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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니즘, 제대로 알기나 하고 저 야단들인가.
"명성이라는 것은 서로를 어긋나게 하고
지식이란 것은 다툼의 도구이다."
— <장자> 인간세(人間世): 2 —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하면, 대개는 그것을 즉각 유학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모 유명 대학의 교수가 매스컴에 나와 근자의 페미니즘관련 문제를 담론하면서, 놀랍게도,
이렇게 언명했다. “… 유학적 사고가 워낙 뿌리 깊어서 여성을 비하하면서도 그것이 여성비하
인줄을 모르는 경향이 있다”. 관록있는 언론인인 대담자의 응대 역시 놀라웠다. “동감입니다.
바로 그점이 근본적 문제일 것입니다”.
유학을 두고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중심주의(male chauvinism)라고 비판들 한다. 그 비판은 서양이 그리고 서양사상에 경도된 동양 지식인이 유학을 공격할 때 쓰는 가장 애용하는 고전적 무기이다. 그들은 그 비판을 오륜(五倫)의 하나인 부부유별과 연계해서, 마치 공자가 남녀간 인간차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라도 했던 양, 신바람이 나서 유학을 비판해 왔다. 적어도 그것 하나만은 유학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카드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비판은 그들 의식에 내면화된, 서양의 경우, 문화제국주의 또는, 서양사상에 경도된 동양 지식인의 경우, 서양사대주의의 표출이다. 아니면 기껏 장자가 말한 지맹(知盲)적 무지의 소치이다. 장자는 의식이 욕심으로 인해 사물事物화 됨으로써 의식에서 도(道)가 사라져버린 것을 지맹적 사태라고 했다.
공자사상의 총체적 이해에서 보면, 부부유별이란 부부간에는 성의 다름에 따른 [인간차별이 아니라]역할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간에 성이 다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가정적, 사회적 역할의 차이를 인정하고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질적 평등주의라는 것이다. 그 차이를 도외시하는 서양, 특히 서구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산술적 남녀평등주의는 양적 평등주의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서양의 문명적 근본에서 볼 때, 도대체 어디에 그러한 산술획일적 남녀평등주의가 제시되어 있는가? 소크라테스-플라톤인가? 기독교 성경인가? 코란인가? 플라토니즘이야말로 남성중심주의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인간창조과정에서부터 남성중심주의이며[이에 관한 인류 필독의 연구서: 김용옥, 1990, 여자란 무엇인가 — 동양사상입문 특강 —, 본 테마와 관련해서는 우선 105~115쪽] 또한 남자와 여자 간에 성의 차이에 따른 역할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특히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서 12절까지) 역시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이원일자적 관계라는 것, 남녀 다같이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의미에서 남녀평등주의라는 것, 결코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그러한 산술획일적 평등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희랍신화를 보면 완전 남성중심주의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또 어떤가. 그의 후기 이론에서는 전기 이론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대부분이 이드(id)로 옮겨진다.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 간의 구별은 이드, 이고(ego), 수퍼이고(superego)라는 한 세트의 상관적 개념들로 대치된다. 이드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 충동의 저장소이다. 이고, 즉 자아는 이드에 의한 본능적 충동행위를 현실의 제반 상황에 맞도록 의식적으로 변경 또는 제약한다. 수퍼이고는 그러한 자아를 형성시킨 초超자아이다. 이 초자아는, 실제 아버지가 아니라, 상징으로서의 아버지(paternity)의 가치관과 기대를 내면화 해서 — 라캉의 표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by the name of the father)’ — 발달한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간의 자아 형성도 전적으로 아버지에 달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신화대로인지, 심리학대로인지 지금도 그들은 여자가 결혼하면 자신의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가진다. 결혼과 동시에 여자는 아예 족보를 남편의 족보로 옮긴다는 것이다. 이런 데도, 도대체 왜 그들은 유학에 대해서만 남성중심주의라고 그토록 집요하게 비판하는가?
논점은 서양의 남녀평등주의 심화가 인간주의의 발전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부유별, 즉 부부간에는 생물학적 성이 다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역할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유학의 가르침을 두고 ‘인간성을 억압하는 봉건주의적 사고’라고 단죄하고 그 역할의 차이를 천부인권天賦人權이라는 거룩한 차원에서 국법으로 단호하게 다스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찍이 마르크스가 갈파했던 바, 자본주의의 안정적 지속적 발전을 위한 여성 산업예비군의 확보와 그 효율적 동원을 기하고 있다. 그것이 잘 기해지고 나라가 바로 자본주의 선진국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도 그것을 잘 기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서 괄목할 만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이룩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발전의 이면에는 인간성 증발, 물신주의 심화로 인해 가정파탄이 늘어나고 있고 또한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반인륜적 범죄, 속수무책의 심리-사회적 문제가 증가하고 있다.
질적으로 참된 남녀평등주의의 길은 무엇인가? 맹자가 <논어>를 징후적으로 독해해서(symptomatic reading) 그 변치 않는 길을 간단명료하게 제시했다: 부부유별. 행복한 가정과 이에 기반한 건전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녀간에 부부유별이라는 윤리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유학은, <주자가례(朱子家禮)>나 <소학(小學)> 등에서 보는 것처럼, 남녀간의 역할분별을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윤리로 삼는다:
남녀간에 분별이 있어야 비로소 부자간에 친함이 있고, 부자간에 친함이 있어야
비로소 의가 있게 되고, 의가 있어야 비로소 예가 있게 되고, 예가 있어야 비로소
만물에 편안함이 있다. 남녀간에 분별도 없고 군신간에 의도 없으면 금수처럼 사는
삶이다(無別無義 禽獸之道也). (<소학> 내편: 명륜62, 155~156쪽)
부부유별에서 ‘유별’이란 어떤 유별인가? 유학에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음(陰)양(陽)적 유별이다. 이것을 오늘에 온고지신(溫故知新)적으로 이해하면 이러하다.
무릇 남자와 여자는 생물신체적으로도, 기질정서적으로도 서로 음양적으로 대조된다. 그러므로 예컨대 여자는 병역의무가 없고, 전투에 나가지 않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남자에 우선해서 보호를 받고, 가정에서는 여성에게 적절한 일을 분담하고, 직업에서는 여성에게 알맞은 직종, 조직에서는 여성에게 적절한 직책을 맡는 등 남자와의 가정적, 사회적 역할이 구별됨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물신체적으로 그래서 기질정서적으로도 서로 음양적으로 대조되는 여자와 남자가 결합해서 가정을 이루고, 가정과 가정이 모여서 사회를 이룬다. 이런 까닭에 남녀간 성의 차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가정적, 사회적 역할구별이 사회적 인간관계에 있어 토대가 되는 윤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유별의 정도와 양상은 시중(時中)적 알맞음이 되게끔 적절해야 — 레비-스트로스의 용어로 말하면, 정도와 양상에 맞게 ‘변형(armature-transformation)’되어야 —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대 청동기시대에서는 그 청동기문화에 알맞게, 지금의 전자∙컴퓨터시대에는 지금의 전자∙컴퓨터문화에 맞게 남녀간에 부부유별이라는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때에 맞게, 지금은 지금에 맞게”(<맹자> 4: 13) 하는 것이다. 또한 부모님 앞에서, 손님을 맞을 때, 자녀를 교육할 때, 가정 살림을 의논할 때, 같이 잠잘 때, 같이 목욕할 때 등 다양한 경우와 사태에서 시중적으로 알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오늘의 현실이 부부유별이라는 윤리로 인해 진정 남녀인간차별적 — 즉, 음의 역할이 혹은 양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 현실이 되어버렸다면,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학의 배움과 깨달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양이 서양으로써 동양을 꾸짖는 한심한 현실을 우리는 목도해오고 있다.
오늘날 서양, 특히 서구사회의 남녀간 평등은 말하자면 양양陽陽적인 산술적 평등이다. 남자 건, 여자 건 그들 개개인의 정신(psyche) 자체가 양陽적이다. 음양적 정신인 우리 동양인에게는 이유 없는 불안(paranoia)이나 정신분열(schizophrenia) 같은 개념은 원래 생소하다. 라캉에 의하면, 오늘날 서양인의 정신은 도가 넘도록 양陽으로 꽉 차서, 정도의 차이일 뿐, 거의 모두가 이유 없는 불안, 정신분열, 라캉이 말하는 쥬상스(jouissance) — 인간유기체가 감당하기에 과도한 재미, 엔조이, 자극, 만족을 추구하는 무의식적 드라이브로 인해 기인된 무기력 같은 증세; 혹은 이웃 사람, 길에서 다가오는 사람, 심지어 TV 등과 같은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에 대한 공포[스웨덴 에드바르 뭉크의 ‘Screaming’이라는 그림, 우리 같으면 꿈에라도 나올까 걱정되는 그 그림이 그들에게는 세계 최고가(2012년 경매가: 2천1백억원)로 어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 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음양적 눈으로 볼 때, 그들에게는 오직 양적인 그래서 ‘되바라진’ 매너와 세련된 에티켓만 가득할 뿐 인간의 향기가 없다. 기껏 그 매너나 에티켓이라는 것도, 푸코에 의하면, 남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배려(consideration for self)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녀간에 음양적 분별이 없어진 자신들의 사회를 근대적 혹은 선진적 혹은 민주적이라고 자랑한다. 반면에 그 분별이 있는 사회를 봉건적 혹은 후진적 혹은 비민주적이라고 업신여겨왔고, 지난 시대에는 그 분별을 없애고자 강제했다. 그들은 나(the I) 중심의 자아(ego) 덩어리이다. 그래서 부부간 마저도 양양적 평등인지라, 부부는 내심 항상 서로 조심한다. 별것 아닌 것을 두고도 서로가 예민하게 충돌한다. 그 충돌 자체와, 충돌의 결과가 법에 의해 항상 든든하게 보장된다. 그래서 이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이다. 아니, 서로 그러면서 살 바에는 이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이혼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그들의 합리성 수준은 이혼권장 정도의 수준을 넘는다. 이혼을 위한 법적 절차가 번거롭고,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아예 부부관계를 피해서 파트너관계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구의 합리주의, 즉 최소투입-최대산출이라는 경제원리추구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그들 삶의 한 양상이다.
자식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양양적 평등과 그러한 합리주의를 보고 들으면서 성장한다. 밖에 나가서도 역시 양양적 남녀평등주의, 합리주의적 타산, 법 만능주의를 보고 듣고 배운다(레비-스트로스는 ‘유럽인은 어릴 때부터 개인주의적 인간, 이기적 인간이 되라고 배운다’고 만천하에 고백했다). 자식이 크면 부모와의 관계 역시 보고, 듣고, 배운 데로의 관계가 된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을 자립성, 자주성, 평등성의 인성함양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결국 그들에게 예(禮)란 격식적인 에티켓 수준일 뿐, 그 마음 속에는 의(義) 대신에 법과 규정만 있게 된다. 아이들에게 도덕 운운하면 별 느낌이 없다. ‘법’ 혹은 ‘규정’이라고 해야만 정색을 하고 귀를 기울인다. 결국 그들의 정신에,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참 휴머니즘과 편안함이 깃들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의 인간성과 그들 사회의 이면은 날로 황량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세련된 에티켓과 능숙한 표정관리로 속 마음을 감추면서 효율과 이윤(돈)이 궁극적 가치로 되어버린 자본주의사회를 오직 법과 규정으로 살아가는 그들 삶의 이면은, 의예(義禮)도덕주의에서 볼 때, 상기 <소학>에서 우려하는 금수적 삶이 날로 보편적으로 되어간다. 결정적 문제는 그러한 삶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런 줄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기네의 삶을 그렇게 보는 문명을 후진적 문명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좀 많이 나간 것 같다.
요컨대, 유학에서는 남녀간에 성이 다름에 따른 부부간의 자연스러운 음양적 역할구별이야말로 행복한 가정, 건전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토대윤리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구별을 유식하고 ‘거룩한’ 문자를 동원해서 대세인 글로벌리즘, 글로벌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오늘날의, 푸코가 말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 시대적 지식구조)에 편승해서 문화제국주의적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유학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비장의 카드로 꺼낼 것이다. 서양 그리고 서양사상에 경도된 동양 지식인이여, 다음을 똑똑히 보시라.
육경(六經) — 예경(禮經)과 악경(樂經)을 합쳐 예낙경(禮樂經)으로 하면 오경(五經) — 중에 하나가 <예경(禮經)>이다. <예경>은 삼례(三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주례周禮)로 되어 있고, 삼례 중의 하나가 <의례>인데, 거기에 삼종지도가 있다: 여자는 부모님께 순종해야 한다; 출가하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 세가지 도는, 결론부터 말하면, 공자에 의해 온고지신적으로 재해석되어 그의 정명(正名)사상으로 흡수된다.
공자는 <논어> 그 어디에서도 남녀인간차별적 윤리를 말한 적 없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을 뿐이다: “소인과 함께하는 여자는 다루기 어렵다(唯女子與小人爲難養).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近之則不孫遠之則怨)” (<논어> 17: 25). 이것을 두고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라고 해석들을 해서 공자가 공공연하게 여자를 소인 취급했다고 소리 높여 비판한다.
부디, 표층적 독해(surface reading)에 매몰되지 말고, 징후적 독해를 하시라. 당시 귀족은 물론이고 부유한 집 또는 대가 집은 첩, 여자 종, 남자 하인이 함께(與) 살았다. 공자는 한평생을 살면서 그런 집에 대해서도 한 말씀해야 할 경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또, 여與를 딱 부러지게 ‘and’라고 새길 한문의 근거가 없다. 그러나 중국어 특성 상 문맥에 따라서는 그렇게 의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왜 꼭 그런 의역으로 새겨야만 하는가? 우리는, 징후적으로 독해해서, 與를 그대로 ‘with’로 새긴다. 그래서 ‘여자여소인(女子與小人)’을 주로 소인(小人) 곧 종, 하인, 대문간 식객 등을 상종하는(與) 여자[여자 종이나 멀리된 첩]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해설이 이렇게 된다: 무릇 예(禮)란 사회생활에 있어서 윤리도덕을 매개로 한 사람과 사람 간의 미학적 거리이다; 그러므로 특히[‘唯’을 의역해서 새김] 여자 종이나 첩과는 그 거리를 적당하게 잘 지켜야 한다.
이 대목에서 그들은 드디어 비장의 최후 카드를 뽑을 것이다. 그것은 공자에 의해 온고지신적으로 재해석되지 않은, 상기 <예경>에 있는 그대로의 삼종지도이다. 주지하다시피, 특히 그 세 번째 도를 가장 결정적 카드로 뽑는다. 아들딸을 막론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유학의 한 절대근본이거늘, 여자라는 팔자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이 죽고 나면 자식으로부터 공경 받기는커녕 오히려 자식에게 순종해야 하다니! 이런 당치도 않는 모순적인 유학의 남녀차별주의에 묶여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고’ 평생을 살아야 하다니! 이 무슨 불행한 ‘여자의 운명’이고, 기구한 ‘여자의 일생’이란 말인가! 신파조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오늘날 이 자유평등의 시대에 유학은 타파되어야 할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독자들도 보았으리라. 알량하게 서양의 페미니즘 공부를 좀 했다고 해서, 부부유별이라는 윤리를 얇은 표층적 독해로써 질타한다. 특히 삼종지도의 타파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모든 것은 유학 탓, 세상 탓이라고 애정 깊게 위무하면서 신파조의 눈물과 감정을 부추기는 일을 전문으로 한다. 첨단의 선진적 지식을 함양한 똑똑한 여권운동가를 자처하면서, 노라를 해방시킨 한국판 입센이라도 된 양, 사명감에 불타 여기 저기 강연을 하고 책도 쓰고 인기를 얻어 급기야 한 자리 얻기도 한다. 도대체 페미니즘이 무엇이기에 이 지경인가?
페미니즘. 이것은, 한마디로,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남녀간에 무차별적인 절대평등주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그 시발적 성격에서부터 지금까지, 학문적 이론이기보다는 여성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이념적 주장이며 그에 따른 운동이다. 페미니즘 학회는 그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전략적 모임의 성격이 다분하다(그러므로 페미니즘을 ‘여성학’, 페미니스트를 ‘여성학자’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운동의 핵심은 시대에 따라 변천해온 남녀간의 사회적 관계에 내재해 있다고 보는 불평등을 파해쳐 드러내는 일, 그리고 드러내진 불평등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제시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 어떤 접근의 페미니즘이라 하더라도 상기 공자사상에 입각한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역할차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딱 멈추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급진적 페미니즘에서는 그 명제를 낳은 애초의 발상 자체가 성차별, 성불평등이라고 주장한다.
서양인의 사고는, 적절한 기회에 논의하게 될 것인 바, 극단으로 가고야 만다.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 함의된 페미니즘, 생시몽주의자의 페미니즘 등 초기의 페미니즘에는 많은 공감들이 있었다. 1960년대 미국 문화인류학의 미드(M. Mead)를 중심으로 비롯된 인종, 문화, 성별, 연령을 포괄하는 만인평등주의 인권운동이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는다. 이에 UN은 그에게 ‘세계의 어머니’라는 공식 호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 운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천적 새벽을 연 소위 68혁명과 맞물려 페미니즘으로 발전해서 날로 극단으로 나간 결과, 현대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막무가내 식의 초超이론적이다.
그런데 현대 페미니즘의 여러 갈래 중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이론이 나름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역시 남녀평등주의를 법제화한 장본은 서구 근대민주주의의 평등사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남녀간에 산술적인 양적 평등주의를 고취시키고 법제화한 진짜 숨은 장본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산업예비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남녀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이 자본주의체제에 불가불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완전고용은 산업사회의 목표이다. 하지만 여자는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하고 오직 남자만 나가서 산업활동을 하는 경우, 완전고용이 달성되면 자본은 꼼짝 없이 노동에게 발목 잡히게 된다. 지속적 확대재생산이 계속되어야만 하는 — 그렇지 않으면 결국 국가 자체가 무너지고 마는 —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은 노동에 대해 적어도 최소한의 힘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본주의는 여차하면 바로 산업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실업자 곧 ‘산업예비군’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에 자본주의 국가는, 남성과 구별되는 여성 본래의 생물·생리·정서적 측면을 도외시하는 그러한 절대평등주의를 법제화해서, 산업예비군으로서의 여자 실업자도 확보해 두어야 한다.
남자노동의 완전고용에 대비해서 산업예비군 성격의 여자 실업자가 확보되어 있어야만 하는 자본주의사회라면, 그 사회는 남성에 비해 여성이 차별 받는 사회임이 분명하다. 여성 산업예비군 곧 여자 실업자가 자본(주의)의 안정적 확대발전을 담보해주는 불가결한 존재라면 마땅히 자본주의사회는 그들이, 여자 취업자와는 물론이고, 남자 취업자와도 평등하게 자본주의세상을 향유할 수 있게끔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한 평등을 향유한다면 어느 누가 취업전선에 나가 노동하려 할 것이며, 노동을 한다 해도 노동의 질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처럼 자본주의체제와 조직에 남녀불평등이 구조적 모순으로 내재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남녀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대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적인 남녀평등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는 타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론을 넘어 실제는 그와 반대이다. 마르크시즘은, 주지하다시피, 기계론적 역사철칙주의이다. 수많은 다양한 일과 사태를 품은 시간의 흐름 곧 역사 속에서 필경 공산사회가 도래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대로라면, 구태여 인위적인 혁명 따위가 필요 없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당면한 복잡다난하고 긴급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 철칙을 믿고 기다리는 웨이팅 게임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철칙이 가져다 줄 공산사회를 앞당겨 실현하기 위해 사르뜨르의 실천(praxis) —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행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실천 — 철학을 수용해서 혁명적인 급진·과격의 실천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만큼 가져간다’는 공산사회는 이른바 마르크스의 낭만휴머니즘(Marxist romantic humanism)이 빚어낸 몽상임을 오히려 앞당겨 입증했다. 남녀 구별없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만큼 가져간다’는 사회주의적 평등주의 역시 허구가 되었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마디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역시 공자사상에 입각한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역할차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결국 무색해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대 페미니즘의 초이론성에 대해 문화인류학이나 문화지리학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접근이 적용되지 않는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를 대상으로 많은 실증적 연구가 있다. 그 공통된 결론에 의하면, 그들 사회에서도 성에 따른 남녀간의 차별은 보편적인 것(the universality of female subordination)이다. 이것은 남녀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이 자본주의체제에 불가불 매몰되어 있다는 상기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는 언어학, 특히 언어의 의미구조 영역에서도 페미니즘에 관한 연구에 나섰는데 역시 동일한 내용을 확인했다. 간단한 예로, man에는 ‘남자’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남녀 통틀어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남자인류가 남녀인류를 대표한다는 함의라는 것이다. 비근하게는 남자고등학교의 경우 그냥 무슨 고등학교라고 이름을 짓는다. 무슨 남자고등학교라고 짓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고등학교는 반드시 무슨 여자고등학교라고 이름을 짓는다. 역시 동일한 함의이다. 또, 먹는다는 말의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먹는 데는 먹는 주체와 먹히는 대상이 있다. 연구대상이 된 모든 문화집단의 언어에서 먹는다는 말에 ‘성교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에서 남자가 여자를 먹는다는 말은 있지만, 여자가 남자를 먹는다는 말은 없다. 인간사회의 생성·유지에 토대가 되는 행위인 성교에서도 성에 따른 남녀간의 차별, 즉 성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래서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극단적 페미니즘은 그런 언어적 의미구조가 있게 된 근본이유가 애초에 남자에 의해 주도된 성차별, 성억압에 기인된 것이라고 막무가내식 주장을 한다.
이러한 초이론적인 극단의 페미니즘이, 놀랍게도, 젠더 아이덴티(gender identity)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이다. 성에는 섹스(sex)로서의 성이 있고 젠더로서의 성도 있다. 전자는 인간과 동물의 생물·생리학적 성을 지칭한다. 그래서 성에 따른 남녀구별(동물의 경우 자웅雌雄구별)이라는 함의를 가진다. 후자는 배, 국가, 자유, 해, 달, 의자, 신, 행복, 바다 등 인간의 인식에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해 인지인류학적 또는 민족학적으로 — 보통 용어로는 사회·문화·심리학적으로 — 부여된 성을 지칭한다. 어떤 사물이 남성적이면 남성, 여성적이면 여성, 남성 혹은 여성 어느 쪽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에는 중성이라는 젠더 아이덴티티가 부여된다(우리 고교 때 독일어 배우던 일이 생각난다). 동일한 사물이라도 젠더 아이덴티티는 문화집단이나 언어권에 따라 다르다. 흥미로운 논점은, 오늘날 인류학 넓게는 사회과학에서는 극단으로 나가는 페미니즘을 의식해서 ‘섹스’라는 용어를 가급적 피하고 ‘젠더’라는 용어를 쓴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첫째, 페미니스트들은 성에 따른 남녀간의 그 어떠한 사회적 문화적 역할구별도, 비록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러운 것 그래서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성차별이라고 간주해서 공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젠더에는 남자와 여자 간에 서로 구별되는 젠더 아이덴티티가 있음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젠더’는 남녀간의 행위와 역할이 사회∙문화∙심리학적 측면에서 본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초이론적임을 넘어, 그냥 ‘눈 감고 아웅’ 아닌가. 바로 서양인들 사고의 ‘웃기는’ 이면인 것이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서양인은 실질보다는 논리, 형식, 절차가 언제나 우선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막스 베버가 간파했듯이 서구합리주의적 논리와 형식에 갇힌(imprisoned)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갇힌 사고에 기반한 페미니즘 논리에서 보면, 오늘날에도 ‘부부유별’ 같은 소리를 한다는 것은 천부의 기본인권을 유린하는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생각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그것을 두고 ‘질적 평등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정신 나간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음양사상에 기반한 유학에서 보면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남녀간에 산술획일적인 양적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이야 말로 맹하게 갇힌 사고의 소산인 것이다.
진정 공자의 정명(正名)사상을 이해한다면, 설령 공자가 <예경>의 삼종지도를 직접 그대로 설파했다 해도 그것은 오늘날에도 온고지신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도(道)이다. 오랜 세월 천자봉건시대, 절대왕정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의 한 절대근간인 부모공경윤리는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하기도 했다. 임금이 죽고 (어린)아들이 임금 자리에 오르면 그 어머니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거나 혹은 쥔 것으로 인식된다.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어머니를 윤리적으로 공경하고 인간적으로도 사랑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대개 어머니는 주변의 인정과 혈육에 마음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임금은 고명한 선비들을 곁에 두고 흔들림 없이 바른 정치를 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청을 하면 거절하기 힘들다. 주지하다시피, 그 결과로 국가적으로 크게 불행한 사태가 야기되는 수도 있다.
도(道) 곧 길은 무엇인가? 삼종지도의 마지막 세 번째 도이다. 그것은 논리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실질적이고도 명쾌한 길이다: ‘남편이 죽고 나면, 어머니는 아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표층적 독해로 볼 때, 이 세 번째 도와 첫 번째 도 —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 는 서로 정면으로 상충되는 모순이다. 논리와 형식에 갇힌 서양인의 사고로서는 이러한 모순적인 도를 제시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하지만 그 갇힘을 열고 나오면, 양자간에 전혀 모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삼종지도 전체가 온고지신적으로 발전되어 정명(正名)의 도를 보게 된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남자로서의 가정적 사회적 역할을 맡게 되면, 어머니는 첫 번째 도인 부모공경을 내세워 아들이 맡은 역할에 간섭하려고 하지 말고, 남편이 있을 때와 다름없이 여자 어른으로서 자연스러운 가정적 사회적 역할을 맡아서 하라는 것이다(正名); 그렇게 하면, 아들은 아들로서 부모공경이라는 도를 변함없이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正名); 또한 동시에 아들은 남자 어른으로서 자연스러운 가정적 사회적 역할을 자신의 결정과 책임 하에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正名). 삼종지도는 이처럼 공자의 정명사상 속에 발전적으로 살아 있다. [말하자면 신약성경인]<논어>의 정명사상은 공자의 천(天)사상, 인(仁)사상, 예(禮)사상, 중용(中庸)사상 등과 함께 [말하자면 구약성경인]육경(六經)을 온고지신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논리와 형식에 ‘갇힌’ 서양이 그리고 서양사상에 경도된 동양 지식인이 유학의 그 깊은 가르침을 알 리가 없다.
서양에서조차 기본문명 족보에 반反하는 페미니즘.
지금 대한민국 정치판은 엉뚱하게도 그 페미니즘을 둘러싸고 온통 시끄럽다.
서양사상에 경도되고, 자리에 혼이 팔려 지맹(知盲)이 된 지식인들.
대선을 앞둔 지금, 그들간에 밑도 끝도 없는 페미니즘 논쟁이 또다시 도지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알량한 지식과 명성을 내세우기 위해 투구하는 그 허황한 논쟁에 의해 ‘갈라 치기’ 당하고
있는가…
장자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세人間世에서 “명성이라는 것은 서로를 어긋나게 하고, 지식이란 것은 다툼의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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