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92.
세종과 양녕의 만남
건물이 낮고 비좁아 개축 공사 중이던 창덕궁 인정전이 준공되었다.
장의동 본궁에서 이어한 세종에게 태종이 환관을 보냈다.
“너의 형 양녕을 불러왔으니 조용히 와서 만나보도록 하라.”
야심한 밤. 세종이 신하들의 이목을 피하여 상왕전을 찾았다.
거기에 양녕이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유배생활하고 있는 형이었다.
형제는 오랜만에 만났다. 마산역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조우한 이후 처음이다.
형제의 정으로 뜨겁게 해후했다.
이튿날 대사헌 허지가 삼성과 합사하여 세종 임금앞에 섰다.
“신 등이 듣자옵건대, 양녕대군 이제가 상왕전에 와 있다고 하오니 양녕이 종사(宗社)에 득죄하였음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온데 상왕께서 전내(殿內)로 불러들이셨음은 신 등이 놀라와서 견딜 수 없사옵니다.”
“부자 형제의 지극한 정으로 어찌 서로 보고 싶지 않겠느냐. 지난달에 상왕께서 불러 보시고자 하셨으나
대간의 청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시고 이제야 부르신 것이니 경들은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상왕께서 양녕을 부르신 것은 장차 경계하고 가르쳐 보전하려 하시는 것이오나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비단 대간만이 아니옵고 백성들이 반드시 소동하는 것이오니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시옵소서.”
형제의 정으로 뜨겁게 해후한 세종과 양녕
“내 어제 잠깐 만나보았고 오늘 다시 만나보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전날 서로 보신 것도 불가한 일이온데 하물며 다시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상왕께옵서 미리 헤아리시고 계시니 이후부터 다시는 이 사실을 아뢰지 말라."
허지가 세종에게 주청했다는 사실을 보고를 받은 태종은 심기가 언짢았다.
“양녕의 죄는 종사에 관계되지 않고 오로지 김한로의 짓이다.
양녕이 작은 집에 있으니 화재 도적등이 두려우므로 내가 이를 불쌍하게 여긴다.
양녕의 집에 간사한 무리들이 몰래 접근할까 염려되니 강화에 집 백여 칸을 지어 거처하게 하도록 하라.”
집을 크게 짓고 숙위 군사를 세워 잡인의 접근을 차단하라는 것이다.
놀기 좋아하고 풍류 좋아하는 양녕에게 잡패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문제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복안이다.
신하들의 등쌀에 양녕대군이 대궐에서 사흘을 묵고 유배지 광주로 돌아갔다.
영광의 길 떠나는 왕비의 아버지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다. 드디어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는 날이다.
사은사 심온, 부사 이적, 주문사 박신으로 구성된 사신이 명나라로 떠나는 날 한양이 술렁거렸다.
대궐은 물론 도성이 들떠 있었다.
왕비의 아버지가 영의정이 되어 사신으로 떠나니 축하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그 중에서 제일 축제 분위기는 단연 세종의 정비 공비가 있는 중궁전이었다.
심온의 딸 공비가 세종 이후 보위를 이어갈 맏아들 향(문종)을 낳고, 위(수양대군)를 낳은 후, 셋째(안평대군)를
회임하고 있었으니 중궁전은 경하의 연속이었다.
사은사 일행이 경복궁 남쪽 광화문을 빠져나와 육조거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구름처럼 몰려온 환송객들이 길을 메웠다. 장안의 백성들이 다 나왔는지 구경나온 사람들 때문에 사신 행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육조거리에 늘어선 사헌부와 이조, 예조, 호조, 형조, 병조, 공조 관원들도 일손을 놓고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황토현을 마주보며 행렬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 무렵, 늘어선 군졸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황토마루에 올라 구경하던 백성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행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
가까스로 길을 트고 서전문(西箭門)을 지나 경교다리에 이르니 경기감사 조치보가 마중 나와 있었다.
경교(京橋)는 한양과 경기도를 가르는 경계선이었고 경기감영이 있었다.
현재 서대문사거리 적십자병원 봉사관 자리다.
떠나는 사신은 경기감사가 출영하여 환송하지 않은 것이 관례였으나 오늘의 사은사는 어디 보통 사신인가.
왕비의 아버지에 영의정이니 부르지 않아도 자청하여 나와 눈도장을 찍어 두어야 한다.
명나라로 떠나는 사신의 출발점이자 중국 사신들의 도착지점인 경기감영 근처에는 훌륭한 시설과
경관이 좋은 명승지가 있었다.
명나라 사신 공식 영접장소인 모화루를 비롯하여 반송정(盤松亭)과 서지(西池)가 있었다.
특히 반송정은 사대부들이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환송받고 싶어 하는 선망의 장소였다.
600여 년이 흐른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환송받으면 영광으로 생각할까?
개인과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영종도에 있는 인천공항이 아닐까 한다.
일제시대에는 부산항이었다. 일본과 미국으로 떠나는 유학생은 물론 유럽으로 가는 유학생들이 요코하마에서
배를 갈아타기 위하여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탔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한양에서 평양과 의주를 거쳐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반송정(盤松亭)이었다.
큰 우산을 펼친 듯 아름드리 소나무가 일품인 반송정은 서지(西池)가 받쳐주어 더욱 빼어났다.
개성 숭교사(崇敎寺) 연못에서 옮겨 심었다는 연꽃이 만발하면 한양도성의 아녀자들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서지와 어우러진 반송정은 도성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동경의 장소였다. 이렇게 경관 좋은 반송정은
조선 519년 동안 사대부들의 환송 명소였다.
반송정은 관찰사와 목사, 수령 등 관직을 받아 북으로 떠나는 친구, 한양에 올라와 과거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는 벗, 청운의 꿈을 안고 명나라로 공부하러 떠나는 가족, 사신으로 떠나는 동료 등등
영광을 안고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환송객들로 항상 북적였다.
한마디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과 성공한 사람들이 눈도장을 주고받는 장소였다.
세조 때 강희맹은 반송정에서 친구를 보내며 이렇게 노래한 일도 있다.
수레 양산(陽傘) 구름처럼 모여
먼 길을 전송하는데,
술잔 소반 흩어지고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큰길가에 술은 이제 다한 것이,
가고 남는 그 일을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나니,
애타는 비파 노래 소리 간장을 에이누나.
잠시 후 서로 떠나면 천리 길 멀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장(蒼莊)하기만 하구나.
▲ 반송정과 서지가 있었던 자리 부근에 금화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반송정은 조일전쟁 때 소실되어
영조 17년 천연정으로 부활했다가 조선 말엽에는 청수관이 되었다.
경기감사의 환송을 받은 심온 일행이 북으로 향했다.
반송정에서 의주에 이르는 의주대로는 조선팔도 간선도로 중 으뜸이었다.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영남대로보다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 길을 가마 타고 가는 사은사 행차 길은 영광의 길이다. 모든 사대부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반송정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의 환송을 받은 심온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임금 세종이 보낸 환관 최용과 중전이 보낸 환관 한호련이 심온을 연서역(延曙驛)까지 배웅하기 위하여
사신 일행과 함께 무악재를 넘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환관 황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보고했다.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세가 못 되어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습니다.”
황도의 보고를 받은 태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임금의 장인에 영의정을 겸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라고 이해하면서도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요란한 행차는
국구(國舅)로서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었다.
태종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왕실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조선 초기에는 환관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 변질된 내시와 혼동하여 폄하하는 것은 오해다.
가성을 내며 허리 구부정하게 드라마와 영화에 그려진 내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은 환관은 당대의 동량들이 진출하던 관직이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청와대 수석비서관쯤이었을 것이다.
외척발호는 왕권의 적이다
태종은 왕권에 반하는 신하들의 행동을 역적 이상으로 간주했다.
혁명동지이자 개국공신 정도전이 신권을 앞세워 이복동생 방석을 감싸고 돌 때 용납하지 않았다.
건국 26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 왕권이 무너진다면 목숨 걸고 세운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 불을 보듯 빤했다.
고려조의 잔존세력이 살아 있는 현재, 최영 장군과 정몽주를 척살하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듯 보이는 자신과
아버지 이성계도 아차하면 역적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태종이 숨을 거두어 땅 속에 묻히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혁명가의 떨쳐버릴 수 없는 두려움이었으며 숙명이었다.
태종의 숙원사업인 왕권강화를 위하여 외척 발호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생리적으로 척리(戚里)를 싫어했다.
훗날(심온 사건 후) “척리(戚里-임금의 내척과 외척)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에는 참여할 수 없도록 하라”는
원칙을 만든 사람이 태종이었다.
왕자의 난 때 동지로 활약했던 자신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협유집권(挾幼執權-태종이 건강상 이유로
선위하려 할때 어린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함) 혐의로 처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태종에게 심온의 뒷모습은 불길한 그림이었다.
초석을 다지기 위하여 아들 세종에게 선위한 자신의 선택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왕비의 아버지이고 자신의 사돈이지만 심온의 뒷모습은 묵과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다음. 193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