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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던 가을이 가고 이제 슬슬 추위가 엄습해오는 겨울의 문턱입니다. 또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말입니다. 슬슬 국회의원 분들도 연탄 날라주시는 ‘설정샷‘ 찍어주시면서 내년대선 몸 풀기 시작하셨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말고사도 모두 끝나고 옆구리는 시리고 친구들은 모두 군대로, 여친의 품으로 안겨버린 시점에 딱히 할 만한 것도 없을뿐더러 예전부터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던 것들에 손을 대보기로 했습니다. 현재 대충 Step. 3~4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조선의 군대에 관한 알 만한 사람 다 아는 뒷북입니다.^^
테마의 주제는 조선전기나 중기의 편제에 대해선 너무나 다들 잘 알고 계시기에 임란이 끝나고 더불어 병자호란도 끝난 직후의 조선군 편제의 변화에 대해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것이니 가볍게 읽어 주십사 합니다. 우헤헤헤헤헤헤
◆ 조선의 군대.
조선후기의 조선군 편제인 거기보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조선 군대의 근본적 문제들을 짚어보고 편제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자.
1) 조선군대의 만성적 문제
조선군대의 만성적 문제라 하면 우리들에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문제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백병전을 위한 단병접전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조선군대는 왜 백병전에 약한 것일까? 조선 초기의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도로 무르진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 조선 초기 - 오위진법
이제 모두가 아는 오위진법이다. 위장을 중심으로 유군이 있고 5부가 있으며 각부마다 4통이라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 4통은 2개의 통이 기병이고 나머지 2개의 통이 보병이다. 기통은 60%가 기사(騎射)이고 나머지 40%가 기창(騎槍)이다. 보병은 활, 총통, 장창, 장검, 방패 등으로 무장했다. 이 4통은 각각 나가서 싸우는 능동적 전투단위인 전통(戰統)과 진에 머물러 수비를 위주로 하는 수동적 전투단위인 주통(駐統)으로 나뉘었다.
오위진법에 관한 설명은 여기서 다루려는 주제가 아님으로 여기서 줄인다.
2) 왜 그냐?
그렇다. 왜 그냐? 조선 초 정도전이 고안한 이 수비적 형태의 진법은 사방의 적에게 대항 가능한 진법이며 기병위주로 북방의 오랑캐를 상대하기 위한 전법이었고 실효성도 좋은 편이었다. 특히 우리가 다루려는 백병전 능력에 관해서는 보전통과 보주통의 최전방에 위치한 방패를 운용하는 집단. 일명‘팽배수’들의 군기와 기강은 과거 로마의‘레기온’들에 버금가는 그것이라고 보인다. 이 팽배수들은 좋게 말해 진형의 최전방에서 적과 첫 단병접전을 시작하고 뒤의 사수와 총통수에게 목표를 고착화시켜 탄착군에 의한 살상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집단이며 진형의 유지자체를 담당하는 부대라 할 수 있다.
나쁘게 말한다면 당연히 단순‘몸빵’용이며‘소모성’전투 집단이다. 따라서 이들은 그 구성부터가 좀 노신다는 분들 아니면 돈없고 빽없는 일반 백성 또는 사회소외계층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곳에 차출당하면 현재의 최전방 GOP근무 옵하들이 형님해야할 심정이었을 거다.
이런 매우 욕나올 정도로 위험도가 높은 집단이었지만 그 대우는 매우 열악했다. 칼과 같은 단병접전무기를 천시했던 조선이었기에 단병접전부대에 대한 천시가 이어졌다. 그렇다고 당시에 무슨놈의 포로협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시신수습해서 집에 보내주는 것도 아니었으며 부상자나 전사자에게 특별히 국가에 없던 충성심이 생겨날 정도의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쯤 되면 미친척하지 않고는 가고 싶은 병과가 절대로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팍팍! 무~울씬 풍겨 나오지 않는가? 저길 들어가느니 차라리 인간사에 돌아다니는 온갖 편협한 수를 써서라도 다른 부대로 빠지거나 병역자체를 이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수군이나 팽배수나‘좆뺑이’의 온상이었던 것이다.
※ 팽배수
이런 사회전반에 걸쳐서 기피하는 병과집단인‘팽배수’는 뭘 믿고 살았을까? 딱봐도 깡이고 악이며 그들 나름의 자부심과 쫀심이었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최전선에서 피와 먼지에 범벅이 되어 소속 부대 명을 목청껏 외치며 전우의 시신을 넘어 묵묵히 전진하는 그들의 모습을. 얼핏 조선군대의 이미지와 매치가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조선 초 북방지역 군대에서는 실제 했던 모습이다. 필자는 이들 나름대로의 부대구호도 있었을 것이고 독특한 구호가 존재했다고 믿으며 더불어 나름의 군가도 있었을 것이라 장담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병과의 조직력을 구성,유지하기는 어렵게 때문이다.
(Hi~킥! 오빠야~! 돈없고 빽없는 팽배수. 모두가 우릴 무시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린 조선 최정예 부대다! 절대 잊지 말아!)
보라 저 살기등등하고 용기백배한 팽배수의 저 모습을!! (솔직히 암만 봐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 그림의 팽배수는 무장이나 패용하는 검이 실제와 달라 보이지만 대충 저런 형태였다.
실제로는 위 같은 쇠자갑을 착용했던 걸로 보인다. 첨주형 투구를 착용했고 일반 사병은 왼쪽 형태의 무장을 했을 것이다. 여기다가 조선특유의 환도가 더해진다. 오른쪽은 경번갑을 착용한 팽배수로 군관 급 이상이 착용하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리틀솔져’님이 하였었다. 이에 필자는 동의한다.
이런 팽배수에 대한 인식은 전기를 지나 중기로 가면서 더더욱 악화되었고 당시 만연하는 군역 및 군포의 부패 화를 통해 병부 상에만 존재하는 부대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이는 당시 조선군대 전체에 이르는 문제였지만 팽배수나 기타 기피병과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라 보인다.
강조하지만 조선은 그 근본뼈대부터가 궁(弓)의 나라이다.
3) 어라? 이 쉐리들 다 어디 갔어?
조선 중기의 임란이 다가오는 시기가 되어가면서 조선군은 장부상의 군대와 실제 군대사이의 엄청난 갭이 형성된다. 위에 설명한 기피현상과 더불어 만연한 군포의 비리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말 다 아는 사실이기에 설명하지 않겠다.(그렇다; AGS 때문이다. 원래는..ㅠ.ㅠ)막말로 개판 5분전. 아니 이미 개판나버린 상황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임란의 입질을 감지하여 성을 신축, 보수하고 군대를 재편성하는 등 나름의 대비를 하였지만 내부 깊숙이 썩어서 곪아버린 문제를 표면상의 해결책으로 복구 할 수는 없었다.
임란이 터지고 막상 지휘부에서 지휘관을 파견하여 제승방략에 의거한 군대를 소집해보면 뭔 제길 써놓기만 몇 천이고 실제 동원된 군사는 (아무리 날라버린 놈을 감안하더라도) 장부상 기록에 크게 못 미쳤다. 장부에 1천명이 실제론 1백 명이니 말다한 것이다. 더군다나 훈련 상태는 필자동네 말투로 쉬발나는 상태고;;
자~ 그리고 이제부터 전설이 시작된다. 경상남도 지역부터 수도권까지 무슨 놈의 현대의 전격기동전도 아니고 순식간에 쓸려버리며 도중에 신립옵하는 나름대로 전술을 구사해 보지만 스펙이 게임이 안 되는데...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물론 신립의 전술은 당시 정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타당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붙었다하면 튄다. 조선군 참~ 대단했다. 중국군대 욕할 일이 아니었다. 장교며 사병이며 어떻게 하면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비전투지역으로의 기동을 할까 고민했다.(응?;;) 그리고 이들은 정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비전투지역으로의 전략기동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선보인다.
이에 격분한 한 조선군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혹자들은 조총에 의한 결과라고들 한다. 허나 당시 조총의 비율은 전체 왜군의 14%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투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냉병기를 사용하는 아시가루들이었다. 발도족경조가 실존했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단병접전에서의 그들의 능력은 조선군을 압도했다. 초기의 팽배수 옵하야들만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4) 임진왜란은 막았다. 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단병접전의 부조리(?)는 조선군 특유의‘엘프족’지향이 대대적으로 피 본 케이스였다. 적당히도 아니고 정말 졸라게 봤다. 뒤에 기술하겠지만 유성룡도 한 또라이에게 궁시와 조총만으로 왜군의 돌격을 막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모두가 알겠지만 레인져형 유닛만 가지고 밀리 유닛을 상대하기란 매우 어렵다.
임진왜란중‘무예제보’를 편찬하였던 한교는 이를 꼬집는다.
“오직 우리나라는 해외에 치우쳐 있어 예로부터 전해오는 것이 다만 궁시 한 기예만 있고 칼과 창은 단지 그 기기만 있고 도리어 그 익혀 쓰는 방법은 없다. 말 위에서 창을 쓰는 것은 비록 무과 시험장에서는 쓰이지만 그 방도도 상세히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칼과 창이 버려진 무기가 된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왜군과 대진할 때 왜군이 갑자기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면 우리 군사는 비록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더라도 칼은 칼집에서 뽑을 겨를이 없고 창은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인 채로 적의 칼날에 꺾여버리니, 이는 모두 칼과 창을 익히는 방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렇게 다 뒤비누어 갔다.
또, 유성룡은 서애집에서 일본군의 전법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군인을 셋으로 나누어 편성해 삼첩진을 만들고 행렬을 이루었는데, 앞에 선 한 행렬은 기치를 가졌고, 가운데 행렬은 조총을 갖게 하고, 뒤의 행렬은 단병을 가지게 한다. 적을 만나면 앞 행렬의 기치를 잡은 자들은 양쪽으로 나누어 벌려 서서 포위한 형태를 만들고, 중앙행렬의 조총을 가진 자들이 일시에 총을 발사하여 적진을 충돌하니 적군이 많이 조총에 상하여 적진이 요동한다. 또 보니 좌우에는 이미 포위된 군사가 있어 반드시 도망하여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러자 뒷 행렬의 창검을 지닌 자들이 뒤에서 추격하여 마음대로 그들을 목 베어 죽인다.”
<고마 쪽발이 보이믄 팍 쒜리삐라! 이랗게 좀..아~~ 따 아그야 제발!!? - 유성룡>
이런 작태에서 전쟁초기 조선 조정은(조정인지 선조에 국한된 사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전반적으로 조선군이 연신 뒤비눕는 원인에 대해서 (전술적인 면에서만 보았을 시) 판단착오를 하고 있다. 백병전등의 단병접전에서 밀리는 것이 아니라 그간 많은 이들이 오해 했듯이 조총의 사용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절강병법을 도입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초기 평양성 전투에서의 명의 화포운용에 대한 이덕형의 보고는 불랑기, 호준포, 멸로포등의 화기위주로 소개하였고, 조총의 도입과 관련하여 초기 선조를 비롯한 조정에서는 화기위주로 병력을 재편하는데 주력하였다. 선조 26년 실록에 기재된 선조의 언급은 이러한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적이 번번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은 오로지 화포가 있기 때문이고 중국군이 적을 진압할 수 있는 까닭도 화포에 있으니 우리나라의 약점은 바로 화포를 사용하지 못하는데 있다. "
"적의 장기(長技)는 조총(鳥銃)뿐인데, 이것을 막을 물건이 없는가?”
선조 27년 3월 선조와 유성룡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선조 이 꼴통쉐리의 견해가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선조는 유성룡의 장,단병을 겸용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칼과 창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읽으면 알겠지만 그게 그 말이다. 허나 지도 알고 있었단 듯이 말해주는 센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기효신서의 입수를 비롯하여, 번역에 대한 지속적 노력과정에서 한교의 주도하에 절강병법의 핵심전술단위로서의 살수를 위한 무예를 기록한 무예제보가 선조 31년(1598년) 편찬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의 군사체계에 있어 "기효신서"와 척계광은 핵심 벤치마킹의 대상으로서 그 근간을 이루는 전술체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백병전과 개인무예라는 요소에 대해서 척계광의 절강병법은 중핵을 이루고 있다. 조선 후기, 심지어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살수대를 포함한 이러한 편제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를 대체할 어떠한 군사체제상의 근본적 변화도 일어나지 못했다. 단지 기병의 강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조선 전기 "오위진법"과 관련한 고려와 "병학통" 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병운용사례를 관측할 수 있으나, 조선 후기 군사체제는 기효신서의 법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절강병법
역시 다 아는 절강병법 나왔다. 임란이후 조선은 척계광 옵하의‘기효신서’에 기초한 조선의‘병학지남’으로 진법을 변형한다. 단병접전능력을 한껏 배양한 이진법은 위의 원앙진에 기초하여 조선 나름대로의 변화를 거친다.
임란 초기에 얼마나 개발렸으면 살수대의 비중을 매우 높이고 조총 등의 개인화기운용을 증가시켰다. 허나 당시의 조총 등이 신뢰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척계광 본인부터가 조총보다는 살수대위주의 진법을 선호하여 완성시킨 것이 원앙진이다.
척사마에 의하면 살수는 반드시 4초, 조총수는 1초의 비중을 가지게 되는데, 총 20%정도의 비중을 조총수가 가지게 된다. 16세기 초나 15세기의 화승총이나 석궁으로 무장한 병력이 파이크대형을 보조하는데 스위스군의 경우 20%정도 비중을 가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척계광이 절강에서 왜구와 교전할 당시의 명의 조총은 신뢰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고, 왜구는 조총을 운용하거나, 대부대운용에 필요한 지휘체계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척가군은 강과 산이 많은 지형에서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는 백병전 위주의 소단위 전술체계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은 또한 나름대로의 궁시(弓矢)의 장기와 조총운영의 여러 가지 환경적이거나 상황적인 한계에 근거하여 조총으로 무장한 포수(砲手)를 중심으로 하되, 살수(殺手)와 더불어 사수(射手)를 양성하는 삼수병(三手兵)체제로 나아가게 된다.
● 드뎌 메인 과제 나왔다.!! 누가 옳은 것인가?
우리는 위에 서술한 내용을 통해 조선군의 백병전 취약점의 원인을 짚어보았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은 화기위주보단 살수대 중심의 절강병법을 도입하기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핏 보기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고 선조가 또 역시나 미친 소리 해댄 것을 여러 충신들이 충언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아이러니 하게도 결국 선조의 견해가 정도나마 맞는 것이 되어버렸으니 정말 역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역시나 본인도 의도하진 않았을 거라 자위해본다;) 많은 분들이 지금 모니터에 침을 뱉고 필자를 찾아서 회떠버리겠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몇몇 지인들은 MLRS 런치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선조 옹호론이라니; 선조가 옳은 소릴 해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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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 프롤로그는 끝납니다. 다음 편부터 드디어 왜 선조가 결과론적으로 옳은 소리를하게 된 것인가. 또. 절강병법의 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테마의 주제인 거기보전등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아~~기대되! 기대되! 아~~ 하악 하악 하아악~ 야마떼~~;; 흠;; 흠... 어쨌든 그럼 다음 편에 계속 됩니다. ㅋ
참조문헌 : 조선의 무기와 갑옷. 민승기
lemiel 글모음. 네이버
그밖에 기타 인터넷 자료;(출처 그딴거 없음)
리틀솔져님 정리 자료.
첫댓글 글 잘 쓰셨네요 ^^
우후~ 낄낄낄 다크킬러님 내공이 늘었소이다. (팽배수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적 가정이 꽤많이 첨가된듯한 느낌이 나는군요)
사실에 입각하여 양념좀 뿌려봤습니다 ㅋㅋㅋ
아~~기대되! 기대되! 아~~ 하악 하악 하아악~ 모또~~ -_-;;; 담편도 즐겁게 보겠습니다.
적절한 코믹과 함께 섞인 뼈대있는 내용 좋았습니다 ^^
이거 은근히 재밌네요...
팽배수의 전투력은 어느정도 될까요? 레기온급이라면 일본군과 싸워도 밀어버릴수 있을거 같은데 말이죠. 일본군은 신기하게 방패를 쓰지않던데 방패와 검으로 무장하고 레기온급의 군율과 깡을 가진 팽배수라면 백병전으로 임진때 일본군을 능히 무찌를거 같은데....
제생각은 그래도 초반에 상당히 고전 했을 것 같은데요. 조선의 팽배수는 주로 여진과의 전투에 최적화된 부대입니다. 문제는 일본의 야리 장창 보병대인데 방패와 짧은 환도로 무장은 팽배수들이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방법은 찾았을 걸로 생각합니다. 실제 임란이듬해로 가면 야전승률에서 조선군이 우위로 바귑니다. 팽배수가 레기온 급인지는 단순 비교는 매우 어렵습니다. 대신 군율만큼은 후덜덜 이었습니다. 한예를 본다면 '오장이 전사하면 휘하의 병사들을 처형하고 대정이 죽으면 휘하의 오장들을 처형하며 여수가 전사하면 휘하의 대정들을 쳐형한다.' 뭐 이런 규정도 잇었다고 합니다.
당시 야리장창부대같은 경우 파이크병이나 기타 유럽의 팔랑크스들 보다 그 정도가 약간 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들도 강력한 주력이었다는데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실제로 레기온이나 타켓티어등이 군율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장창팔랑크스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던걸 봐서는 이런 류의 방패병을 상대해본 경험이 없는 일본 장창대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이었을 거라고 보입니다. 또한 솔져님 말씀대로 초기 3개월이후 야전에서의 승률은(단순비교이지만) 조선 '관군'이 오히려 높습니다. 다만 이당시에 팽배수와 같은 애들이 대거 사용되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또 개인적으로 팽배수들에게 상당히 애정이 가는 접니다^^; 레기온들과 군기면에선 아니 솔직히 저런류의 병과집단에서는 군기가 생명이죠. 또한 당시 일본장창대의 교전전법이 '찌른다'보단 '내리친다'의 형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팽배수에겐 득이 될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그것보다 다크킬러님 현재 제가 댓글 올렸다고 삐지시 마시고 빨리 다음글 올려주세요(그리고 다크킬러님에게 태클 건게 아니라 위에 있던 레미엘님 글에 잠시 조그만 태클을 건 겁니다)아니면 혹시 AGS??
요새ㅠ.ㅠ 눈꼬 틀새 없이 바쁘3 ㅠ.ㅠ 흐미랄 틈틈히 만들고는 잊지만서도 ㅠ,ㅠ (실은 삐?3 -.ㅡ+ ㅋㅋ;;)
근데 왜 일본은 방패를 사용하지 않은걸까요? 방패란것에 대해 모를리도 없을테고 사용해 본적이 없을리도 없을텐데 일본군이 방패병을 운용했다는 사료는 찾아 볼수가 없네요. 방패를 한번 써봤다면 그 유용성을 모를리가 없을텐데 말이죠. 그렇다고 방패를 버릴정도로 일본갑옷이 방어력이 특출난것도 아니고.......방패가 없으면 조선의 궁시에도 특히 약할텐데 왜 방패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뭐 아주 사용안한건 아니고 제한적인 형태로 사용은 했더군요. 다만 전쟁형태및 무기등이 대륙쪽과는 좀 달라서 그렇게 부각되지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생각입니다. 아마 임란때 결국 패퇴한 것도 그런 이유중에 하나일 수 있죠. 사실 일본이란 나라도 그들만의 독특한 전쟁 방식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강인한 인식과는 달리 의외로 대외전쟁의 승률은 거의 극안한 편입니다. 뭐 러일전쟁 정도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투에는 이겨도 전쟁에는 지는 이상한 패턴을 많이 보이지요.
역시 아예 안사용한건 아니군요. 그럼 일본의 방패멸시는 그들이 가진 활의 성능이 볼품없었다는것과 일본도나 다른 기타 병장기가 거의 양손무기란것을 이유로 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