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계 1:1∼3
제목: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
●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계1:3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
선지자와 사도의 시대가 끝나고 특별계시의 절정인 성경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듣는다면 환청이거나 주관적이고 내적인 확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듣는 것을 대신하여, 성도들에게 주어진 성경을 읽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된 것입니다. 신앙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행15: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
구약교회에서 지키던 안식일은 신약교회에서 주일로 계승되고 대체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숭고한 믿음의 모범을 보인 성도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아래 말씀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 examine)하던 분들입니다.
행17:10.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
성경을 ‘상고’한다는 한자어는 조금 어려운데, ‘자세히 참고하여 상세히 검토하다’, ‘연구하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상고할 정도로 성경에 기록한 내용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 ‘복이 있나니’는 예수님께서도 즐겨 쓰고 축복해 주실 때 사용한 거룩하고 복된 표현입니다. 특히 팔복(八福)에 집중되어 나오는데요.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성경과 기독교가 말씀하는 ‘복이 있나니’의 끝판왕 같은 깊고 진한 복의 조건과 결과(아래에 밑줄 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복이 있나니’에서 복을 받은 자들이 받는 결과는 천국을 소유하고 위로를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로 일컬음 받고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기준으로 ‘복이 있나니’는 성경 전서에 24회 등장하고 구약성경에 10회 신약성경에 14회 등장합니다. 생각보다 의외로 찾아보면 많이 나오지를 않는데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의 수준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의 수준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와 동급으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선지자나 사도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신 계시입니다.
계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
3절의 예언은 직접적으로 좁게 보면 요한계시록이고 넓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성경에 매우 드물게 나온 중요한 표현입니다. 좁게 보면 신약성경에 2회밖에 안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
갈1:12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고(갈1:11) 계1:1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시하고 중차대하게 보는 신앙의 핵심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성취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거룩한 책이 성경이고 그렇게 믿는 자들이 참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허황된 소리를 하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는 자는 절대다수가 이단과 신비주의자일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절대다수가 위선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짧은 본문에서 말씀하는 복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즉 참 성도들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참 성도는 말씀을 입과 생각으로만 믿는 자가 아니라 진짜로 믿고 들은 대로 지키는 자들입니다.
눅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
●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1)에서 “때가 가까움이라”는 무슨 의미일까요? 계1:1의 “때가 가까움이라”와 매우 비슷한 분위기가 나타나는 다른 말씀(롬13:11)을 아래에서 보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구원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 즉 최후의 구원을 가져올 개인적 종말(영화) 또는 보편적 종말(주 예수의 날)이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시기에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성도들의 영혼은 늘 깨어 있습니다.
롬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
개혁주의를 비롯한 정통 복음주의는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을 받고 있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칭의(과거)-성화(현재)-영화(미래)의 팽팽한 연속과 긴장감을 가지고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파와 율법폐기론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다 끝났다고 착각하며 방심하고 교만해서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는 삶을 계속해 나아갑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현세에서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인데요. 구원파 류 이단들의 오해와 달리 성경은 이미 구원받은(과거) 자의 구원(미래)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고 하며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 영적 각성과 분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롬13:11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롬13: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롬13:11과 13장이 불신자를 향하여 쓴 말씀이 아니라 신자들을 향하여 쓴 것임을 금방 눈치 채실 것입니다. 계1:3의 복을 받은 자들(위 문단들에서 설명)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우직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죄악 되고 어두운 세상 가운데에서도 빛의 갑옷을 입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합니다. 이는 칭의된 성도들이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의미합니다. 밤이 깊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낮이 가까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팔복(마5:3∼10)에서 “복이 있나니” 앞에 쓰인 조건들(심령이 가난한 자∼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은 롬13:14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상태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참 성도들답게 신앙생활 하기를 기원하며 묵상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안식일에서 주일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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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바리새파의 율법 해석가들에 대한 그의 권위에 있어서나(마 12:1-8 ; 요 5:8-18 ; 7:21-24 ; 9장), 안식일에 금지된 구원 행위를 시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있어서 (마 12:9-14 ; 눅 13:10-16 ; 14:1-6) 안식일에 관해 논쟁을 벌이셨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킨 듯하다(막 16:1 ; 눅 23:56).
그러나 이방인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들어가게 됨으로써, 안식일 계명은 종말론적으로 해석되었으며(참조. 히 4:1-10), 점차 기독교 의식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바울은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안식일 율법을 금욕 생활의 한 형태로 오해하고 있음에 관심을 기울였다(골 2:16-23 ; 참조. 갈 4:9-10).
그리스도인이 일주일의 첫째 날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참조. 요 20:19 ; 행 20:7 ; 고전 16:2) 비록 이것이 칠일의 유대적 시간 구분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그 날에 대한 안식일적 준수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구약의 안식일 규정은 4세기에 이르러서야 주일에 적용되었다.(→주의 날)
※ 참고 문헌 N.E.A. Andreasen, The Old Testament Sabbath, SBL Dissertation 7(Missoula : 1972) ; S. Bacchiocchi, From Sabbath the Sunday(Rome:1977) ; R.de Vaux, Ancient Israel(New York : 1965) 2:pp. 475-483.
출처: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안식일
@장코뱅 본문 중 행15:21을 이해하는데에 초기 기독교의 예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GODpia 성경: 아가페출판사>, “복”
성경은 모범적인 경건한 사람에게 축복을 선포할 때 '복 있는 자' 또는 '복이 있을지어다' 라고 표현한다. '복'이란 말이 가장 많이 나타난 곳은 시편(예. 1 : 1 ; 2 : 12), 지혜서(예. 잠 8 : 34; 16 : 20; 욥 5 : 17), 복음서(예. 마 13 : 16; 요 20 : 29), 그리고 요한계시록(14 : 13; 22 : 14)이다. 복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은 산상 설교 가운데 팔복에 대한 가르침이다(마 5 : 3-12; 참조. 눅 6 : 20-2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복'에 대한 가르침이, 그 형식이나 의도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누가복음에는 네 가지의 복에 이어서 네 가지의 화가 짝을 이루어 기록되어 있으며(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 : 20]),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자여'[6 : 24)), 2인칭을 사용하여 청중들에게 직접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여덟 가지 복은 3인칭을 사용하여 보다 일반적인 진술 방법으로 언급되어 있다.
첫 번째 복은 두 복음서가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두 번째 복이 마태복음에는 세 번째에 기록되어 있으며, 누가복음의 네 번째 복이 마태복음에는 아홉 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복과 연관시켜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의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여기에서 의는 "하나님 나라의 참여“라는 의미이다. 누가복음은 현재의 상태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 나타나는 (본문이 미래 시제를 사용하는 것을 주의하기 바람; 참조. 21. 24절의 '이제 '라는 말도 주의하기 바람),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크게 대조시켜 설명하였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의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인 도전이 강조되었다. 또한 팔복 강해 뒤에 계속되는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켰으며, 고난에 직면했을 때 계속해서 충성을 다하도록 권면해주었다.(-> 산상 설교)
※ 참고 문헌I.W. Batdorf, Interpreting the Beatitudes (Philadelphia: 1966);C.H. Dodd, “The Beatitudes: a form-critical study”, pp. 1-10 in More NT Studies (Grand Rapids: 1968).
@장코뱅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적힌 팔복이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 첨부된 설명으로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츨판사>, “요한계시록”
신약의 맨 마지막 책. 신약 가운데서 묵시적인 양식과 언어로 기록된 유일한 책이기 때문에 '묵시록'이라고도 불리운다.
Ⅰ. 저작권
본서는 본서의 저자가 그리스도의 종이며 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인 요한이라고 스스로 밝힌다. (계 1:1, 9).
초대 교회는 이 요한이 바로 사도 요한과 동일인이며, 또한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의 저자라고 믿었다. 그러나 A.D. 3세기 초에 요한계시록과 나머지 책들 사이에 언어나 신학적 강조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저자들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A.D. 130 년경에 사망한 파피아스 역시 예수님과 관련이 있는 요한은 두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사도 요한과 장로 요한).
오늘날에 와서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론들 마다 각각 다른 옹호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을 기록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뒤엎을만한 확실한 증거는 나타나 있지 않다.
Ⅱ. 기원과 저작 연대
요한은 본서를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나(1:9) 혹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에베소 근처에서 생활할 때 기록했음이 분명하다. 요한을 유배당하게 만든 대박해는 일반적으로 네로의 박해(A.D. 64-67년)가 아니면 도미티아누스의 박해(A.D. 95년)일 것으로 추정한다. 비록 네로 시대의 연대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초대 교부들의 전승을 받아들여 도미티아누스시대의 연대가 더욱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계 13:4에 언급된 황제 숭배는 네로 이후부터 보편화된 제도였다. 그리고 계 2-3장에 언급된 교회의 어려운 형편들도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연대를 뒷받침 해준다.
Ⅲ. 언어
요한계시록의 문장이나 문학 형식은 세련되지 못한 편이며, 때로는 미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서에 사용된 서투른 문법은 아마도 아람어적인 생각을 헬라어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결과인 것 같다. 또한 본서에 나타난 어색한 언어들은, 요한이 상서롭지 않은 주제를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이나 구약의 표현방식을 많이 인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본서는 세 종류의 성경 기록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양식은 편지 형태이다(1:4).
이 부분은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어졌다. 두 번째로는 계시 형태이다(1:1).
이 부분은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장래의 일과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대변동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세 번째로는 예언의 형태이다(1:3).
이 부분은 긴박한 경고들과 교회에 대한 격려로 이루어 졌다.
Ⅳ. 정경성
요한계시록은 동방 교회 보다 서방 교회에서 먼저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A.D. 2세기경에 소아시아 지역에서 등장한 '알로기' 파(派)에서는 본서의 천년 왕국에 대한 약속을 부인하려 했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도 본서의 사도적 저작권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는 본서가 정경임을 확고하게 단언하였다. 본서는 서방 교회에서는 제3차 카르타고 회의에서(397년), 동방 교회에서는 제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680년) 정경으로 인정받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 회의들이 본래 정경이었던 요한계시록을 그때서야 비로소 정경으로 인식했을 뿐이지 본서를 정경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V, 내용
요한계시록은 서론(1장),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일련의 환상들(2-21장), 그리고 결어(22장)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는 교회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관한 계시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요한의 메시지에는(2-3장) 각 교회들의 강한 면과 약한 면이 상세히 실려 있으며, 각 교회들의 처지에 합당한 지도와 권면이 기록되어 있다. 4-20장에는 세상의 사악한 자들 위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교회의 신실한 자들 위에 베풀어질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4-5장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내릴 권세가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판은 예수께서 두루마리의 일곱인들을 떼심으로 시작되며(6장), 그 결과 땅과 땅위에 사는 사람들이 파멸과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 맞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것이다(7장).
일곱 나팔들이 울려퍼지면(8-11장), 보다 더 심한 재앙이 임할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 하는 두 증인들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난 후 하늘의 큰 이적, 곧 영계에서 벌어질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싸움이 계시되어 있다(12-15장).
진노의 일곱 대접들은(16장) 해와 달과 별들에 대하여 결정적인 파멸을 쏟아부을 것이다. 특별히 이때 잔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세상 정부를 상징하던 '바벨론'의 최후 멸망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17-19장).
이와 같은 모든 과정이 사단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와, '흰 보좌' 앞에서 있을 마지막 심판으로 종결될 것이다(20장).
21-22장은 교회의 영원한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결어는(22:6-21) 지금까지 전파한 메시지의 진실성과 절박성을 강조하며 끝을 맺었다.
Ⅴ. 해석 방법들
계시적인 언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방법들이 제시되어 왔다. 루터는 "요한계시록은 깊은 뜻을 담은 책이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루터 이전이나 이후의 많은 사람들은 이 책 안에서 깊고 풍성한 진리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본서를 해석하는 여러 견해 가운데 하나가 역사학파들의 해석 방법이다. 이들은 계시록에 언급된 사건들이 교회사 속에서 순차적으로 성취되어 진다고 주장 한다.
예를 들면, 10:8-11에 언급된 두루마리의 인을 떼는 사건을 종교 개혁과 연관이 있다고 해석한다. 다음에는 미래학파들의 해석 방법이 있다. 이들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일곱 편지들을 교회사 속에 나타난 일곱 세대로 해석한다. 예를 들면, 에베소 교회는 사도 시대 말기, 서머나 교회는 로마 박해 시대, 버가모 교회는 정교(政敎) 연합 시대, 두아디라 교회는 중세 시대, 사데는 종교 개혁 시대, 빌라델피아 교회는 종교 개혁 이후,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대를 가리 킨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4:1이 종말 직전의 대 환란기(마 24:21)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계 4-20장에 나타나 있는 대부분의 환상들은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에 대한 중복적인 묘사이며 어느 시대든지 겪을 수 있는 교회의 고난에 대한 묘사이다. 그리고 말세의 심판에 나타날 하나님의 주권도 맨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 본서에 대한 현대 학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본서에 나타난 계시가 A.D. 1세기의 상황 아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계시들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특정 사건들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갈등들과 마지막 때에 성취될 하나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 방법이라 하겠다. 모든 시대마다 요한계시록은 역사나 당시에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추론하는데 있어서 근거 자료로 사용되어 왔다. 간혹 파괴적인 광신주의와 연관된 그럴듯한 이론들이 요한계시록으로부터 도출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요한계시록이 모든 세대의 신자들, 특히 고난이나 순교를 당한 성도들에게 소망과 위안을 안겨 주었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세상과 교회 위에 미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잘 가르쳐 주며, 마지막에 얻게될 성도의 승리를 확고하게 보증해 주고 있다. (→육백육십육)
※ 참고 문헌G.R. Beasley-Murray. The Book of Revelation, rev. ed. NCBC(1981); G.B. Caird,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 HNTC(1966); R.H. Charles,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St. John, 2vols, ICC(1920)
@장코뱅 이거 하나만 흝어 보아도 요한계시록에 대한 개관이 되겠네요. 좋은 자료입니다.
@장코뱅 올려주신 내용을 읽고 도움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계시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야 복이 있다. 복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이다. 그러므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 구원을 얻었으니 마지막 날까지 믿음을 지키고 구원을 이루어나가자.'
이런 요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하면서 성경을 읽지 않는 자들은 이단과 신비주의자들일 수 있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절대다수가 위선자일 것이라는 지적이 잘 보신 것 같습니다.
구원파나 율법폐기론자들 처럼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다 끝났다고 착각하고 방심하고 방종하면 망하는 것이고, 이미와 아직의 긴장감 속에서 롬 13장의 말씀대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 성도의 길이고, 복을 받은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살아가는 거라는 말씀을 잘 유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남이 쓴 글을 잘 요해하고 간결히 잘 요약해 주셔서 특히 초신자들 보기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장코뱅 네, 공감합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앞 부분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것을 잘 끄집어 낸 좋은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댓글과 격려의 공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