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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과 종교개혁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신조어는 우리 사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태백'이라든
가 '3포세대' 가 그렇다. 이태백은 이십대의 태반은 백수라는 뜻이고, 3포세대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몇 년 전부터 이태백이란 말이 나돌더니 3포세대, 5포세대를 거쳐 이제는 7포세대
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주택 구입과 인간관계와 희망까지 포기한 젊은이들을 일컫는 '7포세대'라는 신조어
까지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헬조선
요즘의 신조어들 가운데 압권은 '헬조선'이다. 지옥을 뜻하는 'Hell'에다가 조선을 붙여 만든 말이다. Hell
도 그렇지만 지금 의 한국 사회를 가리켜 조선이라 한 점이 인상적이다. '2030'세대가 이 말도 만들었겠지
만 ,세대를 뛰어넘어 광범위하게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그 말도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잘 표현한 것 같다.
헬조선! 이 말을 풀면, 지옥만큼이나 절망적인, 조선 같은 한국사회쯤 될 듯하다. 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
은 지금 이 사회를 조선이라 할까? 우선 조선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 시대의 퇴행성를 경고하는 뜻이 담겨있
다고 본다. 지금 젊은이들은 대개 1987년 6월 항쟁 시기 전후에 태어난 세대다. 그들은 오랜 군사독재와 권
위주의 시대를 뒤로 하고, 새롭게 민주 시대를 여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비록 IMF라는 시련을 사
춘기 시절에 겪었겠지만, 그래도 사회의 진보와 성장, 자유와 자아실현의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군복무를 충실하게 했다. 힘겹게 아르바이트를 하면
서 스펙 쌓기에도 열중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진출하여 직면한 사회는 열린사회가 아니라 닫힌 사회다.
앞을 향해 진보하고 발전하는 사회가 아니라 과거로 뒷걸음 치는 사회인 것이다.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사
회가 아니라 권위주의적이며 폐쇄적인 사회다.
신분사회로 회귀?
이 사회를 조선으로 보는 결정적인 이유는 계층(계급)의 고착화 현상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이들은
이 사회를 지금 봉건적 신분사회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
회는 계층이 양극화 될 뿐만 아니라 고착화되고 있다. 갈수록 중산층이 엷어지면서 계층이동(social mobili
ty)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IMF이후 지난 20년 가까이 국가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소위 신자유주
의 정책의 결과라고 본다. 물론 기존의 사회경제적 구조의 취약성에 신자유주의가 겹치면서 빈부의 양극화
와 계층의 고착화 현상은 심화되었다.
본래 서구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은 독점자본이 일반시민(노동자)들에게 그동안 좀 나누어주었던 것을
도로 빼앗는 정책이다. 대량 살상과 파괴를 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세계
자본주의는 호황을 누렸다. 그 때 서구 국가들은 분배나 재분배 과정을 통해 시민들에게 성장의 몫을 좀 후
하게 나누었다. 그러다 풀었던 것들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정책을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80년대부터 강력
히 추진해왔는데, 우리나라는 분배나 재분배가 빈약한 상태에서 거두어들이는 정책을 거칠게 감행했다. 국
가가 나서서 독점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힘쓴 것이다. 지난해 우리는 그 극대화를 위한 사회구조적
인 몰골을 세월호 사건을 통해 적나라하게 지켜보았다.
지난 2000년 이후 한국의 기업소득 비중이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난 사실은 통계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재 한국의 국민총소득 대비 기업소득 비중은 OECD국가들 중에서 최고 수준이다. 2000년도 우리나라
기업소득 비중은 국민총소득의 17.63%로 OECD 평균과 비슷했다. 그러나 2005년 21.34%에서 2009년
23.47%, 2013년 25.15% 등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참고로 기업소득에 견주면 우리나라 법인세는 낮은 편
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실제 낸 세금의 비율을 의미하는 실효세율은 OECD 국가들 가운데 최저 수준이
다. 한편 지난 2000년 이후 정부가 가져간 소득은 거의 제자리다. 결국 기업소득이 증가한 만큼 가계소득
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현재 OECD 국가들 중 꼴찌 수준의 복지 예산비율(국내 총생산 대비
10.4%)을 가진 한국에서 지난 15여 년 동안 기업소득은 급격히 늘고 가계소득은 현저히 줄었다. 그러는 동
안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은 1000조원이나 되는 데 반해 가계부채 총액은 1100조원을 넘겼
다.
기업소득이 늘면 가계소득도 늘까? 대기업들의 이윤이 늘어날수록 일반 국민의 주머니도 두둑해질까?
세계 자본주의 사회 전체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아니오'가 답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될수록 가난한 사람들도 덩달아 부유해진다는 소위 '트리클다운'설은 속임수임이 명백하다.
국세청 통계 자료를 하나 더 보자. 2013년 우리나라 소득에 관한 통계다. 그 해에 상위 1%의 사람들이 국
민 전체 소득의 10.73%를 가져갔고, 상위 10%가 37.14%를 가져갔다. 그런가하면 상위 10%의 소득은 하
위 10%의 소득의 69.43배나 된다. 이런 소득불평등 구조는 지난 2000년 이후 꾸준히 심화되고 있다. 그
구조가 굳어지는 경향도 보인다. 한국의 불평등 수준은 이제 OECD국가들 중에서 3위이다. 1위인 미국을
추격하고 있다. 정부(국가)의 정책은 그 불평등 구조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매진하고 있다. 최근 '노-
사-정 '이 합의했다는 '노동개혁안'은 우리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가속화시키는 합의안이다. 그 골자는 노동
자의 해고를 더욱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더욱 늘리며, 노조(한국의 노조조직률은 고작 10%도 안 된다)를
약화시키는 내용이다. 그에 더해 약자 즉 무노조 기업의 노동자, 비정규직, 낮은 연령이나 고 연령층에게 상
대적으로 불리한 내용으로 되어있기에 그것은 노동개혁이 아니라 노동개악이다. 이는 1996년에 만든 노동
악법에 추가된 개악안이다. 또한 그 합의안에 서명한 노동계는 2천만 노동자의 5%정도밖에 가입하지 않
은 한국노총이다. 아무튼 그동안 소득을 급격히 늘려온 기업들이 앞으로도 더욱 이윤을 많이 가져가도록
한 그 정책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에서 ,땀 흘려 일해 봤자 성장의 몫은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실
을 목도하는 젊은이들, 그런 현실이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는 꼴을 몸소 겪는 젊은이들의 입에서 튀
어나올 말은 무엇이겠는가.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고, 태어나면서부터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현실에 처
한 젊은이들이 날마다 피부로 느끼는 감정은 무엇이겠는가. 사회의 균형을 잡는 임무를 부여받은 국가만
이 아니라 주류 언론들까지 총동원되어 사회 불평등구조를 조장하고 굳히는 사회를 온몸으로 겪는 선남선
녀들의 입에서 나올 말은 뻔하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좋은 일자리를 원한다면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 이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노동절에 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온 나라의 수장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으면 이런 말을 다 할까
? 불평등 1위 국가인 미국 ,기울어도 한쪽으로 너무 기운 운동장 같은 사회의 균형을 그래도 좀 바로 잡아
야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그런 발언을 한 줄로 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지금
도 충분히 지옥인데 지옥 아랫목까지 가봐야 깨달음이 오는 걸까.
헬조선이 헤븐코리아로 가기 위해 한국교회가 할 일은?
'Hell조선'이 'Heaven코리아'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 그 변화를 위해 한국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가. 기여하
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 암흑시대를 허물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세 봉건시
대를 떠받들던 로마가톨릭교회에 저항한 그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개신교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태동하고 발전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개신교회는 그 새로운 사회가 돈
이 왕노릇하는 구조를 갖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주류 개신교는 오히려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와 계급과 짝
하며 돈이 주인 노릇하는 사회를 견고하게 하는 데 협력했다. 자본이 왕 노릇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그리스
도의 왕권에 도전하고 그의 나라를 허문다. 이는 마치 가나안 땅에서 바알이즘이 쉼 없이 야훼 신앙에 도전
하고 이스라엘 사회를 허물었던 현상과 같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사회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의 공동체
형성을 방해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매진하는 사회는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려는 싹부터 잘라버리는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개신교의 한계점 즉 새시대를 여는 데는 일조했지만 돈이 왕 노릇하는 사회의 물결은 막지 못한 점의 씨앗
은 마르틴 루터의 신학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종교개혁운동은 루터가 사도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가톨릭의 공로주의가 만연된 중세 말기 시대 상황에서
그 발견은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칭의의 복음은 성서가 가르치는 칭의의 복음의 반
쪽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얻는 칭의稱義(Justification)는 2가지 의미를 갖고 있
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하나는 법정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관계적 의미이다.이 두 가
지 의미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융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칭의의 복음을 가르치는 대표적인 말씀인 로마서
3:21-26에서 우리는 그 2가지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
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
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
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
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1-26)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얻는 의義는 법정적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즉 그 의는 인간이 죄 사
함(사면)을 얻고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는 은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루터는
이 법정적 의미만을 보고 주로 그것만을 강조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가 동시에 있는 것인데 말이
다. 본질적인 것은 관계적 의미로서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은총을 말한다. 이 관계적 칭
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 주심에 의지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해 사는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의
미한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융합하는 말씀을 골로새서에 남겼다. 여기서 그는 그 2가지를 펼
쳐 보이면서 동시에 융합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이 말씀에서 뒷부분(14절)은 칭의의 법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구절이고 ,앞부분은 칭의의 관계적 차원을 나
타내는 구절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얻는 칭의- 구원은 죄 사함(사면)을 받은 의인으로서 이제 흑암 즉
죄와 사탄의 지배를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상태임을 말한다.'주권의 전이'(Lordship
change)야말로 칭의의 알맹이다. 물론 이 주권의 전이를 위해서는 마음속에서부터 전쟁을 치루지 않을 수
없다. 마음속에서부터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성을 확보하려면 이제까지 마음에서 왕 노릇하던 돈이나
탐욕 등을 끊임 없이 믿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영성생활은 필수적이다.(롬6장)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칭의는 과정이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이다.성령의 도움을 받
으며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이다.
루터가 칭의의 관계적 의미까지 깨달았다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다며 경시하지는 않았으리라. 야고보
서는 칭의의 관계적 차원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살아있는 믿음은 생활에서 의의 열매를 맺는 실천적인 믿
음임을 강조했다. 관계적 칭의를 배제한 절반의 칭의론의 결정적인 취약점은 역동적인 윤리적 삶을 약화
시킨다는 점이다. 때로는 방해하기까지 한다. 예수복음이 본래 갖고 있는 윤리의 역동성을 약화시키는 편
협한 칭의론은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신자의 삶에서 선택사항으로 밀어놓게 만드는 심각한 오류를 범한
다. 왜곡된 절름발이 칭의론이 만약 기복신앙과 만나게 되면, 그 칭의론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소원성취
를 위해 예수 이름을 악용하는 데 몰두하는 사이비 교인과 목회자들을 양산하기도 한다.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생활 속에서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된다.그 과정에서 생산관계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동물과 달리 노동을
하며 사는 인간의 사회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관계 문제는 필연적이다. 인간 사회에서 이 관계는
인간관계들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비중이 크다. 때문에 이 관계 문제는 인간의 칭의와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또한 그 관계에서 이윤의 분배와 착취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로
서 반드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칭의와 구원의 완성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람과 교회는 고용주와 고용인 사
이에서 상대적인 약자인 피고용인 편에 서야한다. 더구나 현대의 독점자본과 노동자와의 관계에서는 더
욱 그렇다. 과거 히브리 노예들 편에 서서 그들의 해방을 도우셨던 야훼 하나님의 성령은 지금도 마찬가지
스탠스를 취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고용주와 일꾼의 관계 문제를 비중 있게 다뤘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
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
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
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야고보서
5:1-8)
지금은 글로벌 자본주의시대다. 자본주의 후기 시대이기도 하다. 완고한 세습적 왕조국가 체제를 가진 북
한도 머지않아 도도한 자본주의 물결에 휩쓸릴 것이다. 북한은 아마도 중국식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될 것
으로 보인다. 아무튼 돈(자본)의 왕권이 지구촌 전체를 뒤덮는 시대에 기독교가 가져야할 정체성과 사명
은 무엇인가? 돈보다는 사람, 이윤보다는 생명을 우선하는 새로운 사회를 성령을 좇아 건설할 교회는 어
떤 성격을 가져야할까? 성령을 좇아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공동체 ,사회를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헬조선에서 절망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일으켜 새로운 평
화(샬롬)의 세상을 건설하는 희망의 교회는 어느 교회일까? 돈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서 남보다 높아지고
부자되기를 추구하는 기복적 교회일까. 개인경건주의에 만족하는 교회일까. 현실 도피적 내세주의 교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외면한 채 재림할 예수나 바라보는 교회일까. 믿음으로 천
국 가는 티켓은 이미 받아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이제 오로지 성공에 매달리는 교회일까.
절망하며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루터가 버린 야고보서를 다시 주
워 가슴에 안고 새겨야 하리라. 종교개혁기념일이 들어있는 10월, 높은 하늘을 쳐다보다 말고 성경을 편
다. 야고보서를 다시 읽는다.
김달성목사(평안감리교회. '옆구리 뚫린 아담의 기쁨'저자)