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현제중의 한사람이고 제가 젤루좋아하는
로마황제 트라야누스에대해서 열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물열전에 글이없더라구요.
마니좋아는하는뒤 아는 내용이 별루없서서리..
Re:열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번호:389 글쓴이: 스틸리코 조회:27 날짜:2001/11/06 16:09
평생 속주출신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렸지만 그 콤플렉스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시킨 인물이겠죠.
사실 글로 남기기엔 카이사르처럼 장단점(장점이야 궂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것이고 단점이야 여자후리기, 천문학적인 빚을 가지고도 멀쩡한거, 공화주의자 입장에서 사실상 1대황제인 점 등)이 모두 있는 사람이 쓰기 쉽습니다. 당장 오현제 중에서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별로 쓸 것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역시 오현제에 포함될 만한 기량을 가졌던것만은 사실입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운 법이니.
물론 그에 합당한 기량이 있었고 그를 증명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트라야누스는 행운아입니다. 술라가 쓴 펠릭스란 존칭은 오히려 트라야누스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도 하구요. 비록 파르타아와의 전쟁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숙적 파르티아의 수도를 처음으로 공략도 해 봤고 또 다행히 그 후계자들이 현명해 수십년간은 잘 버텼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보면 역시 최초의 속주출신 황제라는 것 때문에 평생을 조심했고 또 노력했습니다. 적어도 즉위당시 명성은 어쩌면 최초의 속주출신 황제가 될 뻔도 한 코르불로(남프랑스 속주 출신)보다 아래였던것만은 틀림이 없으니까요.
win-win 작전은 힘든 듯
번호:392 글쓴이: 코르넬리우스 조회:18 날짜:2001/11/07 22:35
고대의 세계 제국 로마와
오늘날의 세계 제국 미국을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 최고 전성기라고 볼수있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도 로마는 소위 미국이 말하는 win-win작전은
수행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만약 한반도와 중동에서 대규모 전쟁이 터져도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win-win이죠.
그러나 로마 제국은 트라야누스 황제시대에도 이런 것은
힘들었습니다. 다키아를 정복하기 위해 오랜동안 준비를
했죠. 왜냐면 다키아 전쟁을 위해 병력을 한 곳으로
투입하면 다른 전선이 약화되는 걸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인강 방어선을 강화하고 그 지역 국경을 외치로
안정시킨후 다키아에 병력을 투입하여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파르티아 정벌은 결과적으로는 실패에 가깝습니다.
수도를 잠시 점령하긴 했지만 정복지와 본국의 반란, 그리고
남아있는 파르티아 지방의 군사적 반격을 막을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겁니다.
미국같으면 한반도와 중동에 동시에 아니 발칸반도 까지 포함해
여러 군데에 동시 다발 전쟁이 터져도 평양과 바그다드를
접수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미국이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죠. 하긴 테러 사건이 터진 후
군사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탱크와 미사일만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란거 알지만...
트라야누스 황제의 파르티아 정벌은 어쩌면
실패라고 할 수도있습니다
첫째 이로 인해 재정적 낭비가 심하고 이틈을 타서 유태인 반란이
발생하는 바람에 국내 사정이 어수선해졌을게 뻔합니다.
두째 파르티아는 충분히 대화로 협상이 가능합니다. 굳이 손봐줄
필요는 없죠.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걸 굳이
공격해서 파르티아를 약화시킨건 잘못한 겁니다. 여우를 죽이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입니다. 이렇게 약화된 파르티아가 3세기에
무너지자 사산조 페르시아가 들어서서 로마를
엄청난 곤경에 빠뜨립니다. 발렌티아누스
황제는 포로 신세까지 되었죠.
세째 파르티아 정벌의 잠시나마의 성공은 로마시민들에게 커다란
만족을 주었고 황제에겐 엄청난 영예였습니다. 그 이후로
황제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업적을 흉내내기 위해 파르티아를
공격합니다. 칼라칼라 황제의 경우 직접 나서서 공격합니다.
이것은 방금전 말한 재정 낭비와 다른 국경 지대의 약화, 그리고
파르티아 약화로 인한 더 무서운 강적의 출현만 초래할 뿐입니다
Re:파르티아 원정에 대해서 궁금한 점..
번호:395 글쓴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조회:22 날짜:2001/11/10 19:59
win-win작전의 어려움은 상당히 동감이 갑니다.
미국역시 그동안 자신감 있게 주장해 왔던 win-win정책에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것의 어려움을 표현했습니다.
미국이나 로마나 별 차이가 없을 듯..^^
문제는 파르티아 원정이 과연 로마 전역의 방위나 안정의 확보에 혼란과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는 가 하는 점입니다.
로마가 방위에 할당했던 국사력은 국토의 크기에 비해서 상당히 소규모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꼭 필요한 지역에서 한정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정이라든지 기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해서는 그 쪽 담당군단이 알아서 하던지, 자체 조달이 우선이 될 것 같은데요...
타 지역에서 이동해 오는 군단은 규모도 별 볼일이 없으면 거리가 멀어 소요시간도 상당히 많이 걸립니다. 그리고 기존의 군단 주둔지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새로운 군단 편성이 더 우선시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제가 잘 몰라서...^^)
미국도 역시...
미국 군사력의 주전력은 예비역입니다.
기존의 군인들은 필요한 인원만을 유지시킨체 전쟁이나 원정시 주전력과 함께 예비군으로 구성된 부대를 구성해 전쟁을 수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인원이 확보되는 동안에 기존의 지역에서 역시 병력의 감소나 축소의 규모는 극히 미비합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 동원되는 주한미군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습니다.
로마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토론주제]
[[질문]]트라야누스의 메소포타미아 원정에 대해서
번호:773 글쓴이:그라쿠스 형제 조회:28 날짜:2002/04/17 16:45
트라야누스는 최초로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한 황제이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점령에 성공하였으나, 지방의 반란과 게릴라등을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그의 임종으로서 파르티아 수도인 크테시폰을 끝내 내주고야 말았다.
이 전투는 적국의 영토를 바람처럼 휩쓸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영토는 모두 빼앗겨 원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그런데, 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사이의 일부분 영토를 점령했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었을까요?
경제적이익이 생기기는 하겠지만(홍해를 통한 인도나 중국진출) 또한 지켜야할 땅이 늘어남으로서 군단유지비가 필요하게 됩니다. 또한 이쪽에 신경을 쓰게 되면 갈리아, 브리타니아등등이 위태하고.. 즉, 부담이 더 크다는 얘기인데..
제가 궁금한 것은 왜, 무슨 이유로 계속해서 세베루스나 카라칼라황제같은 이들이 계속해서 파르티아를 공격했나 하는것입니다.
[의견1]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및 잡담
번호:775 글쓴이:라비에누스 조회:23 날짜:2002/04/18 11:14
트라야누스는 황제에 오르기 전에 로마귀족 사회의 엘리트코스를 거쳤고(원로원의원, 집정관, 군사령관, 총독 등) 수 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았죠.
그는 이런 군사적 업적과 전재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 공손한 매너를 바탕으로 원로원과 민회, 그리고 속주 군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죠.
카이사르 조차 이만한 지지는 받지 못했을 겁니다. 인기면에선 역대 최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로원으로부터 지고의 황제(Optimus Princeps)라는 칭호를 받았고 몇 세기 뒤까지 신임황제에게하는 인사말이 "아우구스투스보다 운이 좋고 트라야누스보다 훌륭하게 되시기를(Felicior Augusto, Melior Traiano)" 인걸 보면 그에 대한 원로원(사회지도층)의 평가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죠.
그는 이러한 인기를 바탕와 본인의 과감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각종 제도를 시행하죠.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못했죠.
군사전략적인 측면에서 백년을 내다보고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방위체제를 재구축하고 다키아와 화평을 택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그는 다키아를 정벌하고 그곳을 초토화시킴니다.
당시에 수 많은 로마인들이 이를 환영했지만 다키아라는 완충국이 없어진 로마는 후에 더욱 더 큰 국방의 위헙에 직면하죠.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도 단행합니다.
파르티아의 왕 코스로이스(Chosroes)가 로마의 동의없이 아르메니아 왕을 폐위한 것을 파르티아 원정의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제로 파르티아 원정은 트라야누스 자신의 군사적 명예와 로마인들의 자존심이 맞물려서 시작된 것입니다.
파르티아 원정 결과 로마의 강역은 제국 사상 최대가 되었고(파르티아인들의 저항과 제국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끝내는 파르티아에서 철수합니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정복에 성공한 최초의 로마인이 됩니다.
다키아와 파르티아 원정으로 로마인의 자존심이 회복되고 트라야누스 자신의 군사적 명예도 최상에 이르렀지만 제국 확장에 든 인력과 자원은 엄청났죠.
그는 세 개의 강력한 완충국(다키아, 파르티아, 나바티아 아라비아)을 침공하고 그 결과 다키아와 아라비아는 속주가 되고 파르티아는 크게 약화됩니다.
완충지대가 없어진 로마는 후에 고트족, 게르만족, 알란족, 아리아족의 대규모 침공을 직접 맞닫트리게 됩니다.
그리고 넓어진 국경선을 유지하는 비용은 나날이 커지지만 제국의 경제는 취약하기만 했습니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경제의 발전을 이룩할 만한 방법이 없었죠.
경제발전이 군사비 지출을 따라가지 못한 겁니다. 재정악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거죠.
그렇지만 이런 경제적, 군사적 손실외에 다른 손실들도 있습니다.
내치와 국방이 더욱 더 복잡해지고 견디기 힘들어 짐으로 해서 황제와 관료, 그리고 군대의 지위가 향상되죠.
그 결과 지방자치조직의 약화와 로마제국의 군국주의화가 초래되죠.
지방자치는 로마제국의 행정부담을 최소화하는 조치라고 로마인 이야기에선 언급이 되죠.
그러나 로마가 커지면 커질 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방자치조직은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역으로 중앙의 행정부담이 커지는 결과를 초래하죠.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로마의 군국주의화는 권력의 근원인 로마시민과 원로원의 영향을 점차적으로 줄여가죠.
권력은 지배층으로부터 시민에게 점차적으로 흩어져야되는 것인데 오히려 한 곳으로 몰리니 정치적으로는 퇴보한 셈이죠.
뭐 물론 당시 시대의 흐름으로선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지만.
아무튼 로마는 공화정시대에 로마와 싸우던 동방의 국가들보다 더 강력한 전제정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트라야누스의 대외정벌은 미래의 로마제국의 재앙만 안겨 준 셈이죠.
이제부터는 잡담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가 공화정때 적국을 바로 멸망시키지 않고 동맹국이나 속국으로 둔 것은 로마인의 관용보다는 직접지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트라야누스는 자존심 때문에 로마에 대항하는 세력을 힘으로 밀어붙인 겁니다.
로마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세계에 로마에 의한 질서를 세울려고 한거죠.
오늘날의 미국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미국도 나날이 국방예산이 커지고 있죠. 그러나 경제발전이 이를 언제까지 따라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 한계가 오겠죠.
이 한계를 꿰뚫어보고 국력을 쌓으려고 했던 지도자들도 많죠.
그래서인지 최근의 미국대통령 중에서는 클린턴을 높이 평가합니다.
외국과의 분쟁을 줄이고 경제를 발전시켰으니까요.
국력을 쌓았다고 볼 수 있죠. 지금 부시가 설쳐도 나라가 휘청거리지 않는 것은 클린턴이 8년동안 쌓아놓은 게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국가적 자존심을 버리고 국력을 쌓을려고 한 지도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악평을 받고 정치적으로 위기 상황에 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선 조선의 광해군, 로마의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도미티아누스가 그런 예이죠.
광해군은 폐위되고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는 폭군으로 남고 도미티아누스는 암살되고 폭군으로 이름이 남았죠.
정치적 지위를 잃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오랜세월 동안 역사 속에서 악명을 남기게 되죠.
다들 제대로된 역사의 평가를 받는데 수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특히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는 거의 18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 했죠.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나라의 앞날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 사람들인데.
나라를 위해서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대중은 그런 사람들을 원하지 않죠.
너무나도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런 건 보지 못하죠. 저도 지금하는 정책들이 10년 뒤, 20년 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할 수 없으니까요.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벌이는 정책 중에서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원정처럼 나라를 말아먹는 정책이 너무나도 많죠(아르헨티나의 위기를 초래한 페론의 정책도 당시에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죠.).
그러나 국민들은 자신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는 정책들은 언젠가 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죠.
독도 문제가 불거져 나올때마다 국가의 대응이 너무 미흡하다고 다들 한 마디씩 하죠.
파르티아를 정벌하지 못해서 가슴에 응어리가 맺힌 로마인들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일껍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강하게 나가봤자 좋을꺼 하나 없습니다.
왜 독도 문제를 항상 어물쩡하게 넘어갈까요?
(밑의 글은 독도 되찾기 서명운동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퍼온 것입니다. 제 입장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독도를 "공인된 우리땅"으로 만들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해서 이기는 방법 뿐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역사적인 문제도, 힘의 강약도 아닌 누가 얼마나 오랜기간 동안 "실소유"해왔나 하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50년이나 독도를 실소유해 오고 있고, 사법재판소에 상정되기 전에 최대한 오랫동안 "분쟁지역"이 아닌 "실소유영토"로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정부는 일본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이를 이슈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발끈하고 일본하고 싸우면 독도는 분쟁지역이 되고 말죠.
한국정부가 일본의 도발에 발끈해서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버리면 50년의 공든 탑이 허사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최대한 국제사법재판소에 상정되는 걸 늦추어서 상정시의 "실소유기간"을 늘려 놓는게 유리한 겁니다. 실소유 100년이면 100% 우리땅 된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한국외교부의 정책은 박정희 이전부터의 일관된 정책으로 국제적으로 약소국인 한국이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안입니다.
독도는 전경이 지키고 있습니다. 경찰이 지킨다는 것은 "外治"가 아닌 "內治"를 뜻합니다. 세상 어느나라에서 자기 땅이 아닌곳에 군인이 아닌 경찰을 보낸답디까....... 참고로, 울나라 남해나 서해에 있는 작은 섬들에도 대부분 군인은 없지만 경찰이 있습니다. 국경지대니까 해병대가 가야 한다고들 하시는데, 적국과의 경계선, 즉, 백령도 같은 곳이 아닌이상 경계지역의 섬이라도 경찰이 지킵니다. 즉, 경찰이 지킨다는 것은 분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한국땅"이라는 의미도 있는 겁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화가 날 정도로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해하는게 안타까워서 설명해 드립니다. 참고로, 한국정부에서 저처럼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는 것도 사실은 "이슈화"를 최대한 막아보려는 뜻입니다. 이런 숨은 뜻도 모른채 오히려 일본인들을 위한 일인지도 모르고 자꾸 "이슈화"를 시도하려는 분들....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독도가 '분쟁지역'이 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상정되면 이길 확률 매우 낮습니다.
현명한 장수는 자기가 유리한 때와 장소를 골라서 전쟁을 치르는 법입니다.
이처럼 한때 국가적 자존심을 굽히는 것은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살 세상을 더욱 좋게 만드는 결과를 나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어쩌면 로마인 이야기에 나온것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기 싫은 것도 보야되고 참아야 될 것은 참아야 됩니다.
그런 눈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혜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죠.
혹시 아우구스투스처럼 국민들을 최대한 속이면서 국가적 자존심과 국력배양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엄청난 정치력의 소유자가 나타나면 뭐 이런 문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런 인재는 몇 백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게 현실이죠.
역사가 흐를수록 인류는 조금씩 진보하고 나아진다는 소박한 희망을 항상 품고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가 잘못생각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웬지 모르게 서글퍼지네요.
[동의]
Re: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및 잡담
번호:777 글쓴이:코르넬리우스 조회:15 날짜:2002/04/18 13:20
라비에누스님의 글을 읽고 감탄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대중적인 인기는 좋을지 몰라도
냉정히 따져보았을때 그것이 장기적인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키아를 정벌하고 다키아에서 나는 엄청난 금을 트라야누스는
공공사업이나 축제같은 것을 벌인다며 물 쓰듯 해버렸죠.
아마 그런식으로 풀려난 금화는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겁니다.
미친듯이 경기가 좋아졌지만 이로인해 경제시스템이 심하게 출렁거리고
별로 생산적인 것에 쓰이지 않아서 거품만 키웠을겁니다.
차라리 금화를 농업이나 공업/광업 발전을 위해 서서히 풀었다면
장기적인 경제 발전에 유익했겠죠.
물론 고대 로마인들에게 그런 복잡한 경제 운영을 요구한다는건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간 로마인들이 경제 운영 능력이
떨어졌다는것이 아쉽군요.
[반론1]
Re: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및 잡담
번호:776 글쓴이:Rain Maker 조회:16 날짜:2002/04/18 13:20
트라야누스...그는...역대 로마황제 가운데서는 정복자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로마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지정한 영토 이상으로더 많은 영토를 획득하려 하지도 않았고 또 획득하고 싶어도 획득할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마제국이 몽고제국 처럼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뛸일은 없겠지만 혹시 그리 되었다면... ㅡㅡ; 상상할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져...
머 그건 그렇고 트라야누스의 정복활동에 대해서 답글하신 님은 국력을 소모한 불필요한 전쟁이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여...물론 맞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경계선을 이어 받은 황제들은 넘지 않았고 굳이 넘을 필요도 없었으니까여...
그런데...왜 트라야누스는 경계를 넘어 정복 활동을 했을까여? 단순히 그가 군인 출신이었기에...전쟁을 좋아해서 그리고 더불어 로마의 자존심을 위해 그랬을까여?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떤 명분을 가진 전쟁이라 할지라도 국력의 소모를 가져오는것은 당연합니다. 그건 전쟁의 규모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말입니다.
하지만 전 트라야누스가 일으킨 정복활동과 전쟁은 비록 국력의 소모는 가져왔을 지언정 결코 불필요한 전쟁이었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우선 제가 생각하기에 전쟁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국가를 단순히 정복하기위한 전쟁과 아니면 어떤 특정한 이익을 위한 전쟁, 이념이나 종교를 위한 전쟁, 그리고 임진왜란과 같이 혼란한 국내 정세를 환기 시키기 위한 전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냥 할짓업어서 힘자랑하기 위한 전쟁(가장 불필요하고쓸데없는 전쟁이져)등..그위에도 많은 목적을 가진 전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답글하신님은 트라야누스의 전쟁을 단순히 정복을 위한 전쟁 그리고 자존심과 힘자랑을 위한 전쟁으로 보신것 같은데여...물론 이거야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를수 있는 것이기에 어떤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 생각엔 트라야누스의 전쟁은 단순히 정복이나 자존심을 위한 힘자랑이 아니라...아무래도 국내 정세를 환기 시키는 목적이 조금더 크지는 않나 싶습니다. 물론 로마의 자존심을 위한 목적도 포함되긴 했지만여...
사실 상식적으로 로마가 다키아를 정복한다고 해서 크게 이익 될것은 없을겁니다...다키아가 약간 거슬리게 굴긴 했지만,로마 입장에서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여... 하지만 파르티아 쪽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로마와 그나마 대항할수 있던 유일한 국가가 바로 파르티아 였으니까여...그외의 다른 로마의 적들은 야만족에 불구했으니까여... 이 파르티아에 대해선 로마가 신경을 상당히 썼을겁니다. 따라서 파르티아와의 국경부근에 많은 군단을 배치 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파르티아와 로마의 관계는 좀 미묘하고 복잡했습니다. 로마 입장에선 쉽사리 함부로 파르티아를 대할수 없었고 파르티아쪽에선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네로 황제 이후에 내전에 휩싸였었고 비록 혼란이 수습되긴 했지만 그 상황이 결코 예전 보다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황제 그리고 비록 암살당한 황제이긴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다스림으로 안정을 찾긴 했습니다. 사실 약간은 어수선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내전이 끝난지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그리고 주변 민족의 침입은 더욱더 극심했겠져...특히 파르티아의 경우는 로마의 상황이 좋지 못할땐 기어올르려구 벼르구 있었겠구여..이런 상황에 5현제 시대로 접어드는 로마...사시 네르바는 그 통치 기간이 짧았기에 그다지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 네르바의 유일한 업적가운데 하나가 5현제 시대를 열었다는 것...정도 ^^
어쨋든 그의 뒤를 이어 받아 첨으루 속주출신의 황제가 탄생합니다. 그것도 전폭적 지원하에... 사실 전폭적 지원을 받고 황제에 오른 이는 그다지 많지 않져 ^^ 트라야누스는 5현제 시대를 이어받은 만큼 그의 통치는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국외적인 문제로 정복활동을 했다는 거져 ... 여기서 왜 했느냐 하는 점이 문제 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 단순한 전쟁이상의 의미로 당시 약간은 어수선하고 침체되어 있는 로마제국을 상승의 분위기로 몰고 가기위해 전쟁을 일으킨 어찌보면 특별한 명분없는 자존심과 힘자랑을 위한 전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로마제국의 분위기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전쟁후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다시 원래 상태를 찾긴 했지만 말입니다.
한 국가를 다스리는데 있어 그 정치란 반드시 실리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침체된 국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어떤 정책을 쓰기도 합니다.군대로 치면 일종의 사기정도로 볼수 있져 제아무리 전력이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왜 싸워야 하는지...그리고 자신감이 없이 침체되어 있다면...결코 강한 군대라고 할수 없을것입니다.
트라야누스는 단순히 그의 군인적 성격과 힘자랑만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침체되고 어수선한 로마제국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한 목적이 더 컷다고 전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좋지 못한 문제점이 생기긴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의 전쟁을 불필요한 전쟁...로마를 군국주의화 했다는 평가는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하드리아 누스는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 방어선을 되돌렸습니다...그 이유는 우리는 추측만 할뿐 하드리아누스 자신만이 알고 있겠져...^^
[반론2]
제가 생각하기에는....
번호:778 글쓴이:트라야누스황제 조회:17 날짜:2002/04/19 10:21
인간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해서 항상 대비를 합니다.
그러니깐 보험도 생기고 은행에 돈도 넣고 그러죠...
전 로마도 이때문에 파르티아를 공격한것 같습니다.
흔히 파르티아를 가상적국이라고 하자나요...
그리고 좀 허망한 생각이지만 로마인들은 그당시
알렉산더대왕이 인도까지 갔다가 턴하고 죽었죠..
그래서 로마인들도 "인도까지 공격해서 밀면 그다음에는 땅이 없겠찌"
좀더 현실적으로 "바다일꺼야~"라고 생각했던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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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국가는 해체되지는 않습니다.
러시아를 예로 들어도 그 넓은 시베리아 땅에 한사람 살지 않아도
그곳은 러시아땅 아닙니까? (한사람도 살지 않는것은 아니고요...)
하지만 고대에는 이보다 덜 체계화 된 국가와 통제때문에
무한정 커지면 이곳이 내 땅인가......... 하고 헷갈리게 되죠....
결론적으로 저도 님들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더이상 로마가 커졌다면 국가가 흐지부지 되겠죠.....
하지만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를 공격하는것은(국가를 넓히는 행위는)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 군대를 빼도 평화로울 것이라는 것을
(즉 군대가 지키지 않아도 될만큼 평화로워졌다는것을)
너무 믿은것 아닐까요?
30개도 안되는 군단수로 그 넓은 경계를 지키기는 어렵지만
후방이 평온하다면 맘놓고 지킬수 있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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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Re:로마는 이미 중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번호:779 글쓴이:스틸리코 조회:13 날짜:2002/04/19 18:21
China. 이 단어의 유래는 중국의 진(秦)나라이고 진나라는 로마시대의 나라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화정 로마시절이죠. 아직 카르타고가 존재하던 시절같군요. 좀 더 정확한건 연표를 봐야하겠습니다만.
그리고 로마인들은 상류계층이긴 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 7권에 보면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가 월식을 이용해 도나우강 유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얘기가 나오죠. 즉 월식의 이유를 상류층은 알고있었던 얘기고 지구가 둥글다는것도 알고있었단 얘기죠.
그러므로 인도가 끝이다란 생각은 아니였을겁니다. 중국 다음에 뭐가 있었는진 몰랐겠지만. 신대륙의 존재에 대해서도.
[반론3]
Re:트라야누스의 메소포타미아 원정에 대해서...
번호:780 글쓴이:카이샤르 조회:9 날짜:2002/04/19 18:49
로마 시대의 가장 중요한 방위선은 도나우 강과 라인강, 그리고 파르티아와 대치하고 있는 아라비아 쪽의 방어선 이었습니다.
파르티아는 로마 주위의 십몇만 규모의 대군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하는 것은 순간은 군사적, 재정적인 손실이 따를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요한 방어선 하나를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리아, 이집트 등에 그렇게 많은 군단을 주둔하지 않아도 되고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재정적인 부담도 줄어들고 말이죠(꼭 파르티아를 속주화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리아 쪽에 있던 군단을 도나우 강과 라인강 쪽으로 돌릴수 있고 도나우강과 라인강의 방어선은 더욱 튼튼해 지겠지요
그래서 로마의 여러 장군들이 파르티아를 평정하려고 별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크라수스는 그들의 공격을 받고 살해되고 카이사르는 원정 가는 도중에 암살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신나게 쳐들어 갔다가 대패하져;;
저는 트라야누스가 조금 더 살아서 파르티아 원정을 끝 마칠 수 있었다면 로마에게는 안 한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이익이 생겼을 것이라고 봅니다.
인기를 위한 정책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죠,,,,
[의견2]
세베루스가 치하에서의 로마와 파르티아의 전쟁
번호:786 글쓴이:라비에누스 조회:7 날짜:2002/04/20 15:26
세베루스가 치하에서도 로마와 파르티아 전쟁을 벌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죠.
파르티아의 왕 볼로게세스 4세는 세베루스의 정적이었던 니게르를 후원하고 당시 로마의 속국이던 오스로에네를 충동질했죠.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니게르와의 내전은 세베루스의 승리로 끝나고 세베루스는 194년에 오스로에네와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아디아베네를 침공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자신이 후계자로 삼았던 알비누스가 여러 추종세력의 지원을 힘입어 반기를 들죠.
그와의 싸움을 위해 195년 세베루스는 원정을 중단하죠.
경쟁자들을 제거한 후 한 동안은 내치에 신경쓰던 세베루스는 197년,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다시금 재개하죠.
전쟁은 서로간의 자원과 인력만 소모하고 199년에 끝납니다.
조금씩 쇠퇴해가던 파르티아는 이 전쟁으로 더욱 체제유지가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셉티미우스의 뒤를 이은 카라칼라는 로마와 파르티아의 통합을 이루어내고자 파르티아의 아르카바누스 5세(Aratabanus Ⅴ)의 딸에게 구혼을 하였으나 실패하죠. 외교에서 실패한 카라칼라는 전쟁으로 이루어내고자 216년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재개했습니다.
아디아베네를 건너 메디아를 침공했고 주변지역을 약탈한 뒤에는 에데사에서 겨울을 보냅니다.
다음해에 있을 공세를 준비하던 카라칼라는 217년 4월 8일에 친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사주로 암살당하죠.
이 전쟁으로 인해 파르티아의 체제는 더욱 약해지고 227년 페르시아의 아르다쉬르 1세(224~241)와 샤푸르 1세(241~272)에 의해 파르티아는 멸망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는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펼치죠.
로마로 봤을땐 더욱 불편한 상대를 만난거죠.
파르티아도 강국이었지만 함부러 먼저 싸움을 걸진 않았지만 페르시아는 먼저 싸움을 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국방은 더욱 위태위태해졌죠.
페르시아의 아르다쉬르 1세는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하고 시리아와 카파도키아 속주들을 위협하고 있었죠.
이 당시 로마는 내분으로 힘이 약해져 있었고 이 당시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죠.
그래서 232년 외교적 방법으로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알렉산데르는 세 갈래의 공격 작전을 세운뒤 샐행에 옮깁니다.
그러나 전쟁은 교착상태를 유지하다 끝나고 알렉산데르는 로마로 돌아가죠.
여담이지만 그후 알레만니인과 게르만족이 국경을 돌파하고 갈리아와 라이티아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들과의 초전을 승리로 이끈 알렌산데르는 어머니의 조언으로 돈으로 게르만족과 화평을 이루어내죠.
아마 파르티아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로마의 국력이 약해져있었기 대문에 이런 방법을 선택했겠죠.
아무튼 이에 실망한 판노니아 군단은 트리키아 사람 막시미누스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키고 알렉산데르와 그의 어머니를 죽이고 세베루스 가의 통치를 종식시킴니다.
세베루스가 치하의 로마와 파르티아의 전쟁은 파르티아의 멸망과 페르시아의 등장을 가져오죠.
로마와 파르티아 둘 모두에게 안 좋은 결과만 가져온셈이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파르티아를 제압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을 가져올려고 했겠지만 결과적으론 국력약화만 가져왔죠.
파르티아의 뒤를 이은 페르시아는 로마와 여러차례 전쟁을 벌이죠.
파르티아보다 더 상대하기 껄그러운 상대를 만난거죠.
특히 샤푸르 1세는 여러 차례 로마의 국경을 소란케했고 로마는 그가 죽은 다음에야 게르만족을 몰아내기 위한 충분한 병력을 소집할 수 있었죠.
결론적으로 세베루스가는 파르티아라는 적국을 도모합으로써 안정을 찾으려 했지만 오히려 국방력 약화와 페르시아와의 소모전이라는 결과만 이끌어냈습니다.
[감상]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대한 리플글이 정말 많다~~~
번호:781 글쓴이:Rain Maker 조회:15 날짜:2002/04/19 20:15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대한 리플글이 정말 많다~~~^^
안녕하세염???
전 오늘 굉장히 놀랐습니다^^: 리플글이 이렇게 많을줄이야...ㅎㅎ ^^
비록...언제나 리플 글 올리시는 분들이 몇분 안계시지만...그래두^^
제가 처음 글올렸을때 보다는 많이 답글을 올리시는것 같네여^^;
제가 로마제국 멸망에 관해 글올렸을땐..두분이 리플해주셨었는데...
ㅠ.ㅠ ^^
글구...카이사르님은 저하고 같은 의견인듯^^ 트라야누스의 정복활동및 원정은 필요한것이라구 생각하시구...물론 그 이유에 대해선 저하고 약간 의견이 다르시긴 하지만...글구 또 그렇게 생각 안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분들의 글을 읽어봐두...충분히 그럴만 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 저두 여기서 마니마니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더욱더 카페두 활성화되구^^ 좋은거 같습니다~~~
그럼 앞으루도 좀더 많은 리플글이 마니마니 올라와서 카페가 활성화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엽~~~ ^^
[자료]
로마가 파르티아 원정으로 얻은 두가지...
번호:132 글쓴이:디오클레티아누스 조회:27 날짜:2001/08/13 22:39
< 편집자 주 :
로마가 파르티아 원정으로 얻은 것들이랍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는
적대적이면서도 따로 떼어 놀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파르티아는 로마의 최대적으로서 로마에게 있어서 군사적인 우위?(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마와의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둔 경우가 많았다..)에 바탕을 두어 승리했기 때문에 황제시대이후의 제국의 경계를 유프라테스강에 두어 파르티아와 대립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성장과 함께 동방에 대한 관심이 증대해지자 그 중간에 있는 파르티아와의 교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실제로 파르티아의 산업은 상업, 쉽게 말해서 중계무역에 그 바탕을 두고 있죠...
그럼 파르티아가 로마에 준 큰 상품은 무엇일까요...?
로마의 제국주의로 인해 로마의 부가 증가함에 따라 로마시민들은 사치품과 기호품을 선호하게 되죠..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중국(로마에서는 중국이란 표현보다는 세레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산 비단입니다...
로마인들에게 비단의 무서움을 보여준 일화가 있습니다..
물론 다 아시겠지만...
삼두정치의 거두중의 일인인 크라수스가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수행합니다..하지만 그의 역량부족과 기타 기후 부적응 등을 이유로 해서 거의 전멸하게 되죠. 자신역시 죽고 맙니다...
그(크라수스)와 많은 로마의 군단병들이 사막에서 죽어가면서 본 것은 바로 비단으로 만들어진 파르티아의 깃발이었습니다..
사막의 땡볕에서 빛나는 비단 깃발..정말 멋있겠지요...^^
그리고 두번째로 그곳에서 로마에 들어온 것은.....
165년에 접어들어서 로마의 군대는 드디어 파르티아의 중심에 들어섭니다..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동방에서 유래된 낯선 질병에 전염되었습니다. 그 질병은 얼굴을 변형시키며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것을 서양에서는 천연두라고 부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