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66]입춘방(立春榜) 입춘시(立春時)
오늘이 병오년(丙午年) 입춘이라 한다. 병오년은 붉은 말띠의 해, 입춘은 봄(春)이 서는 날(立), 그러니까 한 해의 시작은 음력 정월 초하루 설이 아니고, 원래 오늘부터였다고 한다. 그것도 해마다 다른 입춘시(立春時)부터 였으니, 입춘시 앞뒤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띠가 달랐다. 굳이 이런 디테일한 것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만, 따지자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입춘방은 무엇이고 입춘시는 또 무엇인가? 입춘방은 입춘첩(立春帖) 입춘축(立春祝)가 같은 말, 입춘날에 봄을 축하하고 한 해의 복을 기원하며 대문이나 기둥, 천장에 붙이는 글귀이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뜻도 있다. 입춘시는 앞에서 말했지만, 정확히 한 해가 시작되는 시간(2026년 입춘시는 2월 4일 새벽 5시1분)으로, 그 시간에 딱 맞춰 입춘방을 붙이는 시간이다.
왜 이런 것을 아느냐하면, 어릴 적 ‘큰 산’ 아버지가 알려준 것이고, 실제 눈으로 보고 컸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 기와집 대문이 ‘소슬대문’이었다. 양쪽 대문에는 笑門萬福來(소문만복래) 掃地黃金出(소지황금출)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고, 본채 정문에는 立春大吉(입춘대길) 建陽多慶(건양다경), 각 기둥마다에는 父母千年壽(부모천년수) 子孫萬世榮(자손만세영),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夏雲多岐峰(하운다기봉) 등의 글귀가 일년내내 붙어있었다. 잘 쓰시지 못하거나 잘 쓰거나 아버지가 입춘 1주일쯤 정성스레 쓴 것들이었다.
교육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이런 30여개의 글자를 어릴 적 보고 컸으니, 머리 속에 고대로 입력이 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도 좋지 않은가. 붓글씨를 쓸 수만 있다면 직접 써야 할 일이로되, 둔필(鈍筆)이라 엄두도 못내는데, 해마다 입춘 전에 입춘방을 써, 그것도 직접 남원에서 우리집까지 배달해주는 서예가 친구가 있다. 필력(筆力)이 30년을 넘고, 여러 차례 이런저런 대회에서 특선도 한, 호가 근봉(槿峰)인 친구로 예서와 행초서에 능하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다 있나? 엊그제에도 빵빵거려 내다보니 어김없이 입춘방 직접 택이다. 하아, 고마운 일이다. 친구 잘 둔 덕분에 올 한 해도 무병무탈할 것을 나는 믿는다. 입춘방을 받는 순간, 이미 내 마음에 복이 들어온 듯하지 않은가. 몇 년 전엔가, 내가 도연명을 좋아한다고 <귀원전거>라는 긴 한시를 써 가져왔다. 완전 감격. 표구를 해 사랑방에 걸어놓으니, 오며가며 친구들이 묻는다. 자랑스럽게 친구의 선물이라며 뜻풀이를 해주니 약간씩 기들이 죽는다. 하하.
입춘방 글귀의 뜻을 굳이 풀어드리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한마디로 부모가 장수하시고, 자손은 온갖 영예를 누리라는 뜻이며, 중국 시인의 <사시(四時)>라는 한시 등을 써놓은 것들이다. 어느 양반집 기둥에 붙은 '去千災(거천재) 來百福(래백복)', '災從春雪滅(재종춘설멸) 福逐夏雲興(복축하운흥)' 글귀도 본 적이 있다. 무슨 글자 하나로 복이 오고 재앙이 달아날까만, 옛사람들은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지혜로웠다. 말하자면 미풍양속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입춘시를 어떻게 누가 정하느냐는 의문이 생기지만, 우리가 천문학자가 아닌 이상 골치를 썩힐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태양의 둘레를 도는 궤도상의 위치, 즉 황도(黃道)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아시겠지만, 24절기는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태양이 지구를 한바퀴 도는 360도를 15도 간격으로 24등분, 각 지점을 지날 때를 절기로 정한 것. 따라서 춘분(春分)은 황경 0도 지점이고, 입춘은 315도가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태양이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정확히 365일이 아니기에, 누적되는 오차를 4년마다 윤일(閏日)을 두어 날짜를 맞춘다. 마지막으로 입춘대길과 건양다경 입춘방만큼은 붙일 때 여덟 팔(八) 형태로 약간 비스듬하게 붙이는 것이 정석(定石)이지만, 요즘같은 ‘AI 세상’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튼, 나는 새벽 5시1분에 찬 바람을 무릅쓰고 본채 현관문에 입춘방을 정성스레 붙일 생각이다. 고맙다. 친구야. 어느새 한 해가 훌쩍 가고 7학년이 되다니, 올해도 작년처럼 눈 깜빡할 새 가버릴까? <테스형>의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죽어도 오고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는 노랫말처럼, 나는 그것이 무단시(매급시) 두렵다. 건강하자. 우리가 좋아하는 술을 마시려면 말이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