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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잊혀진 전쟁인가.영원한 안식인가.
빠른 변화와 산업화가 혼란기 덮어도.
참혹하게 파괴되는 포화속에서
살아 남은자 기억속에 어제처럼 생생하다
치열했던 전쟁의 참상 해마다 6월이면
악령처럼 되살아 나는데
민족의 분단 뒤로 한체
내 아버지 처럼 땅으로 꺼져가는
수 많은 목슴
전쟁기념관에 회복할 수 없는 찟겨진 흔적 흉물스럽다.
죽어서도 갈 곳 없는 희생된 령.
누구의 적 되어 평화 위해 싸웠는가.?
2세대는 이 모든 것에 무디어져 익숙해지고
실향인의 삶은 윤기를 잃었다.
■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
아버지의 학교 수업은 다채로운 추억으로 남았다.
무엇으로도 허튼것이 없는 한 시대의 서사시 처럼
시대와 함께 호흡했던 수업방식이 있었고
봄이 오면 예나 지금이나 지천으로 피는 꽃동네
섬광처럼 빛나는 임하풍미가 그것이다
빛바랜 두루마기처럼 고유의 삶이 묻어나는
정갈한 기와지붕아래 소탈한 풍경 정겨웠다.
숨죽이고 살던 아버지가 남북통일이 되면
첫 걸음으로 달려 갔을 살았던 고향
평북 신의주 박천군 박천읍 봉화리
오전 수업 듣다 받아든 입영통보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이 되었다.
전쟁에 나가기 싫어 여기저기 피해 숨었고,
정혼녀의 마을로 피신하여
돼지우리안 덤불속에 한달을 숨어 지냈다.
정혼녀의 보살핌에도 한계가 있어 남행하기로 결심
책보따리 등허리에 들러메고
할머니가 챙겨준 돈주머니 허리에 묶고
밤에만 남쪽 능선을 향해 발걸음 재촉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총알이 비 처럼 날아 오는 전시
죽음보다, 할아버지의 엄함보다 더 무서운
배곯음.
■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
전쟁이 끝나고 대전의 한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서너명의 정부요원들에 의하여
무참히 끌려 갔다.
원인은 출신성분,증명불충분
북한 출신만으로도 감시권인데
아버지는 요주의 인물명단 1급
자격은
북한출신,다양한 외국어 소유,공산당당원집안,김일성대학출신,인민군탈영,
미군작전령포로,미군통역병,미군정찰통역병 등.
수학교사로 겨우 한달
아버지를 정착하여 살지 못하게
날이면 날마다 불려가고 체포해가고
휴전이었어도 간첩취급
아버지 삶의 철학은
너덜해진 자존심을 기워내는 일.
트라이앵글 힐(김화,춸원,평강)의 사투 절체절명의 순간.
아주치열했던 피로물든 전투, 혹한에 동상,손가락 얼고,귀 자르고,다리 자르고...
사라지지않는 전쟁의 악령. 아버지의 강원도 말고개는 최고의 격전지.
아버지는 하와이 소령과 지프차를 타고 정찰을 한다.
부대를 이동하거나 전시중에 적의 향방을 살피기 위하여
아버지는 항상 소령과 동행한다.
정찰중 포탄이 날아와 비탈아래로 지프차와 함께 굴러
펑!하는 굉음소리와 함께 불길이 휩싸이는 걸 보고 정신을 잃었다.
한참후에 움직여보니 아버지는 다행히 굴러 떨어지는 과정에서
튕겨나와 살았고,하와이장교는 부상을 입고 쓰러져있으나
운젼병은 그 자리에서 즉사.
운동화를 신은 중공군이 많은 걸 보면
밭에서 일하는 농부까지 무조건 동원하여 총을 죄어주고 일선에
보내진 것 같았다.
새파란 13살정도된 어린아들(북한말로 아이들)까지
연습도 없이 보내는 중공군.
전시중에는 말 조심, 행동 조심,친구조심,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되고,
막사의 아침은 보초가 죽는 일 다반사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기습공격에
참호 안이나 바위뒤에 숨었어도
총알이 빙그르 돌아 넘어와 죽이고
낮에는 멈추고 밤에는 야간행진
빨간 목도리 맨 중공군 인간방패 만들어 피리 불고 꽹과리 쳐
비행기 폭격 소리와 뒤섞여 귀가 먹먹해지고 정신없게 만들었다.
중공군은 아편을 맞고 술에 취
사람이 아니라 악령을 붙들고 싸우듯했다.
매일 같이 하늘에서 폭격기의 포탄이 퍼 붓고
고지 위에서는 중공군의 총알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검붉게 변한 흙위로 전우의 시체가 산 처럼 쌓여서야
1952년 그해 가을 격전은 막을 내렸다.
소금묻힌 주먹밥 허리에 차고 말 그대로
'전우에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적군 아군이 쏟아 붓는 포탄에 땅은 뒤집어져
흙가루가 눈처럼 무릎까지 쌓여.
총 한번 쏘지 못하고 즉어가는 군인도 수두룩
자고나면 사방이 시체로 시체를 넘고 넘는데
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북한군 피해
이승만 미국으로 도망치고
맥아더장군 인쳔상륙작전 성공.
맥아더 장군 중국에 원자폭탄 투하 요청하나 철회
내일이면 휴전인데 김일성 철원평야 사수하라
철원에서 남북한 밤새 치열한 혈전
이튼 날 휴전협정 명령에 전쟁 멈추고
북한군 귀하하거나 월북하거나 지리산속으로 도망가고
포로되어 거제도 수용소로 이송되고...
용촌백이(문등병환자) 소록도에 몰아 가두고
내 아버지는 그렇게 제대를 하나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중.
미군놈들 처음에는 한국사람 아무거나 마구 먹는다
돼지라고 하더니 즈네들도 배고프니 커피끓이고 버린 찌꺼기 줏어 먹고
한국사람 즈네가 버린 내장 껍질 족발 먹는다.미개인 취급하더니
쓰레기통에서 즈네들도 닥치는데로 줏어 먹고
비행기에 물자 떨어 트릴때 빙그르 돌아 떨어 트려
적군진지에 떨어 지면 먹을게 없고 아군진지에 떨어지면 먹을게 있으나
겨울내내 얼음밥 먹어야 하고 눈이 하얗게 왔는데 아침에 보니
보초서는 사람 목아지가 댕겅.
적군도 배곯으니 막사안에 침투하여 훔쳐갈건 다 훔쳐가고
저도 살아야하니 보초를 죽이고 튄거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혹한은
방아쇠가 얼어붙어 총을 제대로 쏠 수도 없었고,
겹겹이 옷을 입었어도 심한 동상에 걸려
귀를 자르기도,손이나 발을 자르기도,
아버지는 전우가 총에 맞아 일어설수 없어 둘러 메고 가려 했으나
가까운 거리를 둔 앞에서 북한군이 총을 겨누고 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하여 뒤 돌아 서는 데 만일을 위하여
부상자의 총을 뺏아 총알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총만 옆에두고
아군진지를 향해 미친듯 뛰었다.
( 이 부분에서 부상자에게 총이 있어야 다가오는 적군을 쏘지 않겠냐 하였더니
아버지는 같은 아군이지만 북한출신이기도해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급한데로 총알을 뺏다는 후문이다) 그럼 부상자를 끌고라도 오지 그랬냐는 질문에
부상이 너무 심해서 어려웠다고했슴.
아버지는 언덕을 구르고 엎드려 기고 바람처럼 달려 저 앞에 있는
아군을 향해 손을 흔들어 적군이 아님을 신호하여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고.
사람을 처음 죽일때는 벌벌 떨더니 옆의 전우가 적의 총탄에 나무처럼 맥없이 쓰러지고
총알이 비오듯 퍼붓는 속에서 살아남기란 바늘구멍보다 적은 일.
적군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생겼으니 인간을 죽이는게 아닌
승패 없는 밀고 밀리는 아비규환 전투이다.
전쟁의 상흔과 고통으로도 모자라 운명이 갈라진 아버지.
그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데 흑백논리사고방식은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정전협정 평화 협정 명분을 세웠다.
해를 거듭하여도 꿈길 고향 꽃동네
강원도 계곡에서 전투중
절구통만한 벌집통이 굴러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 달다고 안 먹는거
아버지 혼자 독식하고.
북진을 하며 몇번 밀고 올랐다가
후퇴하며 남행을 몇번
계속되는 전투중이라 먹을게 없어
죽은 사람시체 뒤져 먹기도
겨울에는 눈을 뭉쳐 먹기도
싸움과 굶주림에 지쳐 잠든 꿈길
생시인 듯 하얀 할아버지 나타나 지팡이 가르친다.
깨어나 가르친 곳을 보니 빛나는 꽃 한송이
그걸 케어 허기져 먹는데 몸통에 큰 구멍이 있고
그 속에 물이 가득 차 있어 꿀 맛인 듯 먹었다는 아버지
천우신조인가. 아직 죽을때가 아닌가 산하가 피로 물들고
몸둥이 만신창이 되고 굶어 죽어가는 전선에서
죽을 운명이었다면 진작에 죽엇을 터.
.......
자연으로 가늘 길.
세월은 가도 인생길 늙으면 슬프고 외로워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때가 돠면 가야 하는 길.
사랑을 다하지 못한 후회의 길.
아무리 생각해도 돌이킬 수 없는 세월 후회 한들
외로운 인생 길.
엊그제도 남부럽지 않게
씩씩하고 용감한 사나이였건만
이렇게도 독척(북한어 독촉)하며 빨리 가야되는지 알다가도 모르는
때가 되면 가야하는 인생의 길.
혼자서 가야되는 인생길.
외로운 인생 길.
나도 모르게 소리 높여 외쳐 보아도
가슴속에 뭉쳐진 검은 숯덩이
언제나 풀어질까.
............
그립고 그리워서
뒤돌아 보고 싶지 않은 지나온 발자취
하루 아침에 하얀 세상으로 만들어 놓은 대 자연 앞에
머리가 숙여지는 인생
그래도 살아야 하는지
수십년이 지나간 세월속에서
그립고도 가고 싶은 옛 고향
오늘 날도 부모형제는 잘 살고 계신지
불효한 이 자식 때문에 말로서 다 하지 못할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는 계시는지............
살아가시는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며 나 하나만 살겠다고
고향 등지고 떠나온 이내심정............
이제와서 통곡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련만
터지는 가슴 않고 지나간 과거사를 적어 본다.
.................
(아버지가 있던 부대는 최 일선에서 10리(4K)정도 떨어져 사우는 박격포 부대여서
생각하는것보다 덜 위험하였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어디든지 주든하면 적군의 형테(북한말..동테)를알아내는 것.
적군의 무기는 어떤것이며 언제 후퇴하였는지등등...
아버지가 하와이 사람과 통했던 것은 아버지나 하와이 사람이 일본어와 영어를 알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
중공군은 가냘픈 피리소리로 국군의 마음을 흔들어 고향생각나게 하고
한국군은 아리랑을 확성기로 틀어 중공군을 자수하게도 하는 상황에
장거리 소포에는 엎드리고,박격포 소리에도 엎드리니
옆에서 보고 있던 군인이 빙긋이 웃으며 엎드려 있지말고 따라 오라고 신호하면서 양쪽에서 사격하는 그 사이로
통과하여 건너편 산으로 후퇴하라 한다.
후퇴하다 숨이 가쁘면 시체를 덮고 바짝 엎드려 숨을 돌리다가 앞에 간 아군을 쫓아가려니 이미 때는 늦었다.
이왕에 죽을바엔 포복이 어데있는가.
비오듯이 날려오는 실탄속에서 마라톤 하듯이 서고 뛴다.
뛰다가 숨이 가쁘면 엎드려서 쉬었다 또 뛴다.
사람의 목숨이란 길기도 하며 또 짧기도 한 모양이다.
전사한 시체를 넘고 넘으면서 마침내 아군이 있는 곳 까지 도착하였다.
몇명 남지 않은 우리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후퇴다.
전시에 군인의 식사는 언제나 사자밥을 먹는 셈이다.
왜냐 묻지 말아라.
언제 어느곳에서 죽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인생이니까.
후방으로 내려 오면 올 수록 민간인을 많이 볼 수가 있었건만
반가웁지는 아니하고 슬픔이 앞선다.
그렇게도 그립던 부모형제가 아닌가.
나 혼자 살겠다고 부모형제를 배반했다는 죄책이 가슴뭉클하니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 무어라 말하리
아 -
나라는 사람은 누구를 위하여 싸워야 하며
부모형제 가슴에 총뿌리를 맞 대야하는가.
차라리 고생은 그만 하고 죽는게 좋지 않을까도...
아니야 살아서 가야되
불효자식 두손모아 빌며
충주에 주둔했던 우리부대는 실종된 군인을 보충시켰는지 다시 이동한다.
바람인듯 어데로 간느지 알수 없으나 쫓아가야 된다.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고적막강산 어둠과 고요가 깊어가는 밤 이동은 계속 되었다.
이동 중 느닷 없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들려 오는 신음 소리, 정신을 가다듬고 팔 다리를 움직여 보니
이미 때는 늦어 기운이 점점 없어지고 정신이 흐려져 그냥 엎드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다음 날 장호원병원이었다.
알고보니 이동 하다가 칠흑 같은 어둠에 앞길이 헷갈려 급경사에서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져 (강원도의 산은 낮에도 검푸르다
밤이되면 사방이 암흑빛)
차는 반대로 뒤집혀 굴러 떨어지니 차에 실렸던 박격포 실탄 괘짝이 군인을 덮었다고 함.
지나간 인생을 돌이켜 보니 파리만도 못한 인생의 목숨.
지나간 과거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즐거운 때도 있었건만
외롭고 말 못할 수 많은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한 없이 외쳐보면 통곡하건만 어느 누가
알아 줄까.
차라리 허공에 뜬 달이 되었으면 보고싶은 부모형제를 바라보련만
아 -
외롭고 슬프다고 알아줄까.
웃는 낯으로 부모형제를 뵙겠다고 즐거웁고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웃음을 자위하면서 소식 써 내려간다.
나는 언제나 죽어서나 가려나 보고싶고 그리운 형제여.
때는 이미 늦었으니 기다리지 마시고 만수무강하세요. 이 몸은 나의 부대로 귀가 하렵니다.
그 장소는 경기도 이천 땅에서 청평,양평, 한번도 교전 없이 북진에 또 북진,
가는 곳마다 거칠것 없이 가평까지 무사히 갔건만,
최 일선에 적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가평시 바로 옆에 밤나무밭속에 이리저리로 길이 나 있었다.
최 일선으로 어떤 길인지 지도를 보고 찾지 못하여 평민에게 길을 물어 본즉 일선으로 가는 길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분 말한데로 길이 없다고 하였더니 대뜸 권총을 나의 가슴에 대더니 솔직히 말하라고 하니 난들
어찌하라'는 건지...
들은데로 통역할 뿐인데 이렇게 까지 욕을 하면서 죽인다고 하더니
(마침내 죽으라는 법은 없듯이)다행이 길을 찾어 일선으로 갔다.
전쟁이란 일사락(일사락은 북한어)도 마음 놓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 전쟁의 일과다.
먼저도 말하다싶이 군인이란 목숨을 나라에 바친 몸이다. 한번 이동하려면 하루전날 일선에 가서 적의 상황을 알어보고 와서야 이동을 한다. 그래서 말 한마디가 한 부대를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커다란 문제의 하나다.
그래서 중대하고도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 고생을 거듭하면서 말고개라는 고개옆에 김일성고지라는 중요한 고지가 있다.
이 고지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요한 고지다.
왜 이렇게도 중요한 고지인가 하며는 이 고지를 점령하는 쪽이 승리하는 요지이기 때문에
서로가 차지할려고 모 - 든 힘을 다하여 싸운 고지이다.
마침내 고지 사움은 시작 되었다.
먼저 비행기로 폭격하는 동시에 장거리포와 박격포로 가세하여 무성하게 자랐던 식물들도 말없이(북한 말 순식간에)사라지고
몬지만(북한어 먼지만) 푸석되게 만들어 놓고서야 공격을 개시 한다.
총 한번도 쏘지 않고 김일성 고지를 점령하고 마음놓고 기뻐하는 그 사이에 이게 웬 날 벼락인가.
산 중턱에서 와! - 하고 외치면서 사방에서 공격하여 올라 온다.
느닷없이 소리지르는 바람에 사격하나 때는 이미 늦었다.
막 대결하면서 한 곳을 뚫고서 목숨 걸고 후퇴하여 갱신히(북한어 간신히)살아났다.
인생의 목숨이란 마음데로 못하는 것 같다.
그 많은 병사중에 어떻게 명이 길어 살었는지 참으로 무어라 말할수가 없었다.
또다시 병사를 보충하여 다시금 돌진이다.
(두번다시 속으랴')이번에는 굴마다 수류탄을 던져가며 자세히 살피면서 김일성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제는 고향에 간다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이 고지를 점령하면 평양까지는 무사히 점령할 수 있는 중요한 고지이며 만약에 고지를 점령치 못하면
서울까지 내 놓아야 하는 중요한 고지이기 때문에 전쟁은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운 고지이다.
그 고지를 넘어 북진하는 도중 철원 들판 앞에 도착할 무렵
느닷없이 쏟아붓는 장거리포가 머리위를 지나면서 앞과 옆을 쏟아 붓는다.
정신없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에 아군의 비행기가 와서 폭타능로 응시하며 장거리포와 박격포등 일선(북한어 전선,전쟁터)에서
소총부대와 합심하여 실탄이 있는데로 하나도 남김 없이 퍼붓고 나더니 천둥같은 소리는 없어지고
조용하더니 전쟁은 끝나고 정전이 되었다고 한다.
말도 아니되는 일이다.
이기던 지던간에 끝도 보지 않고 휴전이란 어데에 해당하는지 나의 머리속에는 이해를 하지 못할 전세이다.
그날 저녁에는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게도 그리던 고향이 가까와 지려나 하였건만 실날 같은 희망은 어데론가 없어지고 같이 싸우던 유엔군은 일본으로 사라지고
갈곳 없는 이 몸은 하늘을 지붕삼고 반겨줄 사람 없는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 한 농부가 말하였다.어데를 가나 살어가는것은 다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부지런히 벌어서 장가들고 살면
고향생각으 ㄴ점점 없어지고 자식만 낳으면 자식들이 잘 살아 나는것을 보면서 사노라면 언젠가는 고향에 가게 될거라고....
그렇다 열심히 살고 보자고 결심은 해 보건만 명절만 돌아 오면 과거생각 고향생각이 절로나
한이 맺히니 명절만 없었다면 과거는 생각지 않앗을 것을 술이라고 한 두잔 먹고 나면 왜 나만 외톨이냐고
어떤 사람은 부모형제와 같이 조상을 보러 산소에 가건만 나라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생각하면 할 수록 눈물이 앞을 가려
터질듯이 아픈가슴 어느누가 알아주랴.
아 - 인생이란 고달프고 외로운건 나만 격는 일은 아니겠지.
죄가 많은 인생이라 벌을 받는지 불효라 죄를 받는지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병원에 갔더니만 이게 웬 날 벼락인가.
암이란 진단을 받고보니 더욱이 생각나는건 부모형제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스쳐가니 죄책의 눈물인지 하염없이 흘러내려
두뺨을 적시는구나.
병원침대에 누워 지나온 과거사를 돌이켜 보니 하나도 잘한것은 없이 자식들 한테도 아버지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고생만 시켰으니 무슨효도를 바라겠느냐. 받은 것으 ㄴ너무많이 받었으니 나의 자식 하나만은 남의 자식들 보다도 잘 두었다고 자부할 만도 하다.
어느집 자식들이 내 자식 육남매 만큼 잘 하는 자식 있겠는가.
진심으로 고맙다.
실날 같은 목숨을 하루하루 지내면서 훗날을 생각하며 고요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고향을 그려본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나의살든 고향은 꽃피는 산골...'
'오늘도 것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아 - 고향 부모형제가 계시는 곳. 내가자란 고향 정말로 가고파라...............
※ 위의 내용은 아버지가 가시기전 달포를 앞두고 '하고싶은 말 있슴 아무거나 쓰세요.'라는 저의 말에 어렵게 쉬어가며 쓴 마지막
유서입니다. 정작 당신이 격었던 전후(전쟁후)의 이야기는 끝내 꺼내지 않네요.말씀은 힘들어서 연필이 죄어지지않는다하였지만 (물론 그러기도 하려니와 자식들에게 혹여 피해가 될까봐 내밀한 부분은 비밀에 부칩니다. 그때 당시도 못내 궁금하여 아쉽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니 더 이상 묻지도 궁금하여 하고 싶은 말 있슴 써보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병중이라 힘도 없어서 이 나마 쓰는 것조차 버거워 몇번이나 쉬었다가 썼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말을 잘 안해서 나도 아는것 없다고 일축해버리지요
아버지의 고향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면 이 토록 고향생각에 간절하여 죽음을 목전에 두면서까지 힘들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있는 가족은 이곳에서도 집을 튀쳐나가 가출하여 영영 안 돌아가기도 부지기수인데
넉넉하고 풍요로운 시절을 보냈기에 더욱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는 인민군되기 싫어 탈영하였으나
남쪽 군인되어 싸우게 된거다.
그렇다면 인민군되어 싸웠다면 가족도 무사하고 아버지도 고생없는 인생이었을 터......)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글 수정중...
비밀로 부친 이야기임.
완결 후 삭제 할 것임.
6.25가 있는 달.가신 아버지생각을 더 선명하게하는 달입니다.
역사를 만든 6.25가 많은 사람에게 깊은 흉터를 남기고 잊혀져 가는게 현실 입니다.
우선 어머니와 몇몇 애기와 아버지에게 들었던 기억을 종합해서 두서 없이 나열합니다.
나머지는 시간 나는데로 정리해야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