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도반은 사진작가래요.
내 도반은 정토마을에 피어오르는
사시사철 꽃들을 찾아서 사진기에
담는 일로 자신의 삶을 가꾸어간다.
그의 하루하루는 정토마을의
역사와 함께 곰삭고 있다.
정토마을을 만들고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나를 찾았다.
병원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진단
을 받고 마지막을 정리하러 온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말간 눈과
고집스럽게 생긴 두상을 보니 왠지
살아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간호사 선생님들과 함께 마음을
다해 간호하는 사이 그는
어느새 나의 도반이 되어 있었다.
눈만 깜박일뿐 운신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든든했다.
그 당시 나는 외로웠다. 승려의 몸
으로 죽음의 중심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스님이 들어온 것이다.
정토마을을 만들고 혼자서 어쩔
줄 몰라 막막할 때 또 한 명의
삭발 스님이 등장했으니, 누워서
웃어만 주어도 내겐 힘이 되었다.
법랍은 나보다 많지만 세속의
나이는 동갑인 그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살아났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가을이 올
즈음엔 휠체어도 탈 수 있게 되었다.
희귀병을 앓던 도반 스님은
오른쪽 전신을 사용하지 못했으며,
언어 구사가 전혀 불가능했다.
일어나 앉기는 해도 자신의 몸과 언어
그리고 기억력과 인지력 모두가 손
상되어 일상생활은 거의 불가능했다
스님은 깨어난 초기에는 많이
우울해했다. 살았으나
살아 있는 삶은 아니었던 게다.
그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가.
어느 날부터 죽음을 넘어선
도반 스님은 재활을 선택했고
자신의 슬픔과, 지금 여기
이 순간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승려라는 정체성이 그에게는 강력한
뒷심이었다. 아주 작고 야원 몸으로
강한 의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심장 기능이 20퍼센트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아니
그보다 더 심한 상태에서도
내 도반 스님은 승려로서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
신의 몸을 살려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규칙적인 생활과 정갈한 음식 섭취,
그리고 기억력과 신체의 일부 기능
이라도 살려내려 재활에 최선을 다했다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왼손의 기능을 최대한
살려서 'ㄱ'부터 쓰기 시작했다.
언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가며 경
전의 글자를 한 자씩 새롭게 익혔다.
아침에 배운 것을 오후가 되기도
전에 잊어버리면 또다시 읽고 쓰며
정성스레 배웠다. 이 여정은
지금까지 십여 년 세월 계속되고 있다
걷는 연습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휠체어를 타지 않고도
왼쪽 다리의 힘을 이용하여 혼자서
걸어 다닐 만큼 회복하였다.
그렇다고 먼 곳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늘 정토마을 안에서 머무신다.
병원에 갈 때 외에는 외출이 어렵다.
멀리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이런 답답한 삶이 때로는 얼마나 지
겨울까 싶어 나 역시 마음이 아프다
우리의 대화는 눈으로 먼저 시작됐다.
옛날이 모여 오늘이 된다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그날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능행 우리가 살 병원
우리가 짓자. 시님아, 어때?
스님 엉
능행 우리 같이 지을까?
스님 엉. 좋아 (아무 생각 없이
'엉'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능행 근데 기도해준다던 그니는
사라지고 기도해줄 스님이 없네
스님 엉. (커다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능행 기도하면서 모금을
해야 하는데 시님이 해줄라요?
ㆍ
스님 (고개를 흔들며) 못해
능행 천일 동안은 기도해야지,
병원 부지를 살 것 같지 않아?
그래야 병원을 짓지
스님 (기도해줄 사람이 그렇게
없냐고 묻는다.) 없어?
능행 엉, 없어
스님 (황당해 하는 표정.)
그날로 천일기도 날짜를 잡고 한 손으
로 칠 수 있는 좌목탁을 하나 구입했다.
그때부터 나의 도반 스님은 간호사
들의 부축을 받으며 법당에 가서
뒤죽박죽 섞여 나오는 <천수경>
을 치면서 천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는 삼 년 동안 이어졌다. 기도
중에 폐와 심장에 물이 차서 일 년에
한 차례씩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마다 나는 스님을 붙잡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은
떠나보낼 수 없다고 기도했다.
죽음이 가까워오면 영정사진 하나
만들어놓고. 또 죽음이 가까워오면
수의 한 벌 만들어놓고, 그러면
서도 간절히 살아나기를 기도했다.
삼 년간의 천일기도를 우리는
해냈다. 그 사이 도반 스님은
생사의 강을 몇 차례나 오갔다.
2005년 늦은 가을,
병원 부지를 매입한 뒤 또다시
내 도반은 기도하고 나는
전국을 도는 탁발 여정이 시작됐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들어오다 보면
도반 스님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야 스님은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병석에 누워서도 나를 챙기고 나에게
힘을 주는 당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도반이며 도행(道行)이다.
어느 날 도반 스님을 위해
작은 사진기 하나를 구입했다.
병실에서 맞는 새벽 일출과
저녁노을을 사진기에 담아보라고.
새벽이면 예불 드리고, 시간을 정해
기도하며, 봉사자들이 힘들어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꼭 주소를
받아 적어 기도하는 수행자.
오른쪽 몸을 쓰지 못해도, 말씨가
어눌해도 내 도반은 그
어떤 이보다도 열심히 정진하는
구도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사계절에 맞추어 피어나는
들꽃과 작은 벌레들 그리고 일출과
일몰을 담아서 스크랩해 두었다가
봉사자들이 오면 보여주시고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잘 찍은 것은 정토마을
봉사자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한다.
한 번은 많은 사진을 곱게 담아서
언양으로 보내왔다. 사진을
어찌하라는 건지 물었더니
팔아서 병원 짓는 데 보태란다
그 마음이 나에게는
태산보다 더한 힘이 되어주었다
고마운 내 도반, 죽지도 못하고 내
곁에서 날 지켜주고 돌봐주기 위해
아직도 사진을 찍으며 살아주는 도
반의 자애심을 먹고 사는 내가 있다
지난 겨울엔 그가 많이 힘들었나
보다. 날 바라보며 "나 언제 가?'' 라고
묻는 날이 많았고, 그러면 나는
"병원 다 지으면 그곳에서
좀 같이 살다가. 그때 가. 그때는
보내줄게'' 대답하곤 했다
그는 안다. 날
두고 갈 수 없는 이유를.....
우리에게는 한 몸이 되어 이 불사를
마쳐야 하는 소임이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세월 수많은 수행자들이
두 다리로 걸어서 정토마을을 오갔다.
그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당신도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도반은 질병으로 무너지는
자신의 몸을 추스려 살아나고 또
살아나서 지금도 정토마을을 지킨다.
봉사자들을 챙기고 반기며 불사를
위한 기도와 함께 내 곁에 머물고 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목소
리만 들어도 가슴 저미는 내 도반.
교육원을 지어 개원했을 때는
그동안 사진에 담은 정토마을 들꽃과
풍경들을 액자에 넣어서
교육원 강당에 전시도 했다.
그 힘든 몸으로 어떻게 이리도 꿋꿋할
수 있을까. 전시된 사진을 봉사자들이
한 점씩 가지고 가면서 내준 보시금을
병원 건립 기금으로 건네시며
"얼마 안 되네" 수줍은 미소를 짓는
그는 오롯이 내게 힘이 된다
새벽 일찍, 이슬을 사진기에 담겠다고
들판으로 나가다. 간호사들과.
매번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여전히
사진기에 정토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는 내 도반.
병원을 다 지으면 그곳에 생의
기운이 담긴 사진을 걸어놓겠노라
자기 자신과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
그의 심장 기능이 조금씩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조급해진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병원 불사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병든 몸으로 일구어낸 자비심
의 열매를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할 일 다
마치시고 떠날 때 나비
처럼 나풀나풀 떠나실 수 있게.
지금도 내 도발은 병원을 지어
중생들의 삶에 보탬이 될까 하여
기도 여정에 계시다.
요즘은 좋아하는 칼국수도 함께
먹으러 갈 시간이 없어 마주할 때마
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다.
''스님, 미안해. 꼭
함께 우리 약속을 지켜내자''
카페 게시글
맑은 자유게시판
내 도반은 사진작가래요---능행스님
고구마감자
추천 0
조회 68
26.05.27 09:47
댓글 6
다음검색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