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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씨, 처음으로 마감일도 늦추시고, 무슨일 있어요?”
월요일을 죽은듯 서재에서 보내고, 화요일엔 미숙한 원고를 턴인하러 출판사에 들렀다.
서너번 차를 마신적이 있어 안면이 있는 김원석이 염려스런 눈빛으로 물어왔다.
“좀…아팠어요.”
파리한 안색을 보고 그럴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다시 물었다.
“지금은 괜찮으신 거에요?”
한국어를 들으면서도 한번 통역을 거쳐야하는 불편을 느꼈다.
지금이 무슨뜻이고, 괜찮다는건 어떤상태를 표현하는것인지 사전을 찾아봐야 할듯 싶었다.
“아니요. 앞으로도 한동안은 좀 아플것 같네요…”
조심하세요.라고 당부하는 그에게 목례를 한후 출판사를 나왔다.
정확히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알려주지않는 그가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일년내내 인산인해를 이루는 거리를 걷다가, 낯이 익은 까페가 눈에 띄었다.
퀴어가 이곳에 있었는지조차 잊고있었다니.
연락한지 벌써 1년이 되어가는 인영선배에게 선물할것을 찾아내려 주위를 둘러보다가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작은 화원을 발견하고, 노란 화분에 담긴 이제 막 앙증맞게 꽃을 피운 선인장 하나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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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여성전용까페.라는 문패가 눈에 띄는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변함이 없는 인영선배가 나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근 일년만에 본 그녀는 담배연기 자욱한 곳에서도 피부가 늙지않고 그대로였다.
“오랫만이에요, 언니…”
오후 다섯시도 되지 않았는데, 까페안은 벌써부터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까페를 개업할때의 취지와는 약간 어긋나게, 이제는 이반전용이 되어있는듯 테이블 이곳저곳에서 거침없이 키스를 하는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면에는 붉은 립스틱 자국처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색깔의 ‘queer’라는 로고가 그려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식물의 오프스프링들처럼 수많은 이름들이 하트무늬등을 사이에 둔채 빽빽히 벽을 메우고 있었다.
“분위기가 많이 변했네…?”
블루스카이 한잔을 만들어 냅킨과 함께 내려놓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까진 인영선배만큼 블루스카이를 맛있게 만드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응. 세월이 변하잖냐. 세월이..”
칵테일팟을 닦는 그녀에게 초록색 리본을 단 선인장 화분을 건넸다.
갑자기 오느라 이것밖에 생각나는게 없었다고 말하자 그녀는 쿡쿡 웃음을 참으며,
“참…너는 어쩜 그렇게 변함이 없냐…?”
뜬금없는 말로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무슨 뜻이야?”
“너 퀴어 개업할때도 선인장 사들고 왔었잖아. 그것도 딱 요만한 싸이즈.. 기억안나?”
“내가 그랬었나…?”
멋적어 머리를 긁적이다가, 변명이라도 해야할것 같아 화살을 돌렸다.
“그럼 그때 내가 준 선인장 두개는 어딨어?”
까페안을 서너번 둘러본후 따지듯 묻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입구에 놓인 레지스터옆을 가르켰다.
정말 오늘 사온것과 크기도 모양도 꼭 같은 선인장이 놓여있었다.
“한개뿐이잖아. 나머지 하나는???”
인영이 대답을 머뭇거리는것 같아 기회라고 생각하고 더 몰아부치기로 했다.
“하나는 죽은거야? 도대체 얼마나 소홀히 했길래 선인장이 죽어?”
“하나는 ….옛날에 주희가 가져갔어.
개업하고 너 다녀간날, 니가 테이블에 올려놓고 간 선인장 두개중에 자기 하나만 달라고 하도 졸라서…그래서 그때 줬었어….”
말하고 그녀는 눈을 피한채 갑자기 바쁘게 테이블 바를 닦기 시작했다.
은숙도 인영선배도, 벌써 오래전부터 주희라는 이름에 자기들끼리 금지령을 내려놓고 사용을 꺼려해왔다.
나는 블루스카이 한모금을 삼키고 화분에서 초록리본을 풀렀다.
항상 시간에 쫓겨지내던 시절이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었다.
미안한 마음에 급하게 눈에띄는 화원에서 선인장 두개를 사고, 기념할만한것을 찾다가 가방에서 샤프를 꺼내어 까페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급히 개업날짜를 새겨넣었었다.
‘12월 13일’이라고 토기화분 두개에 나란히 새겨넣었을땐, 이마에 땀까지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랬구나….그게….내가 준거였구나….”
인영은 여전히 말없이 테이블바를 닦고 있었다.
저렇게 미안해하는 언니가 그녀가 우리 앞집으로 이사왔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 집 베란다에 나몰래 가져간 그 화분이 아직도 살고 있다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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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나온김에 술이라도 한잔 더 하고 가라는 인영선배를 거절하고, 7시쯤 퀴어를 나섰다.
일년의 회포를 풀고싶은 마음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어쩐지 적응할수 없는 분위기가 그곳을 장악하고 있었다.
매캐한 담배연기에 눈도 아파오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국적불명의 아이디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변한건 어쩜 나 하나 뿐일지도.
젊음은 과감함이고, 과감함은 때로 무모함이고, 무모함은 달리 말하면 경솔함이고, 경솔함은 결국 후회를 낳는다는 인영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여기있으면…많은 사람들을 만나. 95퍼센트는 이반이지.
내일이 없는듯이 그렇게들 사랑하지만, 내일은 어김없이 오거든….너도 잘 알지?
젊음은 영원히 머물지 않아.
철 지나면 꽃이지듯, 나이가 드는것과 함께 많은 이반들이 지더라…”
몇년전 퀴어에서 주희에게 소개받았던 몇몇 사람들중, 유독 눈에 띄던 커플이 있었다.
떠들썩한 술집안에서 항상 말없이 마주 앉아있다가 결국 한사람이 먼저 일어서거나, 서로 양손을 부여잡고 조용히 울기만 하거나, 아니면 나란히 앉아 어깨에 기댄채 잠이들어있던 사연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죽으면 안돼는데….”
사색이라고 부르고도싶은 보라빛 포도소주 한잔을 넘긴 주희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했던말을 기억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슬픈거 싫어. 정말 이제 슬픈건 지긋지긋해…”
부모님.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한 용기. 이성을 마비시킨 사랑.
그 세가지의 ‘고정원인’ 이외에도 그들에게는 플러스 알파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이 폐암.이라는 도망칠수없는 덫 이었다.
도리질을치는 주희 너머에 부둥켜 안은채 눈물만 흘리던 그들은, 결국
함께 첫 여행을 떠난 2월의 끝자락에 그들의 서러운 삶을 묻었다.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날,
퀴어의 입구에는 흰국화 한다발이 놓였고, 하루종일 평소 ‘윤희’라는 여자가 자주 신청했었다는 ‘No matter what’만이 들렸다.
그들의 가족들중 아무도 그들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들었다.
“주현아. 우린… 사람이야….
아니어 보려고, 남과는 달라보려고 별짓을 다해보아도, 우리도 어쩔수 없는 사람이구나.
힘든거 피해가고 싶고, 막다른길엔 들어가고 싶지 않은 그냥 그런 사람이더라. 나도.
주희도…그런 사람일 뿐야.
용서해.
만약 아직도 그러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인영선배의 마지막말이 집에 가는길을 한층 더 멀게 만들었다.
돈으로는 살수없는 훈장과 같은 그녀의 연륜이 눈이부셔, 한마디 한마디 플래쉬처럼 터져나올때마다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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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비닐 쇼핑백을 들고 엘레베이터에 올랐다.
7층 버튼을 누르고 거울을 바라보다, 다시 손을 뻗어 2층부터 6층까지의 버튼을 모조리 눌렀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에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이 쇼핑백안에 든 옷은 옷장속에 깊숙히 쳐박히게 될것이 분명했다.
한층, 한층..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곳에서 문이 열릴때마다 입에 침이 말랐다.
젠장..
오는길에 무지개 일곱빛깔 스웨터들이 시선을 잡아당기는 아동복 가게에 홀리듯 끌려들어간게 화근이었다.
피부가 하얀 민아는 빨간 스웨터가 참 잘어울릴거란 바보같은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불필요한 초조함따위는 없었을텐데….
입술을 질끈 깨물고 경쾌한 “땡”소리와 함께 멈추고 입을 벌리는 엘레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저…오다보니 예뻐서…”/ “자 이거..자, 자..”/ “자 이거…”
문앞에서 몇번 연습을 마친후에 쉼호홉을 크게 하고 702호 벨을 눌렀다.
“누구재여~”
우렁찬 민아 목소리와 함께 우당탕탕 작은 발이 구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주희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문을 열었다.
처음보는 앞치마가 낯설어 잠시 할말을 잃고 멍청히 서있다가,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쇼핑백을 불쑥 내밀었다. 로보캅 흉내를 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다가…민아 주려고 사왔어.”
“아돔마…헤헤”
제엄마와 벽사이를 비집고 빠꼼히 얼굴을 내미는 민아가 나를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부풀어오르는 이스트와 같은 양감있는 뿌듯함이 가슴을 메워왔다.
아이가 갖고싶다.
저런 눈을 가진 아이가.
“들어와.”
쇼핑백을 받아든 그녀가 문을 활짝 열어보이며 한발짝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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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짓니…?”
쇼파에 앉으며 물으니 그녀가 멋적은듯 앞치마를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싸한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된장찌개에는 그녀가 싫어하는 호박도 들어있고, 풋고추도 들어있겠지.
“차한잔 줄까…?”
불안해보이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들었다.
언제부터 나는 그녀를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어버렸을까.
“아냐, 됐어. 금방 일어나야지. 영진씨 올시간도 다 되가는데…”
주전자에 물을 올리려던 그녀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채로 움직임이 없다.
민아는 제것인걸 아는지 조금 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스웨터를 낑낑대고 제 스스로 입고는 방글거리고 있었다.
양갈래로 머리를 딴 말괄량이 그림이 수놓아져 있는 앙증맞은 스웨터보다 민아의 표정이 몇배로 깜찍해, 다가가 볼을 한번 꼬집어줬다.
제법 아플텐데도 헤헤거리는 민아는 제엄마 닮아서 물질공세에 약한가보다.
작은 주희다.
“그날은…미안했어. 내가 취해서 고생했지…?”
끄집어내지 않으면 그대로 묻혔을 일을 주희가 들췄다.
“아니…”
“요즘 왜그렇게 술이 마시ㄱ….….”
“다음부턴…”
무슨말을 하고있는걸까.
“다음부턴 그렇게 많이 마시지마. 술이 잘 맞는 체질도 아니면서…”
분명 주제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연해서 그만 가봐야겠다며 일어섰다.
오른편으로 베란다에있는 선인장 화분이 눈에 띈다.
가슴에 난 균열을 타고 한풍이 한줄기 훑고 지나갔다.
“조금…더 있다 가지….”
철이 지나면 꽃이 진다고 했던 인영선배의 말처럼, 세월지나 주희의 도도함도 시들어버려 저리도 말끝을 흐리는가 보다.
“오늘…윤희, 미랑언니 기일인거…알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주희의 표정을 보고 다음말은 그냥 삼켰다.
신물처럼 목구멍이 따가워왔다.
해줄수 있는거 아무것도 없었으니, 함께 간 날만큼은 축복해주자고 했던 약속을 잊었다해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것도 무리일것은 없다.
“아니다. 갈께.”
갑자기 인영선배에게 하고싶은 말이 생겼다.
당장에 전화라도 걸어서 소리치고 싶을만큼 간절하게 전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언니.
용서는 못하겠어요.
미움마저 없애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안고 울고싶은 나를 무얼로 막겠어.
저 선인장 죽을때까지만. 딱 그만큼만 더...’
영퍼센트 뒤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소수점을 찾아 희망을 걸어보고싶은 오기가 생겨났다.
None에 거는 기대는 무모한 젊음만의 소유라고 인영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듣더라도,
철지난 꽃도 봄오면 다시 피어난다고 떼를쓰고 싶었다.
참으로,
봄이 더디게 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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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무언가 재촉하는 소리가 두두둑 두두둑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우는 아이가 미운 엄마를 보채고 나무라는듯 심통맞기도 하고, 동시에 앙증맞기도한 소리였다.
아직도 겨울이 머물고 있었는지, 겨울을 한시바삐 내쫓으려는 분주한 봄비소리다.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다.
이가 빠진 머그잔에 한가득 커피를 담아 베란다 앞에 서니, 가랑비에 옷 젖는줄 모른다라는 말을 모르는 몇몇 아이가 경쾌한 걸음으로 등교를 하고 있다.
무엇이든, 모를때는 즐겁기만 한 법이다.
달력을 올려다 보니 어느새 오늘이 3월의 중순에 와 있다.
재앙과 같은 주희의 등장이 내 시계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는데, 하루하루 아무 변화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느끼지 못한건 나 혼자 였을뿐.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것이 나 하나 였을뿐.
퀴어에 다녀온 후로 나는 집밖으로 한발자국도 떼지 않았다.
아무 생각없이 몇일간 뇌를 죽여보고싶은 취지였으나, 아무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내내 나는 과거속을 헤메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 족족, 주희가 등장하지 않는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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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안지 3개월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때떄로 물을수 없는 나의 소심함과, 얘기해주지 않는 그녀의 무심함을 함께 원망하게끔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후자가 조금 더 컸지 않았나 싶다.
질문은 참 쉽고 간단한것에서부터 시작할수 있었다.
가령, '넌 고향이 어디야?' '넌 무슨과목 전공했니?'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이야기는 끝도없이 길고 깊어질수 있다.
특히 주희처럼 말이 많은 사람은, 묻지 않아도 이종사촌의 여자친구의 동생 이야기까지 들춰낼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예상은 오산으로 그쳤다.
초등학교 시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것은 '가정환경조사서'였다.
해마다 갱신하는 작은 종이 한장을 받아 쥘때마다 나는 몰래 화장실에 숨어 울곤했다.
<어머니- 돌아가심.>
학기가 바뀌어도 같은반 아이 한명 집에 데려올수 없었던것은 모두, '니네엄마는 집에 안계셔?'라는 질문이 두려워서 였다.
그리움이라기 보다, 엄마의 부재는 어린아이에게 어쩔수없는 "장애"일수밖에 없었다.
그후로 나는 귀만 틔우고 대화를 하는법에 익숙해졌다.
먼저 이야기 하기 전에는 묻지 않았고, 대답을 꺼려하는 질문은 두번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상대와의 관계에 터울과 벽이 생길수 밖에 없었고, 그 관계는 언제나 생각보다 더 빨리 인연의 한계에 달하곤했다.
나는 주희와 그렇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등을지게 되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나는 그녀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시시때때로 그녀의 지독한 변덕이 나를 떨궈내는 날이 올까 두려워지기도 했다.
3개월이란 짧은시간동안의 변화치고는, 깊고, 치명적인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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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희. 넌 서울이 고향이야?"
처음으로 그녀를 집으로 초대한날, 그녀를 쇼파에 앉혀놓고 저녁을 짓기위해 파를 썰며 물었다.
지나가는 질문인듯 도마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말이다.
매뉴얼에서 그대로 베껴, 시작은 '고향이야기'일수 밖에 없었던것이 조금 부끄럽지만.
"아니, 경기도."
주희역시 TV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성의없이 대답했다.
"언제 서울로 이사왔는데?"
"나 18살때."
"부모님이랑 다같이 이사온거야?"
어슷썰기면 되는것을, 나는 대파를 잘게 채썰고 있었다.
아무 이야기도 아닌데 왜그리 긴장이 되는지, 나는 비오는날 전깃줄을 밟고 공중에 선것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아니. 혼자 왔어. 근데.."
주희는 마침내 TV에서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봤다.
"근데. 왜 내가 부모님이랑 다같이 이사왔을거라고 생각하는거야?"
가시...
나는 그녀가 불쾌해하고 있음을 진작에 눈치챌수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눈을 보며 이야기하는것을 즐겼다.
그런 그녀가 TV만 응시한채 대답하는것으로 충분히 내가 하고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있음을 경고했음에도, 나는 멈출수가 없었다.
"그냥. 그냥 물어본거야. 18이면 아직도 어린나이라서..."
"별로 그렇지도 않아."
주희는 다시 시선을 TV로 옮겼다.
된장찌개에 들어갈 파가 온통 짓물러 즙이 되어있는것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그녀 사이에 쌓이는 벽을 지켜보는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그리되었다.
"주희야. 난 엄마가 없어."
사실, 벽이란것의 존재조차 나는견딜수 없을것 같았다.
나는 어떤식으로든 그녀에게 그녀에게만 허락되는 예외의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와의 관계에 독이되던 약이되던.
"태어났을때부터 주욱 없었어."
밥먹다 말고 불쑥 내뱉은 말치곤 정말 말도 안되게 황당하고 우스운 말이었단걸 나도 인정한다.
그러니 그녀의 반응도 그리 냉정한것은 아니란 것도.
"그래서? 갑자기 그런말을 왜 하는데?"
관심없다는듯 마주앉은 내머릴 피해 TV를 쫓는 그녀가 뱉은 말에 나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내가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가 얄밉기도 했지만, 나는 절제를 아는 어른이었다.
"아니, 아까 거실 둘러보면서 아빠랑 내사진만 있는거 보고 니가 궁금해할것 같아서..."
"별로 궁금하지 않았는데?"
나는 금새라도 울어버릴것처럼 얼굴이 붉어진채 숟갈로 찌개만 뒤섞고 있었다.
밖에선 비가 내리는지 처마에 내려앉는 녀석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기도 했다.
"그래? 그럼 됐구."
그녀는 밥을 먹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잡지 않았다.
우산도 없이 집을 나선 그녀를 잡지 않았다는것은, 어쩌면 유치한 복수극 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떨리는 손으로 상을 치우는데, 느닷없는 현기증이 느껴졌다.
무엇인가 그녀와 나를 잇던 투명한 신경같은것이 깨어진 느낌이었다.
건드려선 안되는 중요한 회로하나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기분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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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나서 달라진점이 하나 있다면, 그래서 좋은점이 하나 있다면,
아무도 부모님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족관계보다는, 현재 몇평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지, 남편이 무얼하는 사람인지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는 나이가 된 후부터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 일이 아닌것까지 남들에게 평가받아서는 안된다는것.
그러니 주어진 조건이 어떠하건간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것.
그런 기특한 생각을 내나이 20살때에만 할수 있었어도 내인생이 많이 달라졌을거란 생각이 가끔 든다.
후회란 지나간 일들의 발자국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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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고아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세상에 혼자였고, 그녀나이 열여덟이 될때까지 생활하던 경기도의 어느 보육원에서 그녀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말해버리고 나면 순식간에 아무일도 아닌 비밀들을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하나씩 품고산다.
오랜시간 껍질안에 숨어 숙성하는 진주처럼, 상처도 비밀도 자기안에 가두어 두면 나중엔 겉잡을수없이 커다란 슬픔이 되고만다.
세상밖으로 꺼내놓는 순간에서야 그것이 아주 하찮고 사소한 것이었음을 깨닫게된다.
주희는 나를 만난 24살의 겨울까지 슬픔의 진주를 가슴속에 품고 지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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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서러운 봄비를 흠뻑 맞고 다시 내집으로 돌아올것이라고는 상상못했기에,
나는 행주를 손에쥐고 바닥에 주저앉은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비맞은 러시아 고양이'꼴을 한 주희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들어왔다.
놀랐지만 쉽게 일어설수 없었다.
전혀 우습지 않은 비맞은 고양이의 모습이 어쩐지 마음이 아파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너 아직도 내가 싫어?"
다짜고짜 주희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추위로 떨리고 갈라졌다.
'수건을 가져와야할텐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말해봐. 내가 아직도 싫어?"
"주희야, 감기 걸리겠다..."
동문서답을 하는 사람의 심정을 처음으로 이해할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대답보다 더 시급하게 전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어쩔수 없는것이 아닌가.
"너한테 하고싶은말이 생겼는데, 니가 날 아직도 싫어한다면 하고싶지 않아서 그래.
손해보는짓 하고싶지 않아."
주희는 참 어린아이이기도 했다.
문득, 초등학교 4학년때 책상위에 반으로 금을 긋고 그 선을 넘어간 내 팔꿈치를 연필심으로 쪼았던 짝궁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난...."
내가 그순간 대답을 망설인것은, 그녀를 싫어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자신을 향한 의문때문이 아나라
'사실은 널 좋아해'라는 말을 해도 좋은 상황인지에대한 탐색때문이었다.
"니가 날 싫어한다면, 차라리 지금 이 시점이 좋을것 같아.
나에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네가 날 싫어한다면, 적어도 내게 있는 치명적인 약점들때문이란 자학은 하지 않아도 될테니까."
언제나 밝고 당당하던 그녀의 어깨가 불규칙하게 흔들리는것을 처음 목격하고,
나는 백지상태가 되어 우주공간에 버려진듯 무중력의 느낌을 맛보았다.
"난 고아야.
넌 엄마가 없었다고 했지? 난 엄마도 없었어."
그녀가 진주를 토해냈다.
그리고 나는 놀랍고도 씁쓸한 진실 하나에 눈을떴다.
내가 '엄마가 없어'라는 말을 할때의 심정과, 그녀가 '엄마도 없어'라고 하는 말을 들을때의 심정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한 이야기는 내 진주를 토해낼때의 아픔과는 비교할수 없이 미미한 충격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른이의 수술장면보다, 내 손가락에 흐르는 작은 핏방울이 훨씬 끔찍하게 느껴지는것이 인간이다.
세상사람 전부가 자신의 슬픈진주가 가장 클것이라고 믿고, 그점에 대해 비관하며 살고 있다는 진실에 아주 뒤늦게 도달하고 나서야 나는 주희에게 손을 내미는 여유를 찾았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내가 외롭고 아팠었다는 사실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거지?
젠장. 나는 아무렇지도 않고 싶은데, 사람들은 파헤치고 나서 꼭 미안해한단말이야...."
주희의 얼굴이 번들거리기 시작하는것을 보고, 빗물이 참 느리게 마른다고 생각했다.
안되겠다싶어 욕실에서 타올하나를 꺼내와 그녀를 감쌌다.
떨리는 어깨가 혼자서는 힘들겠구나 싶어 그녀를 끌어안기도 했다.
"많이 울었겠구나. 이제부터라도 울지 말아야지..."
이제껏 그녀에게 했던 말들중 내가 기억하는 가장 따뜻했던 말이라 짐작한다.
먼저 한발자국 다가갈수 있는 용기가 있었던 시기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손으로 그녀 얼굴에 흐르는 뜨거운 봄비를 닦아주며 나는 태어나 가장 감동적인 위로를 얻었다.
몰래 눈물짓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녀를 이해할수 있고 괜찮다고 말해줄수 있다는 사실이 심장이 뛸만큼 벅찬 기쁨이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샤워를 권하고, 그녀가 욕실에 들어가있는 동안 치우지 못한 상은 내버려둔채 욕실문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가 즐겨부르던 황당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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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물로 샤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떨고있는 주희를 나는 붙잡았다.
먼길 가서 혼자 잠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고 가면 안되겠니.'
....
그리고 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불호청에 싸여 처음 보육원에 들어왔을때, 아기주희의 낡은 베넷저고리 위에 곱게 올려져있던 메모하나에는 이름 석자 달랑 적혀있었다 한다.
그래서 자기이름이 싫다고 고개를 수시로 좌우로 흔들어대는 주희가 느닷없이 내 팔 한 짝을 끌어다 베개삼고 말을 이었다.
18이 되어 처음 사회로 나왔을때는 너무 막막해서 종종 자살도 꿈꿨었단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보육원을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 더 큰 좌절이었다며 주희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녀가 첫발을 내딛었을때 미숙한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줬던것이 명월관의 '희지'였다.
작지만 자기만의 공간 하나 마련하게 된것이 얼마전의 일이고, 그날 밤새 희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울었단다.
되짚어보니, 그녀집에 처음으로 갔던날 새로 벽지를 바른듯 풀냄새가 많이 났던것 같다.
어렵게 다닌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치 장애처럼 따라다니는 고아출신이라는 딱지때문에 취직이 쉽지 않았던 지난 몇년이 아직도 조금은 마음이 아프다는 그녀 얼굴을 타고 다시 한차례 가는 봄비가 흘러내렸다.
"주현아. 난 불쌍하지 않아."
"알아. 넌 여전히 대단한 잘난척쟁이에다가, 못말리게 자존심 쎈 소심줄이야."
그녀의 팔뚝을 쥐는 내 손이 필요이상으로 뜨거웠다.
내 목을 감싸는 그녀 손도 데일만큼 뜨거웠다.
서로의 손으로 구겨진 마음을 곱게 다리면 마침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녀와 내 몸은 뜨거운 '다리미'의 치료를 받으며 물처럼 녹아들기 시작했고,
빗소리가 그친 방안에 작게 기쁨의 탄성이 울렸다.
처음 나란히 서로에게 한발짝 다가선 밤이었다.
닮은꼴 삼각형 두개가 만나, 서로의 모난 부분을 6개에서 4개로 줄일수 있는 기쁜 밤이었다.
아버지가 그랬듯, 나 또한 커다란 눈에 갇히는구나 한숨이 나오면서도
머리를 들이미는 자석으로 숨어있던 철가루들이 달라붙듯, 거부할수 없는 자연의 힘이 인력을 발휘했던것이라 믿었다.
뜨거운 그녀와 나의 입술이 포개지던 순간 역시, 그 인력의 작용이었다.
그날의 따스한 치료를 멈추고 싶지 않은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조금은 쉬웠을까.
나는 그녀를 곁에서 재우고 싶었고, 그녀는 내 안에서 잠들기를 원했다.
결국 그 금단의 욕심은,
짧고도 영원같은 100일동안의 그녀와의 동거를 알리는 총성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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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가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날 역시, 짖궂게도 비가 내렸다.
아침까지도 맑고 해가 쨍쨍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이사를 도와주러 온 희지가 입을 씰룩이며 불평을 토해냈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도 아닌데 왠 마른하늘에 비람. 야, 정주희! 너 정체를 밝혀! 너 호랑이 아냐?'
살림들을 비에 젖지 않게 비닐로 포장하며 주희는 연신 '어흥'소리를 내며 희지를 놀렸고, 희지는 그런 주희에게 버리고 갈 낡은 신발등을 던져댔다. 초등학교 봄맞이 대청소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용달 운전은 전에 가스배달 경력이 있는 희지가 맡아 비싼 인부를 쓰지않고 셋이서 이사를 마쳤다. 이동거리 시간이 40분인데, 이사가 3시간만에 끝났다고 하면 얼마나 단촐한 이사였는지 짐작이 갈것이다.
이사가 끝나자 희지는 전화기부터 찾았다. 이사 후에는 자장면을 먹어주는것이 정석이고, 자기는 정석대로 사는 인간이라며 씽크대 문짝등을 뒤져 중국집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짜잔~'하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희지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나로 하여금 그녀의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볼수록 참 귀여운 여자였다.
자장면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거실 바닥에 제멋대로 널부러져 각자 알수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난 옛날에 짜장면이 제일 비싼 음식인줄 알았어.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은 늘 그거였거든."
주희가 자세를 고쳐 엎드리며 말했고, 동시에 모두 부르던 노래를 멈췄다.
"초등학교 6학년때 말야...졸업이 가까워질수록 기다려지는건 오직 그거 하나뿐이었대두.
난 아직도 짜장면만 보면 흥분돼. 히히."
"으이구..지질이 촌스러운 년."
이사하면서 쓰였던 비닐봉투를 찢으며 초등학교 6학년생으로 돌아간듯 킥킥대는 주희를 향해 희지가 한 말이다. 면박을 주면서도 측은함을 감출수 없는 희지의 표정을 나는 보았다.
"누가 아니래요..."
주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거들자 주희는 뽀로통한 표정으로 나와 희지를 번갈아 노려보며 엄한 비닐봉지만 더욱 거칠게 찢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이순간 자장면을 기다리며 그녀가 갖는 설레임은 초등학교 6학년때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졌다. 비닐봉투를 찢으며 그녀가 기다리는것이 꼭 자장면 한그릇 뿐만은 아닐거라고, 다가오고 있는 나와의 미래와 행복이기도 할것이라고 나는 믿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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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야~ 주현씨 말 잘듣고, 슬리퍼나 신문같은건 물어뜯으면 안돼~? 바닥에 떨어진거 아무거나 줏어먹지 말구, 화장실 가고 싶으면 꼭 변기를 써라~? 알았지?"
9시쯤 짐정리가 끝나고 집을 나서며 희지가 당부랍시고 주희에게 이른 말이다.
"언니, 혹여 길가다가 18세 미만으로 보이는 아이들 나타나면 숨어야돼~? 언니 얼굴 미성년자 관람불가잖아...알았지..???"
질새라 받아치는 주희의 독설이 문을 나서는 희지의 볼을 퉁퉁 붓게 했다.
나는 몇년이 가도 저런식의 대화는 적응이 어려울거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두사람을 지켜보았다.
'주현씨. 애나 강아지 하나 키운다고 생각해요. 주희가 미성숙아 인것도 사실이지만,
사람은 화초보다도 더 예민하고 여린 존재에요. 그런 사람과 생활을 꾸린다는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거야. 애나 강아지 한테 하듯, 항상 조심스럽고 정성스런 마음만 유지하면, 주희도 신발을 물어 뜯어 놓는다거나 밥그릇에 오줌을 싸는 일은 없을거에요. 하핫'
주희를 따돌리고 배웅가는길, 희지는 내손을 꼭 붙들고 당부했었다.
화초키우듯 사랑하라고.
어쩜 난 그때,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에만 부풀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몇년간 외로움과 한사람이 비어버린 허전함에서 허우적대고 있었고, 늘 변수가 작용하는 주희라는 존재에게도 확신 한올 가지지 못한채 시작한 일이었기에, 나는 아무 준비도 할수 없었다. 설사 준비가 되어있었다 해도 처음의 달콤함에 취해 모두 흐트러져 버렸을것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그저 그녀와 한집에서 자장면을 시켜먹는 즐거움을 자주 느낄수 있겠다는 설레임에 들떠있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언젠가는 멈춰버릴 오르골 상자의 음악소리라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우리가 키워야 하는 화초는 보통의 것들에 비해 좀더 독특하고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것임을, 그래서 잠시도 소홀해서는 안되는 사실을 간과했던 모양이다.
지금 그 아름다웠던 화초는 어느 황폐해진 화단에서 시들었을까.
아직, 그 형태는 남아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