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안(大邱敎案)
1891년 대구 지방에서 감사와 아들들, 불량배들이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를 강제로 축출하고 신부 댁을 약탈함으로써 일어나게 된 교안. 일명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 박해 이후까지 남아 있던 천주교와 서양인에 대한 지방민들의 적대감과 한불조약(韓佛條約)을 무시한 지방 관장의 조치가 어우러져 일어난 것으로, 새로운 지방에서 전교의 터전을 마련하던 교회측에 일시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배경] 1877년 한국에 입국한 로베르 신부는 1882년부터 경상도 지역의 전담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대구 시내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신앙의 자유도 얻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아직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과 신자들에 대한 위협이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우선 1885년 말경에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경상도의 신나무골(경북 칠곡군 枝川面 連花洞) 교우촌에 거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1866년 5월경, 보좌로,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를 맞이한 로베르 신부는 일단 그를 신나무골에서 80리 가량 떨어진 여진(余津, 경북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으로 보내 교우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러다가 1887년 3월경에는 신나무골을 그에게 맡기고 대구 인근의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上里洞과 竹田洞 부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마침내 ‘대구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에 앞서 같은 해 2월, 대구의 아전 2명이 포졸들을 앞세워 몇몇 신자들을 체포 투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허 골롬바라는 여성 신자가 함께 체포되어 약 1년 6개월간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녀는 감사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로베르 신부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서울의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와 프랑스에까지 알렸고, 그 결과 프랑스 공사와 외무 독판의 중재로 허 골롬바는 1888년 8월에 석방될 수 있었으나 이것이 이른바 ‘허 골롬바 투옥 사건’이다.
[발생과 결과] 그 동안 새방골에 있는 로베르 신부의 거처가 점차 이웃 주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호기심을 갖고 구경 오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천주교에 적대감을 갖고 집을 불지르겠다고 위협하는 불량배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1891년 음력 정월이 되자 노골적으로 신부를 위협하고 신자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러므로 로베르 신부는 마부 2명과 회장 김문일(金文一)을 대동하고 판관과 감사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감사 민정식(閔正植)은 오히려 서양인과 일행들을 대구 밖으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아전들과 포졸들은 일행에게 달려들어 마부와 회장을 구타하고 모욕을 주었으며, 모여든 군중들을 돌을 던지며 신부 일행을 위협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군졸 2명을 시켜 신부 일행을 호송하게 하였으나 군중들의 모욕을 계속되었고, 일행은 말까지 빼앗긴 채 칠곡(漆谷)에 도착하였다.
로베를 신부는 칠곡에 도착하는 즉시 그곳 관장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한편 야음을 틈타 100리 가량 떨어진 교우촌으로 가서 휴식을 취한 뒤 3월 7일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베르 신부는 상경하던 도중에 우선 뮈텔(Nutel, 閔德孝)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였다.
이에 뮈텔 주교는 로베르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프랑스 공사 플랑시(Plancy, 葛林德)를 통해 조선 정부에 항의하는 동시에 대구 감사의 파면과 보상 등 6개 항을 요구하였다.
이때 조선의 외무 독판 민종묵(閔種默)은 대구 감사가 권력자인 민비(閔妃)의 친척이라는 이유에서 그를 파면하지 못하고 전라 감사로 전임시켰으며, 뮈텔 주교도 파면 요구만은 철회하였다.
한편 프랑스 정부에서는 한불조약을 위반한 데 대해 조선 정부에 항의하였다.
이렇게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중, 3월 24일에는 우연히 프랑스 군함 라스픽(L’Aspic)호가 제물포항에 나타남으로써 협상을 교회측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정부에서는 나머지 5개 항에 대한 요구를 수락함과 동시에 폭력에 가담한 포졸과 범인들을 유배형에 처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전라 감사 민정식은 프랑스 공사에게 공식 사과문을 보냈다.
협상이 타결되자 로베르 신부는 1891년 4월 20일에 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서울을 떠나 4월 30일에 대구에 도착함으로써 교안은 마무리되었다.
출처:[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