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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속의 풍경들
―고경숙 시집 『달의 뒤편』에 의한 주제와 변주
이종섶(시인)
화가가 그리는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풍경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풍경 속에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풍경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풍경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또 다른 풍경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는 풍경화라고 하기보다는 화가의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작업이라고 해야 옳다. 세상과 삶에 대한 다양한 군상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주제는 같으나 그 대상은 각기 다른 것들을 다룬다거나, 주제를 다양하게 표현하면서 소재는 비슷한 것으로 다루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업을 시리즈라고도 하지만 시리즈의 경우는 각각의 작품이 독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작품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성격과는 분명 다르다.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악장에서 3악장 또는 4악장까지 있는 소나타 형식이나, 주제와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주제의 통일성을 추구하나 그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모음곡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소나타형식의 경우 각 악장 사이에 긴밀한 흐름이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네 개의 서로 다른 곡의 집합에 지나지 않게 된다. 변주곡 또한 제시된 주제를 다양하게 펼쳐나가야 하는데 각각의 곡들이 독단적인 개성으로 작곡이 된다면 그것은 변주곡이 아닌 수집이나 나열 정도의 작곡이 되고 만다. 모음곡도 역시 그러해야 함은 불문가지다.
고경숙 시인의 시집 『달의 뒤편』을 말하는데 미술과 음악 이야기를 하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달의 뒤편』을 살펴봄에 있어서 그런 구조가 적합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달의 뒤편』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풍경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풍경화 속에 다양한 풍경화가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풍경화들은 소재의 영역이나 분할 비율에서도 어느 정도의 균등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경숙의 시선이 파편적이라기보다는 나름대로의 의식과 정서가 고르게 배분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달의 뒤편』이 이런 성격의 풍경화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풍경의 구조를 따라가야 한다. 그렇게 따라가면서 전체의 풍경을 보고 각각의 풍경을 보아야 한다. 전체의 풍경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각각의 풍경들은 또 어떻게 생겼는지, 그 둘의 유기적이면서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주제: 풍경을 바라보다
―불온한 풍경 속에서 기다리는 아침
고경숙은 풍경과 불화한다. 풍경이 시인과 불화할 수는 없을 테니 시인이 풍경과 불화한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고경숙이 풍경과 불화한다는 의미는 풍경이 주는 일반적인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풍경의 일반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시인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풍경과 불화한다는 말은 풍경이 제공하는 일반성을 비틀어버리는 시선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불우했던 저녁은
하늘에 핏빛 노을을 불 지르고 달아났다
기진맥진한 산들이 사지를 늘어뜨리고
바다로 빠진다
어둠을 옹호하는 것들은
풍경의 외곽을 좁혀왔다
―「불온한 풍경」 부분
저녁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따뜻함을 맛보아야 한다. 그러나 고경숙이 바라보는 저녁 풍경은 다르다. “불우했던 저녁”이고 “하늘에 핏빛 노을을 불 지르고 달아”나는 저녁이다. 그 저녁에 “기진맥진한 산들이 사지를 늘어뜨리고/바다로 빠”지다 못해 “어둠을 옹호하는 것들”이 “풍경의 외곽을 좁혀왔다.” 그래서 “불우했던 저녁”은 “피로한 저녁이 신음을”(「시속 10Km」)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이런 “풍경”에 대해 고경숙은 시 제목을 통해서 “불온”하다고 말한다. 제목이 주는 단서로서의 “불온”은 고경숙이 보았던 풍경들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불온”이 타의에 의해 결정 지워진 상황이라고 할 때 고경숙이 말하는 “불온한 풍경”은 저녁이 저녁답지 못한 상황, 나아가 저녁을 저녁답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에 대한 발언이라 여겨진다. 그것을 감지한 시인은 그래서 “저녁”이 “불우”할 수밖에 없었고 “풍경의 외곽”이 “좁혀”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풍경의 외곽”이 “좁혀”졌을 때, 정확히 말하면 “어둠을 옹호하는” 어떤 “것들”이 “풍경의 외곽을 좁혀왔”을 때, 결국엔 “풍경 밖으로 던져진다.”(「풍경의 공식」) “풍경의 외곽”이 “좁혀”졌을 때 “풍경 밖으로 던져진” 이유는 “모난 돌멩이들이 심하게 마찰”(「풍경의 공식」)했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풍경 밖으로 던져진” 것은 “어둠을 옹호하는 것들”과 “심하게 마찰”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을 옹호하는 것들”을 이길 수가 있겠는가? 결국 “결핍되어 늘 여분이었던 그는/풍경의 외곽에 그렇게 버려”(「풍경의 공식」)질 수밖에 없었다. 풍경은 “흔들리지 않”(「머리가 있는 토르소」)고 그 풍경 속에 있는 것들만 흔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풍경”이 “불온”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경숙은 “불온한 풍경”에 지지 않는다. 아니, 승리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맞서는 방법이나 버티는 법을 안다. 그것은 “가만히 풍경 속으로 내려서는”(「쓸쓸한 크리스마스」)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쓸쓸한 크리스마스」) “아무도 지나는 풍경 속에 말을 남기지 않”(「묵계리 근처」)을 지라도 말이다.
나아가 “풍경 속으로 내려”선 뒤에 이제는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불온한 풍경」)린다.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야 말로 “불온한 풍경”을 맞서는 가장 적절한 자세다. “불온한 풍경”의 밤과 싸워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밤과 싸워본들 그 힘으로 과연 아침을 앞당길 수 있겠는가?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는 너무 평범해 보이고 당연해 보이나, 저녁이 지나 아침이 오는 순리적 과정 이전에 “불온한 풍경 속”에 들어가 있는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야 말로 가장 적절하고도 아름다운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불온한 풍경”도 “아침”을 맞이하나 자연적으로 다가오는 아침은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오직 기다림에 의해서 다가온 “아침”만이 “불온한 풍경”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밤새 허우적대며 길을 찾았다
등 돌릴 수 없는 바보들
아침이 오면
여전히 도망치고 싶었지만
서로의 허리춤을 붙잡고
어설픈 허깨비 춤을 추는
그곳은 언제나 똑같은
장미 가득 핀 골목길 주변이었다.
―「가위」 부분
고경숙의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가 더욱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밤새 허우적대며 길을 찾”았으면서도 “아침이 오면/여전히 도망치고 싶었”다는 경험적 사실에 있다. “여전히 도망치고 싶었지만”이라는 가정은 “도망치”지 않고 있다는 역설의 가정을 증명한다. 아침이 왔을 때 만사가 다 해결된다는 보장과 현실만 있다면 누군들 그 아침을 기다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고경숙이 맞이한 아침은 “언제나 똑같은/장미 가득 핀 골목길 주변이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장미 가득 핀 골목길”이었을지라도 그 내면은 “서로의 허리춤을 붙잡고/어설픈 허깨비 춤을 추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은 현실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아침이 찾아왔을 때 그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가 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한두 번에 끝날 일이 아니고 “아침을 기다리”게 만드는 문제도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도 아니다. 따라서 고경숙이 기다리는 아침은 “불온한 풍경”에서 해방되는 영원한 아침이요 그것을 향한 기다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제1변주: 풍경 속으로 여행하다
―인간의 마을을 그리워하는 새
고경숙은 “불온한 풍경” 속에 버려졌으나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를 이야기했다. 이 두 가지는 각각의 변주마다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느 하나만 나타나기도 한다.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는 시들부터 살펴보며 확인해보자. ‘나’라는 화자가 나타나는 시들은 대체로 세상과 삶에 대한 시선을 동반하고 있다.
중심에서 한 발짝씩 멀어지는
생성도 재생도 아닌 소멸로 가는 길은
유쾌한 여행은 아니다
다 익어 떨어지는 사과꼭지도
낙엽에 매달린 잎자루도 모두
세상에 살다간 흔적을 남기려는 몸부림
―「문장부호에 관한 짧은 비망록」 부분
고경숙은 세상과 삶에 대해서 “여행”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유쾌한 여행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풍경”이 “불온”하듯 “여행”도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그 “여행”은 “중심에서 한 발짝씩 멀어지는” 것이고 “생성도 재생도 아닌 소멸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경숙의 눈에는 “다 익어 떨어지는 사과꼭지도/낙엽에 매달린 잎자루도 모두/세상에 살다간 흔적을 남기려는 몸부림”에 불과할 뿐이다. 그 “몸부림”이 더욱 처절한 것은 “살다간 흔적을 남기려는” 세상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난세에는 날뛰지 마라
고대소설을 많이 읽으셨던 할머니의 당부도
이 순간은 무의미하다
푹 꺼지는 쥐치의 몸
찌-익 외마디 비명 지르며
세상문 닫는 녀석이 하늘길을 본다
나머지 놈들 찍소리도 못하고
등에 박힌 날카로운 가시 일으켜
서로서로 알아서 찔러 몸을 눕히는
바다 밖은 온통
바람 빠지는 세상이다.
―「바람 빠지는 세상」 부분
바다에서 쥐치를 잡는 풍경을 그린 이 시는 쥐치의 급소에 핀을 박는 섬뜩한 장면이 등장한다. 더욱 섬뜩한 것은 핀이 박혀 날뛰는 쥐치들이 다른 쥐치들을 찌른다는 사실에 있다. 이쯤 되면 고경숙이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잔인하고 비정한 세상이다. 쥐치를 죽이는 방법에 있어서 잔인하고 쥐치끼리 서로 죽이는 모습에서 비정하기 짝이 없다. 그런 세상에서 고경숙은 ‘죽음’을 생각한다.
죽은 사람들의 음성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유품과 함께 묻히지 못한 소리가
자유로움인지 아님 제외됨인지에 대해
그리움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가끔 꿈속에서 보여지는 그것은
견고한 절망이었다
―「돌아보아야 할 때」 부분
‘죽음’을 떠올리는 고경숙은 정작 ‘죽음’ 자체보다도 “죽은 자들의 음성에 대해/궁금해 한”다. 그때마다 “꿈속에서” “견고한 절망”을 보곤 했다. 이것은 곧 세상 속에서의 절망이며 풍경 속에서의 절망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기에 절망할 수 없고 산 자는 산 자이기에 죽을 수 없어 절망한다면, 절망은 죽음에 값하는 죽음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경숙의 절망은 앞선 자들의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가 할 수 없는 산 자의 몫이 있다. 죽은 자가 하지 못한 산자가 해야 할 몫이 있는 것이다. 절망이 죽음이라면 그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 마치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고경숙은 “잃어버린 나를 찾”기를 원한다. “뼈를 갈아 누군가의 도장으로 나도 다시 태어나고 싶다”(「도장」)고 말한다.
내 족속이 그리운 날은
무제한으로 고도를 높이고 바람을 탔다
내 몸을 힘차게 때리며 퍼덕일 때마다
수평이동은 곧 수직으로 바뀌어
가쁘게 숨을 내쉬다 보면
어느새
시간 속을 날기 일쑤였다
억겁을 날아 차가운 얼음별에 당도하면
진화 중인 내가 거기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막막했다 사방은
매끈한 깃털 하나 뽑아
운석 위에 이름 석 자를 적기로 했다
텅 빈 뼈마디가 공명했다
비로소 내 목소리가 주어졌지만
울음소리는 작고 짧아서
나를 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강력한 기류에 몸이 얹혀져
고도를 바꾸며 날 때마다 허공에 길이 생겼다
내 몸이 음표처럼 악보를 그렸다
그건 운명과는 또 다르게 나를 자극했다
멀리 인간의 마을이 보였다
인기척 없는 공간 속 행보를 들키기 싫었다
물가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렸다
피돌기를 잠시 멈추고
유전자를 재배열했다
―「새」 전문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과정은 「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고 새로 도장 파던 날”(「도장」)의 행위는, “억겁을 날아 차가운 얼음별에 당도”해 “매끈한 깃털 하나 뽑아/운석 위에 이름 석 자를 적”는 행위로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고경숙은 왜 이런 행위를 해야만 했을까? “내 족속이 그리운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제한으로 고도를 높이고 바람을” 타며 자신의 “몸을 힘차게 때리며 퍼덕”이면서 “가쁘게 숨을 내쉬”며 “시간 속을 날”다 보면 “허공에 길이 생겼”고 “멀리 인간의 마을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경숙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족속”의 “마을”이 보였음에도 바로 들어가지 못한다. “인기척 없는 공간 속 행보를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가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린다. “피돌기를 잠시 멈추고/유전자를 재배열”한다. 이것은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마을사람들을 힐끗 보고 달아나던 개”(「연緣」)의 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절망” 속에서 “그리움”의 힘으로 “인간의 마을”까지 왔음에도 왜 곧 바로 들어가지 못했을까? 그것은 “유쾌한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도착한 곳이 “바람 빠지는 세상”이었기 때문이고, “죽은 자들의 음성” 곧 “유품과 함께 묻히지 못한 소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족속”을 그리워하는 강력한 힘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날아왔으나, “인간의 마을” 앞에서 또다시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새」 속에 드러나는 고경숙의 모습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잠깐”(「길, 낭만에 대하여」)인 세상에서 고경숙의 “마침표”는 “응어리진” 것이고 “세상 마감하는 날” “응어리진 마침표”를 “오직 한번 모질게 찍고 싶”(「문장부호에 관한 짧은 비망록」)은 것이다. “지름길을 놔두고 나는 그간 너무 멀리 돌아왔다”(「1973년, 봄」)는 그날이 고백이 미리 들려오는 것 같다.
제2변주: 풍경의 기억을 떠올리다
―잔혹한 스무 살의 겨울밤
고경숙이 말하는 「새」는 인간을 그리워하다가 인간의 마을을 향해 날아가지만 정작 인간의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또다시 기다린다. “물가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면서 “유전자를 재배열”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마을과 관련된 어떤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인간의 마을에 당도해서 또 다시 기다려야만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 이유를 젊은 날의 풍경 속에서 찾아보자.
그해 겨울,
계절을 지나기 위한 인증처럼
감기는 나를 괴롭혔다
달콤한 맛으로 가장한 진통제도
두통을 잠재우진 못해
꽃무늬 전기요 위에 누운 나는
그 꽃송이 모두 열꽃으로 받아내느라
몸이 절절 끓었다
기침을 툭툭 뱉을 때마다
오래된 책갈피에 끼워둔 마른 잎들이
미라처럼 놀라 일어났다
잔혹한 스무 살의 겨울밤,
눈보라가 골목으로 창을 낸 집들을 모조리
두드리고 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밖에 함석연통을 내걸고
팔을 늘어뜨렸다
한기에 섞여 더러는 눈꽃송이들이
링거액처럼 빨려 들어왔다
한 번만 보고 싶은 그 얼굴
주전자 더운 김에 가려 어른거리고
몽롱한 이름 석 자도 잊혀져갔다
소원처럼 난롯가에 양말을 널었던
성탄절 이브가 시시하게 지나갔고
나는 더 긴 잠을 잤다.
―「스무 살의 겨울」 전문
“잔혹한 스무 살의 겨울밤”이었다. “계절을 지나기 위한 인증처럼/감기는 나를 괴롭혔”고 “달콤한 맛으로 가장한 진통제도/두통을 잠재우지 못”했다. “꽃무늬 전기요 위에 누운 나는/그 꽃송이 모두 열꽃으로 받아내느라/몸이 절절 끓었다.” “기침을 툭툭 뱉을 때마다/오래된 책갈피에 끼워둔 마른 잎들이/미라처럼 놀라 일어났다.”
“그해 겨울” 왜 이렇게 지독한 감기를 앓아야 했을까? “한 번만 보고 싶은 그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병은 이렇게 지독했으나 결국은 “몽롱한 이름 석 자도 잊혀져갔다.” “성탄절 이브가 시시하게 지나”가자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나는 더 긴 잠을 잤다.”
고경숙에게 있어서 “젊음은 방화벽에 붙어있는/영화포스터만 보고도 발화”(「한국카센타」)되는 것이니 “포스터”가 아닌 실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젊음은 얼마나 큰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랬으니 “잔혹한 스무 살의 겨울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 사랑의 책임은 “한 번만 보고 싶은 그 얼굴”에게 있지만 “한 번만 보고 싶”어하는 당사자에게도 있다. 열병의 원인은 타자에게 있지만 열병의 발화와 감염은 자신의 정서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경숙은 “나를 올려다보지 말아요/내 향기도 맡지 말아요”(「능소화」)라고 말한다. 능소화가 사랑에 빠진다는 건 능소화 스스로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를 떠나서 자신에게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화려하고 강렬한 꽃 능소화의 “사랑”은 “무모”했고 “짧”(「능소화」)을 수밖에 없었다.
고경숙은 “무모한 사랑” 이후 “잘 죽는 방법을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도/몇 번의 사랑이 찾아왔”(「봉인된 입 ―수동타자기에 부처」)으나 “잔혹한 스무 살의 겨울밤”은 그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리카겔 한 봉지 검은 입에 물고” 조용히 “입을 다”(「봉인된 입 ―수동타자기에 부처」)물었을 뿐이다. “입을 다”물고 보니 비로소 “미나리대처럼 허리 약한 청춘들”(「미나리꽝」)이 보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결심했다.
잊으라, 별이 지기 전에 허리를 펴고
울컥 올라오는 꽃 대궁 속에서
허옇게 꽃물 익어갈 서러운 내일이여,
어둠은 약한 자들의 특권이거늘
꽝, 꽝 무너지고 희미하게 일어나리.
―「미나리꽝」 부분
“잊으라”는 간결한 말과 “희미하게 일어나리”라는 결심의 자세는 상처에 대한 치유적 자세다. 마치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렸던 것처럼 “꽝, 꽝 무너”졌던 “잔혹한 스무 살의 겨울밤”을 딛고 “희미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일어”난 이후 “첫사랑이 떠오”를 때마다 “사랑아! 미안하다”(「밴댕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음으로써 “희미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제3변주: 풍경의 뒤편으로 밀려나다
―궁시렁 궁시렁 달을 한 잔씩 비우는 남자들
고경숙은 “잔혹한 스무 살의 겨울밤”을 보내고 나서야 “희미하게 일어나”는 법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갈 때마다 찾아오는 “잔혹한 겨울밤” 속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십대의 “잔혹”함은 “그해 겨울”이라는 짧은 열병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의 삶과 생활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잔혹”함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십대에서 나타난 “한 번만 보고 싶은 그 얼굴”은 상대와 나 자신이라는 두 사람의 존재적 방향을 암시한다. 모르긴 몰라도 둘 다 지독한 열병을 앓고 나서 일어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경숙 시집 『달의 뒤편』에서는 ‘사내’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많다. 여자들에 이야기도 아주 많다. 여전히 지독한 열병을 앓을 수밖에 없는 그들은 지금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먼저 남자들부터 살펴보자.
젖은 빨래를 탁탁 털어널고 들어간 아내에게
방망이로 흠뻑 두들겨 맞은 날은
일수도장을 찍은 것처럼 후련하다
빨랫대가 그나마 중심을 잡아주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접어진 허리며 정강이가
부러질 뻔 했다 용케도 죽지 않고
정신을 차려 세상을 보면 불똥처럼
외곽순환도로 위 차들이 거꾸로 붙어간다
그맘때쯤
겨울별도 내 늘어진 팔뚝에서 목 솔기에서
오색영롱한 빛으로 뜬다
늘어진 전선들이 달 한가운데를 지나는
기타 구멍처럼 후미진 이곳에선
일 다녀온 아내들에게 매일 밤 얻어맞는
일 없는 남자들이 나처럼 빨래줄에 얹혀져
궁시렁 궁시렁 달을 한 잔씩 비운다
옥탑방까지 무단으로 올라온
빈 은행나무 가지들이
바람부는 대로 달의 표면을 쓸고 있다
쓸어갈 것도 쓸려가는 것도 모두 초라한
달의 뒤편에 기울었던 해는 뜰까
새벽밥 지으러 아내 쪽문열고 나올 때까지
양팔뚝에 고드름 차고 뜬 눈으로 밤을 샌다
쥐새끼 한 마리 못 지나가도록 말이다.
―「달의 뒤편」 전문
시집의 표제작인 이 시에는 매 맞는 남편이 나온다. “아내에게/방망이로 흠뻑 두들겨 맞은” 남편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맞고 나면 “일수도장을 찍은 것처럼 후련하”다고 하니 날마다 맞고 사는 모양이다. 날마다 맞고 살고 어차피 맞을 것이기에 안 맞으면 언제 맞을지 몰라 불안하고 맞고 나면 더 이상 맞을 일이 없을 것이니 말 그대로 “후련하다.” 이런 남자들이 한두 사람이 아닌가 보다. “후미진 이곳에선/일 다녀온 아내들에게 매일 밤 얻어맞는/일 없는 남자들이” 많다. 그들도 “나처럼 빨래줄에 얹혀져/궁시렁 궁시렁 달을 한 잔씩 비운다.” 그들은 “새벽밥 지으러 아내 쪽문 열고 나올 때까지/양 팔뚝에 고드름 차고 뜬 눈으로 밤을 샌다.”
시의 제목이 「달의 뒤편」이다. 달은 밤에만 뜨고 밤에만 본다. 밤의 빛이요 밤의 위안이다. 그런 밤에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의 뒤편”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매 맞는 남편이 아닐까? 아내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현실, 대접을 받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현실은 어느 상황으로든 치환이 가능하다. 더욱이 아내에게 매 맞은 밤에는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쥐새끼 한 마리 못 지나가도록” 지켜보는 소시민적 울분이 나타나는 것까지 말이다.
슈퍼히어로를 갈망하는 시대에
소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그리 평탄하진 않아
쏟아지는 고지서 금액들과
날아드는 휴대폰 번호들이
곤두박질쳐 뜯겨지는 일력에 묻어
날마다 적자인 시간
만화 속 단단한 슈퍼영웅들을 보면서
물컹물컹한 그대 빈주머니를 본다
―「그대 삶은 영웅적인가」 부분
“슈퍼히어로를 갈망하는 시대”는 그만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양산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그리 평탄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삶은 “날마다 적자”이고 “빈주머니를” 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남아있는 힘으로 “차문 박차고 대로를 가로질러 뛰”어보지만 “영웅의 뒷모습에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강철처럼 무거운 저녁”(「그대 삶은 영웅적인가」)을 맞이할 뿐이다. 그런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는 없을지라도 혼자서 “달의 뒤편”을 바라보며 “궁시렁 궁시렁 달을 한 잔씩 비”우게 되지 않을까? “쥐새끼 한 마리 못 지나가도록” 울분을 삭이면서 말이다.
며칠 전,
사내 하나 그 위에서 시위를 했다
펄럭이는 현수막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빠진 나사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나사 하나쯤 빠져도
당분간은 아무 일 없고,
타워크레인이 강풍에 노출될 때마다
풍향계처럼 어지러이 돌며 공중부양하는
지상의 모든 것들,
자고 나면 뚝딱 조립되는 도시를 위해
부푼 마디 꺾으며 기다린다
―「타워크레인」 부분
“사내 하나”가 “시위를” 하는 현장은 “신축 중인 빌딩 꼭대기/타워크레인” 위다. 여기에서 “시위를 했다”면 무슨 내용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신축 중인 빌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시위”에서 “사내”는 결국 “나사 하나쯤”으로 치부된다. 그가 “빠져도/당분간은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펄럭이는 현수막”을 치고 “시위”를 하고 있다. 시위의 현장과는 반대로 “노숙으로 지”내는 동안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정리되지 않은” “빚” 때문에 “누렇게 떠”가는 “아비”(「나무의 지문」)도 있다. 그들은 노동현장 속에서 “달의 뒤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에게도 “달의 뒤편에 기울었던 해”가 뜰 수 있을까?
인력시장서 따가지 않은 날은
대개 그렇게 쪽방에 쭈그려 지냈으니까,
빽빽이풀 같은 시간이 허연 낮달로 건조되고
어미 부음을 들은 하늘이 몇 번 꽃자리가 된 다음에야
죽었던 휴대폰도 빈 소주병도 일어섰다
을지로 대형빌딩,
십여 명이 유리창 청소를 하느라 매달려 있다
날실을 노란 안전모 달랑거리는 고드랫돌에 매달고
아스스한 유리벽에 발을 댔다 비켜간다
긴 가루장목에 김 씨와 이 씨를 늘여놓고
지탱하는 실은 또 다른 김 씨와 박 씨를 만나고
옆 칸으로 날아간다
반복되는 문양 짜넣기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돌연히 선명한 무늬로 떠오른다
깨끗이 닦인 대형 유리벽에
고향 하늘에서 온
화문석 한 자락 펼쳐진다.
―「화문석 짜기」 부분
“달의 뒤편” 사람들 중에는 “달의 뒤편”을 떠나온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인력시장서 따가기”를 기다리며 살았고 “따가지 않은 날은” “쪽방에서 쭈그려 지냈”다. 그들이 “을지로 대형빌딩”의 “유리창 청소”를 맡았다. “십여 명이” 서로 어울려 “유리창 청소”를 하는 모습은 고향에서 해보던 “화문석 짜기”와 유사하다. 그들이 청소하는 모습은 화문석을 짜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대형 유리벽”을 “깨끗이 닦”았을 때 “고향 하늘에서 온/화문석 한 자락 펼쳐”졌다.
쪽방에서 살면서 빌딩의 유리창을 청소하는 인력시장 사람들은 그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시의 마지막에서 제기 되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산업화로 인해 더 이상 “화문석 짜기”를 할 수 없게 된 그들은 결국 도시 속에 흘러들어와 도시가 필요로 하는 “화문석 짜기”로서의 “대형빌딩 유리창 청소”를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경숙은 “고향은 어디인가”라고 묻는 동시에 “눈꽃 만개한 길을/물에 베이면서/귀향하는 사람들”(「연어들의 빙벽타기」)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편지를 써도/날마다 반송되던 고향”(「이태원, 우체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달러가 우글거리는 기지촌”에서도 “내 고향 유타로 함께 가지 않을래?”(「톰과 제리」)라고 묻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매일 밤 “궁시렁 궁시렁 달을 한 잔씩 비”울 것이다. 그래야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사람들은 그래도 돌아갈 곳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매 맞는 집이라도 있고, 집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고, 쪽방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도 여전히 “달의 뒤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대퇴부 한쪽이 함몰된 사내가 사직터널 쪽으로/절뚝이며 도망쳤다”가 결국엔 “수감되었던 제 방도 없어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사내”(「마임 ―장기입원환자 편」)가 있다. “빈 탁자들이 다도해처럼 떠있는 바다”에서 “북극성 알전구로 내려앉은 푸른 어둠 사이로” “등대처럼 환한 여자 주변을 떠다”니는 “한 무리의 사내들”(「머리와 가슴이 따로 부르는 노래」)도 있다. “준엄한 의사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며 “비상엘리베이터로 깊숙이 내려보내”지는 “침대”위의 “사내”(「시뮬레이션 게임」)도 있다. 이들도 지금 “달의 뒤편”에서 “궁시렁 궁시렁 달을 한 잔씩 비”우고 있을 것이다. 그들 앞에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제4변주: 풍경의 뒤편과 맞서다
―저 속 없는 년들
고경숙 시집 『달의 뒤편』에는 표제시 「달의 뒤편」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은 군상들이 흔하게 나타난다. 「달의 뒤편」에는 “방망이로 흠뻑 두들겨 맞은” 남편이 있지만 “일 없는 남자들”을 “매일 밤” “두들”기는 “일 다녀온 아내들”도 있다. 매 맞는 남편으로 대표되는 “달의 뒤편” 사람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남편을 두들겨 패는 아내들과 관계되는 여자들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그들은 가해자이기 때문에 “달의 뒤편”에서 제외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 역시 피해자로서의 가해자 신분이기 때문에 “달의 뒤편”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서 “달의 뒤편”에는 매 맞는 남편과 구타하는 아내와 그들을 포함하는 가정까지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나 주물렀다 놓고 가도
앞가슴 한껏 부풀리고
버선코 내려다보는
저 속 없는 년
―「바람떡」 전문
4행으로 된 짧은 시 「바람떡」에는 “속 없는 년”이 나타난다. “아무나 주물렀다 놓고 가”는 여자, 그녀는 그래도 “앞가슴 한껏 부풀리고”서 “버선코”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를 “저 속 없는 년”이라고 욕하지만 그 욕이 그리 밉지만 않은 것은 욕을 하는 사람도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주물렀다 놓고” 가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상책일까? “풍경의 외곽에 버려”진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잔혹한 겨울밤”을 보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어떤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라며 극단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저 속 없는 년”은 나름대로의 의지와 건강성을 지니면서 상황을 극복하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경숙의 시에는 “잎새 뒤에 숨은 여체를 따라 흘러내리”는 “지독히 관능적”(「色」)인 “色”도 있다. 이 “色”은 다양한 인물과 환경으로 변주된다. “분가루 심하게 눈 날”리는 “날” “사내들이 한 명씩 익사”하는 “옥탑방, 그녀”(「열섬」)가 있다. “이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며 “어차피 혼인묵계 지키는 년놈 몇이나 될까?”를 물으며 “빨판 힘껏,/지나다니는 치마폭 감아쥐고 호객하다가/땅거미에 하나 둘 집어등 불 밝히면/미끄러지며 시선 던지는,/오! 징한 여자”(「오징어」)가 있다. 시어머니와 만두를 만들며 “국물이 들락이며 설익은 데 없어야 하니” “양 끝에 숨구멍은 남겨”두라는 “시어머니” 말씀을 들어야 하는 “과부”가, “만두처럼 꼭꼭 여몄던 치맛단 벗어놓으니/만두피 같은 그녀의 상복(喪服)이 하”얀 “과부”(「과부」)가 있다. 이들은 모두 “풍경의 외곽에” “버려져 있”던 여자들이다. 그속에서 “잔혹한 겨울밤”을 보내기도 하고 “아침을 기다리”기도 하면서.
그러나 아래의 시에 드러난 여성을 보게 되면 이전의 남성들이나 바로 앞의 여성들보다도 더 극대화 된 여성이 등장한다. 고경숙에게 있어서 “일 다녀온 아내”가 “일 없는 남자”들을 두들겨 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듯하다. 고경숙의 가슴속에는 “여전사”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발정기에 들어선 원숭이떼가
엉덩이를 까고 놀리는 줄 알았다.
빨간 석류,
아니 차도르 쓴 여자의 은밀한 곳처럼
검붉다는 게 정확하겠지
'이란産' 딱지 하나씩 엉덩이에 붙이고
위장한 여전사들
어쩌면 저 속엔 투명한 탄환알갱이들이
가득 숨겨져 있을지 몰라
허름한 시장통
경계 느슨한 그곳에서
미제에 물든 내 뱃속을 향해
기습테러를 계획하고 있는 낯선 무리들.
―「석류」 전문
이 시에서 밝히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아예 “아무래도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여자인 내가 딱이”라고 말하면서 “벙커”로 들어가 “뒤통수 바코드에 모든 기밀을 넣어두고 질서정연하게 지상으로 소통하는 놈”을 “체포”(「벙커 1번지」)하기도 한다.
고경숙이 보여주는 여성에 대한 시선은 일견 다양한 곳을 바라보는 듯하나 사실은 한 곳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어떤 환경일지라도 순응과 맞섬을 통해서 그 환경을 극복해나간다는 사실이다. 순응과 맞섬의 양쪽에 각각 서 있는 여성들은 언제든 서로의 위치를 교환할만한 사람들이다. 단지 그 환경이 순응을 필요로 하는 환경인지 맞섬을 필요로 하는 환경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의 양식을 자신의 현재를 통해 보여줄 뿐이다.
그런 여성이 “매일 밤 무엇을 보고 오는지는/아무도 모르지만/동굴 같은 그녀의 방”에는 “몇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Super Natural」)고 한다. 그 “몇천 년의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동안 어떤 “풍경 속에 버려져도” 끄떡없이 “아침을 기다”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제5변주: 풍경 속에서 그리워하다
―눈 감고도 어머니를 찾아갈 수 있을까?
고경숙이 보여주는 남성과 여성의 군상들은 각각의 환경 속에서 고생을 맛보기도 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동시에 생활과 시대의 피해자가 되면서 그에 맞서는 각양의 모습들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들이 겪어야하는 밤과 낮의 풍경 속에서 그들이 패배할 때나 견딜 때나 이길 때에 기본적으로 작용했던 정서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모든 풍경들 속에서 앉아있게 만들고 걸어가게 만들고 때로는 뚜벅뚜벅 달려가게 만들었을까? 고경숙은 그것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붉은 억새꽃 활짝 터져버리면
어머니 먼 길 떠나겠지만
억새에 베인 상처 붙잡고
붉은 노을 아래 울어버리겠지만
갈 길 몰라 가벼워 서운해지는 위에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겠지
나
눈 감도도 그 길,
찾아갈 수 있을까?
―「붉은 억새밭」 부분
고경숙 시집 『달의 뒤편』에는 어머니에 대한 시가 자주 나온다. 고경숙이 말하는 “어머니”야말로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전형이다. 아니 아침을 맞이하게 해주고 아침을 누리게 해주는 힘 그 자체이다. 그런 “어머니”를 보았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움은 아무 때나 솟아나지 않는다. 그리움을 유발하는 환경이 적절하게 주어져야 더욱 깊게 솟아난다. 그때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자신의 현재를 끊임없이 맞서나갈 힘을 얻는 것이다. “눈 감고도 그 길”을 “찾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다.
한옥 대문을 밀면
어머니는 툇마루 근처에서
빨래를 개키시거나
수돗가에서 채소를 씻곤 했었다
돌아앉은 빨간 블라우스 자락이
물소리에 맞춰 흔들렸다
―「모란」 전문
어머니는 부지런하셨고 단정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머니는 툇마루 근처에서/빨래를 개키시거나/수돗가에서 채소를 씻곤” 하셨다. 자식의 “생일에 즈음해” “털실 가게 다녀”와 “아랫목에 앉아 끝없이 털실을 감”(「모자」)으며 모자를 짜는 어머니셨다.
이와는 달리 억척스러운 어머니도 있다. “앞치마로 받아낸 씨 다른 딸년들”을 “씩씩한 그녀, 치마폭에 딸년들 차곡차곡 넣”(「마트로시카」)으며 길러내는 것이다. 「마트로시카」에 나오는 “어머니”는 「모란」에 나오는 어머니와 대조된다. 「모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어머니로 나타나는 여인을 “현모양처”라는 어휘로 표현하는 것조차 누가 된다고 할 만큼 단아하고 기품이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마트로시카」의 어머니는 시에서 나타난 모습 그대로 억척스럽고 바람기마저 있는 모습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의 여인들은 어쩌면 우리네 삶의 가장 대표적인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우리네 어머니의 두 가지 계열이기도 하고. 이 두 부류의 여인 또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정과 가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평상시에는 「모란」 같은 어머니나 여인으로, 환난 때는 「마트로시카」 같은 어머니나 여인으로 말이다.
귀향은
늘 골목 언저리에서 내 보폭을 키우고
곶감 같은 어머니
언 두 눈에 별을 뜨게 했다
하얗게 눈이 덮인 강
시간은 멈춰 흐르지 않고
그 밤,
밀린 몇 장의 달력을 뜯어냈던가
세 끼 분을 거뜬히 먹고도
부엌에선 장작 지피는 소리
여전했다.
―「귀향」 부분
그래서 고경숙은 “귀향”을 생각할 때도 “어머니”에게 가는 것이 “귀향”이라고 말한다. 고경숙의 “귀향”은 “늘 골목 언저리에서”부터 “보폭”이 커졌고 “곶감 같은 어머니”의 “언 두 눈에 별을 뜨게 했”(「귀향」)다. 고향이 있어도 “어머니”가 없으면 “귀향”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고향이 아니어도 “어머니”가 계시면 “귀향”이 이루어졌다. “어머니”가 바로 고향이었다. 고경숙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 가고 고향이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있었고, “어머니”가 된 사람이 있고, “어머니”가 될 사람이 있는 한 그곳은 언제나 “세 끼 분을 거뜬히 먹고도/부엌에선 장작 지피는” 배부르고 따뜻한 고향이 될 것이다.
피날레: 풍경 속에서 풍경을 꿈꾸다
―가격표 대신 맡아보는 꽃향기
고경숙에게는 “귀향”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어머니”가 있었고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힘이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한 “풍경의 외곽에 버려”져도 그곳은 “풍경의 외곽”이 아니었고 “불온한 풍경”을 만나도 더 이상 “불온한 풍경”이 아니었다. “아침을 기다리는” 힘과 의미로서의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곶감 같은 어머니”의 “언 두 눈에 별을 뜨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 돌아갈 “귀향”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꿈은 고경숙의 현재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풍경의 외곽”과 “불온한 풍경”을 노래했던 시인이지만 다음과 같은 향기로운 시도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이기도 한 것이다.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그 자세와 마음이 어느 날 이렇게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사는 동시대의 현재를 향기롭게 하고 이 향기를 다른 공간과 다른 시대에도 퍼뜨려보기를 꿈꾸어 보는 것이다. 이런 “봄날”을 향기롭게 그려보는 것이다.
얼었다 녹은 봄날 산벼랑
백설기처럼 푸슬거리는
산옆구리를 쥐고 달린다
포장을 마다하고
일부러 견고하지 않은 길은
덜컹이며 바람을 타다
오르막에서 멈춘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온 지 한참,
고갯마루 작은 주유소엔
대형 탱크로리에서 꽃무더기를
옮겨 담고 있다
고객님 얼마나 넣어드릴까요?
나는
L당 가격표를 보는 대신 꽃향기를 맡아본다
들꽃유로 가득이요
서둘러 주유기를 꽂고 뒤차로 간다
내 뒤 봉고는 콩기름을 주문한다
주유원이 탁탁 엉덩이를 치면
꽃향기를 내뿜으며 부릉거린다
카드전표로 가져온 꽝꽝나뭇가지에
손도장 꾹 눌러주고
출발!
손님, 내리막길은 무동력이구요,
봄은 비과세입니다.
―「꽃기름주유소」 전문
현재나 현실 속의 봄은 “퇴행을 겪고 있”(「심리테스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견고하지 않은 길”일지라도 일부러 갈수 있을 만큼 여유롭다. “가격표를 보는 대신 꽃향기를 맡”을 만큼 달라져있다. 고경숙이 “불온한 풍경 속에서” 기다렸던 아침은 이런 아침이 아니었을까? “풍경의 외곽에 버려”져 있던 시인이 이제 풍경의 중심, 아니 변화된 “풍경 속에서” 그 풍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풍경’과 ‘사람’이 불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이제 ‘풍경’과 ‘사람’의 조화로 드러나 향기로운 삶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고경숙 시인이 지향하는 사람과 세상의 가치관이 아닐까? 그것을 한 마디로 ‘풍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꿈은 여전히 꿈일 수밖에 없어서 현재의 형편은 전혀 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봄의 꿈을 꾸는 사람들, 봄의 꿈에 전염된 사람들은 편안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봄의 꿈을 꾸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현실의 꿈은 현실이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참다운 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미래의 꿈이 현실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현재와 미래, 현재의 꿈과 미래의 꿈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고경숙은 삶이 고통스러워도 단 몇 프로의 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종합병동에서” 맞이하는 “봄”을 노래한다.
창가로 모여든 환자들의 안부가
은은하다
빛이 안 드는 후미진 복도 벽
모세혈관에 지탱해 한 발 한 발
창가로 이동하는 향일성 환자들
재활에 성공한 봄나무가 되었다
안과 강 박사님은 오늘 휴진이다
그럼 눈을 감고 걸으면 되지
―「봄 ―종합병동에서」 부분
이런 계절을 맞이할 수 있었기에 계절을 마감하는 가을에 이르러서는 “페달을 힘겹게 저으며/길 끝으로 사라지는/가을은/정녕 안녕하신가”(「가을, 허수아비」)하고 물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또 오겠다는 언질은 절대 하지 않는 겁니다/그래야 떠나도 원망은커녕/하염없이 기다려준다니까요”(「계절이 계절에게 ―인수인계」)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중심에서 한 발짝씩 멀어지는/생성도 재생도 아닌 소멸로 가는 길은/유쾌한 여행은 아니”라고 했던 시인이. “다 익어 떨어지는 사과꼭지도/낙엽에 매달린 잎자루도 모두/세상에 살다간 흔적을 남기려는 몸부림”(「문장부호에 관한 짧은 비망록」)이라고 했던 시인이.
고경숙은 풍경을 노래하되 어느 하나의 풍경만을 노래하지 않고 삶의 거대한 풍경을 동시에 노래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풍경의 불화’가 ‘풍경의 조화’로 바뀌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고경숙이 기다려온 ‘아침’의 진정한 의미다.
‘풍경의 조화’가 도래하는 ‘아침’이 오기까지 그 속에서 등장하는 남성은 주로 ‘풍경의 부조화’에서 비롯된 피해자들이며, 여성은 ‘풍경의 부조화’ 속에서 대응하면서 맞서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경숙이 남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부조리한 풍경’과 싸우다 쓰러진 피해자인 것을 인정하는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뒤에 남아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 또한 남성들이 못다 한 일들을 이어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경숙은 ‘이 땅의 모든 풍경’을 지키는 자들로 여성을 제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집과 가정을 지켰던 ‘어머니’의 등장과 역할이다. 어머니를 포함한 그들 여성들의 존재감이 더욱 부각되는 것은 이들이야말로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진정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여성들은 지금 『달의 뒤편』에서 살고 있다. 그 여성들이 지금도 “달의 뒤편”을 지키고 있다. 그 여성들이 있기 때문에 “달의 뒤편”이 유지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풍경이 있는 한 “달의 뒤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나 그 여성들이 있는 한 “달의 뒤편에 기울었던 해는” 반드시 뜰 것이다. “불온한 풍경 속에서 기다리는 아침”은 시간적 흐름에서 빚어진 어느 아침이 아니라 “달의 뒤편”을 지키고 있는 여성들 자신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 속에 아침이 있고 그 아침이 아침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그 여성들의 현재는 미약할지라도 그들은 어머니거나 어머니가 될 사람들이므로. 그 여성들에게는 언제나 ‘아침’이라는 꽃향기가 난다.
더불어, 고경숙이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다양했음을 말하고 싶다. 고경숙은 자신이 바라본 풍경들마다 마음을 기울여주다 못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아파했다. 고경숙의 이런 태도는 “달의 뒤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다. 그래서 고경숙이 그린 풍경화에 제목을 붙인다면 역시 시집 제목처럼 「달의 뒤편」이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경숙의 세 번째 시집의 방향이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여전히 삶과 사회의 다양한 곳에 눈길을 주는 시인으로 나타나 그간의 작업을 이어가고 확장하는 세계를 보여줄지, 아니면 그 중에 어느 한두 곳에 눈길을 주면서 총론에 이은 어느 한 분야의 각론의 깊이를 획득할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고경숙의 시세계가 어떻게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세상과 삶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결코 식지 않을 거라고. 그것은 고경숙 자신에게 부여된 천형과도 같은 것이며 고경숙은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바라본 세상이 자신을 찌르고 달아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그 세상을 붙잡고 있을 시인 고경숙은 어쩌면 “달의 뒤편”을 평생 떠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달의 뒤편”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과 그 “달의 뒤편” 사람들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났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고경숙이 오늘도 “불온한 풍경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절실한 이유다.
첫댓글 고경숙 시인님 두레문학상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다시올문학 겨울호에 발표한 글을 올립니다. 두레문학 가족들 모두 따뜻하고 풍성한 겨울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좋은 시평 감사합니다. 따스한 겨울나기 준비는 잘 하셨겠지요.
감사합니다. 늘 건강, 건필하시고, 두레문학의 발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렇게 덧글을 주고 받으며 인사하는 것도 하루 이틀 쌓이다보면 꽤나 정이 드는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역시 이종섶시인의 시평은 음악성이 살아 있고 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술과 같은 힘이 있습니다. 이종섶시인님! 년말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는 더욱 멋진 글 많이 보여주세요
정말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저 흉내 한 번 내본 것에 불과합니다. 이시인님, 이 겨울 좋은 소식들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올해 두레문학으로 인해.. 제 졸시가 사랑을 듬뿍 받네요. ^^*
사랑을 듬뿍 받아서 더욱 좋은 빛깔을 지닌 시들이 많이많이 탄생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