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희망을 부끄럽게 하나요?
맑은 하늘의 순백색 구름은 참 예쁩니다. 미풍에 실려 떠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기쁨이 몽글거립니다. 이 순간 존재하는 제가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집니다.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세상 부족함 없는 만족감을 느끼다가도 갑자기 원치 않은 상황이 오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압도되는 그런 것 말이지요.
얼마 전, 저는 가족과 함께 집안의 문제를 상의하며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는데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긴장이 되었습니다. 방금까지 저희가 누리던 기쁨과 평화는 사라지고, 불안감마저 엄습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고, 이를 책임질 능력이 충분한데 그 사실을 잊고 과거 어느 지점으로 달음박질하였던 겁니다. 다 괜찮을 거라는 희망도 같이 사라졌습니다. 상대방을 불신하는 마음도 비집고 올라옵니다. 무엇이 그렇게 이끌었을까요. 바로 기억입니다. 희망을 순식간에 압도하는 부정적인 기억 말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께서는 기억의 정화(淨化)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을 기쁘게 잘 살다가도 과거의 기억과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거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면 그때의 일이 마치 이 순간에 똑같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오늘은 사라지고, 불안한 과거와 미래에 가 있는 상태가 되어 ‘그래 그때처럼 또 힘들어질 거야.’ 라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거지요.
집에서 키우는 진돗개 바람이가 떠올랐습니다. 주택에 살다보니 대문 안으로 고양이가 드나듭니다. 바람이는 자기 영역에 침입한 고양이를 매섭게 내쫓습니다.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고양이가 다녀간 그 시간만 되면 나무로 만든 데크에 코를 박고 킁킁거립니다. 고양이가 데크 아래에 있다고 믿으며 발톱으로 나무를 박박 긁어댑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바람이가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자기 영역을 침범했던 고양이에 꽂혀서,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고양이를 아직도 거기에 있는 듯 착각한 것입니다.
기억에 매여 과거에 멈춰 있는 바람이의 모습에서 저를 보았습니다. 고양이 냄새가 나지 않는 다른 장소도 있는데, 나쁜 기억의 자리에서만 맴도는 바람이가 안쓰럽고 애처로웠습니다. 산책을 나갈 때도 다른 때 같으면 신나서 뛰어갈 텐데, 데크 쪽만 쳐다보며 미련을 둡니다. 신났던 오늘의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어제의 나쁜 기억과 내일 또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만 있을 뿐!
바람이는 저에게 부정적인 기억이 희망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을 이번 희년의 주제로 제시하셨습니다. 과연 우리에겐 나쁜 기억만 있을까요? 나쁜 기억조차 자기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껴안으며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인간은 본시 연약한 것이므로 제 아무리 훈련이 되었다 할지라도 기억을 가지고는 실패하기가 쉬우니, 생각을 끊고 고요와 평화 속에 있던 마음도 변하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기억 때문인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 중)
첫댓글 박지현 요셉피나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