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계곡을 넘어
영국의 고원지대인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지역에는 호수가 많다. 가장 큰 로몬드 호수(Loch Lomond)와 네스호수(Loch Nesse)가 있다. 네스호에는 ‘네씨’(Nessie)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신비한 생명체가 있다고 한다. 1933년부터 이를 사진으로 찍었다는 이야기로부터 1,000여 명에 이르는 목격자가 있다고 전해 진다.
괴물 네스 전시장이 호수 주위에 있다. 그 생명체의 존재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해 어느 수도원 신부의 목격담도 있다. 그 신부가 어느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에 호숫가를 산책했을 때쯤 불현듯 호수 저편에서 기다란 목을 물 위로 뻗어 올린 괴물 네스의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런 증언에 신뢰성이 부여되면,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욱 강화되어, 그 현장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네스호를 관광명소로 만들게 된다. 무릇 유명 관광지가 되려면 전설이나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스토리 텔링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통해 쉽게 공감하고 감동하기에 이러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를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능력이다. 가능성과 개연성이 높은 이야기를 구성할 재능이 요구된다. 그러한 이야기가 서사시로 혹은 대하소설로 표현된다.
화가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할까. 아마 형상을 상징으로 하여 소통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은 신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제자 중 둘을 보내어 성내에 들어가게 했다. 그곳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집주인에게 예수와 제자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을 그분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라 했다. 그리하면 집주인이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이니 그곳에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게 했다.
성경은 그 집 다락방이 다빈치의 그림과 같이 13명이나 되는 성인 남자들이 한 줄로 앉을 만큼 큰 방이었다고 한다.
밀라노에 거주하는 미술사학자 스테파노 추피(Stefano Zuffi)의 해설서 『천년의 그림 여행』에 의하면, ‘최후의 만찬’은 무어인 로도비코가 다빈치에 주문한 것으로, 1494년에 시작하여 1497년에 완성했다. 이전의 ‘최후의 만찬’ 구도와는 달리 모든 인물을 한 평면에 배치하고, 3명씩 무리 지어 구분하도록 했다.
다빈치는 이 그림에서 복음서에 가장 극적인 순간, 즉 그리스도가 사도 중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을 선언하는 순간을 선택했다. 이 선언을 듣는 순간, 제자들의 얼굴에는 분노, 체념, 고통, 충격, 당황, 공포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이 표출된다. 다빈치가 말했듯 사도들은 각자 독특한 반응으로 ’영혼의 감정들‘을 드러내고 있다. 개인의 심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12명 사도의 개인 심리를 포착할 적절한 모델 선정을 위해 다빈치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가 등장한다. 우선 그리스도의 모델을 찾는 힘들고 지루한 일이었다. 다행히 어느 주일 다빈치는 교회 성가대에서 한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 청년의 얼굴에서 사랑, 순수, 온유, 연민과 친절함이 묻어났다. 그의 이름은 삐에뜨리 반디넬리(Pietri Bandinelli)였다. 그는 기꺼이 모델이 되기로 했다.
그 후 수년이 흐르는 동안 다빈치는 배신자 유다의 모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드디어 로마 감옥까지 가서 죄수 중에서 적합한 유다의 모델을 찾게 되었다. 그림이 끝날 무렵 그 죄수는 자기의 모습이 그림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궁금해서인지, 다빈치에게 한번 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 죄수가 자기 얼굴을 보자 눈물을 흘렸다. 다빈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자기가 피에트리 반디넬리이고, 수년 전에 예수의 모델이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모델이 된 후 죄를 짓기 시작하여 하나님과 멀어졌고, 그 결과 범죄, 분노, 슬픔과 비탄에 빠진 삶을 살아오다 종신형을 받았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즉 인간이 환경에 따라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혹은 선과 악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양면성을 경고하기 위해 지어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섬찟하다.
또 다른 일화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처형된 두 도둑, 디스마스(Dismas)와 조담(Jotham)의 이야기다. 돈 윌리(Dom Willis)의 소설 《회개하는 도둑 이야기》에서 두 도둑은 형제로 나온다. 이들이 어렸을 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 그때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유대의 왕으로 경배하자, 놀란 헤롯 왕은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을 죽이게 했다. 그로 인해 이 두 형제의 어머니와 젖먹이 동생이 살해되자, 이들은 유대 광야로 도망가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두 형제는 마리아 부부와 동방박사들에게 마구간을 안내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도둑무리에 잡혀 그곳에서 자라게 된지라,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와 상인들을 약탈하고 괴롭히는 도둑이 되었다, 그 후 로마 군대가, 백성의 원성이 되었던, 도둑무리를 소탕하고 세 명의 핵심 주모자를 예루살렘 감옥에 투옥 시켰다.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함께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간청으로 두목인 바라바는 석방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양편의 두 형제 중, 동생인 조담은 이 모든 불행이 예수 탓이라며 예수를 저주했다. 그러나 예수가 메시아임을 안 형 디스마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를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다빈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와 유다의 모델이 동일인으로 처음과 나중이 선에서 악으로 바뀌는 비참한 결과임에 반해, 두 도둑 중 형 디스마스는 악에서 선으로 반전했다. 그런 이유로, 디스마스는 비록 처형받은 범죄자였지만,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개신교에서도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다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계곡을 사이에 둔 선과 악의 경계는 그리 멀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성서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는 죽은 후 그들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서로 건너갈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반전에서 반전으로 이어지는 이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차분히 궁구해보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