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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26. 주일 큐티
마가복음 13:1 ~ 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관찰 :
1)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말씀하시다
- 1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 제자 중 하나인 이 사람은 성전에 대해서 아직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통해서 그렇다면 성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 세상이 끝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성전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잊고 있었던 것은 이미 솔로몬 성전이 무너졌었고, 스룹바벨 성전도 무너졌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 곧 세상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그것을 세상의 끝과 동일시 여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진작에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고, 성전보다 크신 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어도 이들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하나님의 임재 약속이 있는 성전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 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말씀대로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실제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예루살렘은 박살이 나게 됩니다. 오직 통곡의 벽만 남겨져서 옛 성전의 흔적이 남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이제까지 17번 파괴되고 18번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일이 주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한 것이거나, 무슬림이나, 십자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허용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보다 더 크신 분으로 성전이 표현하는 의미를 완성하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 성전이요, 참 제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생각하면서, 진짜 성전인 예수님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서슴지 않았습니다.
2)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3절 ~4절.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와서 어느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지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생각이 묻어납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 5절 ~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 말세에 대한 징조를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람산에서 제자들과 모여 앉아서 말세에 있을 일들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제자들이 이 때의 감람산에서의 이 말씀을 이해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이 말씀을 이해하는 이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특별히 오늘과 같이 말세의 끝에 다다른 상황에서 이 말씀이 진짜 말세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지셔야 할 십자가를 염두에 둔 상황에서 말세의 성도들까지 고려하고 배려하시면서 메시지를 남기고 계신 것입니다. 말세에 있을 난맥상을 이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별하고 이길 수 있도록 주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입니다. 요즘 네플릭스의 “나는 신이다”에서 언급하고 있는 JMS, 오대양, 아가동산, 영생교, 그리고 신천지의 이만희, 통일교의 문선명 등등. 이미 자신을 예수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다 가짜들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현재 54명의 예수가 남한에만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권능으로 오시고 구름타고 오실 것입니다. 심판주로서 오실 것이기에 초림의 예수님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오실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재난의 시작
- 7절 ~ 8절.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 주님은 말세에 있을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동요와 두려움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선지자라는 데이비드 무어가 북한이 쏜 핵미사일이 남한의 원자력 발전소에 떨어지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한 예언으로 동요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홍혜선 이라는 전도사가 북한이 뚫은 땅굴로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서 해외로 도망가는 교회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말세에 있을 환란을 피하라고, 피할 길을 찾아서 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에도 믿음을 잃지 말 것과 그것에 대해서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환란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과 고난을 함께 받으며,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를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어야 하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을 포기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아직 끝은 아니니라” 우리는 말세지말에 있다고 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주님의 말씀과 같이 끝은 곧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때를 지나치게 임박하게 여기지 않고 담담히 흔들리지 말며 주님의 재림을 기대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세를 살아간다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과부의 헌금과 같이 자신의 삶을, 이 부족한 삶을 주님께 소제와 같이 갈고 갈아서 곱게 빻아서 드리는 태도를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 사람들이 환난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넘겨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예정된 수순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예수의 제자들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의 상황이 특별히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불합리하게 핍박이 가해졌는지를 잘 경험했습니다. 포스트 모던의 세상에서 기독교는 가장 핍박받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언된 것이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이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국제적으로 살펴보아도 실제적 현실은 역사상 가장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는 시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모든 핍박들은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이고,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증거가 되는 일들입니다.
- 10절.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 이것이 또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아직 주님의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지 않았기에 말세이지만 아직 끝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박한 종말론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가운데 있는 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준비하며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11절.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 말세지말에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도우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아직 오순절이 이르지 않은 상황이었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성령이 오신 상황이 아니었지만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질 귀한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시면서 이 말씀을 증거해 주시고 계십니다. 말세의 환란에서 주님께서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권면이고 능력의 근원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 12절.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 이 일도 교회사에서 여러 차례 행해졌던 일들입니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친구 사이, 직장 동료 사이, 이웃 사이, 한 나라의 백성들 사이, 한 민족 간의 사이를 모두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전략이 발동될 것입니다. 이 일은 참으로 사탄의 전략이고 이간질 하는 ‘디아블로’로서의 사탄의 본질입니다.
- 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자들을 “이기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기 살기로 복음을 땅 끝에 까지 전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초대 교회 때 이미 상당한 지역까지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이 복음의 확산을 막았고, 궁극적으로 로마의 국교화가 기독교 복음의 땅 끝 전도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명분없고, 잔혹한 전쟁이었습니다. 교회가 힘을 얻어서 그 힘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모두가 다 실패로 끝났었습니다. 오직 끝까지 견디며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증거하는 전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 끝까지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고, 그제야 끝이 오는 것입니다. 순간 잘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세의 상황에서 끝까지 견디며 끝까지 잘 믿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인내로 열매를 맺으며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을 얻게 될 것이고 하늘의 상급을 얻게 될 것임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가르침 :
1)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님은 익히 아시는 바였고, 예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계획이었습니다. 요세푸스는 A.D. 68-70년의 유대 전쟁 기간 동안 죽은 유대인의 숫자가 약 백만 명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의 유대인 총 인구가 약 80만 명,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약 2백만 명이라고 추산할 때 이 숫자는 거의 전 유대인의 몰살을 의미합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주님은 미리 보시고 있고, 슬퍼하시지만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책임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그 핏 값을 돌리라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보다 더 큰 것으로 여기는 이들의 미련함이 그런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가혹하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길이었습니다.
2) 마지막 때에 있을 일들에 대해 설명하시고, 미혹 받지 말고, 두려워 말고, 끝까지 견딜 것을 주님은 권면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은 결국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아같이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미혹 받지 않기 위해,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견디기 위해 성령의 은혜를 구함이 지혜입니다.
3) 말세에 있을 일들을 알려주심은 속절없이 당하지 말라는 것이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시기에 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것을 이미 다 알려주셨기에 살 길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의 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4) 끝은 곧 되는 것이 아닙니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지 인간의 짧은 인생의 관점에서 말세의 임박함을 이야기하면 정상적인 삶과 올바른 삶이 흔들리게 됩니다. 급진적인 제자로서의 삶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삶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삶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적용 :
1) 성전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잘못 오해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옮음만 주장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봄으로 좌절과 절망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비록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지언정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볼 것에 대한 믿음으로 참으로 소망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무너질 성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고 기쁨이요 믿음의 중심입니다. 썩어지고 무너질 세상의 것에 믿음의 중심을 두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말세는 이미 왔습니다. 그것의 끝이 아직 오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그럼 말세의 성도들은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말세의 환란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이사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지진이 나면 지진이 난 곳에서, 전쟁이 나면 전쟁이 난 곳에서, 기근이 발생하면 기근이 발생한 곳에서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말 잘못했을 때는 혼나고, 그 행위를 돌이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혼나지 않고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더 악한 것이 됩니다. 성도들의 문제들은 어쩌면 빨리 하나님께 혼쭐을 나고, 그러고 돌이켜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정능력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서 살 길을 주시는 주님을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런 댓가도 치르지 않고 계속해서 이 땅에서 축복만을 받고자 하는 것은 못된 심보입니다.
3) 땅 끝까지 주님 나라의 복음이 증거 되어야 그제야 끝입니다. 임박한 종말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수일, 혹은 수년 내에 예수님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욱 긴 안목으로서의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코로나 19가 끝났고, 변한 것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사적 삶을 사는 성도로서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현상을 인정하면서도 종말론적인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장차 오실 주님을 기대하고, 일상 속에서 주님의 통치를 삶으로 살아내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