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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님의 날에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앉은뱅이가 치유된 사건으로 인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솔로몬 냉각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메시아다, 너희가 그렇게 기다리던 우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담대히 선포한 후에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패역한 세대에서 돌아오라고 선포한 것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데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설교를 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기록되어져 있고요.
두 번째 단락은 복음을 전파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공예 앞에서 신문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문 가운데 변론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단락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은 1절에서 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있는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성난 표정을 지으면서 막 무리지어서 다가오는 거예요.
오늘 1절 말씀 한번 읽어보실까요?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여기 세 부류의 종류의 사람이 나오죠. 제사장 그룹,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도 개인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세 부류는 모두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죠. 먼저 제사장은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구약을 통해서 많이 보았으니까 이들은 성전을 안에서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예배 의식을 인도하는 주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모두 24 24 반열로 구성이 되어서 각 반열이 한 줄씩 돌아가면서 예배 의식을 진행을 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안타깝게도 이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적대하는 앞자리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죠.
다음 성전을 맡은 자는 누구인가? 성전의 수장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라고 기록되어져 있고요. 신약 성경에 보면 성전의 경비를 맡은 자들을 총괄하는 사람, 성전의 경비를 맡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총괄하는 자라고 말하면서 성전 내에서 법과 치안 그러니까 안전하지만 그래도 더 안전을 위해서 법과 치안을 유지하는 전체 책임자라고 볼 수가 있죠.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던 가롯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 넘겨줄 방책을 의논했다. 그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사두개인이죠. 많이 들어보셨죠? 솔로몬 왕 때 제사장이었던 사두개인을 따르던 우리의 후예들을 이야기합니다.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사실 여러 종파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중요한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죠. 그래서 여러분 신약 성경에 보면 사두개인, 바리새인이 참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정치적인 제사장이었어요. 정치를 굉장히 많이 행사하는 사람들이었고요. 그나마 바리새인들은 경건주의자들 그래서 말씀을 더 가까이하고 자신들의 정결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래서 여기에 제사장들 레위인들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맡은 직무만 다를 뿐이지 같은 제사장 계열에 있었던 사람들 특별히 이들은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막강한 실권을 가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유대가 로마의 속국이었잖아요. 그러니까 로마를 이렇게 보면서 이들이 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겠죠. 당시에 로마가 이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유대 땅에 위협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죠 위협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래서 이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잘 이용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로마와 결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 그런 것들을 얻게 되었던 그러한 때이죠.
그래서 종교 지도자라고 하지만 굉장히 부패해 있었던 그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로마 정무하고 매우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런 배경 가운데 유대 종교자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이겠어요? 이들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민중을 선동하는 선동가다 그렇게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죠.
또한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기득권을 굉장히 위태롭게 만드는 훼방꾼과 같은 존재가 지금 앞에 서 있는 거예요. 그들이 예수가 복음이라면서 그것도 자신들이 죽였잖아요.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섰는데 그 예수가 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수의 부활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들의 생각과 관념 속에서는 납득되지 않는 그러한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종교 지도자들은 사두개인들에 의해서 기존 종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유대교와 더불어서 사회 질서가 무너져 자신들이 불이익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사두개인들을 생각해 보면 당시 바리새인들과 함께 유대교를 이끄는 두 개의 큰 축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몇 가지가 있었어요.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중에 몇 가지가 보면 인격적 메시아 출연 메시아가 오는데 인격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했어요. 몸의 부활은 있을 수도 없다. 그리고 모세의 오경을 제외한 나머지 성경 그리고 구절은 우리가 승인할 수가 없다. 모세의 오경만이 성경이고 거기에 보면 부활도 없고 거기에 보면 인격적 메시아 출연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늘 바리새인과 대치돼 있는 상황 속에 살았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예수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그 말이 가당치 합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니 이들의 마음 가운데는 분노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라고 그들은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2절은 이렇게 표현을 해주고 있어요. 우리 2절 말씀 한번 읽어보실까요?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무엇을 싫어했다고요?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너무너무 싫어했다는 거예요. 왜 이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 그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 안에 부활이 있다는 것은 사두개인들이 볼 때는 증오할 만큼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 이 교리의 핵심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분이 사람이 아니시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요.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참 구원자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의 이 핵심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늘 강조하여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 예수가 죽고 부활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고백하는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우리가 실제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말씀에 기록된 대로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 이 모든 것이 헛것이다.
왜 아무 가치 없고 쓸모없는 믿음의 고백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한번 고린도전서 15장 14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오.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무엇이 헛것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이 헛것이고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고백도 헛것이다. 뭐가 없다면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사실이 없다는 그래서 여러분 사도바울도 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매우 중요하게 선포했다는 것이죠.
그러니 반대로 생각하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셔야지만 우리가 전파하는 것,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 참된 복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부활의 소망이 없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주님 오실 그날 우리도 예수를 믿어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아니면 죽지 않고 주님을 만난다라는 그 부활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 19절 우리 또박또박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 시작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에 살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 불쌍한 자였니라.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돼요?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을 두고 사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불쌍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내 예수님 정말 잘 믿어요. 나 하나님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면서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부활 소망 가운데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도 효염이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 언약도 실효성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지 부활이 있다고 전하고 가르친 베드로와 요한의 메시지는 종교 지도자들 특별히 사두개인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분노하여서 이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족이 충분히 행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즉각적으로 그들을 붙잡아서 체포하여서 구금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붙잡았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 거예요.
마무리 저물고 나면 모든 것들이 종료가 되기 때문에 다음 날 다시 감옥에 가두게 된 것이죠. 우리 3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들을 잡음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이와 같이 그날의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듣고 분노한 사두개인들, 분노한 사람들은 사도들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그러한 일을 했다. 이게 종교자들의 지도자들의 반응이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라고 오늘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 수요가 남성만 얼추 잡아 5천 명 정도 되겠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4절 말씀 같이 읽어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5천이나 되었더라.
여러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사도들을 붙잡아서 막기는 했지만 그렇죠 너희들 그거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도가 전한 복음은 그것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그들의 사람의 모습들은 막을 수가 없고 잡을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이게 복음의 능력이죠. 사람은 가두지만 복음은 가둘 수 없고 사람은 막을 수 있지만 복음을 통해서 변화되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때나 복음이 선포되어질 때 복음을 듣고 종교 지도자들처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렇지만 복음을 듣고 회심한 5천 명처럼 영접하는 자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부활 신앙을 믿는다면 우리도 사도들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혹 그로 인해서 핍박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뭐가 있다고요? 복이 있다 복이 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복 그것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를 위해 박해받는 자 그 자가 복이 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또한 복음 듣는 자 중에 반드시 영접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확신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들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맡겨진 자리에서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이렇게 복음으로 인해서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고요. 두 번째 단락은 이제 공예 앞에서 신문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변론을 베드로가 하게 되죠.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 그리고 현직 대제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가 함께 보입니다. 그 밖에도 대제사장 가문의 유력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공회를 소집한 것이죠.
여러분 공회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사네드린이라는 단어예요. 많이 들어보셨죠? 도대체 사네드린이 뭐야? 공해라는 뜻이에요. 공회.
그런데 여러분 공회의 구성원은 의장을 포함해서 71명입니다. 의장을 포함해서 71명. 유대 최고의 의결 기구이죠. 우리나라에 국회가 있는 것처럼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하는 그러한 기구입니다. 이 공예의 구성원들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장로, 서기관의 직분들을 맡고 있으면서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죠.
특별히 이들이 했던 것 중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거짓 선지자로 의심되는 인물을 신문하고 조사할 권한이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신문했던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또 이렇게 활보하면서 복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전한다. 저들 이단이다 저들 귀신의 지금 묶인 받아서 저렇게 행한다면서 그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그 71명이 서 있는 가운데 누구를 세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딱 세웠습니다. 그리고 핵심 질문 딱 한 가지를 하는 거예요. 그것이 7절만 읽습니다. 어떤 질문을 했는가 여러분 우리 한번 7절을 통해서 같이 읽어보실까요?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두 가지 표현이 나오죠.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 너희들이 지금 행한 이것이 무슨 권세냐 누구의 이름이냐라는 것을 묻는 거예요. 여기에 기록된 너희가라는 것을 원문으로 보시면 너희 같은 자들이니 나는 그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이 뉘앙스가 굉장히 비아냥거리듯 그렇게 표현하 도대체 너희 같은 자들이 무엇이기에 이 같은 일을 하면서 누구의 권능인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이렇게 하느냐라고 따져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행위했느냐는 질문의 의도가 뭘까요? 이들이 딱 그 한 문장에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의 의도가 있을 것 아니에요? 이들이 행한 기적 앉은뱅이가 일어났잖아요. 이 사건이 하나님의 일은 그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한 거예요. 지금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잖아요.
근데 너희들이 한 것은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다. 즉 다시 말하면 지금 일어난 이 기적 같은 사건은 악신에 씌어서 니들이 이 짓거리를 한 것이라는 것으로 몰아갈 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들이 행한 기적의 근원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실제 이들은 과거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쫓을 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귀신의 왕 발세브를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매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실제 그들이에요. 그들이 예수님을 몰아세웠던 것처럼 이들이 하는 지금 능력이라고 보여지는 앉은 베기가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악한 귀신의 힘을 얻어서 이 일을 했다는 것을 지금 이 공예에서 몰아가고 있는 것이죠. 즉 이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 의결기관이고 뭔가 조사를 하려면 진실을 밝혀야 되잖아요.
저도 요즘 국회에서 하는 것들을 가끔씩 보면 저게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몰아세우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것처럼 여기도 진실을 밝히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의도한 방향으로 지금 몰아가는 것이죠. 이 신문에 대해서 이제 질문을 들은 베드로가 변론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결론은 아닌데 여러분들이 다 저하고 반대분들인데 지금 이렇게 마주 있지만 뺑 둘러서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얼마나 주눅이 들겠어요? 이 사람들을 다 한꺼번에 설득을 하고 어쨌든 담대하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얼마나 주목이 되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압감 속에서 오늘 베드로는요. 8절에 보니까 성령이 충만하여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8절 읽어보실까요?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여러분 이 악조건 속에 놓여 있었지만 성경은 그에게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그런데 이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이 단어가 잘 살펴보면 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것들이 있어요. 단어로 볼 때 플래스 데이스라는 단어는 일시적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예요.
또한 폴레레스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지속적 성령 충만을 이야기 다르죠. 잠깐 순간적으로 임했던 성령 충만이 있고요. 이 성령 충만이 지속적으로 쭉 이어지는 그러한 성령 충만의 단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된 성령 충만은 무엇이냐 하면 지속적 성령 충만이 아니라 일시적 성령 충만을 기록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사에드린 법정에서 예수와 복음에 대해서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게 일시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이 임했기 때문에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했던 것 중에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총독과 임금 앞에 끌려가서 그들과 또한 이방 사람들 앞에 증언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들을 관에 넘겨줄 때에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아라. 그때가 되면 성령께서 능히 대답하기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이 있어요. 우리 한번 읽어보실까요? 마태복음 10장 17절에서 20절인데 제가 한절 여러분들이 한절 교독하면서 예수님이 그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한번 보실까요? 제가 17절 읽을게요.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예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예수님께서 이미 그 일을 아시고 너희가 앞으로 나 때문에 고난받을 일이 있고 공에 넘겨져서 이야기해야 될 상황이 생기는데 그때 잡혀가면서 어떡하지? 무슨 말을 해야 되지? 염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할 말을 전할 수 있는 성령을 전해주시오. 할렐루야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담대할 수 있는 것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을 때 담대할 수 있는 것은 그때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시겠다. 염려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복음 안에서 내가 믿는 그 예수를 증거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을 위해서 고난이 오고 위기가 찾아올 때 더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우리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할 말이 생각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이잖아요. 우리가 믿는 복음이잖아요. 그런데 복음이 뭡니까 하면 어른이 돼가지고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 그때 나에게 할 말이 꼭 그것이 내가 잘 정제된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성령께서 그 순간 역사하셔서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역사의 힘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이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베드로가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존경하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오늘 우리가 공해에서 신문을 받는 것이 성전 뒷문에 앉아 있는 이에게 선한 일을 베풀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 병자가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지를 고 계신다면 나는 여러분과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히 답변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질문에 저는 지금 답변할 수가 있습니다고 하면서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 아주 중요한 세 가지 메시지입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고쳤습니다. 할렐루야 이 사람이 고침받은 것은 내가 한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스스로 한 것도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고친 것입니다. 평생을 일어나보지 못하고 걸어보지 못했던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서 있게 된 것은 십자가에 못 박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그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죽으셨던 그분을 무덤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힘입어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진리고 핵심이 되어야 되는 것이죠. 그러니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든지 말레나 이레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를 믿는데 세상 어떤 다른 힘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 일하는 자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이야기고요. 두 번째는 예수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돌을 집 모퉁이 돌로 세우셨습니다. 11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둥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여러분 이것은요. 베드로가 시편 말씀을 인용한 거예요.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한 것인데 왜 이 말씀을 인용했을까요? 유대 지도자들이요. 이 말씀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아는 말씀 가지고 내가 이야기하는데 예수는 바로 너희가 버린 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돌을 삼아서 모퉁이돌로 세우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시편 말씀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그 의미를 잘 가르쳐준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머릿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머릿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두 개의 면, 두 개의 면 직각으로 만나는 그 자리에 모퉁이 돌을 놓아서 그 집이 잘 세워질 수 있도록 기초를 만드는 기초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집을 지으려면 가장 중요한 돌이 기초석인데 이 기초석을 뭘로 사용하느냐 버려진 돌을 집어서 거기에 맞는 것을 사용한다는 거 건축자들은 버렸어요. 아무 쓸모없다고 버린 거예요.
그런데 결국에는 그 버려진 돌이 이 집을 짓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는요. 교회를 지탱하는 기초석임과 동시에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과 삶을 잡아주는 기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것, 아주 매우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집을 짓되 예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때로는 비가 오기도 하고요. 장수가 나고 바람이 불지라도 그냥 무너져버리는 집이 아니라 그 고된 바람과 그 퍼붓는 빗 속에서도 견고하게 서 있는 그러한 집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모퉁이 돌이 되어 예수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결이 되어서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가는 공동체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게 돼 우리 12절 말씀 12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는요. 예수님 이외에 세상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확신 있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결코 주시지 않으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열어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을 통해서 말합니다. 뭐라고 말씀하냐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따라해 보실까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생명은 누구하고 연결이 돼요? 예수 예수가 있는 자에게만 생명이 있고 예수가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요. 자꾸 다른 길을 만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 부여해서 그것이 길이다. 자꾸 이쪽 저쪽에서 말하니까 우리는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러다가도 듣다가 이것이 길인가 저것이 길인가 아니요.
여러분 혼란스럽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성경은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해요.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우리 주님께서 선언하신 거예요. 아무리 다른 좋은 길, 그것이 우리가 볼 때 더 평탄한 길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길이 아닙니다. 가봐야 낭떨어지고 가봐야 죽음의 자리라는 거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오직 한 길 예수의 길을 그 안에 걸어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공회가 모여서 묻습니다.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으로 이렇게 했느냐? 베드로는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세상 사람들이 말할 때 무슨 권세와 능력으로 삽니까? 무슨 이름으로 삽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담대히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이름으로 삽니다. 할렐루야 어떤 어려움이 찾아오고 문제가 올 때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이름으로 해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그 믿음 가지고 이번 한 주도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행복한 시간들이 많아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