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菩提心)을 닦는 차례인 인과칠결(因果七決)
보리심(菩提心)을 닦는 차례(次第)에 인과칠결(因果七決)이라는 것이 있다.
인과칠결(因果七決)이란 정등각심(正等覺心)은 증상의요(增上意樂)에서 오고, 증상의요(增上意樂)는 자비심(慈悲心)에서 오고, 자비심(慈悲心)은 사랑(慈)에서 오고, 사랑(慈)은 보은(報恩)에서 오고, 보은(報恩)은 염은(念恩)에서 오고, 염은(念恩)은 지모(知母)에서 온다는 것을 말한다.
[참고] 지모(知母)는 어떤 것인가.
지모(知母)라 함은 어머님의 은혜(恩惠)에 대한 신념(信念)과 확신(確信)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모(知母)는 모든 불보살지(佛菩薩智)를 생기게 하는 모(母)가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表現)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의 항목(項目)이 있다. 하나는 이러한 차제(次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일깨우고, 다음은 차제(次第)에 따른 실질적인 수행이다. 차제(次第)에 대한 바른 이해(理解)를 일깨우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대승도(大乘道)의 뿌리는 결국 대자비(大慈悲)라는 것과 모든 중생들의 생사(生死)가 대자비(大慈悲)의 원인(原因)과 결과(結果)라는 도리이다.
대승도(大乘道)의 뿌리는 자비심(慈悲心)이다. 모든 중생들을 윤회(輪廻)에서 구하기 위하여 먼저 서원(誓願)을 세워야 하는데, 모든 중생들을 구제(救濟)하려는 자비심(慈悲心)이 없다면 대승(大乘)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자비심(慈悲心)이 대승도(大乘道)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서원(誓願)은 자량(資糧)을 광대(廣大)하게 수행(修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행(難行)의 광대(廣大)한 자량(資糧)에 들어갔다면, 정행(正行)의 근거(根據)에 들어간 것이다. 비록 정행(正行)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무수하고 무변한 저열(低劣)한 중생들을 가르치기가 매우 어려움을 관찰하고 스스로 위축되어 소승(小乘)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대승도(大乘道)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비심(慈悲心)을 광대(廣大)하게 증장(增長)하여, 스스로의 고락(苦樂)을 돌보지 않고, 타인(他人)의 이익(利益)을 위하여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는 모든 자량(資糧)을 원만(圓滿)하게 하여야 한다.
이처럼 모든 보살(菩薩)은 대자비(大慈悲)로 자기를 돌보지 않고, 타인(他人)을 구하기 위한 자량(資糧)을 쌓고, 지극히 어려운 행(行)과 오랜 겁에도 모든 중생들을 완전히 성숙(成熟)시키기 위하여 고(苦)를 싫다고 하여 버리지 않고, 낙(樂)을 즐겁다고 하여 취하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난행(難行)에 들어간다면, 오래지 않아 모든 자량(資糧)을 원만(圓滿)하게 구족(具足)하고, 조금도 의지(依支)할 바 없이. 모든 것을 아는 통지(通知)의 지위(地位)를 얻게 된다. 따라서 모든 불법(佛法)의 뿌리는 자비(慈悲)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과위(果位)를 얻을 때, 소승(小乘)과 같이 적멸(寂滅)에 머물지 않고, 허공(虛空)과 같은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오직 대자비(大慈悲)의 힘에 연유(緣由)한 것이다.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완전히 섭수(攝受)하였기에 모든 불세존은 일체(一體) 원만(圓滿)의 자리(自利)를 얻었더라도, 중생계(衆生界)의 구경(究竟)까지 안주(安住)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불세존(佛世尊)이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 인(因)은 바로 대자비(大慈悲)이다. 비유하자면, 곡식은 처음에는 씨앗(種子), 중간에는 물(水分), 마지막에는 성숙(成熟)이 중요한 것과 같이, 부처의 곡식은 처음부터, 중간,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자비(慈悲)가 가장 중요한 인(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