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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2015.1.1. 힌두의 땅.
그 큰 나라를 스치듯 다니며 보고 들은 것으로
그들의 처지를 아지도 못하면서
호불호(好不好)로 나누고, 가불가(可不可)로 가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다만
여행은 상대방의 문화와 생활 관습을 존중하는것이 그들에 대한 여행의 바른 예(禮)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돌아 본 곳의 좋은 모습을 기억해 두려고 한다.
의(衣).
거리에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서 비로서 인도에 왔음을 느끼게 된다.
처음보는 풍경에는 눈을 뗄 수가 없으며, 궁금함이 많아지게 된다.
인솔자에게 물어봤다.
"인도에는 왜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은가."
"인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우리네 다소곳한 여인의 치마저고리만은 하 못하지만
사리(saree)라고 하는 화려한 문양의 의상, 박음질이 없는 한필(疋)의 긴 천을 둘둘 말아 입은 여인들.
많이 변했겠지만
의복에는 의식(儀式)이 있어 흠집을 내야하는 박음질한 옷은 부정(不淨)하게 생각하며
맨살에 둘둘 말아 입는 것을 정(淨)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다.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귀한 문화를 보여주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사진/하
델리의 거리에서
*사진/하
부유층 신부의 전통 의상. 자이푸르의 숙소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식(食).
어느 나라 음식이고 주 재료는 곡물과 과채류, 생선과 육조류이며
맛은 오미(五味)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향(香)의 차이가 있을 뿐.
음식을 미각(味覺)위주로 향신료를 많이 쓰지 않는 우리와 달리, 깊은 향의 후각(嗅覺)을 즐기는 듯
민가(民家)의 토속 음식을 경험하지 못하여 그들의 깊은 맛은 알 수가 없었지만
다양한 향의 카리(karī. 영어식:curry. 우리말:카레)
훌륭했다.
향의 천국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기획여행에서
선택이 자유로운 것은 음식 골라 먹기다.
많이 즐기려면 떠날 때 음식을 갖고 가지 말아야 한다.
"역겨운 향은 차차 익숙해지면 해결된다.
코를 막고 먹으면 된다."
대부분 여행지의 숙소에서는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없도록 음식을 마련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면서 고향의 맛이 그리워 짐은 참을 수 없는것이다.
약속이 밥 먹듯이 깨어지지만
아내는 여행 짐에 음식 넣어가지 않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한주일쯤 지나 고추장 종지가 나왔다.
화장품 속에 숨겨 왔을까.
완력으로 당할 수 없는, 남자들의 고집을 꺾는 꾀가 놀랍다.
역시
우리는 후,미각(嗅,味覺)을 즐기는 귀족형 식성은 아니었다.
델리의 연꽃사원(Bahai사원)부근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무굴 식당이었지만 탄두르(진흙화덕)에 붙여 구워낸 난(빵)과 힌두의 음식인 밥과 카리(karī)가 나왔다.
그들은 의복에 의식(儀式)이 있듯이 여러 차례 사용한 식사 도구는 부정(不淨)으로 생각하여
손으로 식사를 한다.
그들처럼 손으로 먹어 봤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오글거렸지만, 음식의 뜨겁기와 점도, 질감을 촉지(觸指)하면서 먹을 수 있는
손가락보다 훌륭한 식사 도구는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100년이 넘는 영국 식민지.
서구인들이 자기네만 옳다고 자기네 식(式)도구를 치켜들고, 아무리 비하하려고 한들
인도의 수식(手食)방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하
델리 바하이사원 부근의 무굴 식당.
향초(香草)를 띄운, 손을 씻는 물사발(Finger Bowl)도 없고, 향이 지독한 토속 음식도 아니었고
흡족한 경험은 아니었다.
주(住).
직접 경험이 없어서 알 수는 없었지만
고급 대리석 속에서, 시멘트 속에서, 허름한 집속에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끔 눈에 띄는 노숙인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도 구제 못하는 노숙인이 있듯이
인구 25배인 그들 사회를 동정하는 시선으로 볼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세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성애(性爱)를 조각한 사원이 있는, 카쥬라호라는 마을로 4시간쯤 이동하는 도중
카르톨이라는 마을 부근에서 쉬어가는 휴게소 화장실 줄이 길었다.
잠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길 건너편 산(山)생활을하는 사람들 처럼 노인의 움막이 있었다.
굽실굽실 여러 차례 인사를 하니, 들어오라는 손짓이다.
빨래 솜씨가 깨끗한 부부.
염소 8마리.
식용수 우물과 물이 넉넉한 지름 5m쯤 되는 둥그런 농용수 관정이 따로 있었다.
그득한 우물 물이 그들의 마음을 풍족하게 하여주는 재산의 전부였을 것이다.
열심히 손짓을 하여 보니
그의 나이는 땅이고, 내 나이는 머리 높이였다.
내가 더 노인이라는 뜻인 듯 싶었다.
그는 평상에 앉아 부인에게 손짓을 하고, 부인은 손짓의 지시에 응하여 염소들에게 물을 길어 먹이고 있었다.
부려먹는 즐거움과 부림에 응해주는 즐거움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게 살고 있었다.
부부는 동등할 때 다툼이 생긴다.
서로 교차하면서 부려먹고, 부림에 응하여 줌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겠음을 알겠다.
나의 9살짜리 손녀, 그녀석
늘 나를 부려먹으면서 즐거워한다.
부림에 응해 주면서 나도 즐거원한다.
부부에게도 그러함이 있을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진/하
카르톨 마을 부근
제도(制度).
고금(古今) 어느 나라에서도 완벽한 평등을 찾을 수는 없지만
힌두의 카스트(신분제)는 특이했다.
성직자, 학자
왕족, 귀족
농민, 상인
잡역, 하인
그리고
위의 신분들과는 마을 공동 우물 조차 함께 사용할 수 없으며 접촉을 하여서도 아니되는
인간 도구로나 존재했을 불가촉천민이 있었다고 한다.
현지인에 의하면
카스트제는 분업이라는 명목으로 한 집단의 절대적 구성 요건이며
각 계층 속에는 자기네들끼리의 또 다른 높낮이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신분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지만
아직도 그 인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기적 행위를 합리화하는 명분이, 참으로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역사에는 명분 속 이면(裏面)에 권력을 유지하려는 독재적 법과 제도가 없었는지.
하등계(下等系)생명들이 참을 수 없어하는 것은 배고픔이며
사람은 배고픔 보다는 속박에 견디지 못한다.
그 모든 부등(不等)에도 묵묵히 굽히고 살아가는 힌두인들
현생에 반기를 들지 않고, 다음에 태어날 생을 위해 강가 강에 마음을 씻는
그들 삶의 무게는 가늠할 수가 없다.
*사진/하
강가(Gagā)강의 밤은 안개가 심하다.
곳곳에서는 짜이(chai)라는 차를 판다.
소년시절 정류장 가판대에서 짜이를 팔던 하위 신분의 '모디'가 2014년 총리가 되었다.
종교(宗敎).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할때에 어색한 경우가 많다.
종교 집회에서 마음을 어디에 두고있어야 할지 어색하기 때문이다.
가식은 부자연스럽다.
네팔 태생으로 한국에 유학했으며 인도에 살고있다는 인솔자
종교에 대하여는 많이 절제하며 말을 아꼈다.
힌두교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했다.
개별적인 틈만 있으면 궁금한 질문이 많아 좋아 않는 듯 싶었다.
그의 말을 기억으로 요약하면
힌두교는 오래된 힌두인의 다양한 관습과 문화이며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종교가 아니라 태어나면서 자연히 따르게 되는 힌두인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나 의식의 절차, 방법은 다양하며
제도적, 비 제도적인 종교의 범주에서 하나로 정의 할 수는 없다고 한다.
쉽게 설명을 부탁하니
"단군 신화의 곰과 호랑이 이야기를 종교로 받아 들이는 사람은 없다.
설날 차례를 지내는것.
장례식에서 성경이나 불경을 읽는것. 종교 행사가 아니라 생활 속의 한 의식(儀式)"이라고 예를 든다.
결국. 힌두교는 종교라고 하기 보다는 힌두인들의 생활 관습이라는 것이리라.
이후.
이슬람, 자이나교, 붓다의 초전법륜지, 네팔의 룸비니, 보드나트, 스와얌부낫트 등
여러 사적지를 다녀 보았다.
역시.
훌륭했다.
*사진/하
강가강(Gagā) 힌두의 아르띠 뿌자(제례 의식)
길(距離).
'시크리'라는 도시에서 세계적 명성으로 손꼽히는 타지마할(Taj Mahal)까지, '아그라'라는 도시는 35km 정도.
아그라로 가는 길은 이슬람의 종교 행사로 교통 체증 2시간을 넘겼다.
올림픽 대로에서 미사리까지의 거리,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오토 릭사(삼륜차)운전자에게 놀랄 만큼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하는 경찰을 보았다.
운전자는 폭력에 반항하지 않았다.
길이야 막히든 말든 광화문 경찰은 벌과금으로 비열하게 세금을 떼어가는데
곤장 몇대로 풀어주는, 조선시대 식(式) 방법이 선민(鮮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를 옮기면서 지나게 되는 중소 도시에는 한결같이 우리의 오일 장마당 같은 인파로 붐비었다.
인구가 참으로 많은 나라다.
사람들은 종횡으로 길을 건너 다니며 일상에 바쁘다.
인도 최초의 350년전 계획도시라는 핑크씨티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횡단보도가 따로 없는 듯 했다.차량 사이사이로 길을 건너 다닌다.
폭 35m의 중심 도로에서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있음을 보지 못했다.
인천광역시 1/2 도시에 인구는 더 많은 320만. 자이푸르.
온 종일 우리의 출퇴근 시간대 보다 더 심한 이곳에, 신호등이 있다고 모여드는 차량이 해결 될성 싶지 않다.
자유롭게 놔두는 그들이 현명했다.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
길은 도시인의 필수적인 사용 공간이다.
길은 모두에게 자유로워야 한다.
횡단보도를 찾아 돌아가야하는 불편함
곳곳에 서라! 가라! 하는 신호등 통제에 의존하여야만 질서가 유지되는 기계적인 인공 도시보다는
자연 발생적 질서가 유지되는 도시가 문화인의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종횡을 자유롭게 헤집고 다니면서도 일정한 약속이 있음을 눈여겨 봤다.
백미러가 없는 차량도 있었다.
백미러를 접고 다니는 차량도 있었다.
중앙선을 넘어 달려와도
"저늠아 디질라고 미쳤나"욕하지 않고 추월을 돕고 양보하는
인도(印度)의 땅은 자유로운 인도(人道)였다.
*사진/하
손을 치켜든 교통경찰과 백미러를 접고 운행하는 차량.(정복을 입은 교통경찰은 못 봤음)
*사진/하
인구 320만 자이푸르市에 있는 350년 전 계획도시 '핑크시티'의 중심 거리.
언어(言語).
'아그라'라고하는 도시에서 '잔시'라는 도시로 230km쯤 이동하는 특급열차에서
밖은 끝없는 평원이 이어졌다.
산을 보지 못했다.
답답했을 즈음 뒷좌석에 타고있는 꼬마 숙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등 뒤로 감춘 손을 내놓지 않았다.
홍삼사탕 3알을 쥐여주고 비로소 등받이 틈 사이로 사진 한 장 겨우 담았다.
건너편 자리에는 잘 생긴 꼬마가 20달러 지폐 두 장을 세어보고 또 세어보고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다.
"너는 대단한 부자다."라고 말을 붙이니
"아이 엠 힌두."라고 한다.
"힌두스탄?"
흐뭇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스탄은 나라 또는 땅이라는 뜻이다.
"꼬마 숙녀는 너의 동생이냐?"
이름을 적어 보라고 수첩을 내밀었다.
흔들리는 차중에서 또박또박 정성들여 이름을 쓰는 9살짜리가 대견했다.
수첩을 보니
내 이름을 묻고, 저희들 나이와 이름을 적어 놓은 듯 싶다.
"샥삼.
댄 이어 올드.
슈비젠."
내게 여러 차례를 읽어 준다.
인도는 3,000개를 넘어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방언과 22개의 주(州) 공용어가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국가 공영어인 힌디어, 자기 주(州)의 공영어, 영어를 배운다고 한다.
그들은 복 많은 사람들이다.
언어는 문화의 가장 중요한 초석이다. 한 언어가 사라지면 그 문화도 정지된다.
곧. 통,번역기의 발전으로 일반적인 소통의 어려움은, 없는 날이 온다.
많은 언어를 갖고 있는 인도, 그 수만큼 다양한 문화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슈비젠.
꼬마숙녀 이름을 알았다.
귓속말을 할때의 모양 처럼 의자 등받이 틈 사이로 손을 말아 넣고
슈비젠. 슈비젠.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탄로난 꼬마 숙녀는 더 이상 숨어도 소용이 없음을 알았나 보다.
옆으로 돌아 앉자 손을 내밀어 영화 E.T처럼 약속에 응 했다.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모를 5살 꼬마 숙녀. 조금 성장하면 잘 자라 달라는 마음의 전달이었음을
알아 차릴 것이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어느 지방 마을에서 왔느냐고 한다니
그만큼 사람도 마을도 많다는 뜻이리라.
여러차례 일러 준 '한국'을 아지 못했던 꼬마 녀석들
몇 학년쯤 자라면 지도를 펴 놓고, 귓속에 간질간질 남아있을 '한국'을 찿아 볼 것이다.
*사진/하
일일이 따라다니며 적는 아내의 수첩에 9살 꼬마 샥삼의 글씨
*사진/하
등받이 틈 사이로 슈비젠
*사진/하
샥삼과 40달러
*사진/하
꼬마 숙녀 슈비젠과 E.T 손도장
학습(學習).
여행은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憧憬)이다.
그 충동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미지를 배우게 된다.
작은 일에도 즐겁다.
열차 안에서 우리 일행은 힌두인의 구경거리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서로가 궁금해 하지만
무관심 한 척 한다.
그렇게 딱딱할 필요가 없다.
몇 사람은 어느사이
힌디어의 자모음을 배우는 듯
따라 배우는 목소리에 신이 들렸다.
이제 일손을 놓으면
곳곳을 여행하며 배우는 즐거움을 가져 보십시요.
*사진/하
삼매경에 들었습니다.
인종(人種).
악몽이 길몽인 경우이다.
인솔 차량의 펑크로 한참을 농가 마을에서 머무렀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마우 래니푸르시(市)근교의 주민들.
그들과 우리는 인종이라는 칸 막이 너머 먼 발치에서
서로를 구경거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아닌, 그들 마을에 느닷없이 나타난 우리가 그들의 동물원 원숭이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우리 중에는 누군가가 먼저
인종이라는 간격을 좁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서로가 희귀한 원숭이가 아닌, 하나의 피사체가 되어야 했다.
그 선봉을 자처하여 준 여선생님께 감사한다.
선듯 나서주지 않았다면 그 후 길몽 같았던 즐거운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서면 곧 잊을 일이겠지만
오늘쯤
사진 한 장 남겨 놓지 않고 도망치듯 떠나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기억해 내려고
그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우리의 여행객이 인도를 찾는다 해도
12억이 넘는 사람 속에 섞이면 우리는 희귀한 종족일 수 밖에 없었다.
*사진/하
마우 래니푸르 근교 농가의 스므살 엄마와 아들
네팔(Nepal).
에베레스트 산을 비롯하여 8,000m 이상의 14개 봉우리 중 8개의 봉우리를 등에 업고 있는 나라다.
여러날 동안 북새통을 이루던 인도의 도시를 벗어나 네팔에 들어서니 어느 전원 휴양지에 온 듯 싶다.
히말라야 설원에서 녹아 내리는 물이 깊은 계곡을 넘쳐 흐르고
다랑논,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마을은 옛 정선,평창의 어느 화전(火田)마을을 보는 듯 정겨움을 잊을 수 없다.
청정 국가다.
네팔은
남한의 1.5배, 인구 300만.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와 인도에 둘러 싸인 왕정 국가였다.
지금은 2006년 민주화 운동과 2007년 국민투표로 이원 집정제 민주 공화국이며
군주제 시절 부를 축적한 개인은 부자이며, 신흥 정부는 재정이 어렵다고 한다.
*사진/하
히말라야에 합장을 하고 돌아서는 여인. 이마에 빈디(Bindi.붉은 점)를 찍었으니 기혼녀일 것이다.
귀가(歸家).
여행에서 귀가하던 날 저녁
아비 내외가 왔다.
예영이 녀석이야 은근히 제 선물 생각이 앞서있었으련만
궁금한 내색을 않는 천생이 계집애다.
좀 덜렁거려도 괜찮으련만.
아비에게
강가(Gagā)강에서 떠 온 물병을 꺼내놨다.
현지인에 의하면
실온에서 보관한 강물이 20년이 되도록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비는 즉각
"시각적 관찰에 의한 판단과 시험 분석에 의한 오염은 다른 것이며
아예 생명체가 생존할 수 없이 파괴된 물이 아닐까."라며
예를 들어
"농도가 낮은 락스는 몸을 씻거나 마셔도 무방하지만
생명체가 생존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맥락" 이라는 말을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요즘 젊은이들은 긍정이나 부정을하기 이전에 분석을 우선하는 태도다.
좋은 태도다.
관심을 같은것에 두고 주장을 달리하면 옥신각신 대화가 길어 진다.
한참을 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즐겁게 보냈다.
나는 이성적 판단을 접어 두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들이 아끼는 성수가 오래도록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
독짓는 여인과 살고있다.
도자기를 굽는다.
매주 찌그러진 것을 작품이라고 하나씩 들고 들어온다.
그런가 보다. 하며
고주망태로 찌그러진 그릇에 담아주는 밥을 먹고 산다.
나도 자꾸 찌그러져 간다.
인도의 거리에서는 흙으로 빚은 잔에 짜이(chai)라는 차를 판다.
채식을 주로하는 힌두인들은 우유에 설탕과 향초 즙을 넣은 짜이를 하루 수 잔씩 마시며 담백질을 섭취한다.
그리고 토기 잔은 더러움을 쉽게 옮기는 부정으로 생각하여 차를 마신 후 깨트려 버린다.
강가 강으로 가는 거리에서 짜이 한 잔 마셨다.
버리지 않고 갖고 온 짜이 잔과 아내가 작품이라고하는 것들을 섞어 놓으면
어느것이 작품인지 식별이 어렵다.
난형난제(難兄難弟)다.
*사진/하
강가 물을 떠오기는 했으나 20년간 보관 관찰 할 자신이 없다.
강가 성냥,네팔의 토기 술잔, 강가강 물, 짜이 잔
종(終).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는 여행이 끝나는 날이었다.
아침 식탁에 현지인 해설사가 찾아왔다.
"잔소리 하나 할까요?" 해 놓고, 언듯 생각이 나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룸비니에서의 모닝콜 생각이 났다.
네팔은 전기가 굉장히 부족한 나라다.
그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똑 똑. 똑똑! 굿 모닝"
수동식으로 여행객들의 아침 잠을 깨웠다.
앞으로는 "굿 모닝" 하지 말고
"일어나세요. 게으름 뱅이. 일어나세요." 라고 모닝 콜을 해주면 더 정겹겠다고 일러 주었다.
그 말이 순화된 말인지 아닌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 했었다.
함께 식사를 하던 선생님이
자칫 언짢아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렇다.
공손한 말이 아니었다.
그런 저런 여행 이야기를 듣고있던 아비가
수동식 모닝콜은
"일어나세요. 잠꾸러기. 늦잠꾸러기" 라고 하면 좋을것 같다고.
생각해 보니
그날 한참 뒤에도 현지 인솔자가 다시 물어 왔었다.
발음이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게으름 뱅이. 게으름 뱅이." 라고 또 그렇게 일러 주었었다.
잘 못 일러주고 왔으니
그는. 언젠가 여행객들에게 욕 한 바가지 얻어 먹게 될 것이다.
끝나가는 여행지에서 짧은 모닝콜 한마디가 그렇게 정겹듯이
그동안 우리는 사람의 소리보다는 기계의 소음 속에 묻혀 각박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한 주일이 지나는 오늘.
이 아침은 정겹던 델리의 아침이고
내일은 자이푸르, 카쥬라호, 룸비니가 되어, 그사람들과 마주 앉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잠시나마 각박한 생활에서 벗어나 함께 했던 사람들
인천공항은 각자의 생활지로 바삐 흩어지듯 겨울의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사진/하
인디라 간디공항 면세점.
상품권 긁기는 모두 꽝!
첫댓글 Itt is wonderful diary of Indian trip.
하찮음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당신이 더 멋진 사람입니다.
신비의 나라 인도를 2009년 8월에 주마간산격으로 다녀왔는데, 친구는 인도와 네팔의 의식주 종교 언어등 자세한 해설과 함께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
해설과 풍경 사진 너무나 멋지고 준비와 공을 많이드렸구나.
고맙게 보고 눈과 마음으로 여행 잘하고 갑니다
1979 년 부터 PVC resin 수출하러 Dehli, Mumbai (Bombai), Madras 등 출장을 많이 다녔지만 유명균의 이런 여행담은 감명을 주는구려 !
금년 3 월 부터 예술의전당 문화아카데미에서 세계문화유산 인도에 대한 강의를 신명수와 함께 들을 예정입니다.
인도에 대하여 출장이 아니고 자유롭게 공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