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
어떤 이들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태어난다
---니체
본래 죽음은 잔치였다.
한국 사회에서의 죽음. 특히
好喪의 경우 상갓집은 축제였다.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가무도
행했다. 상여놀이가 그것이다.
상여꾼들이 출상 전에 장례식장에서
빈 상여를 메고 운구를 준비하며
발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노는 놀이.
이것이 상갓집을
축제의 분위기로 만들었다.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내려온 상가의 문화를 살펴보면
죽음은 비통하고 고통
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죽음이라는징검다리를 통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이를 보내는 축제의 날이었다
우리나라 유교적 전통사상에 있어
조상은 또 다른 가족의 구성원
으로서 무척 중요한 존재였다.
조상의 제삿날이면
멀리 사는 가족들까지 함께
모여 제사를 지냈다.
제사상에 모여 절을 하며
조상의 안녕은 물론 가족과
후손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동네 어르신들께는 안부를
여쭙고 음식을 나누어 드리며
오늘 누구의 제사를
모셨다고 알리기도 했다.
이러한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들 삶의 모습이었다
제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
이자 묵시적 소통의 자리였다.
이때의 죽음은
없어짐의 의미가 아니다.
죽는다는 것은 고조부모에
이어 증조부모, 그리고
앞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다음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은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인 가족의 품으로 가서
후손들에게 또하나의 선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져온 죽음의 문화에
길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더 큰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살아있는 가족들에게는
돌아가신 분이 위인이자 작은
신화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고
이곳을 떠나 내일로 가는 잔칫날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묏자리를 직접 찾아
보고 수의도 맞추며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결코
비통의 제의가 아닌.
축제로써 삶에 자리할 수 있었다
탄생을 가족이 함께 준비하듯이
죽음 역시 가족과 함께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어짐이었다.
집 안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수많은 제사와 차례를 통해
산자와 죽은 자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죽음의 질을 높였다.
죽음은 결국 단절이 아닌
지속적으로 가족 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연결
하는 소통과 이어짐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 사회
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양에서의 죽음 역시 삶 속에
존재했다. 그들은 묘지를
멀리 떨어뜨려두지 않았다.
동네의 공원이나 교회의 정원에
묘지를 만들어 늘 가족들이
지나다니며 만날 수 있게 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땐 위안을 얻고.
좋은 일이 있을 땐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장소로
살아있는 자들의
삶속에 함께 머물고 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문화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이자 안심이다.
자신이 살던 정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집과 마을이
산 사람들만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시켜야 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방문객> 중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도
함께 오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한 것처럼 죽음도 그렇다.
노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
그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과
삶의 역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곁에서 함께 살을 부비며 살던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
그것 역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
까지도 함께 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삶의 전환점인
죽음은 탄생보다 더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까?
이러한 죽음이
요즘은 어떻게 되었는가.
낯선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맞이하는 죽음, 짧은 애도와 함께
조의금만 전해주고 가는 혹은
그 조차도 대신 전달을
부탁하는 영혼 없는 장례 조문.
쓸쓸하게 잊혀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죽어서도
머무를 곳이 없는 죽음.
내 가족이었던 그 사람을 치워
버려야 하는. 그야말로
치름이 되는 죽음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고 거기에
맞춰 바쁘게 살아가면서부터
죽은 자와
산 자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
주거문화가 바뀌면서
조상을 모시는 공간이 사라졌고.
핵가족화되면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문화가 없어지게 되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곧 다가올
숙명임에도 불구하고 금기의
대상이자 두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성큼, 덜컥, 불현듯, 와락
죽음을 맞이하니 죽음 앞에서
집착하고 후회하고
억울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질은 떨어지고
죽음의 존엄성마저도 사라졌다.
'죽어가는 것 dying'과
' 죽음death' 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 개념을
삶의 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는
숙고의 시간이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그저
바쁜 일상에 압도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죽음을
맞이하고 보내는 방법에 점점
더 서툰 사람들이 되어가는 게
오늘날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호스피스 hospice'다.
호스피스란 죽음에 가까워진
환자들이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인
측면의 문제들을 해소하고.
존엄성을 지키며 인간적인 마지막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영적돌봄을
제공하는 전인적인 의료활동이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량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인간이 삶의 마지막
종착역에 서게 되었을 때,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덜 아프며
조금 덜 고통스럽게 머물다
떠날 수 있도록 그리고 죽어감의
여정이 안전하도록 돕고 싶었다.
오랜 고민 끝에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인생의 종착역에 선 사람들을
위해 작은 정거장을 만들기로 했다.
1997년 4월 초파일 무렵. 충청도에
자리한 아름다운 사찰로 모금운동을
나갔다. 물론 땅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모금함에 처음으로
성금이 들어왔다. 50원이었다.
그 작은 동전이 모금함 속으로
들어가며 내던 ' 땡그랑'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것은 새벽을 울리는
맑은 종소리 같기도 했고,
잠든 의식을 깨우는
천둥소리 같기도 했으며,
누군가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같기도 했다.
바로 그 50원을 시작으로
이어진 탁발 덕분에
두 해 뒤, 1999 년. 충청북도
미원면에 나지막하고 아름다운
부지 4,000평을 마련해 정토마을
호스피스센터를 지을 수 있었다
그 이듬해 2월부터 환자를 돌봤다.
간호사 두 명과 나 그리고
촉탁의 선생님 한 명. 이렇게 해서
15명의 환자를 돌볼 수 있는 100평
정도의 조립식 시설을 완성했다.
센터를 개원한 첫해인
2000년에 100여명이 넘는 사람
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했다
나는 죽어가는 분들의
마지막 걸음을 배웅하며
나 또한 죽음이 상실된
사회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삶만이 존재하는 우리들의
의식 속에 죽음을 예전처럼
다시 삶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일,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
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
이것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호스피스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물론.
죽음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이 삶
속에 죽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진실을 깨우치도록 도와야 한다.
죽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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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능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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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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