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개]
자가 청보이다. -또 다른 자는 백고이다.- 목은 이색의 증손이고, 이종선의 손자이다. 문장에 능한 재주를 타고났고, 조부의 풍모가 있었다. -정통 병진년(1436, 세종18)에 친시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았다. 박팽년과 성삼문이 대궐 뜰에 묶여서 작형을 당할 때에 이개가 천천히 말하기를
“이것은 무슨 형벌인가?”
하였다. 그는 야위고 약했으나 엄한 형벌 아래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성삼문과 같은 날 죽었다. 수레에 실려 나갈 때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 임금의 솥이 무거울 때엔 삶 또한 컸거니와
홍모처럼 가벼운 곳엔 죽음이 오히려 영광일세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다가 성문을 나가니
현릉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꿈속에서 푸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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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
자가 천장이고,-또 다른 자는 중장이다.- 세종조에 급제하였다.-선덕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정통 무오년(1438)에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과묵하며 도리에 어긋난 말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록 빗물이 고였더라도 길을 피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으면서 경연에서 시강하여 돕고 바로잡은 바가 많았다.
노산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에 여덟 공자가 강성하니, 민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이 일찍이 하위지에게 도롱이를 빌리려 하니, 시로써 답하여 보내었다.
남아의 득실이야 고금이 마찬가지이니
머리 위에 분명 밝은 해가 임해 있네
도롱이 보내드림은 응당 뜻이 있으니
오호의 안개비 속에 좋게 서로 찾으리
이는 시사를 슬퍼한 것이다. 김종서를 죽이고 세조가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모두 팔고 전 사간으로서 선산에 물러가 살았다. 세조가 임금에게 아뢰어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1455, 세조1)에 세조가 선위를 받은 뒤에 교서를 내려 매우 간곡하게 초치하니 하위지가 부름에 응하였다.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을해년 이후부터의 녹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병자년(1456)의 변란 때에 성삼문 등에게 작형을 가하고 그 차례가 하위지에게 미치자 말하기를
“이미 저에게 반역의 이름을 더하였으니 그 죄는 응당 죽이는 것이거늘 다시 무엇을 묻겠습니까.”
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 작형을 시행하지 않았다. 성삼문 등과 같은 날에 죽었다.
세종이 인재를 배양한 것이 문종 때에 이르러 바야흐로 성대하였다. 당시의 인물을 논한다면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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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원]
자가 태초이고, 세종조에 급제하였다.-정통 갑자년(1444, 세종26)에 식년시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계유년(1453, 단종1)에 백관들이 세조의 공을 주공에 견주며 포상하기를 청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조서의 초고를 짓도록 하였다. 여러 학사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유독 유성원만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하여 초고를 지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통곡했으나 집안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노산이 상왕이 되었을 때에 성균 사예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456, 세조2)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을 잡아갈 때에 유성원이 마침 성균관에 있었다. 제생들이 성삼문의 일을 알리자, 즉시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더불어 술을 따라 이별주로 마시고, 사당에 올라가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가서 보니 관디도 벗지 않은 채 패도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거늘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지 못했더니, 조금 뒤에 관리가 와서는 시체를 가져가서 책형을 가하였다.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