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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덟 가지 법규에 담긴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현하는 나라를 세우고자 환웅과 단군왕검은 고조선의 도읍지 이름을 신시(神市) 즉 '하느님의 도시'라 정했는데, 이는 노아 선조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에 입각하여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 세우고자 함이었다. 이는 바벨탑과는 달리 천손민족이 하느님에게서 빛을 받아 반사하여 온 세상을 하느님의 빛으로 밝은 삶을 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유석근). 이는 기원전 1250년경에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과 비교해 보더라도 내용상으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이 반영된 이 ‘8조법금’은 한민족에게 주어진 공동선의 질서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 독보적인 정신 자산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역사 교육의 현장에서는 8조법금의 전문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전한다는 3개조만을 전해주고 있다. 즉,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②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으며,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1인당 50만 전(錢)을 내야 한다는 것”(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고 하여 축소하여 가르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경천사상과 천손의식이 통째로 빠져있다. 겨레의 첫 문명을 비춘 여명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매우 심각할 뿐만 아니라 악의적으로 축소된 역사 왜곡이다.
지나인들이 힘을 모아 커지면서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자신들의 사서에서는 문물의 주체와 수혜대상을 뒤집어 기록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했는데, 특히 고조선 문명에 깃들여 있는 하느님의 이끄심, 즉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으로 나타나는 하느님 신앙을 삭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나사관에 의한 역사 왜곡의 특징이다.
8.7.3. 홍범9주
8조법금 이외에도 홍익인간의 이념을 적용하여 재세이화를 이룩하려 한 이치가 있으니, 그것이 홍범9주(洪範九疇)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규범이라는 뜻이다. 8조법금이 고조선의 백성들에게 적용된 규범이라면, 이 규범은 천손의식에 따라 대홍수 이후 피폐해진 지나인들의 민심을 수습하도록 단군왕검의 아들인 부루 태자가 우(禹) 임금에게 전수해 준 덕분에 인심을 얻어 하 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해준 치세의 지혜이다(檀君世紀, 안경전). 이를 공자가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편(洪範編)에 수록함으로써 인(仁)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유학의 기반이 되었다(王獻唐, 山東古國考).
홍범구주는 천문과 세상 사물의 근본이 되는 다섯 가지 이치(五行)로부터 시작해서 인간관계의 다섯 가지 기본 윤리(五事), 백성의 살림살이를 보살피는 여덟 가지 행정 분야(八政), 백성의 농경을 지도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역법 원리(五紀), 통치자가 지켜야 할 왕도정치의 기본윤리(皇極), 지배층과 백성 모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사회 윤리(三德), 국가 중대사를 결정함에 있어서 여론의 형성 원리(稽疑), 백성의 살림이 평안하기 위해 하느님께 빌어야 할 다섯 가지 복(五福)과 하느님께 청원하여 극복해야 할 여섯 가지 재앙(六極)을 정리한 요점 등 아홉 가지 범주로 되어 있다. 이는 고조선 문명 안에서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이념에 따라 실천되던 공동선 질서로서 이를 간추려 지나인들의 문명에 전수해 준 천손의식의 요체라 할 것이다.
① 오행(五行): 우주의 근본 원리로서,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를 지칭한다. 물은 물체를 적시고 아래로 흘러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불은 물체를 태우고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으며, 나무는 구부러지고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고, 쇠는 조작에 의해 자유롭게 변형하는 성질이 있으며, 흙은 곡식을 길러 거두게 하는 성질이 있다. 이는 음양과 함께 천문을 헤아리고 세상 사물을 다루는 기본이치와 통한다.
② 오사(五事): 인간관계 질서의 기본 윤리로서, 모(貌), 언(言), 시(視), 청(聽), 사(思)의 다섯 가지를 바르게 하는 일을 뜻한다. 외모는 공손해야 하고, 말은 조리가 있어야 하며, 보는 것은 밝아야 하고, 듣는 것은 분명해야 하며,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손함은 엄숙을, 조리가 있음은 이치를, 밝음은 맑음을, 분명함은 도모를, 지혜는 성인을 만드는 것이다.
③ 팔정(八政): 관리, 재정 주관, 제사 관리, 백성 교육, 범죄 단속, 손님 대접, 양병(良兵) 및 백성의 땅 관리 등 국가 행정의 요체를 말한다.
④ 오기(五紀): 해(歲)·달(月)·날(日)·별(辰)·역법(曆法)의 계산을 지칭한다.
⑤ 황극(皇極): 임금의 법도로서 임금이 정치의 법을 세우는 것이다. 오복을 백성들에게 베풀어주며, 백성들이 할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고 노력하도록 왕은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백성들이 법도를 위배했더라도 커다란 허물이 없을 때에는 왕은 이들을 용납해야 한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학대하지 말고 고매한 인격자를 존경해야 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을 격려해 주면 나라는 발전할 것이다. 왕의 법도를 반포하는 말은 불변의 교훈이 되는 것이며, 이는 상제(上帝)의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 법도를 반포하는 말을 백성들이 교훈 삼아 행동으로 옮긴다면, 이는 곧 천자의 광명함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천자는 백성의 부모가 되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⑥ 삼덕(三德): 정직(正直)·강극(剛克)·유극(柔克)을 말한다. 평화스럽고 안락할 때에는 정직을 중시하고, 강하고 굴복하지 않을 때에는 강극을 중시하며, 화합할 때에는 유극을 중시해야 한다. 침잠할 때에는 강(剛)함으로써 극복하고, 높고 밝음에는 유(柔)함으로써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⑦ 계의(稽疑): 복(卜)과 서(筮)의 점을 치는 사람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점을 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복서의 점을 치는 사람들은 비·갬·안개·맑음, 흐린 뒤 맑음, 정괘(貞卦)·회괘(悔卦)에 관한 예보를 한다. 이 일곱 가지의 예보는 복점에 의한 것이 다섯 가지, 서점에 의한 것이 두 가지로서, 이러한 점은 변화하는 현상을 미루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점과 서점을 치는 사람들에게 명해 점을 치게 되는 경우, 왕은 세 사람이 점을 쳤다면 그 중 두 사람의 점친 결과를 따라야 한다. 왕에게 큰 의문이 생기면 자신의 마음에 물어 보고, 귀족이나 관리에게 물어 보며, 백성들에게 물어 보고, 복서인(卜筮人)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왕이 좋다고 생각하고, 복서의 점이 좋다고 하고, 귀족이나 관리가 좋다고 하고, 백성들까지 좋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상황을 대동(大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동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왕은 안락할 것이고, 자손들은 번창할 것이다. 귀족과 관리들이 좋다고 하고 복서의 점이 좋다고 하는데 왕과 백성이 좋다고 하지 않을지라도 길할 것이다. 백성이 좋다고 하고 복서의 점이 좋다고 하는데 왕과 귀족 관리들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길할 것이다. 왕이 좋다고 하고 복의 점이 좋다고 하는데 서의 점과 귀족·관리·백성이 좋지 않다고 하면 내적인 일에는 길하나 외적인 일에는 흉할 것이다. 복서의 점이 함께 사람들을 거역할 경우, 조용하면 길하고 움직이면 흉하다고 보는 것 등이다.
⑧ 오복(五福): 오복은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말하는데, 하늘에 빌어 얻고자 한다.
⑨ 육극(六極): 육극은 횡사요절·질병·근심·빈곤·악·약함을 지칭하는데, 하늘에 빌어 피하고자 한다.
이상 아홉 범주의 내용을 보면 치수를 관리하기 위한 단순한 민심수습책을 넘어 대단히 정교하고 수준 높은 정치철학으로서 문명의 기본 질서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홍수 이후 천명을 받들어 민심을 수습할 뿐만 아니라 천손이 되게 하여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재세이화의 도라고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공자가 유가의 핵심 이론으로 발전시켰다(王獻唐, '山東古代的姜姓統治集團', 山東古國考). 고조선에서는 이뿐만 아니라 도자기, 문자, 철기, 역과 역, 상형문자(갑골문자), 천자제도, 조세 제도, 음양오행, 팔괘, 상수철학, 삼강오륜 등 윤리도덕 규범 등 모든 문물 제도를 전수해 주어 지나인들이 황하문명을 이룩하게 하였다.
이 같은 문물 전수의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들이 헌원(軒轅),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우(禹), 탕(禹), 문(文)과 무(武) 등 역대 중국 왕조를 열었던 동이족 출신의 임금들이다. 이들과 함께 중국 사상을 정리한 노자와 공자와 같은 인물들도 동이족 출신이다. 노자 이이는 본래 동방의 시원 족속인 풍이족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한건이다(司馬遷, 史記, 老壯申韓列傳). 공자는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 후예로서 주 나라에 귀화한 인물이고, 맹자 또한 추(鄒)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추나라는 춘추시대에는 공자가 살았던 주(邾) 나라였다(四書釋地 3續권 下).
특히 공자는 서경 주서 홍범편에 이 ‘홍범9주’를 삽입해 넣으면서, 하 나라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하늘로부터 받은” 낙서(洛書)를 보고 만들었다고 적어 놓았다. 낙서는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이의 등에 써 있던 글이라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하도(河圖)와 함께 지나인들이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명국 국가급비물질 문화유산’으로 분류해 놓고 있는 문명의 지혜이다. 하도는 황하(黃河)에 나타난 용마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거북의 등’이니 ‘용마의 등’ 하는 전설로 감추고 있지만, 모두 고조선으로부터 전해 받은 문명의 지혜이다.
사실 하도는 동이족인 태호복희씨가 1에서 10까지 열 개의 수로써 수의 생성과 변화 원리를 찾아내서 그린 것이고, 이를 다시 응용하여 팔괘(八卦)를 그어 역술의 기초로 삼았으며, 상생의 이치를 나타내어 천지의 모든 변화 과정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 주역에서 바둑이 유래되었다. 반면에 상극의 이치를 나타내는 낙서는 1에서 9까지의 아홉 가지 수로써 모든 변화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낙서의 수는 어느 줄을 따라 세 개의 수를 더하더라도 15가 되는 마방진(魔方陣)이다.
하도는 낙서와 더불어 동양 수학의 기본이며 상수학(象數學. numerology. 주역의 음양론을 위한 수리적 철학체계)의 토대가 되어 왔다. 이 하도와 낙서에서 도서관이라 할 때의 '도서'라는 말이 나왔을 만큼(안경전), 동아시아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홍범9주가 낙서에서 비롯되었다는 공자의 언급도 이를 반영한다.
8.7.4. 법금과 홍범의 의미, 겨레의 공동선
이상 살펴본 8조법금과 홍범9주가 지니는 의미는 자못 크다. 우리 겨레가 역사상 첫 문명인 고조선의 문명에서 이룩하려 했던 공동선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 겨레가 오늘날은 물론 향후 미래에 지향해야 할 공동선의 가치를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선이란 하느님의 가치인 최고선을 실현하는 도구이자 과정인가 하면, 각 시대마다 동시대인들이 겪어 보았고 그래서 갈망하는 모든 사회적 선의 총체를 뜻하기도 한다(사목헌장, 26항). 그래서 최고선의 실현 도구요 과정이라는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지만 각 시대마다 공동선에 포함시키는 내용이 다르게 표현될 수는 있다.
요컨대 히브리 문명에 있어서는 많은 예언자들이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느님을 기억하는 신앙을 계기로 하여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강조한 바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로 공정과 정의를 외쳤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정통노선을 계승하여 가톨릭교회가 지난 2천 년 동안의 식별 과정을 거쳐서 현대에 와서 알아듣게 된 최고선의 가치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로서(가톨릭교회교리서, 1730항, 1934항, 2820항, 2305항; 간추린 사회교리, 95항, 197-208항; 지상의 평화, 163항), 이것이 사랑의 진리에 속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공동선의 가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집대성된 바로는 인간의 존엄성, 재화의 보편 목적성과 이에 속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명제, 보조성과 연대성(간추린 사회교리, 160-196항) 등 4개 원리와 1개 명제였으며 최근에 공동합의성 원리가 추가되었다. 추가된 이 원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공의회가 시작한 교회 쇄신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국제신학위원회를 시켜 5년 간 연구된 성과를 담아서 2019년에 낸 교황 권고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을 통하여 반포된 바 있다. 이 원리는 앞선 4개 원리의 실천을 교회 안에서 담보하기 위한 것으로서, 섬김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신 예수님의 계명(요한 13,14; 15,12)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방법상 원리로 볼 수 있다.
한편, 고조선 문명에 있어서 최고선은 홍익인간과 천손의식이라는 대의(大義)로 집약되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문명의 도구가 앞에서 살펴본 8조법금과 홍범9주였는데, 크게 보면 ‘홍익인간’이라는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종교 윤리(祭天儀式. 8조법금 중 제1계; 홍범9주 중 五福, 六極), 그리고 이 하늘의 뜻을 땅에서 펼치어 사람들 안에서 ‘천손의식’(天孫意識)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사회 윤리(8조법금 중 제2-8계; 홍범9주 중 五事, 皇極, 三德)와 공공 윤리(五行, 八政, 五紀, 稽疑)로 나눌 수 있다.
8.7.5. 역사의 징표
그런데 고조선 이후에는 지배층과 지식층이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에 충실하고 유능할 때에는 국력이 상승하고 문명이 꽃피었으나, 불충실하고 무능할 때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국가가 분열되거나 멸망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지배층과 지식층의 불충실과 무능으로 국난의 위기가 닥치면 백성은 외세에 굴종해야 했고 한 서린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 중 각성된 민중은 민란을 일으키거나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온 복음과 이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피지배층인 백성으로서 그리고 각성된 민중으로서 천주교인들이 백 년의 박해를 받는 동안 천주교 신앙에 의한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을 비폭력으로 고수한 현상은 한민족의 역사 안에서도 매우 이례적이고 유일한 것이었다.
맑은 날씨에는 어둠이 걷히고 동이 트는 새벽녘에 어스름하게 여명이 밝아오다가 곧바로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해가 뜨지만, 흐린 날씨에는 일출 광경을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아예 먹구름이 끼는 장마철에는 아침부터 해를 구경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어두울 수도 있다. 그저 구름 뒤에서 비치는 햇빛의 존재만 흐릿하게 알 수 있을 뿐인 날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현실에서는 자연의 현상에서보다 궂은 날씨가 더 잦았다. 그래서 문명에 진리를 비추어주어야 할 이 여명의 어스름한 빛이 찬란한 햇빛으로 바뀌기 전에 먹구름이 끼는 수가 많다. 실제로 히브리 문명권에서도 십계명이라는 여명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반짝 빛났을 뿐 그 이후에는 왕국 분열과 바빌론 유배와 바리사이즘 탓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빛이 비추어지기 전에 천 년 동안 굴절되고 뒤틀린 과정을 거쳤다. 또 한민족 문명권에서도 히브리 문명권보다 시대적으로 앞섰다고는 하지만 고조선 시대를 제외하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빛이 비추어지기 전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나사관과 식민사관 탓으로 역시 굴절되고 뒤틀린 과정을 거쳤다. 말씀이신 구세주께서 직접 오신 히브리 문명권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구세주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은 정의와 회개를 외치며 진리의 빛을 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광범위한 호응을 받았으나 난폭한 헤로데 영주에 의해 참수되는 운명을 겪었다. 그런가 하면 지구 반바퀴를 돌아 오묘한 섭리로 한민족에게 전래된 말씀 또한 지나사관에 경도된 모화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백 년 동안 박해를 받았다.
이제까지 언급한 바를 종합하자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빛을 비추시는 과정에서도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려던 바리사이 유다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자칫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하셨으나,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삼위일체적 자의식으로 돌파하셨다. 그래서 당장 돌을 들어 그 여인 대신에 당신을 죽이려 드는 적대자들에게서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시는”(요한 8,59ㄴ) ‘사무침’의 행동을 감행하셨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알게 된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께로 구원되기를 거부하는 죄일 수밖에 없으며 그 죄 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으니(요한 8,23ㄴ-24),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은,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요한 8,47ㄴ)이라는 예수님의 경고이다. 그러니까 이 경고에 따르자면, 자비와 진리 그리고 자유와 해방의 빛을 비추는 행동을 감행하되 이 빛을 가로막는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사무침’의 행동도 감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사무침’의 행동이 자비와 용서로 이루어지는 심판의 완결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민중이 – 지배층이나 지식층도 아니고, 역사의식이나 천손의식으로 각성된 민중이 – 이 ‘사무침’의 행동을 감행하였다.
19세기 백 년 동안 박해를 받으면서도 비폭력으로 신앙을 고수하며 만민평등과 남녀동등을 실천한 천주교 교우촌은 지배층과 지식층이 저버린 최고선을 회복시켰고, 19세기 말에 농민항쟁을 일으킨 동학교도들은 탐관오리(貪官汚吏) 징계, 관리의 문서 작성 및 검열, 삼정(三政= 田政, 軍政, 還穀) 개혁 등 공동선 개혁을 요구했으며, 이 동학농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20세기 초에 일어난 3·1 만세운동은 가장 근본적으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어야 함을 부르짖었고 이에 따라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국 정체가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 움직임에서 나타난 최고선 및 공동선의 요구들은 해방 이후 제헌헌법에 반영되었다. 그런데 헌법에 규정된 책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이 출현하자 다시금 평화적인 방식으로 촛불시위를 벌여 대통령을 탄핵하고 민주 정부를 세웠던 21세기 초 촛불혁명(2016~2017)과 빛의 혁명(2024~2025) 역시 빼놓을 수 없는데, 이상 언급한 사태들이 겨레의 공동선 질서 회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민중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8.7.6. 겨레 공동선의 침탈 과정과 회복 과정
이렇듯 고조선 문명이 이룩하고자 했던 최고선과 공동선의 현실은 찬란한 바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최근에 발굴되고 있는 고조선 문명의 유적과 유물들의 시기가 기존 문명의 연대보다도 앞서 있음이 확인되면서 인류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고 사가들은 주장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유적과 유물들의 연대상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토록 이른 시기에 한민족이 이룩했던 정신문화의 수준이다.
하지만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지나인들과 왜인들의 역사 왜곡과 침략으로 인한 한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및 영적 처지는 비참하고 비굴했었다. 한민족의 한이라는 정서가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주변 민족들에게 그토록 찬란한 문물을 전해주고도 침탈당해야 했던 억울함과 배신감, 더욱이 제천의식에 소홀하다가 천손의식이 희박해진 지배층과 지식층의 발빠른 굴종에 대한 민중의 한은 더욱 깊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상 숱하게 민란이 발발하여 의병이 일어나야 했던 역사적 이유이다. 민중이 공동선을 지키고자 일어났을 때 스스로 ‘의병’(義兵)이라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 위주로 운영되었던 신분제도 탓으로 인구의 절반이 천민 신분의 노비들이었는데, 의병들 대부분의 신분은 조선 왕조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천대만 받던 노비들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일제 침략 때에도 나타난 이 이름은 민중이 자신들의 의식과 문화 안에 신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최고선의 가치 중에 정의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외세의 압박이 가중됨에 따라서, 외세 의존적인 지배층 및 지식층 등 엘리트들에게 기대지 아니하고 민중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했던 치열한 노력은 의로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민족이 문명의 시원기에 고도의 정신 문화를 최고선과 공동선으로 이룩했던 역사와 함께, 이것이 침탈된 과정 그리고 이를 다시 민중의 힘으로 회복했던 과정을 기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그리하여 이 최고선과 공동선이 다시금 홍익인간과 천손의식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 최고선과 공동선이 실천되는 과업이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민중을 통해 한민족 역사에 비추어진 자비와 진리. 자유와 해방의 빛을 기억해야 한다.
최고선을 지키는 데에 민족과 인류의 명운이 걸려있고, 공동선을 지키는 데에 민족 구성원의 행복이 달려있다. 정치지도자를 주권자가 선택하는 민주적 기준이 이것이며, 지식층에게 민중이 기대하는 공동체적 요구 또한 이것이다. 정치집단과 지식층이 공동선을 보호하는지 기여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각성된 민중이 담보해야 하는 이 몫은 지지와 응원 또는 비판과 저항으로 나타나게 된다.
8.7.7. 그리스도인들이 겨레에게 보여주어야 할 표징
제8장에 소개된 논쟁은 예수의 신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예수님께서 자비와 용서라는 진리의 빛으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위선적이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유다인들의 음모에 맞서 과감하게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당신께서 현재와 최후 순간에 어떻게 죄와 죄인을 심판하실 지에 대한 원칙을 보여주셨다. 이 자비는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진리가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킬 것이고, 이 자비와 진리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야말로 인류의 영적 어둠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이라고 가르치셨다.
고조선 문명에서 환웅과 단군이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받은 최고선의 진리와 그리고 한민족 안에서와 주변의 지나민족에게도 전해진 공동선의 진리를 반만년 이어진 겨레의 역사 안에서 첫 2천 년에 환히 비추어졌지만, 나중의 2천 년 동안에는 하느님 신앙이 없었던 지나민족에 의해서 훼손되고 굴절되었다. 하지만 백성 가운데에서 각성된 민중은 하느님 신앙을 잊지 않고 간직해 오고 있었고, 이들이 지배층과 지식층이 잊어버린 하느님 신앙을 되찾고자 일어섰으며, 그 신앙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진리와 함께 인간을 존중하고 서로 연대하는 공동선의 진리까지 회복하는 움직임으로 겨레를 일깨웠다. 상처받은 겨레를 민중이 치유한 것이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역사를 알아야 하고 역사 속에 깃든 하느님 신앙을 회복시킨 민중의 공로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이 민중과 겨레 전체에게 그 하느님이 바로 자비와 진리를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천손이라는 이 증거는 민족의 공동선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과업에 투신함으로써 비로소 입증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 구성원들과의 대화는 필수적이다. 이 대화의 원칙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이 제시한 바가 있다. “필요한 일에 있어서는 일치가, 불확실한 일에는 자유가, 모든 일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사목헌장, 92항). 여기서 ‘필요한 일’이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바로 하느님의 뜻에서 나오는 최고선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공동선을 뜻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언자들의 정통노선을 따라 가톨릭교회가 알아듣게 된 최고선이란, 자유와 평등이요 정의와 평화의 가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공동선의 으뜸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나머지 다른 가치들(재화의 보편목적, 보조성과 연대성, 공동합의성)은 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어서 이에 종속된다.
또한 ‘불확실한 일’이란 필요한 일을 함에 있어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조건에 관한 일로서, 최고선의 가치들 중 어느 것을 앞세울 것인지, 또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관한 일들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지닌 입장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으며 관심사의 우선순위가 각각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의견 차이는 다툴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함으로써 해결하면 그뿐이다. 크게 같고 작게 다른, 즉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는 결정이 다소 미루지더라도 ‘필요한 일’에 대한 일치를 깨뜨리지 말고 인내심을 발휘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을 발휘해야 한다 함은 민족 구성원들 모두가 천손이요 심지어 주변의 다른 민족일지라도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야 할 그분의 자녀들임을 명심하여 배척하거나 증오하지 말고 상호 대화하며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오 진리이시라는 믿음으로 이러한 대화와 협력을 하되, 이를 교세 확장이나 종교 간 대결 양상으로 전개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들로 그 빛과 진리를 이해하고 알아듣는 일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심지어 무신론적인 신념을 지닌 이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의 선의를 존중하고 우리의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거나 앞세우지 않는 ‘예의’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종교적으로만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일보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8,32)는 그분의 말씀을 민족의 현실 안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형식적으로 믿었던 이들이 떨어져나가고, 올바르게 믿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며, 그분을 서양 종교의 표상인양 백안시하며 오해했던 이들도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진정한 신성이 밝혀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앞서 소개한 대화의 원칙은 선교상의 원칙이기도 한 것이다.
제8장의 본문 해설에서도 다루었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비의 표징을 이해하지도 못한 자들이 끈질기게 시비를 걸고 논쟁을 벌여 왔던 문제가 그분의 아버지가 누구이시며 자신들이 누구의 자손인가 하는 문제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억하고 여기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이와 똑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이끌었고 우리 민족에게 하느님 신앙을 일깨워 주어 천손으로 자각하게 만든 신성(神性)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아울러 이 신성에 배치되는 악(惡)에 대해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하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악마는 하느님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깃는 이 같은 신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지나사관과 식민사관 역시 이 악에 놀아난 행태일 뿐이며, 우리 민족 안에서도 이 두 사관에 부역하는 모화 및 친일 사대주의자들은 그 정체를 모르고 부화뇌동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이 두 사관의 사악성을 인지하면서도 진정한 신성에 대해 소홀히 하는 이들도 각성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이므로, 따라서 지나사관과 식민사관의 역사 왜곡과 신성 삭제에 대해서는 결단코 물러섬이 없이 역사의 진실을 회복시켜야 하지만, 지나인들이나 왜인들 또 이에 물든 자들과 신성을 소홀히 하는 이들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진정한 천손의식을 실현하는 데 따라오는 검증 조건이다. 그래서도 예수님께서 적대적인 바리사이 유다인들에게 보여주신 ‘사무침’의 실천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필요한 일’, ‘불확실한 일’, ‘모든 일’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일은 진정한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일이며,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심판이 믿는 이들에 의하여 계승되는 일이다.
요컨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고자 여러 표징들을 보여주신 것처럼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한민족에게 표징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자비로운 심판이 진리임을 보여주심으로써 진리가 자유를 가져다 주고 결과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는 표징을 예수님께서 동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최고선이 훼손당하고 공동선이 침탈당함으로써 받은 겨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땅의 겨레 가운데 천손의식으로 각성된 민중이 이미 그 치유자 역할을 해 왔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민족과 국가가 무수히 위기를 겪는 가운데에서 국난 극복을 해 낸 주역이 바로 민중이다.
그런데 이 민중은 그저 자신들이 지녀온 하느님 신앙과 천손의식에 따라 의롭고자 했을 뿐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지 않다. 왜냐하면 지배층과 지식층이 최고선은 물론 공동선에 대한 봉사 자세를 소홀히 함으로써 민중이 생존에 급급하도록 매달리게 하여 그 자각을 가려 왔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제8장의 본문에 대한 신학적 분석을 기초로 하여 식별해 볼 때, 분명히 구분해야 할 선교적 지향이 있다. 하나는 “억압과 고난을 당하는 민중이 타락한 역사를 구원하는 존재”(서남동)라는 민중신학적 노선이다. 이는 민중을 예수와 동일시하는 관점으로서 동의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지배층과 지식층에 대한 우선적 선택으로 접근했던 마태오리치를 비롯한 예수회의 선교 노선이다. 이는 민중을 배제하는 관점으로서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우리의 지향은,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이 역사 안에서 이룩한 민중의 공헌을 기억하고 배우되, 향후 민족의 최고선과 공동선에 대해 헌신함으로써 민중에게 천손의식(天孫意識)에서 나온 신성(神性)을 넘어 제천의식(祭天儀式)에 담긴 정체성을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향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요, 우리끼리 하는 전례의식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민족의 최고선과 공동선을 기준으로 앞에서 인용한 대로 공의회가 권고한 대화의 원칙을 연대의 원칙으로 삼아 겨레 사랑에 헌신하는 실천으로 이룩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민족적인 정체성은 물론 이를 넘어 하느님 안에서의 정체성까지 공유될 수 있을 것이며, 민족 복음화와 아시아 복음화의 전망이 비로소 열릴 것이다.
첫댓글 <예수님을 종교적으로만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일보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8,32)는
그분의 말씀을 민족의 현실 안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일이 더 중요하다. >
녜, 긴글을 읽기에는 눈이 시렵지만 전체를 읽었습니다.
다시 꼼꼼하게 보면서 정체성에 대해 확고하게 알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너무나 똑똑하신 형부의 논리에 대꾸조차 못하지만 행위로 보여주다보니 관계도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못따라가지만 하늘 사랑으로 제 자리를 지켜가도록 하겠습니다.
8.7.1. 진리의 위계질서
큰별이 비추는 성화를 골라 우리에게도 비추어 주실 것을 확신하며 트리 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다시 읽게 되니 더욱 감사의 마음이 우러 나옵니다.
<또한 최고선이 빛이라면 공동선은 여명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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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홍익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이치로 다스림”으로써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하는 뜻으로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
어릴 때 단군이야기와 더불어 비슷한 이야기를 날마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다리 주물러 드리면서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저도 모르게 제 안에 자리잡고 있었나 봅니다.
홍익이란 자주듣던 단어에 끌려 사이트찾아 강의 듣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결국 ‘필요한 일’, ‘불확실한 일’, ‘모든 일’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일은 진정한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일이며,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심판이 믿는 이들에 의하여 계승되는 일이다.>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함께하려는 마음을 길러 가리라 마다짐합니다.
다시 또 읽었습니다.
가슴벅찬 느낌입니다. 민중이 할 수 있는 공동의 힘에 희망을 걸고 용기를 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