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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물리학자들의 학문적계보
머리말
1900년 막스플랑크(Max Planck)의 양자가설제창 이후 1914년 프랑크(Franck)와 헤르츠(Hertz)의 양자
가설을 입증하는 실험이 있었고 1923년에는 콤프튼(Compton) 효과가 발견되었다.
드브로이(de Broglie)는 1924년 박사논문에서 물질파이론을 제기하였다.
이듬 해인 1925년에는 하이젠베르그(Heisenberg)가 양자역학에 관한 첫번째 획기적 논문을 발표하였고
곧이어 보른(Born), 요르단(Jordan)의 논문과 하이젠베르그, 보른, 요르단의 3인 공동논문이 발표되어
행렬역학이 확립되었다.
1926년 초에는 드브로이 논문에서 영감을 얻은 슈뢰딩거(Schrdinger)가 파동역할을 제안하였고 이 두
가지 방식이 동등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파울리(Pauli)는 1925년에 배타율을 발표하였다. 파울리는 양자역학을 "소년물리학(Knaben Physik)"
이라고 부를 정도로 당시 20대 젊은 학자들이 양자역학 발전을 주도하였다.
울렌벡(Uhlenbeck)과 가우드스미트(Goudsmit)가 1925년 11월에 전자의 스핀을 제창하기 전에 크로니크
(Kronig)가 먼저 스핀을 제안하였으나 파울리와 보아(Bohr) 등의 극렬한 반대로 논문을 발표하지 못했다.
위대한 학자들도 실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크레이머스(Kramers)는 세계 최초로 1926년 5월에 우트레흐트(Utrecht) 대학에서 양자역학을 강의하였다.
1928년 초에 디락(Dirac)은 양자역학을 상대론과 접목시킨 이론을 제창하게 되어 유럽의 20대 물리학자
들이 양자역학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들의 학문적 업적이 가능했던 것은 훌륭한 학문적 전통이 있는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들 밑에서 연구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 1은 약 130명의 유럽물리학자들의 학문적 계보를 보여준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수상이 된 후 많은
유태인과 자유주의적 물리학자들을 추방함으로서 이들은 대부분 미국과 영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미국
에서 원자핵폭탄개발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까지 유럽이 물리학의 중심지였다면 그 후에는 미국이 세계물리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2000년 현재 미국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71명인데 비하여 독일 21명, 영국 19명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0세기 초 유럽대학의 학위제도
1945년 제2차대전 패망 이전에 독일의 대학에는 학사나 석사학위가 없었다.
초중고등학교 13년 교육 후에 대학에 입학하면 3년 후 박사논문을 제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언급된 많은 학자들이 20세 초반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공과대학에서는 디플롬(Diplom)을 받고 졸업한 후 다시 박사학위를 받아야 했고 그 제도
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의학과 법학부 학생들에게는 대학에서 졸업장을 주지 않고 국가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졸업장을 대신하였으며 지금도 이와 같은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물론 의학박사와 법학박사 제도는 따로 있다.
1925년 독일에서는 4156명의 박사학위가 수여되었다. 그 중 철학부 (수학 및 자연과학 포함)에서는
1154명의 박사가 공과대학에서는 34명의 이학박사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대학강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수자격학위(Habilitation)를 추가로 받아야만 한다.
독일에서는 대학강사를 "Privat Dozent"라고 부르며 이들 강사 중에서 정교수 또는 부교수를 발탁한다.
정교수는 현재 C-4교수라고 부르나 과거에는 "Ordentliche (Ordinary) Professor"라고 불렸다.
부교수는 현재 C-3교수라고 불리우나, 과거에는 Ausserordentliche (Extraordinary) Professor라고 불렸다.
일단 부교수로 임명된 사람은 타 대학으로 옮기기 전에는 승진이 불가능하며 부교수는 학장이나 총장
이 될 수 없다.
정교수는 모두 석좌교수(Lehrstuhl)이며 연구소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그 밑에 부교수 1~2명, 조수가 여러 명 있게 되며 기술원과 비서가 따르게 된다.
이들의 인건비와 약간의 연구비가 주정부로부터 지급된다. 물론 외부연구비를 받아다가 더 많은 인원
을 고용할 수도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은 모두 같은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교수직도 3국 사이에는 국경의 제한
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박사지도교수를 師父(Doktor Vater)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이유로 독일학자들의 사제관계를 밝히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다.
이태리의 경우에도 독일처럼 당시에는 학사, 석사학위가 없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박사학위를
많이 수여하지 않았다.
라더포드(Rutherford)는 뉴질랜드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캠브리지대학에 입학하여 3년 후 다시 학사학위
를 받았다. 당시 라더포드는 27세였으며 그 해 1898년에 캐나다 맥길대학에 정교수로 부임했다.
윌리암 브래그(William Bragg)도 1885년 캠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호주 아델레이드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전자를 발견한 톰슨도 학사학위 소지자이며 디락의 지도교수 파울러(Fowler)도 학사학위 소지자이다.
1926년경부터 캠브리지대학에서도 박사학위가 많이 배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캠브리지대학에서는 학사학위를 받은 후 Fellow가 되는 것이 독일의 박사학위와 동등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많은 학자들은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 출신이다.
그런데 이 대학에서는 학위를 수여하지 않고 소르본느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지도교수를 밝히는 것이 쉽지 않다. 페르미(Fermi)도 피사의 고등사범학교(Scuola Normale
Superiore)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는 21세 때인 1922년에 피사대학에서 받았다.
네델란드는 또 다른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대학입학 3-4년 후 학사학위와 비슷한 캔디데이트 학위를
받고 연구논문 없이 2-3년 더 공부하면 Dr.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Ph.D 학위는 독창적인 논문이 있어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고등학교 교사들은
Dr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대학졸업하면 Diplom, 약 3년의 연구와 논문이 통과하면 깐디다트(Candidate) 학위를 받으며
이 학위를 서방세계의 Ph.D와 동등하다고 본다. 다시 10여년의 연구 후 논문이 통과되면 Sc.D 학위를
받게 된다.
유럽국가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된 독특한 학위제도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유럽물리학자들의 사제관계
표 1은 유럽의 130여명의 물리학자들의 사제관계를 도표로 보여준다.
박사지도교수 또는 교수자격학위 지도교수는 실선과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으며 점선은 공동연구자
또는 친척관계를 나타낸다.
1920년대 유럽에는 캠브리지, 괴팅겐, 코펜하겐, 베를린, 쭈리히, 뮨헨과 라이덴(네델란드) 등이 물리학
연구의 중심지였다.
1925-26년 당시 여기에 있던 물리학자들의 명단이 그림 1에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림 2에는 이들 학자들의 연령 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유럽인이 아닌 사람들은 괄호 안에 표시
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1900-1908년생이므로 1925 -28년 양자역학의 발전시기에 나이는 20대였다.
그러므로 파울리는 양자역학을 "소년물리학(Knaben Physik)이라고 불렀고 당시 40대였던 보른에게는
양자역학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했다.
born in 1900 Pauli, Uhlenbeck, London, Joliot, Gabor, (Slater) 1901 Heisenberg, Fermi, (Pauling), (Lawrence) 1902 Dirac, Wigner, Jordan, Goudsmit, Kastler 1903 von Neumann, Thomas, Powell, Walton 1904 Gamow, Cherenkov, Kronig, Heitler, Neel, (Oppenheimer) 1905 Bloch, Mott, Segre 1906 Bethe, Goeppert-Mayer, Delbruck, (Tomonaga) 1907 Peierls, Jensen, (Yukawa) 1908 Landau, Weisskopf, Teller, I.M.Frank, Alfven |
1927년 가을에 하이젠베르그는 만 25세 때 라이프치히 대학 물리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피테 데비(Peter Debye)는 같은 해 역시 라이프치히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라이프치히도 중요한 물리학연구센터가 되었다.
슈뢰딩거는 1927년 가을에 플랑크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는 벤뵉(Gregor Wentzel)
이 임명되었다. 동시에 파울리는 1928년에 스위스연방 국립공과대학(ETH)에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프라그, 쭈리히, 베를린 그리고 프린스턴에서도 제자를 양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가 독일수상에 임명되면서 독일물리학의 판도는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또한 이오페(Abram F. Joffe)는 러시아인이지만 뢴트겐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도 쌍트페테르
부르그에는 이오페 연구소가 있다.
표에 실리지 않은 과학자들
표 1에 실린 과학자들의 제자이름을 모두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컨대 1928년 독일,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대학의 이론 물리학 교수 중 1/3가량이 좀머펠트(Sommerfeld)의
제자였다. 표 1에는 이 중 8명만이 표시되어 있는데 젤리거(Rudolf Seeliger), 에발트(P.P. Ewald), 크랏저
(Adolf Kratzer), 베커트(Karl Bechert), 자우터 (Fritz Sauter)와 라포르테 (Otto Laporte) 등도 좀머펠트의 제자
였다.
에발트(1888-1985)는 1921-37년에 스투드가르트대학(TH Stuttgart) 교수로 있다가 1937-49년에는 영국의
벨파스트(Queens University Belfast)에 있었고 1949년에 미국에 가서 부르크린공대(BPI)에 10년간 교수로
있었다.
라포르테(1903-1971)는 1926년부터 미시간대학 교수로 있었다. 그리고 자우터의 제자 중에는 2000년
노벨 수상자인 크뢰머(Herbert Kroemer)가 있다.
미국인 노벨수상자 폴링(Linus Pauling)과 라비(I.I. Rabi)도 뮨헨대학에서 좀머펠트의 강의를 들었다.
좀머펠트의 학맥은 가우스까지 올라간다.
Gauss → Dirichlet → Lipschitz → F. Klein → C.L.F. Lindemann → Sommerfeld
막스보른(Max Born)의 학맥도 가우스로 연결된다. 보른의 스승 힐버트(Hilbert)가 린데만의 제자였다.
브로흐(Felix Bloch)는 스위스인이며 하이젠베르그의 첫 번째 박사지도 학생이었다.
브로흐가 스탠포드대학에서 길러낸 박사생수를 상당하면 좀머펠트 → 하이젠베르그 → 브로흐로 이어
지는 물리학자의 수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수 있다.
막스보른의 제자 중 표 1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은 엘라써(W.M. Elasser), 노르드하임((L.W. Nordneim)과
보가스라브스키(S. Bogaslawski) 등이 있다. 막스보른은 1932년에 하이젠베르그와 같이 노벨상을 받지
못해서 불만이 많았고 1954년에야 노벨상을 받았다.
이때 하이젠베르그는 크게 안도했다고 한다. 막스보른은 1925년 하이젠베르그의 첫번째 양자역학
논문이 발표된 후
라는 식을 유도하였으며 이 식은 괴팅겐 시립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하이젠베르그는 비교환적(non- commutation) 특성을 가진 물리량이 메트릭스라는 것을 몰랐으나 보른과
요르단(Pascual Jordan)은 바로 알아보았다.
요르단은 말을 더듬어서 강연을 거의 하지 못했으며 나중에 나치스당원이 되었다.
막스플랑크는 1888년에 키르흐호프(G.R. Kirchhoff)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플랑크의 후임은 슈뢰딩거였다.
1897년에 막스아브라함(Max Abraham), 1907년에는 라이케(Fritz Reiche)가 플랑크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리제마이트너(Lise Meitner)는 볼츠만에게서 박사학위를 받고 플랑크로부터 교수자격학위를 받았다.
플랑크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을 많이 당했다. 큰 아들은 1차대전 때 전사했고 작은 아들은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그리고 딸은 애기분만 때 죽었다.
표 1에 포함시키지 않은 독일과학자 중에 필립레나드(Philipp Lenard 1862- 1947)와 요하네스슈타크(Joh
annes Stark 1874-1957)가 있다.
레나드는 음극선연구로 1905년에 노벨상을 받았고 슈타크는 전기장에 의한 스펙트럼의 분리현상(슈타
크효과)을 발견해서 1919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극심한 반유태주의자로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부정하고 새로 발전하는
양자역학도 유태인들에 의한 잘못된 학문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소위 아리안 물리학을 제창하였다.
이들은 하이젠베르그가 좀머펠트의 후임으로 뮨헨대학 이론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볼츠만은 자신의 학설이 제대로 인정을 못 받는다고 고민하다가 자살했고 그의 제자인 에렌페스트
(P. Ehrenfest)는 자신이 획기적 업적을 내지 못함을 비관해서 1933년에 자살하였다.
에렌페스트의 경우 유태인으로서 당시 히틀러에 의하여 유태인들이 박해받는 것을 비관한 것도 하나
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볼츠만(Boltzmann)의 제자 하제뇔(Hasenhrl)은 1차대전에서 전사하였다.
캠브리지대학의 카벤디쉬연구소에서도 많은 노벨상수상자를 배출하였다.
표에 나와 있지 않은 사람으로 1962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크릭(Francis H.C. Crick)과 와트슨(J.D. Watson)
이 있고 1973년에 라일(Martin Ryle)과 휴이쉬(Antony Hewish)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초대 카벤디쉬 석좌교수가 막스웰이었으며 랄리경(Lord Rayleigh)이 제2대였다.
톰슨(J.J. Thomson)이 3대였고 라더포드가 4대, 로렌스브레그(Lawrence Bragg)가 5대였다.
톰슨은 1897년에 전자를 발견하였고 채드윅(J. Chadwick)은 1932년에 중성자를 발견하였다.
양성자라는 말은 라더포드가 붙인 이름이다. 톰슨은 전자가 입자임을 증명해서 노벨상을 1906년에
받았고 그의 아들 죠지톰슨(G.P. Thomson)은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가짐을 증명해서 1937년에 노벨상
을 받았다.
카벤디쉬연구소에서 소련인 카피짜(Kapitza)의 역할은 특기할만하다.
그는 연구소에 무려 13년간을 있으면서 카피짜클럽을 만들어서 저명한 물리학자들을 초청해서 세미나
를 열었다. 여기에는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 학자들이 회원이었는데 연사들에게는 가차없는 비판과
공격을 퍼부었다.
카피짜는 라더포드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서 영국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도 되었다.
1934년에 소련에 일시 귀국했다가 붙잡혀서 다시는 영국으로 올 수 없었고 카벤디쉬에서 사용하던
실험장비를 소련에서 구입하여 계속 연구를 하였고 나중에 노벨상을 받았다.
디락의 지도교수였던 파울러(R. Fowler)는 라더포드의 사위였으며 1920년대 양자물리에 관해서 실질
적인 영국의 대표학자였다. 하이젠베르그, 파울리, 보아 등이 모두 파울러와 학문적 서신을 교환하였다.
캠브리지대학에는 루카시안(Lucasian) 석좌교수제도가 있는데 제2대가 뉴톤이고 스톡스(George G. Stokes)
가 제 13대, 라모르(J. Lamor)가 14대, 디락(P.A.M. Dirac)이 15대였다. 현재의 루카시안석좌교수는 17대
호킹(S. Hawking)이다.
디락은 스위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불어교사였으며 디락과 불어로만 대화하였다.
디락은 브리스톨 대학에서 전기공학 학사학위를 받고 2년간 수학을 더 공부한 후 캠브리지 대학원에
입학했으며 192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초에 디락방정식을 발표했으며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제창하였다.
1930년에는 "양자역학의 원리"라는 책을 출판하였으며 1932년에 30세의 나이로 루카시안 석좌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슐뢰딩거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디락의 친구 하이젠베르그는 파아노가 수준급이고 스키도 잘 탔으나 디락의 유일한 취미는 장시간
걷기였다. 미국인으로는 반부렉(John van Vleck)이 가까운 친구였고 러시아인으로는 이골 탐(Igor Tamm)
이 가까웠다.
디락이 미국에서 작고한 후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 디락의 기념패가 봉안되었다.
디락은 비그너(E. Wigner)의 누이동생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이미 자녀 둘을 가지고 있었다.
크레머스(H.A. Kramers)는 보아의 코펜하겐연구소에 9년을 머물러서 보아의 실질적 대변자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아를 교황, 크레머스를 추기경(His Eminence)이라고 불렀다.
보아는 계산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크레머스가 주로 계산을 했으며 그의 고전물리학 실력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BKS (Bohr- Kramers-Slater) 이론은 통계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주장하고 인과율과 광자를 부정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BKS이론은 1925년에 독일의 보테(Bothe)와 가이거(Geiger) 그리고 미국의 콤프튼-사이먼(Compton
-Simon) 실험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크레머스(Kramers)는 보아의 이론에 지나치게 잡착한 나머지 양자역학의 새로운 발전에서 뒤지게 되
었다. 그는 우트레흐트(Utrecht)와 라이덴(Leyden)대학에서 27명의 박사를 배출하였다.
많은 젊은 물리학자들이 보아의 코펜하겐 연구소에서 연구하였는데 표 1에서는 4명만이 표시되어
있다.
란다우(L.D. Landau)는 스스로 보아의 제자라고 주장하였다.
헬름홀츠의 제자 중에는 미국인 웹스터(A.G. Webster)가 있다. 그는 미국물리학회의 창설자이며 제 3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나 1923년에 클라크(Clark)대학이 물리학대학원 과정을 축소하려는데 반대하다가
자살했다.
유럽물리학자들의 미국, 영국 이주
1933년 이후 많은 유태인과 자유주의자들이 독일대학에서 해고되어 미국과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슈뢰딩거는 옥스퍼드에 갔다가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갔다.
막스보른은 캠브리지에 3년간 있다가 1936년부터 1952년까지 에딘바라(Edinburgh)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었다.
프랑크(James Franck)는 코펜하겐에 1년간 머물다가 1935-38년에는 존스합킨스대학, 1938-47년에는
시카고대학에 있었으며 미국의 원자탄개발에도 참여하였다.
울렌벡(G. Uhlenbeck)과 가우드스미트(S. Goudsmit)는 1927년에 미시간대학으로 갔으며 울렌벡은 나중
에 미국물리학회회장이 되었다.
가우드스미트는 미국물리학회잡지(Physical Review)의 편집장을 24년이나 했고 Physical Review Letters를
만들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중국인 우타유(吳大猶)가 있다.
스테른(Otto Stern)은 1933년에 카네기공과대학으로 갔으며 영화관람중에 작고하였다.
하이틀러(W. Heitler)와 런든(F. London)은 영국으로 갔으며 하이틀러는 영국에 계속 남아 있었으나
런든은 1938년에 미국에 가서 듀크(Duke)대학 교수가 되었다.
런든은 1953년에 로렌츠(Lorentz)메달을 받았다. 마이트너는 1938- 47년에 스톡호름에 있었으며 독일의
원자핵분열연구에 공헌이 있었으나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비그너는 1930년에 미국에 가서 프린스턴대학에 있었는데 1936-38년간은 위스콘신대학에 있었다.
비그너의 프린스턴 제자 중에는 바딘(John Bardeen)이 있는데 그는 트란지스터 발명과 초전도이론으로
두 번이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바이스코프(V. Weisskopf)는 1934- 36년에 파울리의 조수로 쭈리히에 있었고 1937년에 로체스터 대학
으로 갔다.
나중에 MIT교수와 CERN의 소장을 역임하였고 원자탄개발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MIT 제자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 겔만(Murray Gell-Mann)이 있다.
한스베테(Hans Bethe)는 1933년에 영국으로 갔다가 1935년에 미국으로 가서 코넬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원자탄개발사업의 이론책임자였으며 그 밑에 바이스코프와 파인만 등이 있었다.
파인만은 베테의 인격에 끌려서 전쟁이 끝난 후 코넬대학교수가 되었다.
헤르츠펠트(K. Herzfeld)는 1926년에 존스합킨스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존휠러(John Wheeler)의 지도교수
가 되었다.
발터고든(Walter Gordon)은 스웨덴으로 갔다가 거기서 1939년에 작고하였다.
그는 Klein-Gordon 방정식을 만든 사람이다. 벤뵉(G. Wentzel)은 1948년에 쭈리히를 떠나서 시카고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70년까지 근무하였다.
페르미는 부인이 유태인이었으므로 1938년에 이태리를 떠나서 콜럼비아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
에는 시카고대학 교수가 되었다.
페르미도 원자탄개발사업에 공헌이 많으며 그의 시카고 제자 중 4명; 쳄버린(Owen Chamberlin), 슈타인
버거(J. Steinberger), 양(C.N. Yang)과 리(T.D. Lee)가 노벨상을 받았다.
또한 로마의 제자중에는 세그레(E. Segre)가 노벨상을 받았다. 세그레는 1938년에 버클리대학 교수가
되었고 원자탄개발사업에도 참여하였다. 페르미의 제자 중에는 칼텍(Caltech)총장을 지닌 골드버거
(Marvin Goldlerger)가 있다.
보아의 제자인 가모프(Gamow)는 1934년에 죠지워싱톤대학 교수가 되어 22년간 재직하였다.
또한 보아의 제자인 일본인 니시나는 1928년에 일본으로 돌아가서 理化學硏究所(RIKEN)의 소장이
되었으며 도모나가는 그 당시 니시아의 제자였다.
토마스(L.H. Thomas)는 1929년 미국에 가서 오하이오주립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란데(Alfred Landé)도
1931년에 같은 대학 교수가 되었다.
질라드(L. Szilard)는 1938년에 미국으로 갔으나 비그너와 함께 아인슈타인을 설득해서 루즈벨트대통령
에게 원자탄개발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텔러(E. Teller)는 1933년에 독일을 떠났고 미국의 원자탄, 수소탄개발에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텔러가 오펜하이머의 공산당관련 주장자였기 때문에 미국물리학회장을 역임하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하바드대학을 졸업한 후 괴팅겐대학에 가서 막스보른의 지도 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돌아가서 버클리대학과 칼텍 교수가 되었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노벨수상자 윌리스램(Willis
Lamb)이 있다.
피터데비는 네델란드 사람으로 라이프치히, 베를린대학 교수로 있다가 미국에 가서 1940년부터 10년
간 코넬대학 교수로 있었다.
데비가 쭈리히에 있을 때 미국인 스트라튼(J.A. Stratton)이 ETH에서 1928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는 후에 MIT총장을 역임하였다.
마리아괘퍼트-마이어(Maria Gppert-Mayer)는 1931년에 남편 조셉마이어(J. Mayer)와 함께 미국에 가서
존스합킨스대학, 콜럼비아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일했다.
그는 큐리부인 이후 유일한 여성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브로흐(F. Bloch)는 스탠포드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52년에 스탠포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델뷰릭(M. Delbrck)은 1937년에 칼텍에 가서 생물학자가 되었으며 1969년에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파이얼스(R.E. Peierls)는 영국시민이 되었으며 원자탄개발사업에 참여하였고 영국의 기사작위를 받았다.
캠브리지에서 공부한 골드헤버(M. Goldhaver)는 1938년에 미국으로 가서 1961년부터 12년간 브룩헤이븐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물리학자 중에는 페르미, 베테, 비그너, 울렌벡, 바이스코프, 브로흐와 골드
헤버가 미국물리학회(APS) 회장이 되었다.
이들 유럽출신의 미국물리학자들은 미국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하였다.
크로니크(R. de L. Kronig)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유럽에서 활동했고 나중에 네델란드의
델프트공대(TU Delft) 총장이 되었다.
맺는 말
상술한 바와 같이 많은 유럽의 물리학자들이 모국을 떠나 미국의 원자탄개발사업, MIT의 레이다 개발
등에 참여하여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데 공헌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하이젠베르그, 게어라크(Gerlach), 폰라우에(von Laue), 바이첵카(Weizsäcker)와 오토한
(Otto Hahn) 등이 남아 원자탄개발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 하였다.
1933년 이후 세계의 물리학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1932년에 이미 프랑스 물리학자
랑제방(Paul Langevin)은 미국이 "세계 자연과학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대로 미국은 노벨상 수상자 수에서도 독일과 영국에 앞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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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영 교수는 University of Maryland 공학박사로서(1971) Univ. of Maryland 객원조교수(1971-72), State Univ. of New
York 조교수, 부교수(1972-77), IIT Research Institute/ECAC 수석연구원(1977-80), The MITRE Corporation 책임연구원
(1985-86),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1985-86), 1986년부터 포항공과대학교 전자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
하면서, 교학처장, 교무처장, 기획실장, 부학장, 부총장, 총장 등을 역임하여 왔다.
(ahaphys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