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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여호수아 24,14-29
마태오 19,13-15
깨끗한 빈손의 진리
갈릴래아에서 공동체설교(마태 18장)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옮겨가셨다.
이제 예수님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으로, 당신을 잡아 심문하고 사형선고를 내릴 백성의 원로와
대사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까지의 활동기간을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했다.
마태오복음은 대체로 마르코복음 10장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19,1-20,34)를 엮었다.
여기에는 마태오의 독자적인 사료로 보이는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생활’(19,10-12)에 대한 가르침과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20,1-16)가 첨가되어 있다.
느닷없이 나타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논쟁을 벌인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이다.
마태오는 마르코복음(10,13-16)을 그대로 따르면서 두 부분을 삭제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려와서 예수께 축복을 요청하자
제자들이 먼저 이들을 나무랐다고 한다.(13절)
마르코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14절)
하고 말씀하시기 전에 화를 내셨다고 했는데, 마태오는 ‘화를 냈다’는 부분을 삭제하였다.
마태오는 화를 낸다는 것이 예수님의 성정(性情)에 어울리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마르코복음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5절) 라는 말씀도
마태오는 뺐다.
그 이유는 마태오가 이 말씀을 이미 공동체설교의 첫 번째 규범(18,3)에
삽입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가진 것 없는 이들과 보잘 것없는 이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가까이하신다. 이런 부류에 물론 어린아이들도 속한다.
어린아이들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모자라고 불완전하며,
부모와 선생 등 그 사회의 성인(成人)들에게 전적으로 의탁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성인들이고 미성년자들이다.
어린아이들의 표본은 배움과 수용의 자세에 있다.
예수께서 축복을 청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오려던 어른들을
제자들이 나무란 것에 화를 내셨다면(마르 10,14),
제자들로 하여금 어린아이들의 표본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기대면 기대수록
다른 것을 믿거나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믿음과 수용 외에 어떤 것도 이를 받을 수 없다.
바로 어린아이들의 가진 것 없는 빈손과 설레며 기대하는 마음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태도이다.
이 태도의 상징인 이마(머리) 위에 예수께서는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15절)
가톨릭교회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리신 축복에 힘입어
유아세례와 첫영성체 신학을 정립하였다.
아이들이 비록 자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자신의 지력과 능력으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하여
그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의 머리 위에 예수님의 축복이 깃들여 있고,
그래서 그들이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도 늘 어린아이처럼 배움과 수용의 태도를 가진다면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14절)이 된다.
아이들의 미숙한 신앙 뒤에 어른들의 강한 신앙이 후견(後見)으로 자리하고 있음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의 깨끗한 빈손과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을
상업수단으로 삼거나 거기에 아무 것이나 가져다 주려는 어른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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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철 신부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여호수아 24,14-29
마태오 19,13-15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미사가 끝나면 제의방은 어린이들로 북적거립니다.
제가 사탕을 나누어주기 때문이지요.
그 꼬마 아이들이 “신부님! 사랑해요” 하면서 제 볼에 뽀뽀를 할 때면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어색해서 제의방에 들어오기를 머뭇거리는 친구의 손을 이끌며
“제 친구예요” 하고 소개하는 아이도 있고,
“동생 것도 하나 주세요” 하며 집에 있는 동생 몫까지 받아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성체를 달라고 보채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는 제게도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제가 퇴장하자마자 달려와 안기는 그 아이들을 보면
하늘 나라가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 차지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미사 중에 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좋아라 하면서 방긋 웃는 아이들,
엄마 손 잡고 봉헌하러 왔다가 제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아이들,
제가 다른 아이들만 안아주고 자기에게는 신경 써주지 않는다며 기다리다 울어버리는 아이들….
저 역시도 그런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사탕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다 주고 싶은데,
주님 보시기에는 오죽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교구 임문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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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이 수녀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여호수아 24,14-29
마태오 19,13-15
우리는 하느님!
가끔 거리에 나서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
몇 해 전 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저기 하느님 가신다!” 하는 어떤 꼬마의 말을 듣고 송구스럽게도
혹시 나를 두고 하는 소리면 어쩌나 하고 얼른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이 요정 같은 아이가 엄마 아빠 손을 끌고 와서는
‘여기 계시잖아, 하느님!’ 하며 나를 꼭 찌르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홍당무가 되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지하철 안으로 달려갔던 적이 있다.
천진무구한 어린아이한테는 우리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모습이 커다랗게 보이나 보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맑다. 그들 안에는 ‘자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아이 적 순수한 모습이 아닌 거인처럼 커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모습 안에서는 좀처럼 하느님을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어린아이가 자주 등장한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어린아이가 자기가 가진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모두 내놓았다.”라며, 사심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작은 아이를 소개한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아낌없이 내어 놓은 물고기와 빵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빵의 기적을 이루신다.
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때 예수님은 사랑의 기적을 이루신다.
이 어린이는 어떤 아이일까?
예수께서는 온 우주의 주인이셨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이루시려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성경이 전하는 어린이란 결코 미성숙하고 분별력이 없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은 어른들처럼 표리부동하지 않고 안팎이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
세상의 절대 권력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 아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절대적 신뢰의 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하는 순수한 사랑이 어린이의 마음 안에 담겨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아빠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마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래서 성경은 작은 자, 어린이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임을,
그리고 이 마음 안에 항상 당신이 일하고 계심을 알려주고 있다.
샬트로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전의이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