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이런 일이 /허숙희
교장으로 첫 출근 전날이다. 삼일절이라 쉬는 날이었지만 일찍 일어났다. 교장 발령받고 하던 일(경기도교육청 초등교육과 방과 후 학교 업무)은 후임자에게 인계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한 책상을 정리하려고 사무실에 갔다가 이런저런 일이 많아 늦은 시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피곤하지 않았다. 태극기를 달고 아침밥 먹기 전인 이른 시간이었으나 자전거로 새로 근무하게 될 ㅁ 초등학교를 향해 달렸다. 늘 타던 자전거였는데 그날따라 새것처럼 페달이 더 힘차게 돌았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도 유난히 상큼하게 느껴졌다. 걸어서 45분, 자전거를 타면 13분 거리로 집에서 3.1킬로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어느새 도착하였다.
교문을 들어서니 아직 다 마무리되지 않은 급식실과 체육관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이 어수선했다. 내일이면 새 학년이 시작되어 학생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올 텐데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임하기 전이라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운동장을 돌아보니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학기 말 방학 중이고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얼핏 관리가 잘 안되는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 너머에는 재개발되어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아파트가 있었다. 저곳이 내가 근무할 학교의 학구였다. 어떤 아이들일까? 학부모님들은 어떤 분들일까? 그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 벅찼다.
ㅁ 초등학교는 개교한 지 30년이 지났다. 두 개의 도움반(특수학급)을 포함해 53학급이었으며 학생 수는 1,500명이 넘었다. 교직원 수는 130명 가까운 규모가 꽤 큰 학교였다. 교통이 편리하고 시내 중심지에 있었다. 선배 교장 선생님들이 선호하는 곳이 아니었는지 그해 근무를 희망하는 분이 아무도 없어 내가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를 선택한 데는 나름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정부(노무현 대통령 시절)는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방과 후 학교 운영을 정책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래서 경기도교육청에 전국 최초로 방과 후 학교 부서가 생겼고 그때 지역 장학사에서 교감으로 발령받고 2년이 채 안 되었는데 도 장학사로 전직 발령이 나 그 일을 하게 되었다. 맡은 업무 중 가장 공들인 것은 공부가 끝난 후에 홀로 지내는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돌봄 교실(그 당시는 보육 교실이라고 하였다.) 확대하고 지원하는 일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학교생활을 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맡은 일에 애착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 도내 전 학교에 돌봄 교실을 설치하고자 사업을 넓혀 갔다. 그러나 ㅁ 초등학교는 여러 차례 돌봄 교실 설치가 필요한 학교를 알아보는 과정에 ‘해당 없음’으로 답변했다. 맞벌이 가정도 많고 사교육비 부담도 큰 학구에서(그때는 분기별로 학교별 사교육비 현황을 집계하고 교육부에 보고 하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만약에 교장으로 그 학교에 가게 되면 반드시 돌봄 교실을 설치해 운영해 보리라 생각했었다.
교장으로 첫 근무가 시작되었다.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업식을 마친 후 마침내 본관과 별관에 있는 교실과 특별실을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쌓인 먼지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게시물들이 눈에 거슬렸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야릇한 분위기를 느꼈다. 입학식 준비며 학교 일을 의논하느라 수시로 두 교감이 들락거렸고 각 학년 부장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와서 자기 학년을 소개하였다. 학부모 대표와 학교 운영위원회 위원장도 교육청 홈페이지를 방문해 내 이력을 캐 보았다고 말하며 학교 일은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든든한 응원군을 자청하고 돌아갔다. 온종일 부산했다. 그러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일 때 여러 차례 학교를 옮겨 다니며 받은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교감이 학부모 총회 때 학교장이 할 인사말이라며 내게 원고를 주고 갔다. 부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고맙다고 말하고 부임 첫날 응원군을 자청한 학부모 대표와 운영 위원장을 떠올리며 향후 교장의 학교 운영의 방향과 의지를 들어내려고 인사말은 짧게 하고 교육청에서 했던 돌봄 교실 운영과 방과후 학교 우수 사례로 방송되었던 영상을 보여 주기로 했다. 총회 때 예상했던 참석 인원수보다 훨씬 많아 준비한 좌석이 부족했다. 학부모들은 화면에 소개된 내용을 보는 내내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학부모의 반응은 내 짐작대로였다. 여기저기서 우리 학교는 어째서 돌봄 교실이 없는지 질문이 들어왔다. 그리고 심지어는 도 교육청에서 지정해 주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며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학교에서 신청이 없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방과 후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운영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학생, 학부모,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 보고 학교 여건을 살펴보면서 검토하겠다고 답변하고 회의를 마쳤다.
총회 이후 학교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불만으로 가득 차 심상치 않다고 두 교감에게 전해 들었다. 특히 저학년 선생님들은 방과 후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게 되면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비워 주어야 하니 더욱 불평이 심하다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신경 쓰였다. 교장이 되면 의욕대로 섣불리 서두르지 말라는 선배들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이들은 기다려 주지 않고 커 가고 있으니 오랜 시간 머뭇거릴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방과 후 부장과 교무부장이 앞으로 열심히 해 보겠다고 했다. 또 퇴근 후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돌봄 교실을 책임져야 하는 담당도 젊은 남자 선생님 세 명이 희망하여 돌봄 교실 신설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든든한 응원군인 학부모들이 있었다. ‘3인의 법칙’이 떠 올랐다. 그걸 믿어 보자. “그래 한번 해 보자. 이제 시작이다.” 나는 힘이 불끈 솟았다.
갈 길이 바빠졌다. 학부모와 선생님들의 의견을 모아 방과 후 학교 운영 계획을 세웠다. 개설할 프로그램 수요 조사와 임용할 강사 선정 등 모든 사항을 교육청 방침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게 세심하게 살피며 학교 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운영을 서둘렀다. 한편 교장에게는 학생과 학부모만 수요자가 아니라 선생님들도 수요자이므로 그들의 불만을 해결해 주려고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내준 선생님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각 학년 연구실을 쾌적하게 정비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교과 관련 프로그램 이외에 요리 교실을 비롯하여 승마 교실, 외발자전거 반, 튼튼 줄넘기 교실, 측만증 체조 교실, 수영교실, 영어 말하기 반 등 모든 프로그램이 늘 희망자가 넘쳐 추첨해서 수강자를 확정하였다. 또 참여자가 늘면서 계속 강좌의 가짓수가 늘어 갔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선생님이 진행하는 한국사 반도 생겼고 학부모님들의 재능 기부와 지역 유관 기관과 연계한 프로그램들이 다채롭게 운영되었다. 보기 드문 사례였다. 지난해 여덟 개였던 프로그램이 40여 개로 늘었다. 수업이 끝난 후 텅 비어 있던 교실과 운동장 등 학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학부모님들은 사교육비가 많이 줄고 아이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반응이 뜨거웠다. 돌봄 교실 담당과 방과후 학교 부장은 교육청 회의가 있을 때 우수 사례 발표를 여러 차례 하였다. 처음 하는 일이라 어려움은 있지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 직원이 모두 그런 줄 알았다. 경험 없는 교장의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행정실장이 사색이 되어 교장실을 찾았다. 교육청 감사과에서 방과후 학교 운영과 관련하여 감사가 나온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표적 감사였다. 잠시 후 도 교육청 관련 부서에서 전화가 왔다. 교육감실로 직접 온 민원이라 도에서 나가야 하지만 함께 근무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봐 왔기에 믿고 그럴 리가 없을거라 판단해 지역교육청에 일임했다고 했다. 그동안 규정과 방침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촘촘히 짚어서 추진하였고 도에서 내가 오랫동안 해 왔던 일이라 잘못되지 않았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혹여라도 실수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서류 검토는 건성이었고 모든 선생님을 학년별, 개별로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심지어는 방과 후 강사까지 일일이 만나 면담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민원은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임용하는 과정에서 학교장이 강사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5일간의 감사 결과는 아무 티끌도 찾지 못하고 끝났다. 부임한 이후 교직원들이 내게 보여 준 모습은 민원인이 누구였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모두가 협조적이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보였다. 그래서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일까?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민원을 낸 그는 정말 내가 강사들로부터 사례를 받았다고 생각한 걸까? 소통이 잘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속상해서 받은 상처가 오랫동안 아물지 않을 것 같았다.
“허 교장님! 나는 처음부터 허위 민원이라 생각했어요.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무어든 다 하세요.” 교육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다. 그리고 감사 이후 교감 선생님 두 분을 비롯해 학교 식구들이 모두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이번 일로 모든 사람이 나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정당한 일도 모든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다고 자책하거나 오랫동안 상처를 지우지 않고 간직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상처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출 수 없었다. 직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되는 일은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계속 진행하겠다.”고 말하고 회의를 마쳤다.
그 일이 있고 딱 1년 6개월 후인 2011년 12월 1일 전국에서 방과 후 학교를 가장 잘 운영하는 학교로 선정되어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전국 제3회 방과 후 학교 대상’을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다음 날 ‘학원보다 낫다 입소문 타니 참여율 29% →92%’ 란 제목으로 중앙지 전면을 차지한 기사가 나왔다. 한동안 전학 문의 전화가 많아 교감이 혼쭐 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