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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55회 : 세기의 걸작, 백제 금동대향로는 어느 불효자의 사부곡(思父曲)
(2002.4.27.)
방송일: 2002427 조회수 : 23921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 PD : 김형운/ 작가 : 빈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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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c.g.)말 달리고
사비성 불타고 20"
-서기 660년....
백제가 이 땅에서 사라졌다.
(보다가)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는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절탑 불타고 5"
(연기 피어오르면)
-연기에서 향로로 줌아웃 35"
-그리고 백제의 운명과 함께 땅속에 묻혀버린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최고의 걸작품인 금동대향로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이 아름다운 유물에서 백제 시대....한 불효자의 이야기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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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 1 기본세트...엠씨 옆에 금동대향로 실물 있고....
#오른쪽의 백제금동대향로 가리키며
(또는 백제금동대향로에서 줌아웃)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발굴당시 워낙 세상을 떠들썩하게했던 유물이라..아마 한번쯤은 본 기억이 있는 분들도 있으실겁니다...
바로 지난 93년 부여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라는 것입니다.
이름그대로 백제시대 쓰였던 향로...즉 향을 피우는 그릇입니다.
#살펴보며
지금 이건 실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물을 그대로 본따 만들었기 때문에 미세한 선 하나까지도 실물과 똑같은데요...
#손으로 가리키며 (또는 타이트 샷을 따서...)
이 부분이 뚜껑이고...그 아랫부분이 몸체...그리고 여기가 다립니다.
#뚜껑 열어보이고...그 안에 직접 향을 피우기
이 뚜껑을 열고 향을 넣은 뒤...불을 붙이면...
#다시 뚜껑 닫고
이렇게 연기가 향로의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됩니다.
#향냄새 음미하며 (몸을 약간 숙여 향냄새 맡아도 좋을 듯)
향냄새가 아주 좋군요...
그런데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향로의 구조나 모양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백제시대 이 땅에 살았던 어느 불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근데 왜 이 향로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느냐...
바로 이 향로를 통해.....백제시대 한 불효자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동안 이 향로의 모양이라든가...
향로에 새겨진 문양에 대한 해석들은 많이 이뤄져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향로가 언제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었는데요
오늘 그 의문을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던 당시로 거슬러올라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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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
-차 트래킹 10"
(능산리고분군 표지판)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은 부여 능산리..부여시가지를 마-악 벗어난 곳이다.
-나성에서 팬 왕릉 14"
-부여시 능산리엔 부여시 외곽을 두르고 있는 백제시대 도성인 나성이 있다.
(팬하면)
그리고 나성 바깥쪽으로
-왕릉군 5"
백제시대 고분군인 능산리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다
-현장으로 걸어가고 줌아웃 18"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곳은 바로 나성과 능산리고분군 사이에 있는 벌판이다.
향로가 발굴된 이후 이곳에선 지난 10여년동안 계속해서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기와 쌓여있고... 11"
-지금은 8차 발굴을 준비하기위해 잠시 발굴작업을 쉬고 있다.
-발굴당시 자료화면 풀팬 20"
-이곳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건 지난 93년...원래 논경지였던 이곳에 능산리 고분군을 찾는 관람객을
위해 주자창을 건립할 계획이었다.
-발굴현장 타이트 11"
-그런데 주차장 공사를 위해 현장조사를 하던 중 예기치못한 발견을 한 것이다.
-향로 발굴된 지점 5"
진흙구덩이 속에서
-발굴당시 향로 사진 타이트 9"
진흙과 뒤범벅이 된 채로 향로가 놓여있었다. 뚜껑과 몸체는 분리되어 있었지만 온전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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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장 인터뷰
향로가 있더라구요 그리고 일체 아직은 보안상이어서 어디 말도 못하고 정말...향로는 향론데...지금껏 전혀
보지못했던 거기 때문에 놀랄 따름..이건 어떻게 말을 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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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외경 6"
-현재 향로는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의 향로 줌인 11"
-64센티미터의 높이에...독특한 모양의 향로..
-향로 틸업 22"
-향로 몸체엔 어디 한군데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수십가지의 문양이 빼곡이 조각되어 있없다.
이렇듯 화려하고 정교한 향로는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유례가 없는 것이다.
자연히 발굴지로 관심이 모아졌다.
-전시장 또다른 유물들 풀 6"
-과연 향로가 발굴된 곳은 백제시대 어떤 곳이었을까?
-풍경 틸업 11"
향로가 발굴된 이후 본격적으로 유적지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불신 들 18"
그리고 유적지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파손되긴 했지만 분명 불상의 머리와 몸을 조각한 것이다.
-광배조각 16"
이것은 불상을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광배 조각.../. 일부 조각이긴 하지만....문양이 선명하게 살아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향로가 발굴된 곳이 사찰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수장고 이름표 4" (보고)
-문열고 안으로 들어가 22"
-이외에도 능산리유적지에서는 눈길을 끄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무려 10여년간 지속되었던... 발굴의 결과다...
-상자 꺼내고
그 중 발굴당시 발굴팀을 흥분시켰던 유물이 있다.
-상자 뚜껑 열 때 10"
-나무상자안에 소중하게 보관되어있는 건 바로 목간이다.
-목간으로 줌인될때 14"
그동안 백제땅에서 목간이 발견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그런데 능산리유적지에서만 무려 23개가 발견
되었다.
-목간 틸다운 12"
목간이란 이렇게 나무막대기에 글씨를 쓰는 것으로 종이가 흔치않던 시절..종이 대신 쓰던 것이다.
-목간에서 글씨 나온다 12"
"보희사 지진"
-그런데 목간중에 절이름이 쓰여진 것이 있었다..보희사! 처음 발굴팀은 이것이 능산리에 세워져있던 사찰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자기사 목간 7"
그러나 흥분도 잠시...또다른 목간에서도 절이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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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연구사 인터뷰
처음에는 능산리 절의 사찰명이 아닌가 생각을 했었는데 이 목간들은 여러 군데 절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능산리 인근의 절에서 왕실의 사찰인 능산리 사찰에 물품이나 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목간이
아닌가 생각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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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목간 16"
-목간에는 불교적인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글귀도 나왔다.
-c.g.)글자 나오고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한 곳에서 태어났다."
목간은 능산리에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절터로 걸어올라가 손으로 가리키며 25"
-그렇다면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이 능산리 사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장음 좀 듣다가
"지금 여기 봐서 풀이 없는 부분..약간 도드러진 부분이 절터의 남쪽 한계 해당하는 남회랑 "
-능산리절터 부감 4"
-주춧돌을 근거로
-선 그어지고 선 눕혀지고 6"
백제시대 이곳에 세워져있었던 건물들을 그려봤다.
-탑 생기고 건물들 올라오고 8" (좀 보다가)
-다 올라오고 화면 돌리고
나무 생기고 15"
-사찰마당엔 목탑이 세워져있었고 그 뒤로 금당과 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찰주변엔 회랑이 쳐져있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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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 2 ... 복원된 사찰..
#복원된 사찰 중앙에서 ...
-지금 제가 서있는 이 사찰의 구조와 모습은 부여박물관팀이 그려놓은 복원도를 근거로 한 것입니다.
백제시대....부여 능산리엔 이런 모습의 절이 세워져있었던 것이지요
#향로 발굴된 지점 쪽으로 걸어가며...
-향로가 발굴된 곳은 바로 이 절의 내부였습니다.
(지점에 가서)정확한 위치는 바로 이 즈음...사찰의 서쪽 부분입니다...
#생각하듯
-자...그렇다면 백제금동대향로는 이 사찰에서 쓰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향로는 예나 지금이나 절의 중요한 물품중의 하나입니다.
요즘도 절에 가보면 대웅전 불상앞에 향로가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고대 절터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향로 나오고
이 유물을 보시지요...백제금동대향로처럼 화려하진않지만 이것도 향론데요 이 향로가 발굴된 곳도 백제시대
절터인 익산 미륵사집니다.
#용주사의 금동향로 나오고
그럼 이번엔 이 유물을 한번 보시지요
백제시대보다는 좀 후대의 것이긴 합니다만 이것도 향롭니다...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위해 지은 "용주사"라는 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터에서 향로가 발견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 의문을 갖는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예사롭지않은 모습 때문입니다
#위의 두 개 향로와 백제대향로 함께 놓여있고
자..보십시오..
앞서 본 다른 향로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너무도 화려하고 정교한 모습입니다.
#익산 미륵사지 향로 손으로 가리키며
특히 이 향로가 발굴된 익산 미륵사지는....백제시대 중요 사찰터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발견된 향로는 투박할 정도로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찰에서는 이렇듯 화려한 향로를 썼을까요..?
과연 이 사찰은 어떤 사찰이었을까요?
지난 96년 사찰의 건립배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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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성왕을 추모하기위한 사찰...
-사찰터..풀 걸어가는데 탑 생기고 12"
-향로가 발굴되고 불과 2년뒤인...95년
능산리절터에서는 또다시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바로 사찰마당에 세워져있었던 탑자리에서
-발견된 자리로 걸어가고 5"
독특한 모양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사진 생기고 사람 없어지고 7"
-탑자리를 1미터가량 파자..그 중심부에 돌이 하나 비스듬하게 쓰러져있었다.
-발굴현장사진의 사리감 타이트 7"
-마치 지금의 우체통 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모양의 돌이었다.
-사리감 풀 5"
-돌 중앙엔 돌과 같은 터널 모양의 구멍이 파져있다.
-글씨 틸다운 16"
그리고 돌의 양옆엔 글씨가 새겨져있는데..모두 20자였다.
대체 이 돌은 무엇일까?
-탑에서 글씨 나오고 22"
-돌에 새겨진 글씨를 통해....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글씨 나오면)
백제창왕 13년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 즉 이 돌속에 사리를 넣어 공양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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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선관장 인터뷰( 3650)..박물관에서 ..사리감 가리키며
이 사리감은 보시다시피 외형이 위에가 아치형으로 오늘날의 웇통과 비슷하다고 이야기가 되는데
공의 윗부분도 외형하고 같이 아치모양으로 뚫어져있습니다.
사리장치를 안에다 넣고 바깥부분은 아마 목재로 제작을 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여닫이 문같은 장치가
만들어져 있을 수도 있게 안쪽에 내각을 파서 구조를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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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사리감 입구에 문 달려있고 4"
-이 돌은 사리함을 넣어두던 감실..즉 사리감이다.
-사리감이 생겨 안으로 들어가고 8"
-사리를 넣은 사리함을 이렇게 사리감안에 보관했을 것이다.
-기둥 뽑고 14"
-원래 사찰마당에 탑을 세울 때엔 그 안에 사리나 불교경전을 넣는다.
그런데 대개 목탑의 경우는
-구멍 들여다보고
심초석 즉 탑의 중심기둥에 구멍을 뚫고 사리함을 넣는다.
-그 옆에 사리감 생기고 9"
그런데 능산리 사찰에선 이렇게 독특한 모양의 사리감을 따로 만들어 사리함을 보관했다.
-현장과 c.g...탑앞의 두사람 풀 20"
-능산리사찰에선
왜 이렇게 독특한 모양의 사리감을 따로 만들어 탑에 안치한 것일까?
-사리감 빠져나오고
-여기에서 사리감에 쓰여진 글씨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리감 배경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5"
-(보다가)
-사리감에서 창왕 13년 나오고 9"
-창왕13년..이것은 바로 사리감이 공양된 연대다..
-삼국사기등장할 때 16"
-c.g. 나오고..원자다라는
-그렇다면 창왕 13년은 언제인가.
삼국사기에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성왕의 맏아들인 위덕왕의 이름이 창이라는 것이다.
-위덕왕 나오고 =표시 15"
-사리감에 새겨진 창왕은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백제 위덕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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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학 인터뷰
창왕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창왕은 백제 위덕왕이 생전에 불려졌던 이름이 되겠습니다.
왕이 죽게되면 시호가 부여되지 않습니까...
백제 25대 무령왕의 경우 생전에 사마왕으로 불렸습니다.
무령왕을 매지권에서 확인되고 있지않습니까..
이 분이 돌아가시고 무령왕이라고 하는 시호가 부여됐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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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감에서 매형공주 글씨 11"
-사리감엔 사리감을 공양한 사람의 이름도 등장한다..매형공주...이는 성왕의 딸이자..위덕왕의 누이다..
-투샷 서있고 사리감 들어가고
탑 세워져이고 14"
-그러니까 위덕왕 13년...즉 성왕이 죽고 13년이 흐른 뒤 성왕의 딸이 사리감을 봉양하고 탑과 함께 사찰을
건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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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연구사 인터뷰
성왕과 창왕대의 역사적인 시대분위기와 일관되어서 이 절터가 아마 백제성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않느냐
단정하는데 유력한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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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으로 걸어들어가고 19"
-실제 능산리사지가 성왕과 관련이 깊다는 건...사찰옆에 위치해있는 능산리 고분군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능산리절터에서 600미터즈음 떨어진 곳에 있는 능산리고분근..
-고분군 전경 팬 15"
-이곳엔 모두 7기의 고분이 나란히 조성되어있다
그런데 이 고분들은 바로 백제 왕실의 고분이며 이 중에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고분군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7"
-고분 타이트 3"
삼국사기에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모형내부 판 들어보이며 23"
-그리고 무덤의 내부구조를 통해서도 이무덤이 왕릉급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고분군의 무덤 중 한기를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곳이다.
"처음엔...한사람..좁게..나중에 한칸 더 붙여서,,,합장...무덤"
-무덤 내부 풀 10"
-시신을 모셔두는 현실이다.
각 벽면이 거대한 하나의 판석으로 이뤄져있다.
-내부 벽화들 16"
-그리고 벽면과 천정엔 벽화가 그려져있는데 네 벽면엔 사신도가 그려져있고...천장엔 연꽃과 구름 무늬가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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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구인터뷰(내부에서 8 1718)
벽화고분 발견되어서 그 전부가 왕릉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왕을 포함한 최상류층의 무덤이라고...판단..
이런 벽화를 그릴 수 있는 건 왕이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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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 책 표지 7"
-넘기고 사진들
-그렇다면 능산리고분군의 7기의 무덤 중 성왕의 무덤은 어느 것일까..
이 책은 일제시대 발굴결과를 정리해놓은 조선고적도보다..
-도굴구멍 사진 10"
-발굴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된 뒤여서 이렇다할 유물은 찾을 수 없었다.
-구조 다른 사진들 11"
-대신 무덤의 내부구조를 통해...무덤의 주인을 추정해볼 수 있었다..
-아래오른쪽 무덤에서 평천정
c.g.나오고 17"
-무덤군을 바라봤을 때 아랫열 오른쪽 무덤은 이런 모양이었다.
(좀 보고)
시신을 모셔두는 현실의 천장이 일직선으로 평평하다.
-터닐식 c.g.나오고 13"
-이에비해 아랫열 중간무덤은 천장이 둥그스름한...터널형이다.
-평사형 13"
-아랫열 왼쪽 무덤은 벽면과 천장을 이어주는 부분이 꺽여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5각형구조를 하고 있다.
-뒤의 네 개 무덤 c.g. 10"
-그리고 나머지 네기의 무덤도 이렇게 5각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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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구인터뷰(책 들고 8 3225)
이 그림은 중하총 그림인데 중간 둥글게 되어 말하자면 터널형이다..이렇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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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에서 중하총으로 줌인 11"
-7기 무덤중에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건 아랫열의 중간에 있는 무덤이다.
-무덤에서 c.g.나오고 4" (보다가)
-성왕무덤 돌리고 6"
-시신을 모셔둔 현실의 천장이 둥근..터녈형...
-무령왕 무덤 돌리고 10"
그런데 이 구조는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바로 성왕의 아버지인 무령왕의 무덤과 똑같은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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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구 인터뷰(8 4742)
여기와가지고는 공주의 벽돌을 돌로 바꿔만 놓았지 구조 형식면에서는 완전히 똑같다.
그건 공주에서 바로 이쪽으로 이어지는 형식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고..
여기 있는 왕릉중에 가운데가 제일 오래되고 제일 오래되었다는 건 사비에 와서 제일 먼저 별세한 왕은
성왕이다. 그래서 성왕의 무덤으로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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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복원도에서 사리감 나오고 6"
-그런데 또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능산리사찰에서 나온 독특한 모양의 사리감이
-무덤 구조 c.g.옆에 와서 붙고 10"
성왕릉의 둥그스름한 천장구조와 닮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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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학 인터뷰 (7 )
성왕의 시신을 안치한 관을 넣어둔...현실의 구조가 아치모양으로 되어있는데 능산리 2호분 아치모양이
사리감과 똑같다.
이건 추측컨데 불교신자였던 성왕의 무덤의 현실구조를 따라서 사리감을 만들지않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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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서 절터로 팬..절터 생기고 26"
-부여 능산리에 조성되어있는 성왕의 무덤...
-(잠시 보다가)
-(팬할때부터 멘트 시작)
그리고 성왕이 죽고 13년 뒤...성왕릉에서 불과 600미터 떨어진 곳에 조성된 사찰..
이는 이 사찰이 성왕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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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복원된 사찰 배경 //완본
#탑앞에서
성왕은 백제 26대왕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백제 무령왕의 아들로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성왕이 왕위에 오른 건 523년..그러니까 6세기 초,중반에 백제를 다스렸던 왕입니다.
그리고 백제의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 즉 사비로 옮기는 국가적인 사업을 단행한 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왕을 위해 건립한 절이 바로 부여 능산리에 세워져있었던 이 사찰이다..?!
(현재 능산리에는 절터만 있고...스튜디오에는 복원도를 근거로 복원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위에 쓰여있는대로 정확히 표현해야합니다...예를들면 "부여 능산리에 있는 이 사찰이다"
이렇게 표현해도 틀리고 "그냥 이 사찰이다" 라고만해도 정확치않으니 이 부분은 좀 신경써서...말씀해주시면
너무도 감사하겠습니다...)
#기록 등장 ... 기록옆에 멘트에 따라 자막 플레이이 기록을 한번 보시지요
"백제여창 봉위고왕 위도백인 다조번개 종종공덕"
해석을 해보면 여창...즉 위덕왕이 고왕...여기서 고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미하는 한자입니다
그러니까 위덕왕의 아버지인 성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덕왕이 성왕을 받들기위해...백명을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하고....번개를 만들고 공덕을 닦았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데 번개라는 말이 좀 생소하실겁니다...번개라는 건 사찰의 천정에 종이나 천으로 장식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록에 의하면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위해 대규모의 불교적인 의식과 행사를 거행
했다는 것입니다.
#기록 사라지고...탑앞에서
그렇다면 이 탑에 사리감을 공양하고 사찰을 건립한 것도 바로 이런 백제왕실에서 거행했던 불교행사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그런데 최근에 또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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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성왕 사망 뒤,성왕을 위한 추복불사가 대대적으로 행해지다.
-법륭사 헬기샷 11"
-(보다가)
일본 나라현에 위치한 법륭사..4만4천평에 달하는 이 거대한 규모의 사찰은
-법륭사 탑과 건물 걸쳐진 풀 6"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법륭사 금당풀 4"
-그래서인지 사찰에 세워져있는
-금당 문 열고 4"
각종 건축물뿐만아니라 그 안에 모셔져있는 불상들은
- 훑고 20"
대부분이 일본의 국보급 유물들이다.
(좀 보다가)
-특히 법륭사금당엔 많은 불상들이 모셔져있어 마치 박물관을 방불케한다.
그런데 이 법륭사의 불상들 대부분이 고대삼국과 관련이 있다.
-석가삼존불 풀 7"'
-삼존불의 불상 얼굴 3" .
-석가삼존불은 백제계 장인으로 알려져있는 도리가 만든 불상이다
-담징벽화 15"
-그런가하면 법륭사 금당엔...그 유명한 담징의 금당벽화가 있다..고구려 학문승이었던 담징이 법륭사에 와서
그렸다는 벽화다
-백제관음 27"
-이곳엔 백제라는 이름이 붙여진 관음상도 있다...2.8미터의 키에 가냘픈 몸매..
그래서 동양의 비너스로 불리는 이 불상은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몽전 팬 12"
(윗그림과 몽전 걸쳐서)
이렇게 일본 법륭사엔 고대 삼국..그 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은 불상이 많다.
-문 열면 불상 얼굴 12"
그런데 일본 법륭사의 불상 중에 외부에 공개가 잘 되지않는 불상이 있다.
바로 몽전이란 건물에 모셔져있는 구세관음상이다.
-나머지 한쪽 문 여는 4"
봄과 가을에 각각 한달씩 1년에 두 번...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된다.
-불상 틸업 23"
-(보다가)
구세관음상의 높이는 178.8센티미터..사람의 신체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놓은 등신상이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이 구세관음상을 두고 사람을 본따놓은 듯 하다고 평한다.
-광배에서 보주로 틸다운 21"
-뿐만아니라
구세관음상이 쓰고있는 화려한 관과 의상...그리고 보주를 감싸고 있는 손의 조각은...정교하기 이를데없다..
-얼굴로 줌인 14"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구세관음상을 두고 일본 최고의 불상조각이라고들 한다..
-김상현교수 찾아가고 5"
-그런데 최근 동국대의 김상현교수는 법륭사 구세관음상에 대해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투샷 책 보는 8"
-대일본불교전서 책 펼치면 24"
-김상현교수가 제시한 기록은 대일본불교
전서-일본의 불교관련 기록들을 모아놓은 책으로 그 중에 법륭사의 스님이었던 성예가 남긴 기록이 있다.
-현장음
"그 중에 성예초 2권이 있다.
부왕을 연모해서 그 모습을 나타내다."
-c.g.로 책 넘기면 21"
-15세기 초 법륭사의 스님이었던 성예는 법륭사 몽전의 구세관음상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적고 있다.
"위덕왕이 부왕..즉 성왕의 형상을 연모하여 만든 불상이 구세관음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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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교수 인터뷰
일본에서는 일찍이 12세기 전반에 이건 세속사람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성예초에 백제 성왕의 모습을 배낀 것이라는 기록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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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놀로자기록 c.g. 23"
-이러한 성예초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또하나의 기록이 있다.
1884년 미국인 페놀로자는 법륭사를 방문해 스님들로부터 구세관음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구세관음상은 추고왕때 백제에서 수입해온 불상이라는 것이다."
-불상 틸업 23"
-일본에 남아있는 두가지기록에 의하면 법륭사의 구세관음상은 위덕왕이 자신의 아버지 성왕을 추모해 만든
것으로..일본 추고왕때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서산 가는 트래킹 6"
-과연 구세관음상은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산에서 팬 전각 11"
-대표적인 백제불상인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았다.
-전각에서 줌아웃 구경하는 사람들 8"
-백제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은 일반인들엑 가장 잘 알려진 백제불상이기도 하다
-마애불 틸업 13"
-세 불상 중 중간에 있는 불상이 석가여래..즉 부처이고 양쪽에 서있는 것이 보살상이다.
-손의 보주 줌아웃 13"
-그런데 서산마애삼존불 중 부처의 오른쪽에 서있는 보살상이 법륭사 몽전의 구세관음상과 유사했다...
-문명대 투 샷 8"
-과연....서산마애삼존불과...구세관음상은 같은 양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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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대 인터뷰
뭐 거의 유사하다고 ..
뺨이 팽창된 것말고는 거의 같다..이렇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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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 비교 10"
-보주를 양손으로 감싸듯 들고있는 모습은 백제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불상 보고 7"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동보살입상...
-틸다운 비교 21"
-두 불상을 비교해보면
지느러미모양의 옷자락이 닮아있다..옷자락을 마치 지느러미모양처럼 표현하는 건 백제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익산석불 9"
-익산 연동리에 있는 석불좌상...이 석불에서도 구세관음상과 닮아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광배 나오고 8"
-바로 불상뒤에서 불상을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광배다
-법륭사 석가삼존상 광배 11"
-백제계 장인이 만들어 백제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법륭사 석가삼존상이다.
-구세관음상 광배 나오고 6"
-그리고 법륭사 구세관음상의 광배를 보자.
-세 광배 나란히 17"
-외형적으로 광배의 모양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광배를 자세히 살펴보면...모두 5겹으로 이뤄져있다. 광배문양을 5겹으로 나눠서 장식하는 것도 백제에서
널리 유행했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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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대 인터뷰
얼굴의 여러 특징이나 지느러미형 라든가...5겹의 광배문양이라든가 이런 것이 전부 다 백제거다
백제거라는 걸 고대로 들어내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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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상 줌아웃 8"
그렇다면 일본에 남아있는 기록대로 어쩌면 이 불상은 위덕왕이 성왕을 추모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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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4 ..복원된 사찰의 금당안..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건 백제 성왕땝니다.
이때 불교경전과 함께...많은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사찰을 건립해주었습니다.
#자막 등장
그리고 위덕왕대에 와서는 여러차례 일본에 불상을 전해줍니다.
어쩌면 이때 구세관음상도 일본에 보내졌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 부분은 추정이니까...추정하듯이...단정해버리면 안됩니다.)
물론...구세관음상엔 아직 풀리지않는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위덕왕이 성왕을 추모해서 만든 불상이 이
구세관음상이라면 위덕왕에게는 물론이고 국가적으로도 아주 귀중하게 모셔졌을텐데요...
과연 그런 불상을 일본에 전해줬을지는 여전히 풀리지않는 미스테립니다.
그러나 일본에 남아있는 기록과 불상의 양식을 통해 이 불상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고 위덕왕이
성왕을 추모하여 만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금당밖으로 나와
이렇게 백제왕실에서는 성왕을 추모하기위해 불상을 조성하고...사찰을 건립하고..그리고 100여명의 백성을
출가시켰습니다.
#향로 등장
그렇다면...이 향로도 바로 그때 성왕을 추모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일까요?
향로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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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4. 백제중흥을 꿈꿨던 성왕의 뜻을 기려 만든 향로..
-향로 틸업 22"
-향로의 몸체엔 한치의 틈도 없이 다양한 문양들이 장식되어있다.
사람과 동물...그리고 산과 계곡등 현실세계의 다양한 모습들이 64센미터높이의 향로에 모두 담겨있다.
-주작 틸다운 22"
-그 중 눈길을 끄는 부분은 뚜껑에 장식되어있는 새다...
주작의 알부분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새는
턱아래에 작은 알을 끼고 있다..
(보다가)
그리고 발아래에는 좀 더 큰 알이 놓여있다.
이 알의 의미는 무엇일까?
-C.G.삼국사기 ..
기록 나오고 15"
-그것은 백제의 건국신화와 관련이 있다..
백제를 건국한 왕은 온조..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졸본땅에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다.
-온조 주몽 글씨만 남을째 7"
즉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이다.
-기록 나오고 20"
-그런데 주몽의 첫째아들이 부여에서 내려와 태자가 되자...온조는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한다.
-온조,남행만 남고
-즉 백제를 건국한 왕 온조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주몽이다.
-삼국사기 책 넘어가면 10"
-그런데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주몽의 탄생설화를 보면 알이 등장한다.
-기록 나오고 14"
-햇빛이 비추자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그 알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주몽이라는 것이다.
-일영,알,주몽만 남고 9"
-학계에서는
대향로에 새겨진 알은 바로 이 주몽의 탄생설화를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지도 부여...고구려...백제 21"
-그리고 그건
백제의 뿌리가 부여라는 걸 강조하기위한 것이다.
주몽이 부여를 떠나..졸본땅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했고..그리고 주몽의 아들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해 백제를
건국했다. 즉 백제의 뿌리는 부여인 것이다.
-헬기샷 20"
-이러한 부여의 전통을 유난히 강조했던 왕이 바로 성왕이다.
무령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왕위에 오른지 16년이 되던 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다...
-삼국사기 기록 9"
그리고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고친다. 부여의 후손임을 강조하고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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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학 인터뷰
백제왕실의 성씨 부여씨..그건 이들이 부여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성씨가 부여씨가 되다
이런 부여적인 전통...역사적인 이상..이런 걸 백제가 계승했다는 걸 내세우고 일종의 종주국 행사하며..
능동적으로 이끌려는 백제성왕의 이상..이런게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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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의 주작 줌인 17"
-이러한 성왕의 의지는 또다른 문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금 보다가)
-향로 뚜껑에 있는 새의 발부분을 보자..
(조금 보다가...자막 나오면)
다리 뒤쪽에....선명히 보이는 것이 ....흔히 닭의 다리에서 볼 수 있는 며느리발톱이다.
-강서대묘 내부 틸다운 8"
-이렇듯 며느리 발톱을 가지고 있는 새는 고분벽화의 사신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룡 7"
사신도는 동서남북..각 방위를 수호하는 동물을 그린 것인데..
동쪽엔 청룡...//
-현무 7"
북쪽엔 현무 //
-백호 7"
서쪽엔 백호..
-주작 7"
그리고 남쪽엔 주작이 그려져있다..
-주작 타이트 5"
-주작은 남쪽을 수호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며느리발톱 줌인 14"
(삼실총)
그런데 주작의 발부분을 보면 . 향로뚜껑에 새겨진 새와 똑같은 모양의 며느리발톱이 있다
-주작,며느리발톱으로 줌인 14"
(강서중묘)
-이런 모습은 강서중묘에 그려져있는 주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향로의 뚜껑에 있는 새는 바로 주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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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학 인터뷰
주작이라고 하는 건 남방을 지켜주는 방위신이다.
백제는 538년에 성왕이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이때 보면 남쪽이라는 방위관념이 유독 강조되고 있는 그런 상황인 것이죠
(짜집기)이 금동대향로에 있는 새를 주작이라고 봤을 때 바로 남쪽이라는 관념...
그리고 그 안의 상징적인세계가 건국설화 부여적인 전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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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나는 향로 풀 돌리고 7"
-대향로의 몸체에 새겨진 수많은 문양에서도 성왕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
-향로 문양 보이게 타이트 돌리고 13"
-향로엔 사람과 동물...그리고 산과 계곡이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새겨져있다.
-c.g. 향로 펼쳐서 문양들 나오고 9"
-향로의 몸체부분을 펼쳐서 보면 연기구멍이 보이는데....한 열에 5개씩 만들어져있다.
-향로문양...약간 어두워지면 9"
그런데 5개씩 짝을 이루고 있는 건 이것만이 아니다
-악사
거문고 북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새 5"
다양한 자태의 새...
-산봉우리 5"
그리고 산봉우리...
-스틸 5"
모두가 5개다..왜 이렇게 5라는 숫자를 중요하게 여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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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학 인터뷰(7 4630)
부여적인 전통일 가능성이 있다..
부여에서는 5라는 숫자를 기본단위로 해서 사회편성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나 백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백제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다한 후
수도를 5개부로 나누고 지방을 5개방으로 나눈 것입니다.
이 5라는 숫자는 부여족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있는 숫자로 볼 수 있는데 금동대향로에서도 5라는 숫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고
그런 배치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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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풀 5부 표시 18"
-수도를 사비로 옮긴 성왕은 수도와 지방의 행정체제를 새로이 정비했다.
수도인 사비성은 이렇게 5부로 나누었고 지방행정체제도 5방으로 바꾸었다.
-향로 돌려 틸업 20"
-이렇듯 백제성왕의 의지가 그대로 표현되어있는 백제금동대향로..바로 성왕의 뜻을 기리기위한 의도가 아니
었을까..
----------------------------------------------------------------* 스튜디오5 ... 복원된 사찰
#금당밖..사찰 마당..향로 놓여있고
이 향로엔 백제 중흥을 꿈꿨던 성왕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성왕을 추모하기위해 만든 사찰에서 이렇게 성왕의 의지가 담겨있는 향로가 발견되었다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입니다.
즉 이 향로도 백제왕실에서 성왕을 추모하기위해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찰을 거닐며
-그런데 이즈음되면 한가지 궁금증이 생길 것입니다.
도대체 위덕왕은 왜 이렇게 성왕을 추모하는데....많은 정성을 들인 것일까..
뭐 어찌 보면...아들이 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위덕왕이 조성했던 불상이나....사찰...또 향로는
누가봐도 예사롭지않은 것들입니다..예를들어 향로 하나만 봐도....적지않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을 더욱 짙게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 등장
"백제여창 즉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을 받들기위해 출가해 승려가 되려했다.
그러자 백성과 신하들이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어느 나라에 넘겨주려고 그러느냐며 반대했다."
그러니까 이 기록에 의하면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위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승려가 되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위덕왕은 이토록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려 애썼던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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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5. 관산성전투 ! 성왕의 비참한 최후
-차 트래킹 8"
-성왕과 그의 아들 위덕왕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을 풀 팬 16"
-(팬하면)충북 옥천군에 있는 한 농촌마을...
이곳에 성왕과 관련된 유적지가 있다.
-개울 타이트 6"
-마을을 따라 흐르는 계곡....
-벼랑 줌인 12"
구진벼루라 불리는 이곳에서 성왕이 마지막 숨을 거뒀다고 한다.
성왕은 왜 사비성이 아닌 이곳 옥천...계곡에서 숨을 거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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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탁교수 인터뷰
제가 판단하기에는 백제성왕이 그의 아들 여창을 고리산성에서 만나기위해...바로 구진벼루를 통과하다가
이 지점에서 참변을 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
-관산성으로 줌인 11"
-성왕은 아들 창을 만나러 관산성으로 가다가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산으로 걸어올라가는 8"
-당시 성왕의 아들 창이 있었다는 관산성은 성왕이 숨을 거둔 곳에서 불과 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모습에서 팬..
두사람 13"
-유적지조사를 했던 성주탁교수와 함께 산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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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수님 인터뷰
이곳이 백제시대 고리산군이다.
순수한 우리말에 고리산군...그게 한자로 고리환자..환산 그리고 그게 고리관으로 관산성에서 관산군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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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흔적 21"
-실제 산정상엔 성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현장음 좀 듣다가
"다듬지아니하고 그냥 쌓은 거다.."
대부분 무너져내리고 일부만 남아있지만 큰 돌을 켜켜이 쌓아올린 것이 분명 성의 흔적이다.
-토기편 타이트 8"
-그리고 산성안에는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조각들이 널려있었다 새끼줄무늬가 선명한 백제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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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탁교수 인터뷰...
이 문양...가마니 누른 것같은 문양..백제계..보통 그렇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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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내려다본 교통요지 19"
-그렇다면 이 관산성은 어떤 성이길래...성왕의 아들 창이 머물러있었던 것일까?
(자막 나오면...)
-산정상에서 내려보면 이곳엔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국도와 철도 그리고 고속도로가 모두 모여있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유일한 통로..
-타이트 팬 10"
즉 삼국시대 이곳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던 것이다.
----------------
*성교수 인터뷰
이것이 교통의 중심이다.
호서지방과 경상도 길목에 이것밖에 없다.
백제 웅진부터 지금까지 국도의 중심지다.
해서 요 능선은 백제 국경선이다..이렇게 볼 수 있다.
가장 교통의 요충지자 군사적 전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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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c.g.로 돌리고 13"
-당시 성왕의 아들 창이 있었던 관산성은 신라와의 접해있는 최전선이었다.
-또다른 c.g.들 다섯 개의 산성이어
보이게 17"
-그리고 이 지역엔 관산성외에 또다른 백제의 성들이 있었다.
-산능선을 따라....봉우리마다...성이 쌓여있었는데....그것이 모두 5개였다.
그렇다면 당시 성왕의 아들 창은 왜 이렇게 최전선에 나와있었던 것일까..?
-지도...고구려 백제.신라 접경지표시 20"
-551년..백제는 신라와 연합해...고구려를 공격한다...이때 신라는 한강상류지역을 백제는 한강하류지역을 차지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2년 뒤 신라는 백제를 공격해....한강하류지역을 빼앗고 만다.
-일본서기 17"
예기치못했던 신라의 배신행위를 놓고 백제조정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이때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 창이었다.
-------------------
*노중국인터뷰
여창은 그런 온건론자에게 왜 그리 겁이 많으냐며 질타하면서 신라공격을 강력하게 주장..
성왕은 이런 아들 주장 받아들여 군대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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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관산성 공격 12"
-드디어 554년
"가야와 더불어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의 아들 창은...가야군까지 동원해 관산성으로 진격했다.
-말들 달리고 싸움 20"
-백제의 기습공격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초반, 백제의 공격에 참패를 당했던 신라가 신라전역에서 군대를 동원했고...//
-554년...관산성에서는
백제와 가야연합군..그리고 신라군간의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달그림 20"
-그런데 바로 그 즈음 -
-말들 달려오고
성왕은 호위병 50명만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한다.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아들 창을 위로 하기위한 것이었다..
-복병 14"
-그런데 이 정보를 입수한 신라군은 백제 성왕이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성왕이 나타나자..기습공격을 해 성왕을 사로잡았다.
-기록 12"
-이때 성왕을 잡은 사람은 고간 도도..그는 노비출신의 장수였다.
-당시 대화내용 32"
-일본서기엔 당시 성왕이 어떻게 마지막 숨을 거뒀는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도도가 머리를 베겠다고 하자 성왕은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고 한다
도도가 다시 "우리 국법엔 노비의 손으로 왕의 머리를 칠 수 있다"고 맞서자..
성왕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목을 베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성왕죽음 c.g. 13"
-그렇게 신라 노비가 휘두른 칼에 백제 성왕은 쓰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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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국인터뷰 (5...)
전쟁을 적극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도 자신이었고 또 자기를 위로하러 올려고 했던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신라군에 포로가 되어 시체마저 온전하게 정리하지못했던 게 자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같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추모..이런 마음이 다른 어떤 아들보다 더 강하게 우러나지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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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에 향 올라오고 30"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관산성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위덕왕...
그가 아버지 성왕을 그리며 만든 것이 바로 이 백제금동대향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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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6 복원된 사찰
#사찰마당
성왕의 시신에 대해서는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신라군이 성왕의 시신을 구덩이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곳에다가 아무렇게나 묻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성왕의 몸은 백제에 보내고 머리는 신라 경주로 가지고 와서 관청계단 아래 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라의 대신들이 늘 성왕의 머리를 밟고 다녔다는 것이지요 뭐 어느쪽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시신조차도...제대로 거두지못할 정도로 성왕의 최후가 비참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위덕왕은 이렇듯 아버지 성왕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건 자신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승려가 되려고했지만 왕위를 이어야하는 태자신분이기에 그마저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위덕왕이 어떤 심정으로 사찰을 짓고...불상을 조성하고..그리고 향로를 만들었을지..
1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느낄 수가 있을 것같습니다.
1500년 침묵을 깨고 우리 앞에 나타난 백제금동대향로..
이 향로엔 백제 중흥을 꿈꿨던 성왕의 꿈과 좌절이 서려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감당해내야했던 위덕왕의 애닯은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 위덕왕이 스스로 불효자라 여기며 써내려 간 "사부곡"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