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7년 2월 광주 풍향동 백림약국 사거리가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고
80년 5월을 네살 되던 해에 맞았다.
영화 내용중
총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 일어나 하면서 울던
그 꼬마와 얼추 나이가 비슷할 것이다.
1980년 5월 그날 함평 외가에 내려갔다가
광주로 올라오지 못하고 보내버렸던 그 시간에
많은 내 고향 광주사람들이
계엄군의 곤봉에 맞아 죽고, 대검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사실을
1987년 5월
특별방송으로 나오던 영상을 보고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방안엔 나와 부모님 밖에 없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불안에 떨면서 그날의 악몽을 얘기해 주셨다.
내 고향 광주 사람들은
옳지 않은 일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고
옆사람이 힘들거나 어려워하면
묵묵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사람들이었다.
강한 억양의 사투리에 툭툭 던지는 말에
그다지 첫인상이 좋지는 않지만
알고보면 따뜻한 맘을 가진
다독이고 감싸주는 정 만큼은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서 으뜸이었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 계엄군이 광주를 진압할 때까지
광주에서는 단 한건의 살인, 방화, 약탈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사재기를 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뭉쳐야 산다는 공감대를 직접 실천으로 옮겼던 그 일주일간은
지금까지 나에게
나는 자랑스런 광주사람 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 비록 몸은 서울에 있지만 내 주소지가 서울로 옮겨져 있지만
광주사람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를 대신해서 죽어준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영원히 잊지도 않을 것이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