리나라 중부 이북에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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