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가 말하는 '불이의 법문' 은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가르침이다. 말하자면 대립이나 차별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진리로서, 현상적으로는 대립되는 두 개의 사실이 근원적으로는 일체一體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는 둘이 아니다
「유마경」은 「반야경」에 이어 성립된 경전이다. 이 경의 특징은 설법자가 석가모니가 아니라 재가 신자인 ‘유마’ 라고 하는 점이다. 유마는 승려가 아니다. 그는 재산을 가진 부호로서 문수보살과 경지가 같거나 그 이상으로 불교의 심오한 뜻을 추구한 재가의 거사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이 목표로 하는 것은 재가신자의 성불로서, 하찮은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유마경」의 매력은 대승불교의 근본 원리인 ‘번뇌 즉 보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는 데 있다. 이 가르침을 「유마경」에서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부른다. 「유마경」전체의 사상은 이 불이법문의 세계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마경」의 중심 부분의 이야기는 이렇다. 유마가 병으로 정양중이라는 소식이 석가모니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런데 그의 병이 문제였다. 감기가 들거나 지병이 재발한 것이 아니다. 병이 들 리가 없는 유마가 병이 들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 유마의 병명은 무엇이었을까?
석가모니는 사리불 등에게 유마를 문병하러 가라고 권했지만 모두 발뺌을 했다. 그것은 예전에 유마로부터 그들의 수행 방법이 철저히 논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마의 문병을 제자들이 모두 사양했으므로 결국 문수보살이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유마를 문병하러 가게 된다. 유마의 거택에서 이루어지는 문수와 유마의 당대 최고의 불교에 관한 대담은 필시 볼만 할 것이라 여긴 석가모니의 많은 제자들은 문수를 따라갔다.
유마는 지혜 제일의 문수가 온다는 것을 알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신통력으로 겨우 일장一丈-약 삼미터- 밖에 안 되는 방의 세간을 모두 치워 버리고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것은 공空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좁은 방에 문수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다고 「유마경」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립이 없는 공空은 어떤 것도 방해함이 없이 모두를 포용함을 시사한다.
문수와 유마의 회견은 일반적인 병 문안의 대담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의 심화된 사상의 깊이와 신앙체험의 무게 그리고 두 생명의 만남이었다. 그래서 처음의 인사말부터 대단하다.
병실에 들어서는 문수를 보고 유마가 “잘 오셨습니다. 그대는 불래不來의 상相으로 와서 불견不見의 상相으로 보시는군요 -오지 않는 모습으로 와서, 보지 않는 모습으로나를 만나고 있군요” 하였다. ‘불래’ 란 ‘오다’ 의 반대 개념인 ‘오지 않다’ 의 의미지만, 유마가 말하는 뜻은 ‘온다’ 거나 ‘오지 않는다’ 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넘어, 공空 곧 ‘무심無心의 엄숙한 만남’ 을 말로 나타낸 것이다.
‘불견’ 은 ‘보다’ 의 반대 개념인 ‘보지 않다’ 의 의미지만, 유마가 말하는 ‘보다’ 는 단지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뵙다’ 는 의미다. 그러므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다’ 거나‘보지 않는다’ 고 하는 대비적인 의미를 초월한, 공空 곧 ‘무심의 경건한 만남’ 을 의미한다.
유마의 인사를 받은 문수의 대답 또한 멋지다. “그렇습니다. 이미 와 버렸다면 다시 오지 않고, 이미 가 버렸다면 다시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는 자는 오는 곳이 없고, 가는 자는 가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아야 할 진리는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고 감은 단지 현상적인 것으로서, 무상無相하고 평등한 공空의 본체에는 옴도 감도, 봄도 보지 않음도 없으며, 있는 그 자체 그대로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파도와 물의 관계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온다고 하고, 밀려 나가는 것을 간다고 할 뿐, 물이라는 자체에서 볼 때는 밀려오는 것도 밀려기는 것도 없다. 진리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진리 그 자체, 실상實相 그 자체는 보거나 보지 않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며, 보고 보지 않는 것은 임시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문수는 석가모니의 문병 인사를 전하고
병명과 상태를 물었다.
유마는 “치癡와 유애有愛에 의해
나의 병은 생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치癡란 사물의 도리를 알수 없는
무명無明을 말한다.
이 무명 때문에 유애有愛
곧, 애착과 집착이 생기고 고통으로 앓고 있다고 유마는 대답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마의 병은 신체적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라는 것이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일체 중생이 모두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
그것이 병의 원인이라 밝히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앓고 있을 때
자신도 그 사람과 동화하여
앓음으로써 비로소
그 사람의 고뇌가 구제된다는 이치이다.
고통받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보살의 원심願心이다.
중생에게 병이 없어지면
유마의 병도 낫는다.
보살의 마음 속에는 부처님의 마음과 함께
고통받는 중생의 마음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생의 고통과 파장이
일치하므로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염려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여기에 불교사상의 심원함이 있음을
「유마경」은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회장에서의 모든 대화가 일단끝나자
유마는 마지막으로 문수에게
“어떤 것이 불이不二의 법문입니까? “
하고 물었다
문수는 “말하는 것(言)도 설명하는 것(設)도,
나타내는 것(示)도 이해하는 것(識)도 없는,
모든 문답을 여의는 것.
이것이 불이의 법문입니다.”
하고 대답한 뒤 유마에게 이번에는
“당신이 불이不二의 법문에 대해
대답해 주십시오”하였다
이에 대해「유마경」은
“그 때 유마힐은 묵연默然으로서 말이 없었다”
라고 간결하게 결론짓고 있다.
문수는 감탄하며 “정말 훌륭하십니다.
문자나 언어가 있을 리 없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법문에 들어갈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 불이의 법문을 듣고 많은 보살들은
불생불멸의 공의 진리인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불이不二는 불어不異와 같은 의미로서,
둘 사이에 대립이 없다는 뜻이다.
유마가 말하는 ‘불이의 법문’ 은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가르침이다. 말하자면 대립이나 차별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진리로서,
현상적으로는 대립되는 두 개의 사실이
근원적으로는 일체一體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서 말하면,
자기와 남과는 결코 같지 앓지만
자신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초월하면
어느 사이엔가 남과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어도 자신은 자신,
남은 남이며, 서로의 상위함은 있어도
대립하지 않는 것이
불이不二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