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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월요일. - 나처럼, 주님처럼. 등 )
* 호명환 신부님 글 : 07:2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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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10 03:54
- 나처럼, 주님처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크게 요약하면 이런 것 같습니다.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네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네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이 주님이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그런데 오늘 말씀을 뜯어보면 사랑의 상승이 있습니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여기애인(如己愛人)에서,
내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여주애인(如主愛人)으로.
그러므로 상승의 시작인 나 자신처럼 이웃 사랑하기를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동일시(同一視)와 불이시(不二視)입니다.
동일시란 너와 나는 같고 하나라는 시각이고,
불이시는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우리 인간관계는 다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다름에서부터 출발하지만 같음과 하나를 추구할 수도 있고,
다른 존재가 같을 수는 없고 하나 될 수는 더더욱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다름 때문에 같을 수 없고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고,
다르지만 같음도 있고 둘이지만 둘이 아니라 실은 하나라는 걸 보는 겁니다.
이것을 쉽게 경상도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남이가?’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다르지만 남이냐 하면 남은 아니라는 말이고,
다른 것만 보며 남이라고 하지 말고 같은 점을 보며 남이 되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민족인데 다름만 보기에 남북이 적이 되고,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다름만 보기에 좌와 우가 극좌와 극우가 되어 싸웁니다.
이렇게 가다가 남과 북은 영원히 다른 나라가 되고,
대한민국은 둘로 쪼개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랑은 다름 때문에 남남인 채로 살려는 것을 극복하고,
같음을 발견하려고 애쓰며 하나를 살려고 하는 의지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는 남남인 채 사는 것이 편하고,
다른데도 같음을 보고 하나가 되려는 것은 너무 힘든 것인데
주님께서는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당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런 놀라운 표현을 하십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 이렇게 이웃을 당신 형제라고 하시고,
이웃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며 이웃과 당신을 동일시하시며
당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 신명기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며 ‘나는 주님이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라고 하신 분이 우리의 주인님인 것 맞습니까?
주인님이 이리 말씀하셨는데도 나는 남남인 채로 편히 살겠다고,
남남인 채로 편하게 사는 것에 안주하며 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앞에서 사랑은 의지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려는 의지이고 더 고귀한 사랑을 향한 상승 의지입니다.
고귀한 사랑이란 주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남이 아니라 주님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이 고귀한 사랑을 향한 상승 의지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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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은총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10. 05:1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8일 토요일 (호명환 번역) 열 번째 주간: 지극한 은총
은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언가가 아니라; 은총이 바로 하느님이신 바 그 자체입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은총이 하느님이신 바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선은 차별이나 선입견 없이 우주 전체의 틈새를 메워 줍니다. 하느님은 정말 모든 존재에게 더불어 얹혀 주시는 선물입니다. 모든 존재 사이의 공간은 절대 공간이 아니라 성령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존재들의 어둠과 빛을 한데 묶어 주는 "선의 접착제"이시고, 모든 것을 단절하는 죽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모든 것을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는 에너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모든 빚을 다 갚아 주셨다"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우주 안의 모든 결핍을 메워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진리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외에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은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언가가 아니라; 은총이 바로 하느님이신 바 그 자체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하셔야 할 일들 전체 목록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해 주신 모든 존재를 - 영원히 - 살아있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근본적으로 증거해 주는 이들 - 즉 예언자들, 신비주의자들, 성인들, 변모된 사람들 등 - 을 믿는다면 우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선이 이 우주 안에서 영원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이런 현상을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만, 그런 단어도 사실은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때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우리 경험을 통해 알기는 하는데,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이가 하느님에게 은총이 아닌 다른 어떤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서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성서가 하느님을 영원히 고통을 주는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또 우리가 만들어낸 "화가난 하늘의 아버지"로 인해 하느님의 선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훤히 드러나듯, 성서가 지향하는 바는 하느님의 정의가 징벌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옳음, 조화, 균형, 그리고 존재 자체와의 새로운 관계 맺음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은총은 가장 먼저 자비, 즉 히브리어로는 hesed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hesed는 언제나 충실한, 계약에 매어 있는, 무한하고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을 일컫는 말입니다. 소생과 부활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모든 힘은 징벌에서가 아니라 이 너그러우심의 원천에서 솟아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면 다른 모든 것이 왜곡되고 심지어 파괴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어지는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은 이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종종 말했듯이, 하느님은 "숨어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순간이 하느님, 즉 은총으로 우리에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순간이 그저 또 다른 일상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이 모든 순간을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은총, 자기-계시, 가능성 등)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순간을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시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은총은 매순간 분명한 선물로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이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선물을 받게 됩니다. 요한 복음 1장 16절에서 말하듯이,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어떻게 지극한 은총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은총이란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모상으로 지어 주셨기 때문에 '나'를 몹시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은 '내' 존재 안에서 반사되는 당신의 신성한 모습을 보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진리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선물로 인해 '나'는 어떤 삶이 '나'에게 펼쳐질지라도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께서 '나'의 온유함과 충실함, 그리고 하느님과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갈망 안에서는 물론이고 '나'의 연약함 안에서마저 '나'를 보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Joseph G.
Adapted from Richard Rohr, A Spring Within Us: A Book of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16), 147–14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Geentanjal Khanna, Untitled (detail), 2016,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의 노력으로나 공로가 아닌 거저 주어지는 자비는 우리 삶에서 그저 손을 벌리기만 하면 되는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알게 되는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 사실 우리는 물 한 방울처럼 별것 아닌 것 같고 때로는 계획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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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맞추는 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10. 06:06
아시겠지만 성경의 장과 절, 그리고 제목은 본래 성경에 들어 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성경을 편집하고 번역한 사람들이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복음 말씀은 그 제목이 "최후의 심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매번 이 제목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보다는 인과응보의 하느님을 얼마나 더 많이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제목이 붙은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 제목을 볼 때마다 제 내면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게 됩니다. 자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무한함과 그지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저도 제 무의식 안에 이런 하느님의 이미지가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요....
틱낫한 스님의 책(어떤 책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에 나오는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우리 마음은 수천, 수만 개의 채널이 있는 텔레비전과 같은데,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우리 삶에 해가 되는 채널을 무의식적으로 보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사랑과 자비의 채널보다는 폭력과 살인, 복수가 넘쳐나는 방송을 계속해서 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무의식에 계속해서 쌓이는 것은 긍정이 아닌 부정이 쌓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의식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랑과 자비, 너그러움이 잔잔하게 흐르는 방송을 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가 사랑과 자비, 그리고 너그러움, 관계 맺음 등의 긍정을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식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바꿀 수 없는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너무 오래 익숙해진 정신 구조를 고쳐 나가는 데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의 핵심 메시지는 최후의 심판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 구조가 조작해 놓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 메시지는 "너희가 형제들인 이 가장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질문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터인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삶, 즉 이전의 삶은 다 지워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삶(윤회)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윤회를 상정하면서도 업보(carma)에 대해 왜 생각했을까요? 모든 것이 다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니 윤회라는 것도 결국은 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윤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제 CAC(리처드 로어의 '활동과 관상 센터') 매일 묵상에서 리처드 신부가 말하듯이 성경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의 잘잘못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분명히요!!!
코헬렛서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가 쓰러진 자리에 남아 있다."(11,3). 우리 인생은 딱 한 번 주어진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도 그 부자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대로 의식적으로 긍정의 채널을 틀려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죄성에도 불구하고 '나'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남'과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누가 온전히 양쪽(오른쪽)이나 염소쪽(왼쪽)에 완전히 걸맞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시는 도전은 그저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느님 자비에 맞추라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이들의 부족함과 연약함, 죄를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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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지면서 걱정이 생겼습니다. 본당에 가면 여름 캠프를 함께 해야 하고, 따라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해야 할 텐데 저 자신이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계속 걱정이 되었고, 나름의 생각 끝에 도서관에 가서 ‘수영 교본’을 빌려서 읽었습니다. 방학 전에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름 캠프에 가서 멋지게 수영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수영은 물에 들어가야지만 배울 수 있으니까요.
종종 ‘기도할 줄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기도할 줄 알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도 관련 책을 계속 읽으면 될까요? 기도에 관한 강의나 피정에 참석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직접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며 기도를 아예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대화도 만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는 정의를 기억하면서, 사람과 대화하듯 하느님과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을 많이 읽고, 교리 지식에 대해 박식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수영을 잘하기 위해 책만 읽고 있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성경과 교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또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에 다가선 것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로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 배고픈 이, 목마른 이, 병든 이, 억압받는 이, 소외된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시지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2.42)
이웃을 향한 사랑이 곧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의인으로 인정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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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아이들은 틀에 맞추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잠재력을 펼쳐나가야 하는 존재다(제스 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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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프란치스카 로마나 대축일(마태 22, 34-40)
오늘은 [또르 데 스뻬키 수도회](Tor d'Specchi)의 창설자요, 로마의 주보성녀인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1384~1440)) 대축일입니다.
프란치스카 로마나 성녀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성인 돌아가신지 36년 후인 1384년에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의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열두 살 때쯤에, 부모님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 40여 년 동안 결혼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전쟁과 역병으로 인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고, 로마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성녀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직접 봉사하면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녀는 1425년 8월 15일, 45세 때, 현재의 프란치스카 로마나 수도원인 [산타 마리아 노바 수도원]의 봉헌자로 응답하였고, 1433년 3월 25일에 함께 봉헌한 자매들과 함께 [또르 데 스뻬키](Tor d'Specchi) 수녀원을 창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창설한 이 수녀원에 자신은 입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혼인한 한 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52세 때, 1436년, 그녀는 남편이 타계하자, 비로소 공동체에 입회하였습니다. 한참 늦은 ‘늦깎기 성소’인 거죠. 그리고 4년 후, 1440년 3월 9일 56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삶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는 가정과 신앙의 조화입니다. 성녀는 결혼한 여성으로서 가정을 충실히 돌보면서도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이 됩니다.
<둘째>는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성녀는 전쟁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녀께서는 우리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셋째>는 사랑과 봉사의 실천입니다. 성녀는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직접 돌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통해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르 벡에 있는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봉헌자 수녀원”의 사라 수녀님은 “오늘 올리베따노회 수도자들에게 주는 성녀 프란치스카의 메시지”를 세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예, 제가 원합니다.” 라는 순명, 곧 봉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봉헌되고 선사되고 바쳐지고 남김없이 자신을 쏟아 붓는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되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을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계획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더 좋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 계획에 늘 열려 있으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께 바치는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은수 성소를 갈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열두 살 때, 부모님의 뜻에 따라, 불타오르는 자신의 갈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의 부르심에 “예, 제가 원합니다.” 하고 응답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성 알렉시오의 전구로 기적적인 치유를 얻게 됩니다. 기도 중 환시에서, 성 알렉시오가 그녀에게 “낫기를 원하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예,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낫기를 원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녀의 일생 전부는, 주변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 하인들과 이웃들의 요청에 대해, 온통 “예” 라는 순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녀는 1425년 8월 15일, 45세 때, 현재의 프란치스카 로마나 수도원인 [산타 마리아 노바 수도원]의 봉헌자로 “예” 하고 응답하게 됩니다. 그때 그녀는 [봉헌증서]를 통해, “저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저를 봉헌합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녀는 함께 봉헌한 자매들이 자신들이 봉헌을 공동체 생활로 확장시키고 싶어 했을 때도, “예” 라는 순명으로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녀는 [또르 데 스뻬키](Tor d'Specchi) 수녀원을 창설하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입회한 자매들은 여전히 [산타 노바 수도원] 수도원의 봉헌자 신분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곧 봉헌자 수도공동체였던 것입니다.
1436년 5월 20일, 그녀는 남편이 타계하자, 비로소 공동체에 입회를 청원합니다. 그때 나이가 52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예, 원합니다.” 라고 하던 그 순명의 정신이 마침내 수도생활에 대한 응답으로 심화되었던 것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영성을 지니십시오. 하느님께 ‘전부’를 바치면 그분은 ‘전부’를 되돌려주십니다. 툭 트여 막힘이 없는 영성을 지니십시오. 하느님께 전부를 청하십시오. 마치 소화 데레사께서 그리 하였듯이 ‘전부’를 선택하십시오.”
<두 번째> 메시지는 “당신(타인)을 위하여” 라는 연민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연민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십시오. 형제자매들의 좌절과 가난을 깊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십시오.”
<세 번째> 메시지는 “당신과 함께”라는 친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친교의 사람이 되십시오. 늘 타자에게 열려있고,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타자 중 으뜸 타자, 곧 ‘절대 타자’이신 하느님께 그러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한 몸”(Unum Corpus)을 몸으로 실현하십시오.” “사랑하기를 좋아하십시오. 여러분의 우정과 인간관계에 충실하십시오. 어머니가 되고 딸이 되고 누이가 되십시오.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고 형제가 되십시오.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가꾸어 나가십시오. 성찬의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성녀께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봉헌의 삶을 사십시오. 연민의 삶을 사십시오. 친교의 삶을 사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이웃을 남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로 보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내 몸을 사랑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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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아침에 달걀, 우유, 떡, 야채를 먹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무엇을 먹을지 선택합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도 달라집니다. 아침에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몸이 활기차고 힘이 납니다. 오트밀, 그리스식 요구르트, 달걀, 통곡물로 만든 빵과 같은 음식들은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고, 하루를 활기차게 살아가게 도와줍니다. 반면, 도넛이나 설탕이 많은 시리얼, 패스트 푸드 같은 음식들은 순간적으로는 달고 맛있지만, 금방 피곤해지고 건강을 해칩니다. 영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가난한 이에게 먹을 걸 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볼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할 때, 우리의 영혼은 점점 약해지고 병들어갑니다. 마치 아침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영적인 건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양과 염소로 나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를 입힌 이들입니다. 반면, 염소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아침에 꼭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 말씀, 용서입니다. 먼저, 기도는 우리를 하루의 시작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하루를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아침에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몸이 힘을 얻는 것처럼, 기도를 통해 영혼도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입는 갑옷과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싸움에 임하는 신앙인에게 무기와 같습니다. 기도는 먼 길 떠나는 자동차에 필요한 기름과 같습니다.
둘째,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마음을 다스려 줍니다. 하루를 말씀과 함께 시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작은 구절이라도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영혼이 더욱 튼튼해질 것입니다. 말씀은 신호등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미움과 분노를 품으면 그날 하루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실천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하루가 평안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 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선행 하나하나가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길입니다. 마치 매일 아침 건강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몸을 위해 건강한 아침을 챙겨 먹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용서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우리의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건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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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순절을 시작한 첫째 주 월요일에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심판의 모습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오른쪽에는 양들을, 왼쪽에는 염소들을 서게 할 것입니다. 양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양과 염소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요?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오늘 주님은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누구일까요?
우리 사회 안에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있음에도 드러나지 않아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이들이고, 노약자이며, 몸이 불편한 모든 사람입니다.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든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이들에게 ‘나에게 해준 것처럼 해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뿐만이 아닌 그들의 현실에 맞는 무언가를 해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제의 꿈을 키우는 이들에게 매년 쌀을 보냅니다. 나라는 달라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러보세요. 우리 손이 필요한 곳에 그 손을 펼쳐주세요.
⭐밥과 집
옷 가게
과일 가게
생선 가게
조명 가게
천 가게
하물며 반찬 가게......
거의 모든 상점을 가게라고 표현하는데....
밥을 파는 곳은 ‘밥 가게’라고 부르지 않는다.
밥집이라 부른다.
왜 그럴까?
밥은 집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밥은 가족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밥은 회복과 따스함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밥은 집에서 먹어야 일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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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 심판의 잣대
“사랑”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참 오랜만에 사순 제1주일 미사중 영성체후 기도후 잠시 공지사항에 준하는 말씀 전한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마 미사에 참석했던 신자들 마음속에도 깊이 각인됐을 것입니다. 미사강론후에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강론중 빠진 것이 있어 말씀드립니다.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미사전례입니다.”
사랑의 성체성사요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가 성체성사입니다. 바로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질그릇에 나오는 옛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시편을 큰 소리로 노래하는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든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그 진리를 체험하기까지는 낯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느님만이 기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악마도 그 기도소리를 듣는다! 네가 비록 시편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악마는 의식한다. 그들은 듣고 떤다!”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 떠는 것이 사랑의 찬미인 시편성무일도 노래랍니다. “악마여, 주님을 찬미하라!”하면 악마는 질색하여 달아난다 합니다. 사랑의 선택-훈련-습관을 위해 평생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영성훈련보다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만세칠창후 바치는 사랑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 ‘사랑의 전사’이다.”
교황님의 정치에 대한 견해에도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정치는 삶이요 정치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능력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는 ‘애덕의 최고의 형태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가톨릭신자는 자신의 최고의 것을 봉헌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20년 이상 알고 지내는 모녀분이 오랜만에 함께 피정을 왔고, 그 어머니가 율리안나 딸에 대한 칭찬이 좋아 격려하고 싶어 율리안나를 불러 그대로 전했습니다.
“우리 율리안나는 크게 성숙했고 도량도 크게 넓어졌습니다. 저는 율리안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랑의 성숙이요 사랑의 도량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가 사랑하라 연장되는 선물같은 날들입니다. 저역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매일강론입니다.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이요 임종시에도 남는 아쉬움은 더 사랑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일 것입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현대판 악령들린 사람들처럼 증오, 혐오하고 싸우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억울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 인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이요 평생공부가 사랑입니다. ‘평화학’, ‘화해학’이란 학문도 있다는 데 ‘사랑학’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학 박사되기가 소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오늘 복음에서처럼 최후심판의 잣대도 사랑입니다. 종파와 국적, 인종과 남녀 차별없이 온인류에 적용되는 사랑의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일반적 종교수행이나 관례나 관습이 아닌 실제적 사랑입니다.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몸의 현실에 직결된 구체적 실제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웃이 곤궁중에 있었을 때, 즉
“1.굶주렸을 때,
2.목말랐을 때,
3.나그네였을 때,
4.헐벗을 때,
5.병들었을 때,
6.감옥에 있었을 때,”
도왔는가 묻습니다. 즉 6개의 구체적 항목이 열거됩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양들과 버림받은 염소들로 분리하면서 곤궁중에 있던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는 누구나 예외없이 또 하나의 예수님이라는 것이며 곤중에 있는 이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해서 비로서 사람이요 사랑이 최후심판의 잣대이자 구원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고, 지도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하듯 디테일에 강한 사랑임을 오늘 레위기에서 배웁니다.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 맨처음에 나오고 구체적 부정적 ‘안된다’라는 이웃 사랑이 나열될 때 마다 후렴처럼 “나는 주님이다.”란 말마디가 못박듯이 나옵니다. 중간쯤에는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가 나오고 끝에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이 결론처럼 나옵니다.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입증되는, 거룩함이요 경외함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부정적으로 표현된 구체적 이웃사랑의 항목을 나열해 봅니다. 예나 이제나 영원히 준수해야할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1.도둑질해서는 안된다.
2.속여서는 안된다.
3.사기해서는 안된다.
4.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5.이웃을 억눌러서는 안된다.
5.이웃의 것을 빼앗서는 안된다.
6.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7.귀먹은 이들에게 악담해서는 안된다.
8.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된다.
9.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10.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는 안된다.
11.세력있는 자라고 우대해서는 안된다.
12.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된다.
13.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는 안된다.
14.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15.앙갚음 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긍정적인 사랑의 의무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3.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4.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5.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정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요 디테일에 강해야 하는 사랑인지 또 사랑이 모두요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임을, ‘사랑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평생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이요 저절로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겸허한 자각이 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은총이 우리의 사랑실천에 좋은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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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장 작은이와 만나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가장 작은이에게
눈길 건네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
눈길 건네는 사람은
사람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사람을 보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스스로를 보는 사람은
스스로인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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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2-33)
사람의 아들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이 말을 보면 그때 지상의 사람들은 섞여 있습니다. 의로운 이들이 사악한 이들과 나란히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구별할 수 없게 섞여 있습니다. 의인들과 악인들 사이에 눈에 보이는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겨울에는 건강한 나무와 말라 죽은 나무를 구별할 수 없지만 아름다운 봄에는 구별할 수 있듯이, 믿음과 행실이 각 사람을 드러내 줄 것입니다. 악인들에게는 잎도 없고 열매도 없을 테지만,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잎사귀를 옷처럼 입고 영광의 열매로 장식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거룩한 목자 주님에 의해 나뉠 것입니다. 지상의 목자는 동물들을 몸 생김새에 따라 가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의 생김새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십니다. 양은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으므로 온유하고 누구에게 해를 입으면 저항하지 않고 견디므로 인내심이 있어 의인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인들은 염소라고 하십니다. 다른 동물들에 대한 변덕스러운 행동과 자만심, 호전성 같은 악덕이 염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카푸토는 이러한 고통의 진단과 그 해결책인 버림이 부처가 씨름했던 고통의 문제와 대단히 유사하다고 말한다. 부처가 제시한 고통의 해결책은 아집과 욕망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다. “부처가 그랬듯이. 엑카르트도 비슷한 처방을 내린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처방한다: 그대 자신을 포기하고,그대 자신을 버려라." 엑카르트는 사람이 아집을 버린다는 게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참되고 완전한 의지가 되려면, 오로지 하느님의 의지 안에서 걷고, 아집을 여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할수록, 참된 의지는 하느님 안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실로, 자기를 여의지 않은 채 수천 편의 시편을 낭독을 하는 것보다는 자기를 여의고 “안녕하세요 하느님!" 하고 한마디를 하는게 더 낫습니다. 자기 포기 없이 해외 순례를 하는 것보다는 자기를 포기하고 내딛는 한 걸음이 더 낫습니다.
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버린 사람은 완전히 하느님으로 둘러싸일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만지고 싶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만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히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그를 둘러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의 두건이 나의 머리를 감싸듯이 말입니다. 나를 만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누구보다 먼저 나의 옷을 만지게 될 것입니다.(346)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18,12-22
되찾은 양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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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후의 심판
강만연 [fisherpeter] 250309. 22:24 ㅣNo.180619
우리는 흔히 심판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앞설 것입니다. 일단 신앙 안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은 무학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그런 내용의 복음입니다. 세상에서도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법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개별적인 내용 그 자체를 언급하는 것보다 다른 각도에서 한번 오늘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흔히들 누군가는 오늘 복음을 너무 지엽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는 보편적으로 '최후의 심판' 이라고 명명합니다. 제가 왜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지엽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하느냐 하면 그 근거가 있습니다. 이건 성경에 있다뿐이지 성경 어디에도 그 마지막 장면의 한 부분을 묘사를 했을 뿐이지 이게 절대적인 심판기준이라고 그 어느 곳에도 명시적으로 밝힌 부분은 없습니다. 아니면 최후에는 이렇게 심판하겠다고 하는 단정적인 말씀의 표현도 없습니다. 저는 이부분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생각을 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오늘 복음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근거를 논리적으로 반론을 제기한다고 한다면 분량이 엄청 많을 것 같아 그건 생략하겠습니다.
결론만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최종적인 상황에서 모든 걸 다 참작한 후에 일종의 정상참작의 사유가 될 것입니다. 또한 최후의 심판에서 흔히들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말을 하는 건 잘못됐습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아직 하시지 않았는데 마치 인간이 하느님이 이렇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사실 냉정하게 따지면 이처럼 무례한 행동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옹기장이 비유의 말씀은 성경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잘못 해석한다고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다만 성경 말씀에 비추어 그걸 합리적으로 해석을 해봤을 때 이렇게 하시지 않을까 하는 추론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느님께서 이런 추론까지도 허용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냥 맨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주실 필요도 없으셨고 아예 로봇처럼 그 어떤 판단조차도 허용이 되지 않게 창조를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성을 부여하신 것은 어떤 걸 그 이성에 근거해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봐야 하는 게 정상적인 판단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런 목적이 없으시다면 저는 그처럼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비참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같은 존재인 인간으로부터 경외를 받으신다면 하느님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형편이 없는지는 자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의 가치에 따라 하느님의 가치라고 말하기엔 표현이 좀 그렇지만 하느님의 존재가치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주변에 있는 사람과 함께 평가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군인 왕과 또 훌륭한 재상이 있다면 과연 왕이 훌륭하니 그 밑에는 그에 걸맞는 신하가 있다고 평가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잠시 어떤 근거를 제시하다 보니 이런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잘못 간과하고 있는가 하면 간혹 가다가 보면 심판 때 마치 세상 법률에서처럼 상계를 하는 표현을 사용해 이야기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만약 하나를 악행을 저지르고 또 하나의 선행을 했다고 했을 때 심판이라는 말의 틀 안에서 주고받고 결산을 하면 수학적으로 제로가 되는 것처럼 말을 한다면 논리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여긴 심각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오류가 생길까요? 바로 선행은 선행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어야 그게 진정한 존재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떤 죄나 악행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 역할을 한다고 하면 그게 어떻게 선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설령 겉모습은 선행인 것처럼 보여진다고 해서 선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 생각이 합리적인 생각인 것 같다고 동의가 되신다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일명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이 내용의 기준이 절대적인 심판기준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내용이 엄청 고민을 해야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오늘 복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심판의 다른 요소도 있는데 이게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오도를 한다면 그럼 다른 그 어떤 행동이나 행위 같은 것 가령 예를 든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어떤 최소한의 규율이나 규칙 같은 것은 배제를 하려고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현상이 얼마나 모순이 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 부분을 강조한다면 어떤 결과물을 얻는 데에 그 과정은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절대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원래 사람이는 존재 그 자체는 어떤 행위를 해석할 때 일단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걸 절실히 체험을 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저도 나름 합리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사고를 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몰랐는데 작년에 어떤 계산을 했는데 그때 정말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의 입장에서 해석을 할 때 그게 자신을 위한 의도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대부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제가 크게 느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합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어떤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완전한 인간이 아닌 이상은 그런 흠결은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걸 인정할 수 있어야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오늘 심판의 기준을 이해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 이하의 것은 당연히 잘 이행한 후에 오늘 복음의 기준이 적용된다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 이 사실을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제가 쇼킹한 한 마디의 말로 표현을 하면 피부에 절대적으로 와 닿을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최후의 심판 때 하느님께 이런 말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시면 제가 오늘 언급한 이 모든 말씀이 명쾌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미사도 게을리 하고 세상 일에도 열심히 하면서 마태오 복음 25장에 있는 말씀을 언제 신부님이 강론을 하셨는데 뭐 계명 같은 것도 잘 지키고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얼마나 세상에서 살면서 작은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었는가 하는 게 심판의 척도가 된다고 해서 저는 그 말씀을 철떡같이 믿고 그냥 세상 살면서 제가 일해서 얻은 수입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으니 제가 미사도 궐하고 한 것은 다 이해해 주실 것이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래, 사랑을 많이 베풀었으니 오른쪽으로 가 천국의 유업을 물려받아라" 하고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은지 한번 묵상해 보시면 그냥 답이 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표현을 이해하시고 다시 한번 제가 오늘 올린 글을 보시게 된다면 처음 보셨을 때랑은 생각이 많이 변화가 있으실 것 같다는 말씀을 자신 있게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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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지금 이 시각에도 최후의 심판은 도처에서 /
박윤식 [big-llight] 250309. 19:37 ㅣNo.180612
영생은 죽음 뒤에 시작되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만 만족한 채 매일 매일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의 삶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만든 스스로가 홀로된 모습인지, 아니면 그 누군가와 공감하는지를 곧장 아는 그때가 바로 영생이리라. 참 의미 있는 풀이이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생각한다. 얼마나 계명을 잘 지켰는가? 얼마나 많은 헌금을 내었는가? 얼마나 죄짓지 않고 살았는가? 이러한 것들이 저 세상 어딘가에서, 우리가 받을 최후의 심판 기준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후의 심판에는 그런 기준은 아예 없다. 교회의 직책에 대해서도, 숱한 이들께 전도한 건수도 찾지 못한다. 위아래 방방에 예수님 달린 십자고상만 있다고 꼭 주님을 모시는 게 아니었다나. 매일 주님 부르며 기도하였다고 해도, 그분과 함께한 게 아니라나. 우리보다 못한 작은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때에야, 비로소 함께 한 것이었단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힘들 때 언제나 어루만져 줄 분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우리가 도와드려야 할 신세인 것 같다. 아무 힘도 영향력도 없는 헐벗고 굶주린 이가 바로 당신이라기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나.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다.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바로 당신이시라니.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지나쳤던 가난한 이들이 다 예수님 당신이었단다. 기절초풍 할 노릇이다.
하느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그날에 우리를 왼편오른편 편 가르실 때에 어떠한 죄를 저질렀는지를 보기보다는 우리가 타인을 위해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를 카운터 하신단다. 또 얼마나 이해타산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죄를 얼마나 저질렀는지를 헤아리시기보다는, 타인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었고, 또 얼마나 이해타산 없이 선행을 베풀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거다. 오직 이웃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그들에게 과연 당신 대하듯 한 것인지만 따진단다.
그렇다. 지금껏 우리는 베푸는 선행이야말로 악행을 이겨내고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크고 작은 저지른 죄보다, 얼마나 이웃을 위하고 또 진정성으로 선행을 했는지에 그 가치를 꼭 두어야겠다. 우리 주변에는 외롭고 지친 이들이 참 많다. 따스한 이의 정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자. 아무리 주님 계명을 많이 안다 하여도, 사랑 실천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허공에 떠다닐 것이기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분리할 수가 없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분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가장 작은 이들도 사랑할 수밖에.
그리하여 이번 사순에는 어렵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 봉사를 정성껏 하도록 마음 다져야겠다. 예수님 재림해서 행할 그 마지막 심판 기준은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평범하고 작은이들께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가 기준이 될게다. 곧 보잘것없고 굶주린 이들께 먹을 것을, 목마른 이들께 마실 것을, 나그네와 병자들을 살폈는지가 되리라, 그들을 예수님처럼 귀하게 여겨 따뜻이 맞는 사랑실천으로 우리믿음을 증언하자. 따라서 죄 짓지 않아 용서 청할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보다, 얼마나 진정한 마음으로 작은이에게 다가갔는지에 그 참가치를 두자. 최후의 심판은 그때가 아닌 지금 이 시각에도 도처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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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 준 의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가장 작은 이들’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의인이 되려면, 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작은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이 죄짓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6절 참조).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10절 참조).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참조).
바로 이 작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어린이처럼 스스로 작아진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작은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의인들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업신여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해서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머물 곳이 없는 이들은 죄의 유혹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과 함께하도록,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서로 도우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이들’이 되어 ‘작은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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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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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임금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자신에게 해 준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옆에 있는 가장 작은 이가 임금이라면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한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임금이기에 잘 해주고
작은 이이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임금에게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경우에는 임금을 대하는 것을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옆에 있는 이가 가장 작은 이라서 도와주지 않는 것이나
그가 임금이라서 무엇인가 받으려고 도와주는 것은
도움의 대가를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 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어도
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퍼 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나도 누군가에게 무한히 받아야 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원하는 때에 즉시 받을 수 있다면
우리도 옆사람이 원하는 것을 즉시 줄 수 있습니다.
주기 위해서 받아야 합니다.
받기 위해서 주시는 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을 다른 관점에서 읽으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베풀었는지는
내가 필요한 것을 받기 위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었는지로 바뀝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은
저 세상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먼저 하느님께 청하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것을 채워주시는 것은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기에
보이는 인간에게 청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지지만
하느님과 관계 맺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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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하느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사람을 얻는 것이
곧 하느님을
얻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를
찾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보다
먼저
가장 작은 이를
끌어안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만들고
이루어내시려는
진정한 복음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서
너무 먼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
너무 작아서
우리가
못 보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으로
시작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선는
가장 작은 이가
되시어
당당하게
사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기에
사랑의 실천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버리면
안 보이던 것이
못 본 것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굶주림과
추위와
목마르심과
헐벗음과
병드심과
외로움에
다가가는
사순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깨어나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가장 작은 이를
보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의 오늘
되십시오.
실행으로
옮겨지는
사랑의 평등이며
사랑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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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웃픈 현실 앞에서...
사순시기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회개(悔改)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지난 시절 지은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음’입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가슴도 치고,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가슴을 치는 행위도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죄나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도 회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다른 측면의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라는 표현 안에는 ‘안다’ ‘인식한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려서, 삶에 여유가 없어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미처 몰랐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 역시 회개입니다.
칼라너 신부님의 표현에 따르면 회개란 우리가 지니고있는 지극히 협소한 인식 지평을 더 넓게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더 깊어지고 더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중요한 노력이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는 주님,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주님, 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 나의 고통을 보고 계시는 주님, 나의 작은 신음소리 조차 귀기울이시는 주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으면 다음 작업이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 앞에 나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흙이요 먼지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죄와 한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지닌 존재입니다.
왜? 우리 각자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느님을 잘 알게 되면, 나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란 존재는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닌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 지상 과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회개의 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측면의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좋은 마음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목 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 한 잔 건넸는데, 그것을 받아 먹고 마신 사람들이 예수님이시랍니다.
우리는 습관처런 병자 방문을 가고 교도소 면회를 갔는데. 거기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이 또 다른 예수님이시랍니다.
회개와 관련해서 요즘 시국 돌아가는 것을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큰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고 김치찌개를 맛나게 드시고 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그는 죄중에서도 가장 큰 죄, 자신을 모르는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그런 죄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최악의 생활고와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참담한 사태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가슴을 찢고 있는데, 무슨 세계 챔피언 먹은 것도 아닌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주먹을 불끈 쥐고, 정말이지 참담하고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와 그 가족, 주변에 죽치고 있는 하이에나 무리의 회개와 새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슬픈 저녁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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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31-46: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순절에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굶주리시고, 당신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종들 안에서 헐벗으신 분이시다. 모든 병을 고쳐 주신 분은 당신의 종들 안에서 병드셨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시는 분이 당신의 신자들 안에서 감옥에 계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혼자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으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주님께서는 옳은 일을 한 그들을 칭찬하셨다. 아버지께 복을 받는다는 것! 이렇게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35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얼마나 큰 복됨인가! 그분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신다.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 하신다.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지,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들의 행실을 단죄하신다.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그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죄받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이 이런 단죄를 받았다면 악마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46절) 죄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해 주며, 그분을 닮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모시고 사랑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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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옥이 없다는 헛된 희망을 주는 이들에게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짐승의 사랑의 수준이 있고, 인간, 그리고 성인들의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도 구제받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이와 달리 엄격한 심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지만,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이며,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하느님께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내가 먼저 구원받아 그 사랑의 기쁨과 능력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는 매우 탐욕스럽고 냉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과 직원들을 경멸했습니다.
어느 성탄 전날 밤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을 만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절대 다른 이를 돕거나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내면의 구원을 받은 이후에야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고 아기가 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의 눈높이에서 아이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만약 아기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고 그 물속에는 괴물들이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죽을 것이 뻔한데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게 사랑일까요?
부모는 또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게 함께 죽는 것이라고 믿고 뛰어들어 죽으면 그 부모를 통해 새로 태어날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는 생명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생명에 대한 경시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낚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깊이에 있는 물고기들은 낚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두운 심해로 들어가서 눈을 잃은 물고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 물고기를 낚겠다고 그 압력 높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시입니다.
반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어릴 적부터 가진 열등감과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증오와 야망으로 자신을
채웠습니다.
작은 악들이 쌓여 마침내 그는 유대인을 향한 끔찍한 학살과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최악의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최후의 순간에도 회개하지 않은 채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반지의 제왕』의 골룸은 우연히 절대 반지를 얻은 이후부터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 전체를 그 반지에 투자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반지를 얻으려는 집착만이 남아 삶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저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해 몇 년간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저에게 다가오기 어려워집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더는 희망을 할 수 없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다른 죄는 용서받아도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비행기의 비상 상황에서 산소마스크를 먼저 착용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 안전하고 구원받은 상태에 있어야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반드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야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옥이 존재하고 심판이 존재합니다. 사랑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모기나 기생충은 사랑을 배울 수 없는 수준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은 나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경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받아서 주는 것이라 그 받은 사랑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하느님이 계셔야 사랑이라고 말하며 하느님 생명까지 경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심판이 없는 게 사랑이 없는 것이지, 사랑이 있다면 심판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서도 일부러 죄를 짓는다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제물이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판, 그리고 적대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에 대한 무서운 예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히브 10,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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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1-46).”
1) 이 말씀의 핵심 주제는 ‘사랑 실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작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관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다가는, ‘불우이웃 돕기’만 잘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그런데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온 삶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온 삶으로’ 실행해야 할 ‘아버지의 뜻’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실천’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고(루카 10,25-28), 그 율법학자가 다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29-37).
2) 신앙인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사랑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해야 하고, ‘나보다 작은 이들’도 사랑해야 하고,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잘 모르는 사람도,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도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고, 정치적인 신념이 다른 사람들도, 식구들도, 친척들도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정치적인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비방하면서 적대시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사탄의 종교라고 비난하는 자들은?
그래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3) ‘하느님 사랑’을 ‘신앙’으로, ‘이웃 사랑’을 ‘생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있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에 신앙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쭉정이’이고, 쭉정이 같은 신앙은 신앙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마태 3,12).
반대로 사랑은 있는데 신앙이 없다면?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사람이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될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4) ‘사랑 실천’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는,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이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입니다.
5)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의 44절에 있는,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는, 뜻으로는 “주님, 주님께서 언제”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작은 이’가 되셨느냐고 묻는 말이고, 그렇게 되셨다는 것을 자기들이 알았다면 곧바로 가서 도와드렸을 텐데, 몰라서 못했다고 변명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답변은,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이 곧 나다.”입니다.
사실 ‘작은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6-27).”
‘작은 이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고, ‘나’입니다.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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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집필한 <영신수련>을 보면 “두개의 깃발”이라는 챕터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그 깃발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고, 그 주변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 깃발 아래에 모여 있으면 성공과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지요. 그러나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의 최후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다 결국 단절되고 마는 것, 즉 ‘지옥’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 깃발은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고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엔 힘들고 괴로운 표정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 깃발 아래에 모여 있으면 고통과 시련이 계속될 것만 같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모인 사람들이 마주할 미래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친밀해지다가 결국엔 완전히 일치되는 것, 즉 ‘천국’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깃발 아래로 모여야 할 지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아는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건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 마음이 붙들려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의 순간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오면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온 의인들은 당신 오른쪽에, 주님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욕망에 휩쓸리며 살아온 죄인들은 당신 왼쪽에 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 오른쪽에 서 있는 이들, 즉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 있고자 노력한 이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고, 그분 왼쪽에 서 있는 이들, 즉 사는 동안 ‘사탄의 깃발’ 아래에 서 있으려고 발버둥 친 이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으로 가게 되지요. 이 때 왼편과 오른편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심판의 기준은 ‘죄’를 지었는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주변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즉 나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으면 하루 하루 살기가 버거운 어려운 이웃들에게 평소에 사랑과 자비를 얼마나 열심히 실천했는가에 따라 내가 영원한 삶을 누릴 장소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주님을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데, 그분은 어린이와 같이 작고 약한 이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실 정도로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과 특별하고 깊은 친교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시간을 내서 무료급식소에 봉사를 가면, 그곳에서 굶주림에 시달리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가출청소년 쉼터에 간식이라도 사서 가면, 그곳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떨며 사랑과 관심을 갈망하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 가득한 마음을 안고 병실을 찾으면 그곳에서 매일 계속되는 십자가 고통에 너무 아파 신음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편견을 무릅쓰고 높은 담장을 넘어 교도소를 찾으면 그곳에서 깊은 후회와 절망으로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난 주님으로부터 환대받지 못하면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괜히 왔나?’하는 생각에 상처받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찾아가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그분 마음을 열면 나를 괴롭히는 고통과 시련, 슬픔과 아픔을 이겨낼 힘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돌보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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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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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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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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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가장 큰 기쁨 속에 살아가는 삶
<2025.3.10>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0:1~24절)
❝가장 큰 기쁨 속에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과 예수님에 대해 보고 듣는 일로 기뻐하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정말 기뻐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복음을 전하는 증인됨이 기쁨입니다(1~16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70인을 세워 그들 중 둘씩 짝을 지어 전도자로 파송하시면서 마치 어린 양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워 하셨습니다(1~3절). 전도자는 전도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서도 어떤 상황을 만나도 ‘평안이 있기를 빕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곳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그 평안이 그 사람에게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안이 나에게 되돌아오기 때문(4~6절)입니다. 또한 누군가 그들을 대접하면 그것을 당당히 누리되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병자를 고쳐 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을 말해야 합니다(7~9절).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그 사실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실을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자들에 판단과 선택에 있습니다. 아울러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임할 화 역시 그들이 져야 할 책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앞에서 중립 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전도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임무나 은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각자의 형편과 상황 속에서 지혜를 가지고 효과적인 전도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8:10)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복음의 메시지가 확장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은 도우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거절당함의 상처와 모함과 핍박이 있는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은 결코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기도보다 앞서지 않아야 하며,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과 기도로써 용기를 내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요, 소망임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조심스레 그러나 때로는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복음 전도자라는 사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택하시고,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임을 잊지 말고 순적한 전도의 문이 열릴 수 있도록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복음을 전하는 증인 됨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 자녀로 살아감이 기쁨입니다(17~20절).
70명의 전도자들은 기쁨을 안고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7절). 제자들이 귀신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유일하고 충분한 무기는 ‘주의 이름’이었습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 같다며 안쓰러워 하셨던 예수님은 승리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니 앞으로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제자들에게 더 기뻐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자만에 빠지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감을 기뻐하라고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그가 일어섰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 있고, 깊은 인생의 절망 가운데 거할 수도 있고, 사탄의 강력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질 때,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자랑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하나님께 이 거룩한 일에 쓰임 받고 있다는 그 자체입니다.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삶 속에서 참 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하늘의 비밀을 깨달음이 기쁨입니다(21~24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쁨에 차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새번역, 21절)..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22절) 외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2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이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24절,새번역)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을 통해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며,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려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자세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가난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며 의지하는 삶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음이 기쁨이 되는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성장하는 믿음 생활을 통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충분히 아는 단계에까지 이르기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육신적인 눈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음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이며, 찬양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일상의 삶에서 전도의 열매를 맺도록 때로는 선하게, 때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음이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0:1~2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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