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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말씀 후기
<여자는 노래한다>
한국도로공사는 공기업이다. 국토교통부가 전체 주식의 약 86%를, 한국수출입은행이 약 10%를 소유하고 있다. 사장은 국토교통부 장관의 임명제청을 통해 대통령이 임명한다. 톨게이트 수납노동자들도 과거에 한국도로공사에 직접 고용된 정규직이었으며, 2000년대 초반부터 두 번의 구조조정과 2007년 파견법 제정 후 파견허용업종으로 지정되어 강제로 전원이 민간위탁으로 전환됐다. 2013년 톨게이트요금수납노동자 529명이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통해 1, 2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법원은 부당하게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톨게이트 요금 수납 노동자의 지위를 원래대로 복귀하라고 했으나 정부와 한국도로공사는 자회사 전환이라는 꼼수를 부리고 정규직 전환을 거부했다. 이에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노동자들은 2019년 6월 30일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10m높이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은 *왜 여성의 일자리를 공격하는가? 조리, 소매 판매, 전화 판매, 보험, 개인정보 취급, 개인 보호, 요금 수납 등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을 강요하는 비정규직 대부분이 여성 일자리이며 OECD 최고의 성별 임금 격차는 바로 여성의 비정규직화로 인한 저임금이 원인임을 분명히 밝혔다. 온갖 욕설과 생리현상을 참으며 해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미수금을 개인 돈으로 채우고, 회식 자리에 불려 나가거나 상급자들의 온갖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던 그녀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고속도로에서 돈이나 받던 아줌마들의 정규직 욕심이 아니냐란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 그들은 여성단체들과 민주노총의 여성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더 이상 여성들의 일자리를 공격하며 여성들을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으로 내모는 정부 정책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 2019년 12월 6일, 대구지법 김천지원 민사합의부는 요금수납원 4120명이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낸 3건의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일부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일부는 각하됐지만 서류 미비 등이 이유가 됐다-재준비 중) 소송에 참여한 4120명 중 자회사에 근무 중인 3500여 명은 근로계약서에 권리 포기 각서를 썼기 때문에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직접 고용이 어렵고 임금 차액만을 받을 수 있다. (여러 기사와 기자회견을 찾아보고 요약한 내용입니다. 보충할 이야기가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이 위대한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은 자신이 여성이면서 노동자이고 어머니이면서 가난하고 사회에서 배제된 자라는 중첩된 정체성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병치시켰다. 우리는 여성이다, 비천한 계층이다, 노동자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우리’라고 선언한 싸움이었다. 그들이 모여 낯선 노래를 부를 때 스스로 점점 더 낯선 존재, 낯선 어머니, 낯선 여성, 낯선 노동자가 되었고 마침내 세상을 낯설게 만들었다. 그들의 노래가 이 땅을 금 가게 했다.
그녀들은 자신의 몸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성’과 ‘계급’, 그 가운데 어느 것도 포기될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성’과 ‘계급’은 긴밀한 관계에 놓이면서 서로 긴장 상태에 있기에 그 중첩된 모순이 폭발된 힘으로 발화된다. 그녀들은 이것을 스스로 자각하면서 입증해냈다. 이 두 힘을 싸움 끝까지 ‘등가의 사슬’로 가져갔다(샹탈 무페-지배체제와 싸우는 사람들은 싸움의 위계를 해체시키고 등가로 봐야만 폭넓고 폭발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 무엇이 더 우선이고 더 중요한가에 매몰되면 중요한 것은 사라진다. 중요 순위를 정해왔던 주체를 해체해야 한다.
구조 안에서 몫이 없는 자들, 차별받고 무시 받는 존재들이 공정한 분배를 요구할 때 그 목소리는 그들의 위치를 넘어선다. 그들은 생각 못 한 다른 장소와 영역에서 같은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며 연대하지만, 기존 구조 안에서는 평등한 분배가 불가능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구조의 변혁을 요구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사회변혁으로 나아간다. 한국 여성학자 김은실은 이것을 ‘끼어들기’와 ‘새판 짜기’라고 요약했다. 예를 들어 남자나 부자나 권력자들이 독차지했던 자리에 여자나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 ‘끼어들기’이고 스스로 결코 포기하지 않는 기득권을 해체해야 하고 새 세상, 새 판의 필요를 요구하는 것이 ‘새판 짜기’다. 새판이 짜지지 않는다면,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면, 스스로를 해체하고 다시 자신을 구성하는 씨름을 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과 연대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희망은 없다.
본문의 ‘마리아의 노래’는 바로 그 문제를 돌파하고 있다. 마리아는 보편 질서를 선포한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몸으로 잉태하지만, 저주였을 그 불길한 전언을 지복으로 전환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는 정확한 인식 속에서 전복적 힘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녀는 계급적으로 ‘비천한 자’이고 ‘여자’이고 ‘종’의 신분이었다. 마리아는 그 삼중의 사슬 속에서 더욱 몰락할 자신의 운명을 오히려 그 사슬의 힘으로 돌파해낸다. 자신이 바로 그 삼중의 바닥과 비천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낯선 자인 ‘메시아’를 잉태할 수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자신의 수태가 곧 ‘케노시스’에 대한 잉태, 즉 신이 하늘의 위치를 포기하고 비천한 인간의 땅으로 진입한 사건에 대한 잉태임을 깨달은 것이다. ‘케노시스’ 이후 하늘에는 금이 갔다. 땅의 모든 것에 금이 갔고 모든 것이 요동쳤다. 스스로 몰락한 금 간 하느님이 온몸에 금이 간 여자의 몸을 통해 오신 것이다.
현실 너머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끌림으로 모든 두려움을 넘어 자기를 던지는 ‘창조자의 노래’가 바로 ‘마리아의 노래’이다. 모든 걸 뒤집고 새 판을 짜는 개벽의 ‘시’다. 비참한 자들의 무기는 지배자들의 무기와 다르다. 돈과 권력이 아니며 수모와 무시에 대한 복수의 무기가 아니다. 그들의 무기는 ‘언어’다. 그들은 언어를 전적으로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언어로 바꾸어낸다. 자기 운명과 양보할 수 없는 자기 향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윤리’가 그들의 두 번째 무기다. 금 간 존재들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사랑이 탄생하고 차이를 가지고 매진하고 향유할 뿐이다. 그들의 모든 언어가 노래가 된다. 온전치 못한 존재들이 자신이 분열되고 금 간 존재임을 자각하며 연대하며 함께 미래의 노래를 부를 때 비로소 사랑이 가능해진다.
여자는 포기하지 않는 존재다. 다시 일어난다. 노래한다. 비천한 여종 마리아가 낯선 어머니가 되고 낯선 시인으로 거듭났다. 두려움은 확신으로, 절망과 불행이 찬양으로 바뀌었다. 메시아는 이 노래 속에 이미 오셨다. 메시아는 고통과 희생이 아니라 무한한 향유를 약속하신다. 마리아의 노래는 당대에서 영원한 후대로, 온 세계에서 지금 오고 있는 세계로, 우리를 가두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시야를 무한히 개방하는 초월적 환상으로 이끈다. 스스로 낯선 존재가 되는 마리아는 환상에 매혹되었다.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되면서 교섭되는 환상,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만나고 충돌하면서 전적으로 다른 것이 임하는 환상, 억압받던 모든 피조물의 황홀한 꿈같은 환상. 진정한 환상에 매혹된 자는 스스로 승화되면서 세계를 승화시킨다. 비천한 여종의 이 위력적인 노래가 변할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을 금가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같은 노래를 메아리로 부를 때 위계는 해체되고 모두가 하나가 될 것이다.
성탄을 맞아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우리의 균열로부터, 스스로 금 간 존재가 되어 사랑의 모범을 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들려올 것이다. 그 노래에 응답하면서 목소리를 합쳐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낯선 창조자로 다시 서게 될 것이다. ‘성탄’은 '노래하는 시간', '중지하는 시간', '응답하는 시간', '전적으로 새판이 짜이는 시간'이다.
첫댓글 역시나…. 먹느라고 식사 장면은 촬영 못 했어요. 언제쯤 돼야 음식 앞에서 이성을 차릴까요? 그리고 박목사님,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참석하셨을 박목사님 건강 위해 기도합니다.
네, 저도 박목사님 호전되기를 기도합니다..샛별교우님 정성깃든 후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