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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참선
부처님 자리는 단지 경(經)만이 아니고 바로 생명 자체입니다. 내가 생명인데, 우리 자신이 바로 생명인데 일체 존재, 일체 생명의근본 자리인 부처님 자리가 생명 아니겟읍니까? 천지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관무량수경"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즉 부처님은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말이 있읍니다. 부처님은 저 어떤 하늘에 계셔서 하늘만 몸으로 하시는것이 아니라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우주를 몸으로 하는 가운데 우리도 다른 모든 존재와 똑같이 우주에들어 있읍니다.
그러나 성품 자리에는 대소장단이 없읍니다. 모두가 우주에 들어있는 부처님 성품인데 잘난 사람은 부처님 성품이더 많은가하면 그렇지가 않읍니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 동물이나 인간, 또는 식물이나 하나의 티끌조차도 모두가 "성품" 이라는 차원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읍니다.
왜 그런가? 성품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읍니다.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는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공간성이 없으니 물질이 아니겠지요. 또한 공간성이 없으니 시간성도 없단 말입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인과율(因果律) 조차도 초월한 순수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는 작고 크고, 많고 적고, 또는 높고 낮은 어떠한 차이도 없읍니다. 티끌에 있는 진여불성이나 사람에게 있는 진여불성, 석가모니에게 있는 불성이나 예수님 불성이나 똑같읍니다. 다만 역사적인 상황과 인과의 여러가지 차이 때문에 상(相)만, 오직 상만이 차이있게 표현된 것이니 본성품에서 본다고 생각 할때는아무런 차이가 없읍니다.
따라서 "남묘호랑계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참다운 성품은대소장단의 차이가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고 훤히 빛나는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우주에 충만해 있다" 이렇게 확신 하면서 "남묘호랑계교"를외우면 허물이 될것이 없읍니다. 또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는 화두를 하더라도 "어째서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고 하는가?" 이런 식으로 의심하면 참다운 공부가 되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다운 참선이라는것은 본 성품의 자리,본분(本分)의 자리,본래면목(本來面目)의 자리, 곧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기왕이면 참선을 하고 싶지요? 스님네들에게 말을 들으면 "일반 공부는 방편이요, 참선이라야 훌룡한 공부다" 하니까 저에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타러 옵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어떻게 공부를 합니까? 하고 물으면 "아, 저는 관세음보살 합니다" 라고 대답 합니다.
이런분들는 관세음보살과 화두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물론 관세음보살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입 으로는"관세음보살" 하면서그 마음 자세가 본 성품을 떠나서 "관세음보살이 저 만큼 어디에 계신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대상적인것으로 추구하는것은 참다운 참선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참다운 염불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염불에 불과 합니다.
참다운 염불은 불이불(不二佛), 즉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입장에서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또는 불리불(不離佛)이라, 즉 부처와 내가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염불 한다는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천지 우주가 부처님뿐이다, 부처님 한 분 뿐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 염불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중생은 그 자리를 떠나기 쉬우므로 그 자리를 간절히 지키기 위하여 염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한다면 "관세음보살" 하는것 이상의 다른 화두를 들 필요가없읍니다. 어떤 화두를 들든 그 화두를 다만 상대적인 문제로나 의심하고이럴까, 저럴까 또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의심 한다면그것은 바른 참선이 되지 못하는것 입니다.
의심하고 회의하는것은 하나의 이성적인 추구 방법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한 순간도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본 주인공을 안 여의여야 바른 참선입니다.이렇게 하다보면 공부가 차근차근 순숙(醇熟) 됩니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단박에 다 끝나는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근기와 선근(善根)에 따라 차이는 있읍니다만 대체로 오랜 시간동안 추구해야 바른 참선에 이를수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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