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1970년대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류한다. 특히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 1979)에서 ‘포스트’의 성격을 부각시킨다. 리오타르는 ‘모던’의 성격을 거대한 이야기로 특징짓는다. 이 거대한 이야기란 이성주의 시대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꿈꾸었던 거대한 계획을 말한다. 이들은 객관적인 학문, 보편적 도덕과 법률 그리고 자율적인 예술을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말할 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보편화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배양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아발견, 도덕의 진보, 정의로운 사회와 제도의 실현, 인류의 행복증진이 가능할 것이라는 거대한 계획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계획은 파산되었다. 이 거대한 계획은 오히려 일상생활의 가치를 오염시키고 무한한 자기실현의 요구와 과도하게 자극된 감수성을 강조하는 주관주의가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보편성과 총체성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려했던 하드웨어중심의 거대한 이야기는 5~6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리오타르는 헤겔이나 맑스나 휴머니즘 철학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에 부합하는 소프트웨어 체계의 작은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새로운 질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난 40년 동안 인공두뇌와 컴퓨터, 정보저장과 자료은행과 단말기 등의 등장은 우리의 지식의 체계를 보편화시켰다. 지식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이 옳은가를 묻지 않고 무엇이 쓸모있으며 어느 만큼 생산성이 있는가가 문제이다. 이제는 인간의 정신적 삶이나 인류의 해방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는 말의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컴퓨터 시대의 지식문제는 이제 정부의 문제 이상의 것이 되었다. 규제와 재생산의 기능이 관료의 손을 떠나 기계로 넘겨졌다.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는 정보를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모던적 신앙은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에서 학문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수행성(performativity)이다. 즉 가장 이상적인 투입/산출관계를 가져오는 것이다. 과학자, 기술자 그리고 기구는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힘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말하자면 지식의 장사화(mercantilization)가 이루어진다. 교육은 단말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선생의 역할을 기계가 부분적으로 대신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자료의 효율적인 활용이다. 자료은행(data-bank)은 내일의 백과사전이다.
이런 사회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보편성이나 총체성으로 짜여진 권위에 맹종하기보다는 단편화된 작은 이야기의 창조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이나 맑스의 인간 해방과 의미의 해석학까지 근대 계몽주의 설화의 성격을 지닌 거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리오타르의 작은 이야기 전략은 하버마스에 의해 공격받는다.
이제 포스트구조주의자들까지 하버마스와의 논쟁에 개입한다. 변증법적 전통을 이어가면서 하버마스가 제시한 합리적 의사소통이론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야기의 틀이다. 합리적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정당성이 결여된다는 것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비판이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을 안티모더니즘으로 부르면서 그들은 신비적인 방식으로 근대 세계의 밖으로 도피하여 스스로 감정의 영역으로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신실용주의자인 로티 역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의사소통을 결여한 극단적인 건조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