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고비를 넘다
박경혜
정상에서 꼭 일몰을 보고 말리라 다짐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재바르게 출발했건만, 야속하게도 해는 서쪽을 향해 더 빠르게 달렸다. 고비사막 아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노을이 절정을 넘고 있었다. 대상도 없이 원망의 말을 쏟아내면서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위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정상에서 노을 감상할 기회는 놓쳤지만,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를 일이 아닌가.
거대한 모래산은 기이하다. 한 발 올라가면 반보쯤은 미끄러진다. 수많은 사람이 오르는 동안 모래는 끊임없이 흘러내렸을 터인데 어쩐 일인지 정상은 까부라지지 않고 올라도 올라도 까마득하기만 하다. 호락호락 등성이를 내주지 않을 모양이다. 기를 쓰며 오르고 멈추어 서기를 반복하다 가파른 경사면에서 지쳐 주저앉았을 때다. 깊이 파묻힌 두 팔을 통해 전해지는 울림, 마치 지진이 난 듯 흔들리며 산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웅 웅….
앞 사람 때문인지 울림 때문인지 모래는 자꾸 미끄러져 내려와 다리를 빨아들이듯 파묻는다. 두려움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건 분명한데 묘한 전율이 가슴을 에는 듯하다. 울컥울컥 눈물이 난다. 서러움에 겨운 아이처럼 울음이 목구멍을 차고 올라온다. 퍼질러 앉아 악다구니를 쓰며 질펀하게 울어버리고 싶다. 팍팍해진 내 삶에 약간의 물기가 생기기를 소망하며 떠난 여행이 아닌가. 모래 산이 우는 소리와 울림의 리듬에 맞추어 마지막 눈물 한 방울까지 짜내 버린다면 좀 시원해질까.
어스름이 모래사막에 제법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즈음이라 울음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겠다. 그게 아닐지라도 제각기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중이라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인다. 주위 관광객들의 소란도 한 몫 거들어 주리라. 이방異邦의 사람들이 더 많으면 좋으련만, 들리는 건 대부분 익숙한 우리나라 언어인 것이 아쉽다. 그늘진 모래산 허리 색이 짙어진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해진 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쉬이 피로해지는 눈 때문에 오래 책을 읽지 못하거나 사소한 것들을 깜빡깜빡 잊곤 하는 기억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과 나이가 드는 것, 견디는 시간과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수동과 능동 중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싶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저 매사에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월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그냥 멍하니 주저앉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오래오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했다. 제 품 안에 아무것도 수용하지 못하는 팍팍한 성미가 딱 중년의 내 모습이다. 타인에게는 너그러워지라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점점 옹졸해지고, 머리를 비워야 맑은 생각이 들어찬다고 말하면서도 온갖 삿된 생각으로 늘 복잡했다. 수양하며 잘 나이 들어가는 중이라 생각했건만, 그건 자만이었던가 보다. 쫓기듯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잦아졌다.
매사에 사나워졌고 말에 가시가 돋았다. 실체도 없는 허공에 싸움을 거는 격으로 짜증을 부려댔다. 이유 없는 울분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원인 없는 결과들이 퇴적물처럼 쌓여갔다. 여유 있는 행간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어쩌다 생긴 작은 행간조차 휑하게만 느껴졌다. 주위에서 갱년기라는 진단을 내리고 나를 다독였다. 그럴수록 더 응석받이 아이처럼 비뚤어지고 싶은 나날이었다.
고비사막은 봄철 황사를 퍼뜨리는 주범이라고 익히 배운 터이다. 막상 다다르고 보니 불만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끝 간 데 없이 길고 가파른 경사가 놀랍고 경이로울 따름이다. 관계에서도 자주 그렇다. 잘 모르면서 소문에 의지해 뒤엣말을 하다가도 맞닥뜨리거나 가까이 있고 보면 태도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변덕이 심한 나는 황사 같은 건 잊은 채 보드라운 모래의 촉감과 깊은 울음소리와 쉽게 허용하지 않는 도도함에 연신 감탄을 남발한다.
사막을 오르면서도 꼭 무언가를 바랐던 건 아니다. 가슴이 저릴 만큼 아름답다는 고비의 일몰 보기를 포기한 후부터는 그저 정상을 밟아보는 것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모래산 능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처 사그라지지 못한 노을빛에 의지해 희뿌옇게 드러난 등허리가 너울너울 펼쳐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먹먹해진 채로 할 말을 잃고 밀려드는 어둠에 몸을 묻는다.
어둠은 느리고 무겁게 내려앉는다. 분위기를 느끼기는 한마음인지 사람들의 희뿜한 형체가 제법 보이는데도 한순간 고요해진다. 약속이나 한 듯, 하나 둘 드러눕는다. 별과 은하수 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간간이 들리는 낮은 감탄사가 감미롭기까지 하다. 200여 미터 올랐을 뿐인데 손을 뻗으면 별이 잡힐 듯 하늘과 맞닿을 거리처럼 느껴진다.
땀이 식으면서 살짝 한기가 든다. 서늘해진 모래 온도가 등으로 전해진다. 자꾸만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에 매혹되어 밤새 마주하고 싶던 마음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아쉬움을 켜켜이 쌓아두고 모래에 의지해 천천히 미끄러져 내린다. 단단하고 깊게 여물어 가는 고비의 밤에 마음을 묶어둔 채.
(《수필문예》 제19집, 2020.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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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 신라문학 대상 수상
· 수필문예회 회원
· 2016 독도문예대전 입선,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 제2회 수필문예회 작품상 수상
· 대구수필문예대학 18기 수료
· bohe11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