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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임할 바벨론 왕의 칼
겔 21:18-27
1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20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21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어귀에 서서 점을 치되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
22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설치하며 입을 벌리고 죽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설치하고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게 되었나니
23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
24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의 악이 기억을 되살리며 너희의 허물이 드러나며 너희 모든 행위의 죄가 나타났도다 너희가 기억한 바 되었은즉 그 손에 잡히리라
25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마지막 때이니라
2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27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겔 21:18-27 / [바벨론 왕의 칼]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19) `너 사람아, 바벨론 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올 만한 두 길을 그려 보아라. 다같이 바벨론에서 시작되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다 방향 표지판을 각각 만들어 세워라. 20) 한 길은 암몬 백성의 수도 랍바로 가는 길이요 다른 길은 유다의 한가운데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다. 21) 바벨론 왕은 이 갈림길에 이르러 점을 쳐서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그는 전동에 화살들을 담아 흔들고 수호신 드라빔에게 물어 보고 희생제물의 간을 잘라 그 형태와 무늬를 살펴보면서 점을 쳐서 22) 자기의 오른편 길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점쾌를 얻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결심을 세우고,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진격의 함성을 외치며 쳐들어와 예루살렘 도성 둘레에 장벽을 쌓고 그 성벽을 향하여 공격 진지를 구축하고 성문마다 공성추를 설치할 것이다. 23) 그런데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서 그런 점괘를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장담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벨론 왕의 점괘는 옳다. 예루살렘의 죄악을 폭로하여 그 백성이 모두 잡혀 죽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24)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가 저지른 온갖 죄가 폭로되는 날에는 바로 너희가 지은 죄악이 너희 자신을 심판할 것이다. 너희가 지은 온갖 죄가 너희의 온갖 행실에서 드러나고 너희가 지은 죄악을 통하여 범죄자로 폭로되었으므로 너희는 이제 원수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25)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의 왕, 너 더러운 범죄자야! 네가 최후의 형벌을 받아 죽을 그 날 그 시각이 닥쳐왔다. 26) 나 여호와가 직접 명령한다. 그의 왕관을 벗겨라! 그의 면류관을 치워라! 네가 통치하는 세상은 끝났다! 현재의 질서대로 남아 있을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는 모든 낮고 천한 사람을 높고 귀한 사람으로 받들어라. 강하고 권세가 많은 자들을 끌어내려라. 27) 나는 예루살렘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고 쑥대밭과 허허벌판으로 뒤엎어 놓겠다! 그러나 이 도성을 정의로 다스릴 그 평화의 왕이 올 때에는 이런 일이 더 이상 없어질 것이다. 나는 이 도성의 통치권을 그에게 넘겨 줄 것이다. 보라, 그가 이미 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말씀하신 심판의 예언은 유다의 역사 속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져 갈 것을 말씀합니다.
길을 그리라(18-21)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바벨론에서 유다와 암몬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유다와 암몬의 갈림길에서 바벨론 왕은 점을 쳐서 그 갈 길을 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에는 군사정보를 얻기 위해서 점을 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점을 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화살을 흔들어 아는 방법인데 보통은 화살에 이름을 적어 뽑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때는 유대 도시 예루살렘과 암몬 도시인 랍바를 썼습니다. 두 번째는 우상에게 묻는 방법인데 드라빔과 같이 몸에 지닐 정도의 작은 신상을 가지고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희생 제물의 간(肝)을 보고 아는 방법인데, 제물을 신에게 바치기 위하여 죽인 후 간의 색깔을 보고 선택했다고 합니다.
점을 치는 바벨론 왕(22-23) 바벨론 왕이 점을 친 결과는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바벨론 왕이 자신이 믿는 점술을 통하여 결정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계획 안에 있었는데, 바벨론은 공성퇴와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왕의 침략전(侵略戰)의 무서운 실정을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이는 이 예언을 듣는 자들(이스라엘)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도록 하여 회개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바벨론에게 충성하기로 맹세하였다가 배반한 무리들은, 바벨론의 왕의 점괘가 거짓된 것으로 생각하여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도 걱정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너지는 왕권(24-27)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엎드러뜨리고’ 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중복되게 하신 것은, 유다를 확실하게 패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라고 하셨는데, 훗날 다윗 왕통의 왕위를 이어받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습니다(눅 1:32).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에 대항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대항하였으며,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여 악을 행하기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드기야 왕에 대하여 ‘극악하여 중상(重傷)을 당할 왕’으로서, 그의 마지막 날이 이르러 관을 제하고 면류관을 벗기며 낮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눈앞에서 아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바로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왕하 25:3-7; 렘 52:10-11).
적용: 이방인을 통해서도 교만한 유대인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이러한 경우는 없었는지요.
극작가 ‘버나드 쇼’는 어느 날 기자로부터 ‘성경 66권 중에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책을 선택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욥기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게 곤욕과 질고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이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어렵고 고통당할 때 감사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두가 평범한 삶에서는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알기가 쉽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려움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신앙과 점
신윤식 목사
지난주에 하나님은 다시는 칼집에 꽂히지 않을 칼을 빼어들고 계시는 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나도 내 손뼉을 치며 내 분노를 다 풀리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고통이 언제 끝나는지에만 있었을 뿐입니다.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고 오직 고통이 끝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칼을 빼어 들고 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었을 뿐이고 그들의 관심은 현재의 고통이 끝나는 것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온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우상이라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기를 위해 존재할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존재할 피조물로 지음 받았는데 그 같은 피조물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 자기를 위한 삶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는 분노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을 때 관심은 미래로 향하게 됩니다. 자신의 장래가 어떨지, 또는 자기 자식의 장래가 어떨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 관심이 사람으로 하여금 복술가, 즉 점치는 자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현대 사회가 복술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라 할지라도 미래를 알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복술가를 찾지는 않는다 해도 현대 사회에 퍼져있는 여러 방법을 따라 자신의 미래가 어떨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술가를 찾는다면 그 이유가 복술가 때문이겠습니까? 복술가를 섬기기 위해서, 복술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복술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때문입니다. 자기 미래를 알고 미래가 좋지 않으면 좋은 미래로 바꿀 방법을 찾기 위해 복술가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와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는 관심이 가지고,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죄 문제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 신경 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 5:12절에 보면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복술을 끊는다는 것은 복술가를 찾는 속성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스라엘이 복술가를 찾는 것과 동일한 속성이 아닌가를 점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도 보면 능력이 있는 목사, 능력 있는 기도원을 찾아다니는 것이 많고 그것이 복술가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바벨론 왕이 점을 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19,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명하여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고 하십니다.
설명하자면 바벨론 왕이 칼을 들고 들어올 두 길을 그리는데 그 출발점이 같은 곳이 되게 하고 성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는 표지판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길 중에 한 길은 암몬 사람들의 랍바성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고 다른 한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에게는 암몬 나라도 점령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암몬을 치기 위해 군사를 끌고 출발하는데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한 길은 암몬으로 가는 길이고 한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남은 것은 바벨론 왕의 선택입니다. 그가 암몬을 치고자 하면 암몬이 먼저 무너질 것이고 예루살렘을 치고자 하면 예루살렘에 먼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바벨론 왕이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는 점을 쳤던 것입니다. 점을 치는 방법은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피는 것입니다. 화살들을 흔드는 것은 마치 점쟁이들이 산통을 흔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쩌면 화살 두 개에 하나는 암몬이라 적고 하나는 예루살렘이라 적어서 흔들어 그 중 하나를 뽑아 뽑힌 그것을 신의 뜻으로 여기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우상에게 묻는 것은 그들의 우상인 드라빔에게 그들의 방법으로 신의 뜻을 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생 제물의 간을 살피는 것은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의 간의 색깔이나 모양, 크기 등이 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고 생각하고 제물의 간에서 신의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바벨론 왕은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점괘를 얻고 예루살렘을 치게 됩니다. 이처럼 바벨론 왕이 두 길을 놓고 점을 치는 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의 연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 바벨론 왕이 점을 치고 점괘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행동한 것처럼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을 점을 치는 것과 같은 속성으로 대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바벨론 왕의 점괘를 거짓 점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맹약한 자들입니다. 바벨론에 충성하기로 맹약을 했는데 점괘가 자신들을 치라고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점괘가 나온 점을 엉터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바벨론 왕이 세운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에 원군을 청하여 대항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바벨론 왕이 그 죄를 기억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령 자신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쪽을 선택해야 좋은 결과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바벨론 왕이 점치는 수준과 같다는 것입니다. 두 길에서 어느 길로 갈지 점을 치며 신의 뜻을 묻는 바벨론 왕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 길을 그리게 하시고 바벨론 왕이 점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바벨론 왕이 신을 뜻을 묻기 위해 점을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보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 자체가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바벨론 왕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당을 찾아서 무당이 섬기는 신의 힘을 빌려 자신의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바벨론 왕의 점괘가 예루살렘을 치는 것으로 나왔을 때 바벨론에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은 바벨론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바벨론 편에 있는데 자신들을 치라는 점괘가 나올리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점괘가 암몬을 치는 것으로 나왔다면 그 점괘를 참된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기에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신의 뜻으로 인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술가나 무당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우상을 앞세워 점을 치며 자신이 원하고 누리고자 하는 인생을 살려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기독교라 하기에는 낯 뜨거운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현재보다 미래가 좀 더 낫기를 소망하고 그 미래를 위해 신을 찾지만 신앙은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자리와 형편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찬송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을 위해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열심히 충성하고 섬기면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으로 기대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우리의 ‘믿습니다’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조건과 상황으로 밀어 넣으시면서 그 가운데서도 ‘믿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세우셨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는 좋고 나쁨을 떠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이 믿음을 주신 이유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칼을 빼어 들고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밖에서 바벨론 왕이 점치는 것처럼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은 점괘대로 예루살렘을 치고 그로 인해 왕의 왕관이 벗겨지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바벨론 왕이 친 점의 점괘 때문일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의 점치는 종교심까지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기억하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왕의 왕관이 벗겨지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끊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없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왕을 원하고 왕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하고 이방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줄 능력 있는 영웅적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가 부강해지면 자신 또한 부강해 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일에 뜻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한 대로 왕을 세우게 하셨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왕의 왕관의 벗겨 버림으로 이스라엘 모든 왕의 왕 됨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참된 왕은 하늘로부터 오십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참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왕 되심으로 인해서 그 나라가 참된 생명이 있는 나라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상에서의 나의 미래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믿음의 관계에 있다면 믿음을 자라게 해서 좋은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점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뜻 또한 자신에게 좋고 유리한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대로 이것은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이 칼을 빼어 들고 분노하시는 죄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죄를 외면한 채 탄식이 없는 현재의 기독교의 모습이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점을 치듯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우리의 죄에 분노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구원의 조건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죄인에게만 해당됩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서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님을 알았다고 해서 자신을 위한 삶을 잘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죄로 인해 지옥 갈 자라는 것입니다. 지옥 갈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모든 죄를 덮으시고 죄 없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신자는 자기 미래에 대해 염려하거나 불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죽는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며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확실히 알고 그 세계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칼
에스겔 21장 1-32절 / 곽노아 목사
지진이 날 때나 세상의 어떤 재앙이 일어날 때 짐승들은 먼저 깨닫고 자신들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디로인지 도망을 간다고 합니다. 일본 고오베 지진이 날 때도 일주일 전부터 쥐들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었습니다. 특히 인간에게는 짐승들보다 더 높은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끓임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더 놀라운 지혜를 주어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성경에 “칼” 이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예언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약70번 정도로 가장 많이 기록되어져 있고 그 다음에 에스겔서로 약50번 정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장은 “칼” 이라는 말씀이 약20번 정도로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는 장입니다. 이렇게 “칼”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강하게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지만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촉각을 세우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내 칼을 칼집에서 빼리라(겔21:1-7)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먼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눈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절을 주목해 보세요. “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 내어 이스라엘 땅을 쳐서 예언하라” 3가지로 명령하셨습니다.
1.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해라.
2. 큰 소리로 외쳐라.
3. 땅을 치며 예언하라.
예루살렘을 향해서 땅을 치며 큰 소리로 예언을 선포하라는 것은 아주 급박함 상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문 앞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6절도 주목해 보세요.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 둣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그냥 큰 소리가 아닙니다. 허리가 끓어지는 애통함으로 슬피 울며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택한 백성들이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이미 계획된 심판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 심판 속에서 구원받을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스겔 선지자의 애통함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았습니까? 7절을 보세요.
무지한 자들이 에스겔이 슬피 울며 예언을 전해도 그들은 오히려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외면했고 무시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의 칼을 칼집에서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3절 보면 하나님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칼이 무엇이었습니까? 당시에 하나님의 칼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예레미야 시대부터 수없이 전해왔습니다. 더욱이 에스겔 시대에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1차 2차 공격을 받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나도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말씀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몇 주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버린 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선지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함에도 어리석은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소리에 귀를 더 기울였고 믿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더 솔깃하고 듣기 좋은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종들은 예루살렘이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바벨론에서 곧 해방될 것이라고 떠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은 마지막을 향해 무섭게 달려가고 있는데도 전혀 마지막에 대해서 준비를 하지 않고 복이나 받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듣기 좋은 말에 익숙한 귀들이 되어서 어리석고 무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이라고 깨닫고 회개하고 마지막을 준비하며 신앙생활 하여야 합니다.
3-4절에 보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라고 언급하셨는데 여기에서 “의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답을 4절에서 볼 수 있는데 4절에서 “의인과 악인”을 “무릇 혈기 있는 자” 로 바꾸어서 말씀하고 있는데 “혈기 있는 자는” 곧 모든 육체를 가진 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20장 47절에도 “모든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라고 하셨는데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5절에서도 다시 언급하시기를 “무릇 혈기 있는 자” 라고 하시면서 칼을 다시 칼집에 넣지 아니하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무너져 내릴 것이며, 손도 무릎도 재앙 앞에 두려워 떨 것이며, 그들의 영혼들도 두려워 떨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보라 재앙이 오나니 정녕 이루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무서운 재앙을 선포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습니까? 울면서 전하는 에스겔에게 “무엇이 그렇게 슬퍼서 우느냐?” 비웃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에 있을 재앙은 예루살렘 재앙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창세 이후로 찾아볼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이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마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고 있는 자들이 마지막 때에 있을 재앙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아니 알기나 하고 있습니까? 또한 알아도 비웃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의 칼을 칼집에서 곧 빼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깨어서 준비하는 지혜롭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칼의 노래(겔21:8-17)
19장에서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슬픈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는데 8-17절까지에서 또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는데 일명 “칼의 노래” 였습니다.
이 노래는 3연으로 되어 있는데 각 연의 초점은 “홀” 에 두고 있습니다. “홀” 은 고대 왕들의 권력의 상징으로 약1.5m 정도의 막대기를 장식으로 만든 도구인데 본문에서 “홀” 은 남유다의 왕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칼은 남유다의 왕권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칼의 노래” 3연 중에서 첫째 노래는 9-10절까지 부분인데 칼의 특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칼의 특징은 날카롭게 잘 갈아 번쩍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날카롭게 된 것은 10절에 보면 번개처럼 휘둘러 사람을 살육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칼은 무디거나 녹슨 칼이 아니고 날이 번쩍거리도록 준비된 무서운 칼이었습니다. 또한 이 칼은 번개처럼 신속하게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유다 왕권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자신들에게 임한 줄을 깨닫지 못하고 즐거워하고 교만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마지막은 수 차례 걸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은 기근으로 자식을 잡아먹고, 친구를 잡아먹을 정도로 백성들은 완전히 미쳐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말발굽에 도시와 성전이 불에 타서 황폐한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노래를 불러서 쉽게 알아듣도록 했지만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외면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어리석고 무지함이 이 시대에 없습니까? 에스겔 시대보다도 더 심각합니다.
11-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칼의 노래” 3연 중에서 두 번째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칼의 심판을 받을 대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에서도 칼이 사람을 죽이기에 사용하도록 아주 빛이 나도록 날카롭게 갈아졌다고 하였습니다. 그 칼은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백성”에게 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3절에서 “홀”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3절을 주목해 보세요.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슬피 부르짖으며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지어다” 라고 했는데 허벅다리를 치며 애통함으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에스겔처럼 가슴을 치며, 무릎을 치며, 땅을 치며, 애통해 하며 전하는 주의 종들도 보기 힘들지만 이렇게 전한다고 귀담아 듣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오늘날도 그럴 것입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혼자 무엇을 다 아는 것처럼 왜 그러십니까?” “당신만이 하나님의 종인지 아십니까?”
성도 여러분! 에스겔 선지자가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까? 왜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고 세상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반만이라도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14-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칼의 노래” 3연 중에서 세 번째 말씀인데 여기에서는 칼의 활동에 대해서 생동감있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세요. “칼로 세 번 거듭 씌우게 하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심각하게 임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14절에 “중상케 하는” 라는 말씀이 두 번 언급되고 있는데 밀실에 들어가서 대인을 중상케 한다고 하였는데 에스겔 8장에서 지도자들이 성전 안 밀실에서 우상을 섬기는 짓들을 범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은밀하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칼을 의인화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칼이 바벨론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고, 그 바벨론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도 내 손뼉을 치며 내 분을 다 하리로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노래를 불러서 깨닫게 하여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시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날마다 하나님 말씀의 비밀을 깨닫고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바벨론 왕의 칼(겔21:18-27)
하나님은 심판의 칼이 곧 바벨론 왕이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의 칼을 통하여 두 나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는데 먼저 예루살렘을 치도록 바벨론의 군대를 주관하셨습니다.
B.C 588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반역한 세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하였습니다. 세 나라는 남유다와 두로와 암몬이었는데 이중 두로는 그 위치상 공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두로를 일차 공격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우선적으로 남유다와 암몬을 공격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20-22절 말씀을 보면 더욱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립나에 이르러 그들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유다 수도 예루살렘을 먼저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요단 강을 건너 암몬을 먼저 공격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21절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공격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3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화살을 흔들어 점을 쳤습니다. 두 개의 화살에 두 도시의 이름을 써서 전통에 넣고 흔든 다음에 하나님의 화살을 뽑아 결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둘째는 우상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의식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셋째는 희생 제물의 간을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에게 드린 희생 동물의 간을 놓고 그것의 색깔이나 형태를 살펴서 결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세요. 점괘 결과는 예루살렘으로 정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사실은 점괘로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이 점괘를 치기 전에 이미 계획하고 계셨던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받았을 때는 바벨론이 공격하기 약 5년 전에 이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바벨론 왕이 그러한 점을 칠 것 까지도 이미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 왕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정해놓은 길을 바벨론 왕이 가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22-27절까지 예루살렘을 향한 바벨론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죄악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2절에서는 공격하는 무기들을 언급하셨고
23-25절에서는 그들의 죄악을 다시 언급하였습니다.
특히 25절에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끝 때니라”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의미하고 있는데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간절한 권면도 무시하고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 왕을 의지하였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심판의 칼을 불러들인 장본인이었습니다. 지도자들 백성들 죄도 악했지만 시드기야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 하늘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시드기야 왕의 마지막은 그 어느 왕보다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신의 눈 앞에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고 자신은 두 눈이 뽑힌채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비참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자의 마지막의 끝이 어떤 것인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6절에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지라”
27절을 주목해서 보시면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라고 3번 연속적으로 강조하셨습니다.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남유다의 왕권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의미 심장한 말씀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 왕권이 회복되는 날은 언제 입니까?
육적인 이스라엘 왕권은 영원한 왕권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영적인 이스라엘 왕권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함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세상을 영원히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는 만 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번째. 암몬 족속의 심판(겔21:28-32).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암몬 족속도 바벨론 군대가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칼이 암몬을 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암몬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29절 끝에 있는 말씀처럼 “죄악의 끝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암몬의 죄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2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을 비웃었습니다. (겔25:6) "네가 이스라엘 땅을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바벨론 군대가 자신들의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그들은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좋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비웃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비웃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은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함부로 사람들을 비웃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의 종들을 함부로 비웃는 미련한 자들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 종이라는 자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비웃고 조롱할 수 있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종이라면 큰일 납니다.
엘리사가 길을 가는데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야” 하며 조롱했습니다. 이때 아이들이 몇 명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무려 42명이 곰에게 물려 찢김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함부로 비웃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허무한 것을 보았습니다. 암몬 족속에게는 복술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헛된 점술에서 나오는 허무한 것들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짓들을 한 것입니다.
셋째는 거짓 복술가들이 많았습니다. 거짓 복술가들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땅은 거짓된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암몬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남유다의 심판과 다른 심판이 주어졌습니다.
30절에 보면 “칼을 그 집에 꽂을지어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암몬 족속에게 싸워보았자 소용이 없다 라는 말씀입니다. 암몬 땅에서 하나님이 국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남유다처럼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는 암몬 땅에서 끝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자와 예수를 믿지 않는 차이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회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만 예수를 믿지 아니한 자들은 이러한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31절에도 보면 하나님이 “내 분노” “내 진노의 불을” 쏟아 불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짐승 같은 자의 손에 붙이겠다” 고 하셨습니다. 즉 바벨론의 세력에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2절에도 “네가 불에 섶과 같이 될 것이며 네 피가 나라 가운데 있을 것이며” 라고 하였고 “네가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암몬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바벨론 군대의 세력에 의해 멸망되어 미약한 상태로 잔존하다가 마침내 유다 마카비 시대에 완전히 멸망하여 역사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주관하고 계시고 세계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 어느 누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 앞에 “아니라”고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고 그 이름을 높혀 드리고, 그 이름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에스겔이 “칼의 노래”를 부를 때가 약B.C 591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20장 1절에 보면 “제 칠년 오월 십일”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온지 7년 째 되던 해를 말하는데 이때가 B.C 591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마지막 멸망을 불과 5년 남겨놓고 하나님은 이러한 “칼의 노래”를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5년 후 B.C 586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5년 후에 되어질 일을 믿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리석고 무지하게 느껴지십니까? 바벨론에서 포로로 고생하면서도 이러한 말씀을 외면한 그들이 미련하고 바보처럼 느껴지십니까?
이 시간 나의 신앙의 모습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알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종말론을 전하면서 주의 종들, 성도들을 만나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마지막 때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라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 십년 신앙생활을 하였음에도 계시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들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가르치는 자가 없으니깐 알 수 없는거죠. 마지막 때에 대해서 가르치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성도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혹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도 엉터리로 가르침 받았으니까 잘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두 종의 모습을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을 말씀하셨는데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라고 하였고 (마24:45)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는 종이라고 (마24:48)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임할 때서야 깨닫는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언에 대해 미리 알고 배워서 창세 이래로 찾아볼 수 없는 환난 속에서 반드시 구원받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