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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파란 눈의 사람들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 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가복음 4: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복음으로 이 땅을 기경한다는 것. . . 조선 땅 복음의 역사 법칙이 있다! → 죽은 듯하지만, 썩어진 씨앗으로 인해 결실을 맺는다는 사실. 마가복음 4장 20절.“좋은 땅”이라는 말씀. NIV: “. . .hear the word, accept it, and produce a crop. . ." → 좋은 땅이란 처음부터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경하는 것.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맨 땅에 씨를 뿌린 다음 갈아엎어서 씨를 묻는다. 씨를 뿌리기 에 좋은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고 갈아엎으면 ‘좋은 땅’이 된다. 복음이 뿌려지는 곳이 그렇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터툴리안) ex) 크리스천투데이, 2023.04.17. 이효준 장로(객원기자) 토마스 선교사의 어머니는 목이 잘려나간 아들의 소식을 듣고 온 성도들과 함께 조선을 위해 간절히 기도. “하나님 내 아들을 목 베어 죽인 민족이지만,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조선이 주님 앞에
- 1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 2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 후 평양 대동강변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목을 베었던 박춘권뿐 아니 라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의 설립자가 됐고,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했다. 오늘은 복음의 씨앗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 어떻게 기경하고 밀알이 되었는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은 공식적인 선교의 시작. - 그 이전 밀알의 이야기 ★ 공식적인 선교 전 해인, 1884년 9월 23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인 알렌 목사가 의사의 신분 으로 먼저 들어왔다. 이듬해에 들어온 선교사들 역시 의료와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선교 활 동. 기록되지 않는 구제사역이 없었다면, 선교사들로 인해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 ↓ 땅을 가는 사람,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고린도 전서 3장 6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나니 ★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이유를 생각해 보라! 아볼로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느니, 복음을 전한 자신보다 지금 교회에 더 유익함을 인정. 심는 자가 있으면, 물을 주는 사람도 있다. 사명이 어떠하든지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그렇게 고백을 하고 나니,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사역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고, 자신이 하 지 못했던 일을 하는 사람을 보니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모든 날이 은혜스럽다]왜 접니까(84페이지) 中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의 믿음의 고백이 참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심었고 아 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지>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종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을 섬겨, 우리 주인이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맡 기는 법을 배우게 한 종일 따름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종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나는 씨를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심는 일과 물을 주는 일은 종들이 약간의 급료를 받고 하는 허드렛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어떤 일이 더 중요한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주인 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 주인이 하는 일에 비하면 종들의 일은 어쩌면 허드렛일일지 모릅니다. 때로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을 모를 때도 있습니다. 주인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 다. 그래서 불평하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고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약간의 급료를 받고 하는 허드렛일에 불과합니다. 종의 마음은 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나를 양도하는 것. 우리의 최선은 하나님께서 잘 사용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놓는 일이다. → 그렇게 생각하니, 나보다 사역을 잘하는 부목사들을 보는 것이 기쁘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짐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한 알 한 알이 다 소중하고 의미가 있기 때문. ex) 선교학 논쟁. 학교와 병원 같은 긍휼사역이 선교의 수단이냐? 아니면, 그것 자체가 선교의 목적이냐?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병자들들 고쳐주셨다.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하는 일이 선교, 만일 그렇지 않으면 긍휼사역은 수단으로 전락한다.
- 3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이는 하나님. 지금 어떤 열매를 맺느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 4 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분명하면, 누군가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 중앙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아주 전설적인 선교사의 이야기. 조지 아틀레이라는 젊은 선교사가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그의 손에는 윈체스터 연 발총이 들려 있었지만, 끝까지 손에서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맞아 죽었다. 복음을 전하겠다고 들어온 자신이 살기 위해 총을 쏜다면, 누가 복음을 듣겠는가? 원주민들이 그의 손에 총과 탄환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 선교사는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 그의 죽음 원주민들의 마음 밭을 기경한 것이 아니었을까? ● 결핵 퇴치와 관련되어 된 4대에 걸친 ‘유진 벨’목사님 가족에 대한 이야기. * 유진 벨 부부 1895년 4월 도착 이래 전라도 광주와 목포를 중심으로 의료와 교육 사업에 힘쓴 선교사. 수피아여고 그리고 광주 기독병원을 세움. * 1901년 34살의 나이로 아내 로티 위더스푼은 전도 여행 중 심장병으로 두 자녀를 남기고 죽어 양화진에 묻힘. 유진 벨 선교사도 격무로 1925년 57세에 광주 양림동 묘역에 묻힘. * 딸 샬롯 벨은 미국에서 자랐으나 성인이 되어 한국을 방문. 당시 선교사였던 윌리엄 린튼과 결혼 후 조선에서 선교사역.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1937년 강제로 출국을 당하고 만다. * 해방을 맞아 다시 한국에 돌아와 한남 대학교 설립. 40여 년간 전라도 지역에서 학원선교. * 휴 린튼은 윌리엄과 샬롯 사이에서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추방됐지만, 외할아버지 유진 벨과 어버지 윌리엄 린튼의 선교사역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한국에. 3대를 이어 전라남도 섬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곳이 넘는 교회를 세우고 농촌과 간척지 사역 그리고 기경한 땅에 밀알이 된 사람들. . .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에 집중. 휴 린튼의 검정 고무신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됨. 검소하고 겸손하게 지역 주민들 을 섬기기 위해 봉사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혼자 남겨진 휴 린튼의 아내 로이스 린튼은 결핵 퇴치 운동의 선봉에 서서 대한민국을 위 한 가장 큰 공헌. 1960년대 전라남도 순천 일대에 큰 수해로 결핵이 유행할 때, 그의 세 자녀 도 결핵에 걸리게 되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움. 35년 후인 1994년에 은퇴. *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의 둘째 아들인 스티브 린튼과 막내 아들인 존 린튼이 유진 벨 선교 사와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에 유진 벨 재단을 설립. * 가정 이야기를 인요한 (존 린튼)을 통해 들은 가정 이야기. 결핵환자들을 치료하며 만났던 환자들 중에는 아버지에게 감사하기는커녕 결핵균이 있는 가래침을 뱉은 사람도 있는데, 왜 아버지는 그 사람들을 돌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게 한국 사람을 사랑했던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고 당시 구급차 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한국에는 그런 차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해 인요한 교수는 우리나라에 적합한 한국형 응급차를 만든 사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가문에 우리 민족이 진 빚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인상적인 것은 그의 자서전에서 한 말 이었습니다.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의사의 길을 택한 이유에 대해 조상들처럼 “남들이 잘 가 려 하지 않는 길 위에서 내가 가진 재능과 기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싶었다”며 “그것이 선교사 아들로서의 숙명이자 내가 한국 사람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 라고 밝혔다
.- 5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말씀을 준비하며 보았던 휴 린튼과 그의 아내 로이스 린튼의 사진을 보았다. * 인세반(스티브 린튼) 씨가 새운 유진 벨 재단 –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 여섯째 인요한은 한극에서 의사가 되었다. 인요한 교수와 우리 민족에 게,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이 땅에서 그렇게 살다 죽어간 그 부모들의 삶이었다. 밀알이 남긴 열매들 한국의 역사책은 알렌을 1885년에 광혜원을 세운 의사로, 유진 벨을 이 땅에서 결핵을 퇴치 한 인도주의자로, 또한 스크랜턴은 1886년 남대문 근처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을 시작한 사람 으로 기억할 것이다.→ 한글 보급/ 미신 타파/ 남녀평등, 여성 학교/ 금주운동/ 도박 퇴치 이 모든 일들이 조선 사람이 아닌, 복음을 품었던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놀랍다. ●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 그리고 열매가 바로 우리교회이고 우리 자신, 자녀들이다. → 그러니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 사실은 ‘죽음에 빚진 자’들이 아닐까? 이들을 바라보며 인생을 낭비했다고, 살이 아깝다고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밀알의 기적을 믿는다. [품 프로젝트] 신명기 1장 31절. - “밀알의 선순환
”- 6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 1월 8일 [하나님이 시선] 묵상 “나의 희생제물은 살아있습니까?” 하나님은 ‘죽음’이 아닌, ‘죽음을 통한’ 희생제물, 즉 ‘산 제물’이 되기를 원하신다. ex) 케냐의 SAM 운동/ 볼리비아 농업기반/ →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 → 구한 말 조선은 패배주의, 열강들에 의한 착취. 그 때 복음을 알고 배움을 갈망했던 젊은 이들이 일어났다. 오래전 선교사들이 이 땅을 옥토로 기경해 놓은 것은 아닐까? 밀알은 죽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처음이 된다는 것! 1884년 알렌이 조선에 들어와 1885 세웠던 광혜원은 첫 발자국이 되었다. → 고종황제에 의해 반입이 허가된 것은 의료를 통한 서양문물. (의술이 선교의 도구가 됨) → 영적인 눈을 통해 보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 이런 관계 속에서 언더우드는 새문안 교회를,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게 되고, 스 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지어 교육, 의료,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 조선의 초기 선교역사를 통해 참 의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1885년 5월 입국한 스크랜턴: 정동에서 병원 시작 .고종 황제가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
- 7 → 2년이 채 못돼, 자리를 서대문, 남대문, 동대문 세 곳에 집을 짓고 ‘시약소’를 세움.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이 모든 시약소에는 장차 예배당으로 사용할 부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런 목적을 갖 고 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이처럼 시약소를 많이 세우는 목적은 이들 시약소가 삼림 속에 들어가 벌채하는 역할을 해서 미래의 목적에 사용되도록 땅을 개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10년 안에 이들 부지를 예배당 용도로 넘겨주고 우리 의사들은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지역에 들어가서 병원을 세우는 것입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의 선교보고서”, 1889. 9. 3). 이해 할 수 없는 스크랜턴의 행보에 대한 답 - “그곳에 민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민중이 고통 당하고 죽어갈 때, 유일하게 안식처가 되었던 곳. ● 민중들의 오해 가운데 역사하심! ‘영아 소동’ - 오히려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 1888년 6월 서울 시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록이 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공짜로 먹이고 입히는데 다 꿍꿍이속이 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리고 남색을 즐긴다더라”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잘 먹인 다음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판다더라”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 신체를 해부용으로 쓰고 눈알은 사진기 렌즈로 쓴다더라”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를 잡아 연한 살은 칼로 썰어먹고 피를 잔에 받아 마시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 흥분한 사람들이 병원, 고아원, 학교로 몰려가 시위하고 폭행. 오해가 풀리자. 스크랜턴 선교사는 영아 소동을 민중의 시험기라고 표현. 기독교의 반대자가 지지자로 바뀐 것. ↓(영아 소동을 통해 일어난 놀라운 사실) 선교사들을 제대로 알게 된 조선 사람들이 걸출한 민중의 지도자로 전도인으로 거듭나게 됨.
- 8 ex) 머슴 김창식이 올링거 선교사 집 사환으로 몰래 잠입.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내가 맨 처음 일하던 집은 미국 사람 올링거 목사의 집이었는데 나는 그 집에서 일하는 동안 주인 내외의 생 활을 매우 주의하여 살펴보았으나 아무리 살필지라도 조금도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몇 해 동 안 그 집에서 일하는 가운데 그 집 주인 내외가 가히 본받을 만한 사람인 줄 깨닫고 그들에게 감화를 받아 예 수 믿기를 작정하였다.” (김창식의 고백) → 2년 후에 세례를 받고 감리교 전도인이 되어, 1893년 의료 선교사였던 홀과 짝이 되어 평양에 내려 가 선교지를 개척하는 일을 하게 된다. 1901년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음. → 전덕기는 대표적 민중 목회자로 일제에 항거한 민족 지도자. ‘영아 소동’ 때 정동으로 달려가 군중과 함께 돌을 던졌을 정도로 선교사를 미워하던 사람. 던진 돌을 맞고도 화내기보다 미소를 띠며 좋은 말로 권면하는 선교사들의 태도에 충격. 선교사의 실체를 알기 위해 스크랜턴 선교사의 요리사로 들어가 병원 일을 도우며 선교사 가족들을 유심히 관찰. 무려 4년이라는 세월동안 그곳에서 선교사들에게 감동을 받 음. 스크랜턴 대부인이 전덕기를 배려하여 소외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한국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보고 는 감동. 1896년 스크랜턴에게서 세례를 받고 1905년 목사 안수를 받게된다. 결국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선교사들, 온갖 억압과 핍박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냈던 선교사들에게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열매가 되 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죽어야 밀알이다! 밀알은 자신의 형상을 포기하고 썩어야 열매를 맺는다. 죽는다는 것은 단순한 생명의 포기가 아니다. 육신의 생명과 육신의 정욕을 버리는 것. → 밀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 이것을 ‘종자’라 부름.
- 9 ‘종자’는 하찮게 버려지지 않는다. 다음 생명의 열매를 위한 존귀한 존재.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때로는 힘들어도 견뎌내고 때를 기다려야 하는 ‘종자’ 이 소중한 존재가 ‘한 알의 밀알’ 깨달음: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 죽음이 많은 생명을 낳기에 축복이다. ●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미련하지 않은 이유 → 자기를 부인하므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자기 부정’이 아닌,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종교. ‘자기부정’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 선택’이다. → 누군가는 ‘밀알’이 되고, 누군가는 ‘땅을 기경하는 사람’이 된다. 이 시간 우리가 여기서 예 배함도 누군가 밀알이 되었기 때문이다. 밀알의 신비를 믿는 사람만이 기꺼이 썩어진다. 신비를 믿지 못하면 썩어짐이 허무하다. 예수님 오늘 우리들에게 그 밀알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다. 누군가 썩어진 밀알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밀알의 열매를 거두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밀알 되었던 사람들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으로 도전하고 있다. 당신도 한 알의 밀알이 되지 않겠는가?
- 10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양화진에서 바라보는 밀알들. . . ●우리 근대사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참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호머 B. 헐버트의 묘지. 그는 1886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국립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 고종의 신임을 받음. 명성왕후 시해 사건 이후 극도로 불안해하는 고종을 위해 선교사들이 궁 밖 미국 공사관이나 선교사 사택으로 옮기려 했던 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다. 일본 측의 항의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헐버트 선교사가 깊숙이 관여. 1905년 을사늑약이 있던 해, 헐버트 선교사는 안식년으로 미국 행. 그 때 고종황제가 친서를 주어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불행하게도 일본의 방해와 미국 대통령의 면담 기피 로 개인적 문서가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준 열사를 파견했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도 헐버트가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일 본의 불법적 만행을 폭로하고자 밀사를 보냈지만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암묵적으로 일본을 지 지한 미국과 영국의 소극적 자세로 밀사들은 발언권조차 얻지 못하자 헐버트는 일본을 규탄하 는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인해, 다시 한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막히고 만다. (미국정부 소환 형식으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이후에 그를 한국으로 초청. 여든 일곱의 나이로 태평양을 건너온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 도착 후 여독으로 병을 얻어 서울 위생 병원에 입원 했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별세. 화진 외국인 묘지에 그의 시신이 안장. 그가 남긴 유언.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11 사순절 성령행전 – 빛을 따라 성령으로 3. . ●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윌리암 홀 선교사의 무덤이 있습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 선교사로 1891년 31살의 나이로 한국에 파송된 의료 선교사. 당시 조선은 청일 전쟁 이후에 피폐한 상황에서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들과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과로로 말라리아에 걸려 34살의 나이에 죽음 한국에 온지 3년 만. 그의 미망인 로세타 셔우드에게는 겨우 돌을 지낸 아들 ‘셔우드 홀’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로세타는 본국으로 돌아가, 1897년 아들 셔우드와 딸 에디스를 데리 고 다시 한국의 선교사로 나오게 된다. 남편을 기념하여 평양에 병원을 설립. 이 병원의 이름 은 ‘기휼병원’,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박 에스더를 배출. 고려대학 의과대학의 전신 이 된 한국최초의 여자의학 교육 기관인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도 세우게 된다. 남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남편의 이름을 기념하여 세워진 병원, 그리고 조선 땅에 떨어 져 썩어진 남편으로 인해 조선 땅에는 여성들을 위한 의료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1911년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 살던 셔우드는 18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유니온 대학을 거쳐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된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며 해주 의창학교 교장직을 겸하다가 후에는 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 들을 위해 헌신. 1928년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해주에 설립‘ 1932년 12월에 그 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 1940년까지 14년간 한국에서 의료 선교사로서 의 삶을 살았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했던 그는 인도로 가서 23년간 선교사로 봉사한 뒤 1963년 은퇴. 1978년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란 책을 출판. 1992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