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 이해인
숲과 바다를 흔들다가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바람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놓고
햇빛과 손잡은
눈부신 바람이 있어
가을을 사네
바람이 싣고 오는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면
가까운 이들과의
눈물겨운 이별도
견뎌 낼 수 있으리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모든 말
깊이 접어두고
침묵으로 침묵으로
나를 내려가게 하는
가을바람이여
하늘 길에 떠가는
한 조각 구름처럼
아무 매인 곳 없이
내가 님을 뵈옵도록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바람이 있어
나는
홀로 가도
외롭지 않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잠시 떠돌기 좋은 계절입니다.
가을의 창문을 열면 - 이외수
어디쯤 오고 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도
깊어지는 사람 하나
단풍나무 불붙어
몸살 나는 그리움으로
사태질 때
가을 창문을 열었다가 괜히 그리움에 사무쳐요.
가을 그림자 - 김재진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 빠진 감잎에 근심 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선 여윈 추억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난 누구? 내 가을 그림자는 어떤 모습일까?
가을에 -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
너와 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최애 계절, 가을에 햄볶아요. ㅋ
가을엔 1 - 추경희
시간이 가랑잎에 묻어와
조석으로 여물어 갈 때
앞내 물소리
조약돌에 섞여
가을 소리로 흘러내리면
들릴 듯 말 듯
낮익은 벌레 소리
가슴에서 머문다
하루가 달 속에서 등을 켜면
한 페이지 그림을 접 듯
요란했던 한 해가
정원 가득 하늘이 좁다
한가롭고, 고즈넉한 전원에서 가을이 오는 소리를 느끼는 시입니다.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오래된 가을의 추억을 돌아보는 천양희 시인의 시입니다.
가을아, 어쩌라고 - 임영준
그렇게 갑자기
아침저녁으로
매몰차게 뿌리치면
우린 어쩌라고
툭 건드리면 터져버릴 듯
울먹거리면서
구석구석 후벼대면
난 어쩌라고
새파랗게
뭣도 모르는 것처럼
다 내려놓고 떠나버리라고
자꾸만 흘겨대면
다들 어쩌라고
가을아, 그렇게 소리소문 없이 떠나면 어쩌라고? +_+
가을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 용혜원
가을에 축축하게 비 내릴 때마다
나무들은 알몸이 되고 싶은지
단풍 든 잎새들을 떨궈냈다
비 내리는 길 바라보고 있으면
고독 속에 신열을 앓던
외로움 덩어리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거리에 떨어진 낙엽들이
흥건히 빗물에 젖고
한산해지는 저녁 무렵
가을 길을 걷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몰랐다
가을은 왜 우리 가슴에
짙게 머물다 가는가
세월 가듯 구름 가듯
모두가 떠나가야 하는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
가을비가 내리면
단풍으로 물든 이야기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가을빗속을 걸어 들어가며
사랑하는 이와 다정하게
팔짱 끼고 걸으면
아픈 자국을 남겨놓고 떠나는
가을도 쓸쓸하지만은 않다
가을비 내리는 길에서 짙은 가을 냄새를 맡아요.
씨앗 - 허영자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낭만과 고독이 공존하는 계절, 가을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김준엽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