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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상제님의 강세
(1)【예시 1절】
상제(上帝)께서 구천(九天)에 계시자 신성 • 불 • 보살(神聖 • 佛 • 菩薩) 등이 상제가 아니면 혼란에 빠진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호소하므로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오셔서 삼계(三界)를 둘러보고 천하(天下)를 대순(大巡)하시다가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시면서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셨다가 갑자년(甲子年)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스스로 세상에 내리기로 정하셨도다.
[주해]
• ‘상제(上帝)께서 구천(九天)에 계시자’라고 하신 말씀은 ‘구천(九天)에 계신 상제(上帝)께’와 같은 말이며 상제님은 바로 ‘구천상제(九天上帝)’이시라는 뜻이다. 구천상제(九天上帝)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의 준말이며, 구천(九天)은 바로 상제께서 삼계를 통찰하사 건곤(乾坤)을 조리(調理)하고 운화(運化)를 조련(調練)하시고 계시는 가장 높은 위(位)임을 뜻하는 것이다. 상제(上帝)란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삼계대권(三界大權)으로 주재(主宰) 관령(管領)하시며 관감만천(觀鑑萬天)하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느님의 존칭이다.
‘신성 • 불 • 보살 등이’라는 말씀에서 볼 때 등(等)이라는 것은 신성 • 불 • 보살 외에 다른 의미를 가진 분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밝히지 않고 숨겨 두고자 할 때나 잘 모를 때를 등(等)이라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 수많은 사람이 수도하여 신성(神聖)이 되고 부처(佛)가 되고 보살(菩薩)이 되었는데 그 많은 신성 • 불 • 보살이 모두 구천에 가서 호소했다는 말인가. 여기에는 반드시 주체자(主體者)가 있는 것이 천지의 이치인 것이다. 등(等)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주체자를 숨겨 두고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밝혀 볼 때 신성 • 불 • 보살의 주체자가 바로 미륵세존인 것이다.
‘상제가 아니면 혼란에 빠진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호소하므로’라는 뜻은 신성 • 불 • 보살의 주체자이신 미륵세존께서 구천상제가 아니면 혼란에 빠진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는 뜻인 것이다.
• 미륵세존께서 구천 상제님께 호소하게 된 연유는 서양인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박힌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그는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사후(死後)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다.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다.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다.
하지만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天理)를 흔들어 놓는 결과를 나았다. 문명을 받게 된 인류가 자연을 정복하려는 등 끊임없이 죄악을 저지르자 마침내 신도(神道)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천도와 인사의 상도(常道)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道)의 근원(根源)이 끊어지게 되었다. 세상이 이 지경에 이르자 미륵세존을 주체로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상제께 하소연하였던 것이다.
• 미륵세존의 호소에 의하여 강세하신 구천상제께서는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오셨는데, 서양 대법국이라고 밝히신 대법국은 오늘의 프랑스를 말한다. 천계탑은 하늘에 있는 탑(塔)으로써 상제께서 먼저 서양의 프랑스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동토에 이르러 모악산 금산사에서 30년을 지내시다가 1871년에 인간의 몸을 빌어 강세하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금산사로 오시기 전에 먼저 서양 대법국 천계탑으로 내려오셨는데, 그 후 프랑스에서는 하늘에 있는 이 천계탑을 증명하는 탑이 세워졌으니 그것이 바로 에펠탑이다. 상제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지 15년 후인 1886년 5월 1일에 프랑스에서는 샹드마르스 위에 철(鐵)로 된 3백 미터 높이의 탑을 짓기 위해 후보작들을 현상 공모한다는 내용의 법령이 공포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철(鐵)로 탑을 세우려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서양 사람들은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기계 문명을 반영하는 가장 상징적인 물질이 바로 ‘철(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동양의 역학(易學)으로 풀어보면 철은 금(金)인 것이며 금은 가을, 즉 후천(後天)의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탑의 높이를 3백 미터로 한 것 또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3이란 숫자는 세 분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탑은 당시까지 세계에 존재하는 어떠한 건물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당시까지 가장 높았던 건물은 미국 워싱턴에 있었던 높이 1백 69미터의 석조건물로써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기 위해 1885년에 완공된 워싱턴 모우먼트(Washington Monument)였다고 한다.
에펠탑의 건설을 두고 프랑스에서는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갔다고 하는데, 옛 경관을 바꾸기를 싫어하는 구시대의 사고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 시대와의 논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존의 판에서 기득권을 차지하여 자기 자리를 놓치기 싫어하는 보수세력과 새 시대로의 변혁을 요구하는 개혁세력과의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논쟁과도 같다고 하겠다. 이 탑의 현상 공모에 응시한 사람은 자그마치 7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7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현상 공모에 당선된 사람은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었다.
(에펠(Eiffel)은 1832년 디종에서 태어나 1923년 파리에서 숨을 거둔 프랑스가 자랑하는 건축 기술자로서 특히 철 구조물에 있어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는 가라비(Garabit) 고가교(高架橋)를 만들었으며,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철 구조물 부분을 제작하였다.) 에펠은 이 탑의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마시키고 설득하기 위해 “프랑스는 에펠탑이 있으므로 해서 3백 미터 높이의 깃대에 국기를 휘날릴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드디어 1887년 1월 28일 파리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펠탑 건설을 위한 첫 곡괭이질이 시작되었다. 공사는 3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달려들어 곡예사처럼 일을 했다고 한다. 차곡차곡 공사가 진행된 에펠탑은 25개월만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때맞춰 에펠탑 완공을 기념하는 박람회가 개최되었고, 박람회가 열리는 가운데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첫선을 보이게 된 에펠탑은 세계인의 주목과 사랑을 한 몸에 받기 시작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탑이 바로 에펠탑인 것이다. 상제께서 서양 대법국 천계탑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프랑스에 에펠탑은 이렇게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 에펠탑은 20년 후에는 해체되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 에펠탑을 건설한 회사가 그 장소를 빌려 쓰는 조건이 20년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에 이 탑은 해체의 위기에 봉착하였는데, 그러나 에펠탑의 건설을 반대했던 운동이 있었던 것처럼 해체를 반대하는 운동이 극렬히 일어났다. 그런데 때마침 기술이 진보하여 무선 통신이 탄생하여 에펠탑을 구제할 수 있었다. 에펠탑 정상에 무선 안테나가 설치되고 이로 인해서 대서양을 넘나드는 전파를 보내는 역할을 할 수 있었으니 에펠탑을 해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에펠탑은 새로운 통신 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각종 첨단 장비로 무장하게 되었는데 1918년에는 라디오 방송을 위한 안테나가 설치되었고, 1957년에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설치되었으며, 현재는 기상 관측 장비와 항공 운항 장비까지 가세되어 에펠탑을 해체하자는 말은 없어진 것이다.
이 탑이 전파를 보내는 탑으로 쓰임은 상제께서 인세에서 천지공사를 마치시고 해탈초신(解脫招身)으로 상계(上界) 천존제위(天尊帝位)에 임어하셔서 삼계를 통찰(統察)하시고 무한무량(無限無量)한 세계를 관령(管領)하시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 구천상제께서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셔서 삼계(三界)를 둘러보시고 천하를 대순(大巡)하셨는데, 삼계라는 것은 천계(天界), 지계(地界), 인계(人界)라는 뜻으로써 상제님께서 ‘천계, 지계, 인계를 둘러보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상제께서 ‘천하를 대순하셨다’ 함은 천하를 막힘 없이 두루 크게 돌아 보셨다는 뜻이다.
그런 연후 ‘동토(東土)에 그쳤다’ 하심은 우리 한반도를 역학적으로 풀어보면 동토(東土)인 것이다. 바로 동방의 땅 끝 나라인 여기 한반도에 와서 순행(巡行)을 마치시고 머무르셨다는 것이다.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셨다’는 것은 한국 전라북도 전주의 모악산에 위치한 금산사 삼층전의 미륵삼존불상에 임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임하셔서 30년을 지내셨다.
• 구천상제께서 금산사에 임하여 계시면서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大道)를 세우게 하셨다가 갑자년(甲子年, 1864년)에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스스로 세상에 내리기로 정하셨다.’는 내력은 이렇다.
최제우는 1824년 경상북도 월성군(현재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龜尾山) 아래서 최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성묵(性默), 초명은 제선(濟宣), 호는 수운(水雲)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 최옥은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명망이 높았던 근암공(近庵公)으로, 이후 몰락하여 가세가 기울었다.
최제우는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기울어 가는 가세와 당시 조선말의 불안정한 사회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1844년부터 10년 동안 도를 닦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였다. 이 구도행각(求道行脚)의 유랑에서 부패한 관리들의 핍박으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보았고, 양반 • 상놈의 구분과 남존여비, 적서차별의 억울함을 가진 백성들의 비애를 보았으며, 그릇된 정치가 행해지고 있는 나라 실정에, 서양과 일본제국 세력이 조선을 넘보고 있었으니 백성들은 안주하지 못하고 세상도 크게 어지러워짐을 보고 한탄하였다.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 서구의 동방 침략이 중국에까지 미쳐 1840년의 아편전쟁, 1856년의 영 • 불 연합군의 베이징(북경) 함락 등 큰 사건이 일어났고, 이웃 일본은 먼저 서구 물질 문명을 받아들인 후 군사력을 증강하여 외국으로 세력을 펼쳐 나갈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봉건 정부의 병폐인 당쟁과 세도정치를 임진 • 병자 등의 큰 난리를 치르고도 시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의 내분과 정부의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으며 지방의 말단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핍박하고 있었으니, 나라 안팎의 정세에 백성들은 안주할 곳을 잃고 재래의 비결인 『정감록(鄭鑑錄)』 등을 들고 피난처를 찾거나, 서교(西敎)에 귀의하여 난을 피하려는 등 민족적 위기가 점증되고 있었다.
그러니 최제우는 이러한 어지럽고 병든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결심하고 1856년 경남 양산에 있는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도를 닦기 시작하여 1857년에 천성산(千聖山)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를 드리고 정성을 드렸다.
1859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경주에 돌아와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치고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억울한 민생과 병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경신년(庚申年, 1860년) 4월 초 5일에 상제로부터 강(降)을 받았다. 『동경대전』의 "포덕가"에 그 내용을 보면,
뜻밖에도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執證)할 수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神仙)의 말씀이 있어서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또 묻기를 “그러면 서도(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요, 또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하였다. 이 때 나이 37세였다.
상제로부터 계시를 받은 최제우는 많은 문답과 시험을 거쳐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則汝心)’라는 결정적 계시에 홀연히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자신 속에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원리를 깨닫고 주문(呪文)을 적어내어 포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국가의 기강과 사회 도덕이 모두 타락하여 국가는 외세에 대응할 힘이 없었고, 서민들은 각종 차별주의적인 제도에 속박되어 권익이 보장되지 못하고 억압당하여 억울함에 한이 맺혔으니, 최제우는 이러한 세상을 구하고자 먼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포덕천하(布德天下)의 기치를 내걸고 구국제민(救國濟民)을 표방하는 한편, 당시 외래 종교인 서교(西敎)에 상대되는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정신을 배양했다.
그리고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한민족의 전통적인 제천신앙(祭天信仰)의 핵심인 한울님(하느님)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 자신과 세계를 구하자는 신앙이며, 기존의 낡은 세계와 질서를 근본적으로부터 부인하는 개벽사상(開闢思想)이었다. 이러한 사상이 농민, 천민, 유생에 이르는 광범위한 계층에 ‘후천 개벽 세상’이 도래됨을 공포하며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무차별의 평등 세상을 선포한 후천 개벽설(開闢說)은 억압받던 기층 농민, 천민들에게 열광적인 희망을 주었던 반면, 상류층의 양반 계급과 조정에서는 위협의 대상이었다. 그 와중에 동학은 1861년 6월부터 포교 활동을 시작하여 삽시간에 수많은 신도들을 확보했다. 동학 세력의 교세가 확장되어 나가자 당시 혼란한 시국에 빠져 있던 조정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최제우는 1862년 전라도 남원 보국사(輔國寺)에 들어가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안심가(安心歌) 등을 지어 서한(書翰) 형식으로 신도들에게 보내어 수도법을 가르치고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최제우가 1862년 3월에 경주로 돌아오게 됨을 계기로 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포교 활동이 시작되어 다시 교세가 확장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1862년 9월 최제우가 경주 관아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되면서 그 포교 활동이 순탄치 않게 되자 교통(敎統)을 이을 후계자 선정과 교의를 정립하기 위한 경전(經典) 편술(編述)과 동학의 기본 조직인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하고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두어 관장하게 하는 등 대폭 활동의 방향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14개 접소에 접소마다 교인이 3,000명에 달했다. 그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大道主)로 삼고 8월 14일 교통(敎統)을 계승시켜 교주(敎主)로 삼았다.
그 해 최제우는 지방 접소를 순회하다가 1863년 12월 9일에 경주 용담정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갑자년(甲子年, 1864년) 3월 10일에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大邱) 장대(將臺)에서 사형되었다. 이 때 최제우의 나이 41세였다.
최제우는 사형 당시, 북향사배(北向四拜)를 하고 유언하길,
‘더디도다 더디도다
무극대운(无極大運) 팔 년이 더디도다.
전 사십은 나려니와
후 사십은 누구련고.’
라고 하였다.
최제우의 유언대로 상제님께서 8년 후 신미년(辛未年, 1871년)에 세상에 강세(降世)하셨다. 여기에 대하여 [전경 교운 1장 9절]에 상제께서 밝히신 말씀을 보면 ‘최제우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 대도(大道)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 1864년)에 드디어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고 하셨다.
즉 이제 진멸지경에 처한 천하창생과 무너져 가는 천지를 상제가 아니시면 어느 누구도 구하고 건질 수 없으므로 드디어 상제께서 직접 강세하기로 정하셨던 것이다.
(2)【교운 1장 58절】
상제께서 어느 날 한가로이 공우와 함께 계시는데, 이 때 공우가 옆에 계시는 상제께 ‘동학주(東學呪)에 강(降)을 받지 못하였나이다’라고 여쭈니 ‘그것은 다 제우강(濟愚降)이고 천강(天降)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만일 천강(天降)을 받은 사람이면 병든 자를 한 번만 만져도 낫게 할 것이며 또한 건너다보기만 하여도 나을지니라. 천강(天降)은 뒤에 있나니 잘 닦으라’고 일러주셨도다.
[주해]
강(降)이란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내려오는 기운을 말한다. 따라서 천강(天降)이란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운이다.
구천상제께서 최제우에게 내려 주신 주문은 열석 자(13字)로써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였으며, 여기에 최제우가 적은 ‘至氣今至 願爲大降’의 여덟 자(8字)를 더한 스물한 자(21字)가 동학주(東學呪)다.
이는 ‘하늘의 주인을 모시고 영원한 세상까지 잊지 아니하는 조화를 마음에 정하면 만사를 알게 된다’는 상제님의 가르침에 최제우(崔濟愚)가 ‘지극한 기운을 크게 내려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간절한 청원(請援)을 더한 것이다. 그런데 최제우는 하늘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밝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의 전헌을 넘지 못하여 대도(大道)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상제님께서는 내려주신 신명, 즉 천강(天降)을 거두시게 되니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주문은 더 이상 천강(天降)이 되지 못하고 제우강(濟愚降)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최제우의 주문을 이어받은 동학(東學) 교도들의 동학주(東學呪)는 제우강(濟愚降)이지 천강이 아니라는 말씀이시다.
‘천강(天降)은 뒤에 있나니 잘 닦으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은 상제님께서 직접 강세하셔서 처결하신 천지공사의 도수에 따라 이후 하느님의 정체를 밝히는 천부적 종통 계승자에 의해 천강이 있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즉 구천상제님 이후 천부적 종통 계승자인 도주 조정산, 도전 박우당, 대두목 박성구에 의해 천강이 이어지고 세분 하느님의 정체가 모두 밝혀지는 대두목의 때가 되면 진정한 시천주(侍天主)가 되어, 즉 세 분 하느님을 모실 수가 있어, 천강(天降)이 있게 되므로 잘 닦아 나가라고 하신 것이다.
(3)【예시 2절】
상제께서 대순하시다가 선망리의 한 여인이 근친하러 갔을 때, 그 여인의 몸을 하늘의 불덩어리로 덮고 이상한 향기와 맑은 기운이 가득히 찬 방에서 신미년(辛未年) 9월(九月) 19일(十九日)에 광구천하하기 위해 강세하실 것이 예시되었느니라.
[주해]
• ‘상제께서 대순(大巡)하셨다’ 함은 구천상제께서는 천하를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이 크게 돌아보셨다는 것이다.
‘선망리의 한 여인’이란 이후로 구천상제님의 모친이 되 실 분으로 성(姓)은 권(權)이요, 성함은 양덕(良德)으로서 전라도(全羅都)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선망리 (仙望里) 강씨(姜氏) 가문(家門)으로 시집을 갔다가 친정인 고부군(古阜郡) 이평면(梨坪面) 서산리(西山里)로 근친 가서 계셨는데 권씨 부인이 어느 날 꿈에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몸을 덮으면서 천지가 밝아지는 꿈을 꾼 후 그 뒤로 태기가 있더니 열석 달만인 신미년(辛未年) 9월 19일에 상제께서 광구천하하기 위해서 강세하셨다. 상제께서 탄강(誕降)하실 때 유달리 밝아지는 산실(産室)에 하늘로부터 두 선녀가 내려와서 아기상제를 모시니 방안은 이상한 향기와 맑은 기운이 가득 차고 밝은 기운이 온 집을 둘러싸고 하늘에 뻗쳐 있었다.
구천상제님의 부친은 성(姓)은 강(姜)이요, 성함은 문회(文會)이며 자는 흥주(興周)이시다. 구천상제께서 탄강하신 곳은 예로부터 봉래산(蓬萊山) • 영주산(瀛州山, 一名 神仙峰) • 방장산(方丈山)의 세 산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어 오던 곳이었다. 방장산(方丈山)으로부터 내려오는 산줄기에 망제봉(望帝峰)과 영주산(瀛州山)이 우뚝 솟으니 그 뒷 기슭과 함께 선인포전(仙人布氈)을 이룩하고 있는 곳이다. 망제봉(望帝峰)의 산줄기가 기복연면하여 시루산을 이룩하였다. 이 시루산 동쪽 들에 객망리(客望里)가 있고 그 산 남쪽으로 뻗은 등(燈) 판재 너머로 연촌(硯村) • 강동(講洞) • 배장골(拜將谷) • 시목동(枾木洞) • 유왕골(留王谷) • 필동(筆洞) 등이 있으며 그 앞들이 기름들[油野]이오. 그리고 이들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가 뻗친 앞들에 덕천사거리(德川四街里) 마을이 있고 여기서 이평(梨坪)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으면 부정리(扶鼎里)가 있고 그 옆 골짜기가 쪽박골이다.
객망리는 강세하시기 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 부르다가 강세하신 이후로는 객망리(客望里;손바래기)라 부르더니 지금은 신월리(新月里) 새터로 고쳐 부르고 있는 곳이다.
• 구천상제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性)은 강(姜)이요, 존휘는 일순(一淳)이고 자함은 사옥(士玉)이시며,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다.
이 세상에 성씨(姓氏)로는 풍(風)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 • 풍신(風身) • 풍골(風骨) 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씨(姜氏) 성이 나왔으니 곧 성(姓)의 원시(原始)가 된다. 그러므로 개벽시대(開闢時代)를 당하여 원시반본(原始返本)이 되므로 강씨(姜氏) 성이 일을 맡게 되었다.
강씨(姜氏)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原始姓)이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니 중국(中國) '광동 강씨보(廣東姜氏譜)'에 ‘공좌태조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組以定天下後煬帝簒位公以退野)’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 ‘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隨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의 기록이 있는 바와 같이 진주(晋州) 강씨(姜氏)는 중국(中國) 수양제(隨煬帝)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 왔다.
시조(始祖) 이식(以式)으로부터 31대(三十一代) 자손 세의(世義)가 고부(古阜)로 낙향한 후 6대(六代)에 진창(晉昌) • 우창(愚昌) • 응창(應昌) 삼 형제도 이 곳에 살았었다.
객망리에 강씨 종가인 진창 어른부터 6대에 이르렀을 때 구천상제께서 강세하셨으니, 때는 신미년(辛未年) 9월 19일인, 즉 조선(朝鮮) 고종(高宗) 8년이며, 단기로는 4204년(四千二百四年)이고, 서기로는 1871년 11월 1일 이었다.
• 상제께서 구천에 계시자, 원시의 모든 신성 • 불 • 보살이 회집하였을 때 주체자(主體者)인 미륵세존(彌勒世尊)께서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구천상제께서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한국의 전라도 전주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에 30년을 머물면서 최제우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최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 1864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 1871년) 9월 19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의 강씨 가문에 인간의 몸을 빌려 강세하시니 존호가 증산(甑山)이시다. 구천상제께서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라 천지신명이 모여 ‘구천상제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 하므로 ‘괴롭기 한량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고 [전경 공사 1장 9절]에서 밝혔다.
그리하여 구천상제께서는 선천의 상극(相克) 세상에서 원(怨)으로 인해 생긴 모든 불상사를 해소하기 위해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시고, 후천의 무궁한 선경의 운로(運路)를 열어서 선천에서의 상극에 따른 모든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道)로써 세계의 창생을 널리 건지려고 순회주유(巡廻周遊)하시며 천지를 개벽(開闢)하는 공사를 행하셨으니 천하창생들은 상제님의 무량한 덕화를 입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