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과 완생, 그리고 자본주의
19기 이신근
우리나라에서 사회와 직장에 첫발을 딛는 순간 행복하다고 느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러려고 다른 즐거움 다 포기하고 공부만 한 게 아닌데, 이러려고 비전을 품고 꿈을 꾼 게 아닌데, 이러려고 쉼 없이 달려온 게 아닌데…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내가 참 가진 게 많고, 특별한 줄 알았지만, 사회와 직장이 나에게 요구하는 건 단 하나다. 직장에 이익을 낼 수 있는 요소 하나로만 내가 규정되고, 나 또한 그 기준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나의 원대한 꿈과 비전은 축소되고 축소되어 결국 한 가지만 남는다.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 그것뿐이다.
바둑돌 하나가 판 위에 놓이고, 이 돌은 361칸 중의 하나를 차지한다.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이 돌 하나가 자기 집을 짓고 살아남을지 혹은 상대방에게 잡혀먹힐 돌일지 게임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모른다. 잡혀먹히지 않기 위해서 나와 다른 색깔을 내 주변에 허락하면 안 된다. 나와 다른 색을 가진 돌에 둘러싸이면 죽는다. 죽지 않으려면 같은 색깔의 바둑돌을 이어 두 개 이상의 공간(집)을 마련해야 한다. 두 개 이상의 집이 생겨 상대방이 죽일 수 없는 집이 되면 그 집을 완생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완생할 여지를 남기고 있지만, 언제든 먹힐 수도 있는 미완성의 집을 미생이라 부른다.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요즘 한참 인기다. 드라마에는 톱스타도 없고, 별에서 온 외계인도 없고, 출생의 비밀도 없다. 그 흔한 애틋한 남녀 간의 사랑도 없다. 숨 막히는 우리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쌍한 신입사원 장그래가 있다. 검정고시 고졸출신에 요즘 개나 소나 다 가지고 있는 컴활(컴퓨터 활용능력) 하나 있는 장그래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남들과 차별 있는 노력뿐이다. 그나마 하나 있는 드라마적 판타지는 정직과 성실만으로 장그래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누군가 인생은 바둑과 같다고 했다. 더 엄밀히 보면 자본주의의 생리와 바둑의 비교가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내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내 사업이 잘된다는 건 경쟁업체가 힘들어진다는 뜻이고, 경쟁업체가 잘 된다는 소식은 내 이익이 줄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업이익을 내려면 사원들에게 더 가혹한 폭언을 퍼부어야 하고, 출산휴가를 바라는 여성들은 눈치를 줘야 한다.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옳지 않은 것을 보고 침묵해야 하고, 갑 앞에서 굽실거려야 하는 을의 자존심 따위는 하루빨리 털어 버려야 한다.
나와 나의 이익이 되는 존재는 흰색이고, 그 외에 사람들은 또렷한 흑색이다. 그 외에 어떤 칼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그리고 적이 있을 뿐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바둑을 두는지, 나와 상대가 얼마큼의 차이가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승자와 패자, 성공과 실패로만 내가 규정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속임과 꼼수도 있어야 하고, 큰집을 위해 작은 집을 내주기도 하는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오늘 한 독거노인이 자살소식이 있었다. 자신의 시신을 수습해줄 사람들에게 남긴 수고비 10만원과 밀린 공과금도 함께 있었다. 봉투에는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답지 않게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죠.”라는 여유로운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지난번 충격을 준 세 모녀 자살사건도 그랬다. 치료비가 없고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 죽는 마당에 그들이 죽기 전 유일하게 마련한 건 밀린 공과금이었다. 먹고, 먹히는 자본주의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대표적인 예스맨들이다. 정해진 사회구조를 바꿀 생각을 못하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다 결국 그 속에서 낙오 되었을 때는 자기 탓만 하는 사람들… 매번 ‘그래(YES)'로 화답하는 장그래를 보는 시선이 불편한 건 그 탓이다.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바둑의 룰을 좀 더 바꿔 볼 순 없는 걸까? 내 이익의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공유해서 어제 나의 적이었던 실패한 이웃들에게 나눠주면 어떨까? 나도 까만색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상대방도 하얀색을 조금씩 받아들여 회색으로 인생의 바둑판을 두는 건 어떨까? 그 누구도 죽지 않고 내 집이 너희 집이 되고, 다 같이 살 수 있는 우리 집이 되는 건 이 땅에서 불가능한 낙원일까?
첫댓글 저도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석과 완생 사이의 미생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화상 같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형 글은 참 집요해요. 그래서 더 고민하게 되고 되돌아보게 되요. 그래서 참 귀하고 고마워요. 이미 좋은 작가입니다.
역시!클래스가 틀린 글이에요.^^
형의 글은 항상 생각하게 됩니다.
멋진 글 감사해요~~
다들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충전된 힘으로 더욱 열심히 쓸게요~^^
지난 수요일 우리교회 어머니 기도회에 한영주교수님이 와서 강의했는데, 학교에서 학생들이 부딪히는 친구관계가 이렇다는군요. 미생. 친구들 사이에 신뢰나 우정은 대나무 속껍질처럼 얇던지 아예 없던지, 언제나 등돌릴수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에 대한 두려움으로 ...거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네요. 부모들이 그걸 몰라주어서 아이들이 의지할데가 없다는...지금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자신의 관점으로 잘 서술하셨어요. 신근씨.
댓글도 깊어!^^
깊이 있는 글, 삶을 되짚어보게 하는 좋은 글이에요^^
긍께요! 몹시 공감^^
삶에 대해, 가치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글이에요^^
정말 저도 그랬어요! 부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