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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생각해보면 고승들, 스님들이 지은 불교 관련된 책을 몇 권 겨우 읽어 보기는 했으나, 이 책은 스님이 아닌 건국대 철학자 교수를 지내고 지금은 재가 불교 운동을 펼치고 있는 성태용 선생이 2022년에 쓰고 「북튜브」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으로 그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래도 불교는 용어에서부터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내가 불자 아니라서 겉핥기로 공부해서일 거라는 생각은 한다.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나마 읽고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야겠다.
표지에서부터 「초심자를 위한 불교 교과서 -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읽기」라고 했는데, 이것마저 한자 제목이라 쉽지가 않다. 불교에 입문하는 스님들이 공부하는 기본교재라는 것인데, 고려 시대 지눌스님이 지은 「계초심학인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 시대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과 고려 말 야운 스님의 「자경문(自警文)」등 세 가지 글을 합쳐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라고 하였던 것으로 그중에서 「계초심학인문」을 뽑은 것이라고 한다.
제목은 그렇다 쳐도 내용 중에서 내가 알 수 있고, 이해가 되는 부분만 읽어갈 생각을 한다.
〈처음 출가해 계를 받은 이들이 알아야 함(誡初心學人文)」- 해동사문 목우자(海東師門 牧牛子)로 시작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처음 마음을 낸 이는 나쁜 친구를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해야 한다. 오계와 십계 등을 받아서 그 계율을 지키고[持], 범하는[犯] 경우와 열고[開], 닫는[遮] 경우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오직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고 용렬한 무리의 헛된 이야기를 따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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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을 꾸준히 가지고, 도업(道業)을 항상 새롭게 하며 이런 불법 만난 것이 참으로 기쁘고 다행이라는 마음을 품어 끝까지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이와같이 오래오래 닦아 나아가면 저절로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게 밝아져 스스로 마음 성품을 보게 될 것이며, 집착 없는 자비와 지혜로 중생을 돌이켜 제도하고 모든 중생들의 복발(伏鉢)이 될 것이니 부디 힘쓰고 힘쓸지어다.”
지눌스님은 스스로 스승의 가르침을 본받고 근기의 동물인 소를 기르는 ‘목우자’라 자칭했는데 그는 “청산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하는 시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스님은 고려말 퇴락한 불교를 새롭게 하고자 순천 송광사에서 ‘定慧結社(정혜결사)’를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혜결사에서 정은 집중되고 안정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혜는 깨어 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언제는 정을 닦고, 언제는 혜를 닦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함께 있어 깨어 있음[惺]과 고요함[寂]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착각한 게 있다. 불교에서는 선지식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선지식은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지식은 선우(善友)를 말하는 것으로 ‘착하고 어진 벗’을 말한다. 선우와 선지식은 같은 말이다. 흔히 말하는 지식이 많다는 그 지식이 아니라닌 것이다. 지식과 벗은 ‘칼야나미트’라는 범어로서 같은 말인데, 한자로 번역되면서 벗友로, 혹은 지식知識으로 번역된 것이다. 선우, 선지식, 도반, 모두 다 좋은 벗을 말한다. 이런 좋은 벗들을 가까이 둔다는 것은 도를 거의 다 이룬 것이라고 목우자는 말했다.
좋은 벗이 있는가 하면 나쁜 벗도 있을 수 있다. 나쁜 벗과 어울려 다니다간 신세 망치기 십상이다. 그것을 악우(惡友)라고 한다면, 선우와 악우를 구분해야 하고 ‘악우를 멀리 하라.’는 것이 「계초심학인문」의 첫 번째 계다. 불교뿐 아니라 다른 모든 가르침도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 매달리면 안 된다고 하고 그러면 달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게 된다고 한다. 불살성계(不殺性戒)는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라는 계인데 손가락에 매달리다 보니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탄생 되었다는 것은 다 안다. 그는 왕자로 태어났음에도 젊은 나이에 출가를 결심했다. 그가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씨족사회로, 농경문화로 출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석가모니는 처음 출가한 것이 아니고 당시 인도에는 많은 사문들이 출가했고, 고대 인도에서는 출가한 사문들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사문들과 사문의 스승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철학이나 수행을 전문으로 행했는데 그들을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도 사문의 예에 따라 출가한 것이고, 사문(沙門)에 들기 전에 성문 밖을 나왔다가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보고는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노동을 안 하는 삶이, 성생활을 안 하는 삶이, 고귀한 삶일까? 스님들의 삶이 최상의 삶이라면 성생활은 아주 천박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그걸 천박하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여 모든 사람들이 성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종하고 말 것이다. 스님들에게 성생활을 금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재가자의 삶은 천박한 삶이야 재가로는 부처님 깨달음을 추구할 길이 없으니까 내생에서 출가하자’이런 식이 되고, 영원히 내생에서 하겠다고 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미뤄놓지 않고 지금, 여기서 정면 대결하자는 자세가 출가자의 자세이듯이 출가하지 않더라도 이런 출가 자세를 갖춘다면 출가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렇게 할 때 바로 여기에서 우리 삶이 욕망, 즉 부처님이 말씀하신 ‘갈애(渴愛-오욕에 애착함)’로 추동되는 삶이 아닌 다른 에너지로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다.
절에서 가장 중요시하고 기본인 것이 삼귀의다. ‘불·법·승’삼보에 귀의한다고는 것인데, 마지막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오해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스님들 개개인에게 귀의한다는 것이 아니다. 수행공동체에 귀의한다는 의미다. 출가자의 수행공동체를 훼방하는 것을 아주 큰 죄로 여긴다. 스님들을 다 존중해서 스님을 비판하면 안 되는 줄로 알지만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님들이 잘못이 있으면 엄격히 비판받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스님답지 않은 스님은 재가자들이 공양을 끊었다고 한다. 스님들이 엄하게 감시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한국 불교계는 그것이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6촌 동생인 데바닷다가 사람들을 꼬시어 승단을 나가는 일이 있었다. 이게 바로 파승가로 승단을 깨뜨린 것인데, 다행히 부처님 사후에 목건련과 사리불이 그를 다시 설득해 데려왔다고 하지만, 교단이 상처받았던 것은 데다닷다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스님들을 받들어 온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지금도 어렵지만 조선시대 500년 동안은 불교를 박해했다. 최하층 천민으로 취급되었고, 수도인 한양에는 발을 들일 수 조차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불교를 믿으니까 박해에서는 벗어났지만, 대처불교를 심어 놓고 갔다. 그걸 회복하기 위해 정화불사(淨化佛事-1954∼1962년까지 대처승 배제와 종단 재건을 내세운 자정 운동)가 한국 불교에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전국의 절을 원래대로 회복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 깡패를 머리 깎여 스님으로 만들어 각 종단에서는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기원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폭력은 한번 쓰면 끝내기가 어렵다. 반대 세력이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스님의 수도 줄어든데다 불교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스님들을 받들 필요가 생겼고, 출가 스님들의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삼천 배 하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았다는 성철스님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성철 스님의 방편은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스님 스스로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조금 배웠다고 스님들을 우습게 보는 행위도 결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불경》과 《논어》는 비슷한 데가 많다는 것은 알지만, 《논어》에 ‘빈이무첨 부이무교(貧而無諂 富而無驕)’라고 있다. 공자의 제자가 스승에께 물었다.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공자는 전혀 다른 방향의 대답을 했다. “그것도 괜찮지만 빈이락(貧而樂)하고 부이호례(富而好禮)한 것이 더 낫다.”고 한 것이다. 가난하다고 왜 부정적으로 생각하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가난하되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 부를 바탕으로 예를 좋아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한 것이다. 재물은 일반적으로 욕망을 낳지만 그게 없으면 안 된다. 자급자족의 시대가 아닌 지금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재물에 매이는 것이 나쁘고,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 나쁜 것이다.
스님들은 원래 비구육물(比丘六物)이라고 하여, 세 가지 가사(옷)와 쇠나 나무로 된 발우, 니사단(방석), 녹수낭(물을 먹기 위한 물주머니) 등 여섯 가지를 준비하고 다녔다. 삼의는 승가리, 울다리승, 안타회 이렇게 세 가지로 그중 승가리는 9조(가사를 구성하는 천의 수)에서 25조까지로 크고 풍성한 옷을 준비해 마을이나 궁중에 들어갈 때 입었다. 울다리승은 7조로 이루어져 예불, 독경, 포살 때 입고, 안타회는 울력할 때 입는 5조로 된 가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종에서 삼의일발(三衣一鉢), 즉 세 종류의 가사와 하나의 발우만을 갖추어야 할 도구로 정함으로써 검약을 실천하게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가장 많이, 널리 독송되는 경전이 《반야심경》이다. 그것은 대승불교의 대표 경전으로 소승의 법집(집착)을 깨뜨리기 위해 세운 경전이다. 소승은 자신들이 세운 진리의 세계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고정된 법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 소승에 반해 대승은 ‘안이비설신의’와 ‘성향미촉법’이 없다는 것을 세운 것으로 법 체계, 즉 법집을 부수기 위해 이 경전을 세운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말했는데 삼세 불변하는 법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소승은 법을 이루는 아는 공空하지만, 그 아我를 이루는 법이 참으로 존재 한다고 했고 대승은 달리 본 것이다. 《반야심경》대승 경전으로 널리 독송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해보면 한평생 살아온 것만 해도 얼마나 운이 좋아서 인지를 생각해야 할 때가 있다. 또 살아오면서 내가 알게 모르게 지은 업장이 얼마나 많을까를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정말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복된 것이고 어려운 일인지를 망각하고 사는지 모른다. 내가 지은 업장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사람이 겸손해진다. 그걸 모르고 함부로 나대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뻔뻔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잘못을 범했는지 스스로 내적 반성은 아무리 많이 해도 흉하지 않다.
내가 잘못 키워서 애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많은데 그것은 아니다. 내 잘못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 내 잘못이라고 스스로 죄를 짊어지기 시작하면 아이를 더 잘못되게 만든다. 아이들도 스스로 이겨갈 힘이 있다. 그 아이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잘못을 아는 것과 그것 때문에 자책해서 죄의식에 빠지는 것은 별개다. 죄를 반성하고 업을 반성하되 죄의식에 빠져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처와 중생을 딱 둘로 나눠 놓고 보는 순간 그건 불교가 아니다. 번뇌와 보리는 둘이 아니라 연기적이다. 또 번뇌와 보리를 하나라고 해도 안 된다. ‘하나다. 똑같다’고 하는 것은 연기가 아니다. ‘불이법문’이고 하여 법문도 둘이 아니다. 예를 드리는 나와 예를 받는 부처가 둘이 아니라 연기적이고, 번뇌와 보리가 연기적이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 연기적이다. 이것이 불교의 본질이다. 불교의 기도는 기독교의 기도와는 차이가 있다. 신에게 매달리는 기독교 기도도 무시할 수는 없다. 자기를 온통 다 비우고 온전히 신에게 매달기는 기도이므로 마음을 비우는 효과가 있다.
피조물인 내가 창조주의 영역에 감히 간섭하지 못하니 피조물로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조물주에게 완벽하게 의존하는 기도가 기독교의 기도인데, 그 효과는 매우 크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한 점도 따른다고 생각된다. 기독교에 맹신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를 잘 믿는 사람들은 굉장히 영성을 얻는다. 기독교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게 한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천국에 갈거야.’하는 것은 망상이다. 천국에 가고 안 가고는 신의 뜻에 달렸지 일개 피조물이 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천국에 가기 위해 열심히 기도한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의 뜻에 달렸다는 말이다. 그 믿음까지 맡겨야 하는 것이 기독교 기도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예약해 놓은 것처럼 자만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건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니다. 기독교인도 진짜 겸손해야 한다.
받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참 기도다. 가난뱅이가 기도한다고 부자가 될 수 없다. 아낌없이 준 부처처럼 받은 것을 확인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나씩 주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 주는 것이 부처님 마음이다. 그렇게 받은 것을 확인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달라진다. 기도하는 자세가 달라지고 자기 존재가 자꾸 높아지는 것이야말로 복을 짓고 복을 받는 일이 된다.
사람을 잘되라고 한 종교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리다’라고 고정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거짓이고, 나아가 악마가 된다.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이는 ‘쟁론’의 위험성인데 가까운 개인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말을 하다 보면 고집이 생기고, 또 이기고 싶어진다. 지게 되면 기분이 나쁘니까 고집으로 우긴다. 이게 쟁론의 특징으로 깊이 공부하지 못 했지만 원효스님의 ‘화쟁론’도 아마 그래서 생긴 화두였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는 끊어내라는 것이 아니다. 삼독심(三毒心)이라고도 하는 그것은 무조건 악으로 보고 끊는다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서 ‘계정혜’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정혜의 뿌리가 탐진치다. 탐욕을 제어하는 것이 계율이고 올바른 원칙을 세우고 탐욕이 거기 정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성내는 마음을 가라앉혀 정심을 이뤄야 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돌이켜서 지혜를 이뤄야 한다. 둘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듯이 탐친치와 계정혜도 둘이 아니다.
탐진치는 엎드려 있다가도 불쑥불쑥 일어난다. 꼭 말라리아 같다. 하루는 잠잠하다가 혈구를 타고 나오는 식이어서 주기적으로 열이 오르는 병이 말라리아다. 모기로 인해 전염되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 이것들(뇌염, 천연두 등)을 잡은 것은 양의학이다. 한의학이 아니다. 한의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 방법이 다른 것이다. 어떤 한 가지에 빠지면 다른 것은 잘 안 보인다. 언제나 균형 잡힌 사고를 가져야 하고 반대 의견도 참작해야 한다. 그래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라야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 될 수 있다.
보조 지눌의 「계초심학인문」에서는 마지막으로 간곡히 부탁한 말이 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 잘못을 깨닫고 나아가라! 그러면 그 효과가 나날이 드러나리라!’라는 것이다. 부록 삼아서 한문은 많이 딸리지만 끝으로 지눌의 「계초심학인문」을 옮겨보면서 줄인다.
夫初心之人 須遠離惡友 視近賢善
須五戒十戒等 善知持犯開遮
但依金口聖言 莫順庸流妄說
旣已出家 參陪淸衆 常念柔和善順
不得我慢貢高
大者爲兄 小者爲弟
儻有諍者 兩說和合 但以慈心相向
不得惡語傷人
若也欺凌同伴 論說是非 如此出家 全無利益
財色之禍 甚於毒蛇 省己知非 常須遠離
無緣事則 不得入他房院
當屛處 不得强知他事
非六日 不得洗浣內衣 臨盥漱 不得高聲焍唾
行益次 不得搪湥越序 經行次 不得開襟掉臂
言談次 不得高聲戱笑 非要事 不得出於門外
有病人 須慈心守護 見賓客 須欣然迎接
逢尊長 須肅恭廻避 辦道具 須儉約知足
齊食時 飮啜 不得作聲 執放 要須安詳
不得擧顔顧視 不得欣厭精麤
須黙無言設 須防護雜念
須知受食但療形枯 爲成道業
須念般若心經 觀三輪淸淨 不違道用
赴焚修 須早暮勤行 自責懈怠
知衆行次 不得雜亂
讚唄祝願 須誦文觀義 不得但隨音聲
不得韻曲不調
瞻敬尊顔 不得攀緣異境
須知自身罪障 猶如山海
須知理懺事懺 可以消除
深官能禮所禮 皆從眞性緣起 深信感應不虛
影響相從
居衆寮 須相讓不爭 須互相扶護 愼諍論勝負
愼聚頭閒話 愼誤着他鞋 愼坐臥越次
對客言談 不得揚於家醜 但讚院門佛事
不得詣庫房 見聞雜事 自生疑惑
非要事 不得遊州獵縣 與俗交通 令他憎嫉
失自道情
儻有要事出行 告住持人及管衆者 令知去處
若入俗家 切須堅持正念 愼勿見色聞聲
流湯邪心 又况披襟戱笑 亂說雜事 非時酒食
妄作無碍之行 深乖佛戒
又處賢善人嫌疑之間 豈爲有智慧人也
住社堂 愼沙彌同行 愼人事往還 愼見他好惡
愼貪求文字 愼睡眠過度 愼散亂攀緣
若遇宗師陞座說法 劫不得於法
作縣崖想 生退屈心 或作慣聞想 生容易心
當須虛懷聞之 必有機發之時 不得隨學話者
但取口辦
所謂 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智學成菩提
遇學成生死 是也
又不得於主法人 生輕薄想
因之於道 有障 不能進修 劫須愼之
論云 如人夜行 罪人執炬當路 若以人惡故
不受光明 墮坑落慙去矣
聞法之次 如履薄水 必須側耳目而聽玄音
肅情塵而賞幽致 下堂後 墨坐觀之
如有所疑 博問先覺 夕惕朝詢 不濫絲髮
如是 乃可能生正信 以道爲懷者歟
始無習熟 愛欲恚痴 纏綿意地
慙伏還起 如隔日瘧
一切時中 直須用加行方便智惠之力
痛自遮護 豈可閒謾 遊談無根 虛喪天日
欲冀心宗而求出路哉
但堅志節 責躬匪懈 知非遷善 改悔調柔
勤修而觀力 轉深 鍊磨而行門 益淨
長起難遭之想 道業 恒新 常懷慶幸之心
終不退轉
如是久久 自然定慧圓明 見自心性
用如幻悲智 還度衆生 作人天大福田
切須勉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